처음 올려진 묘호와 시호는 순종(純宗)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었으나 철종 때 묘호가 순조로 개정되었고, 대한제국 때 황제로 추존되면서 시호가 개정되어 최종적으로 순조(純祖)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가 되었다.
정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정조의 후궁인 유빈(綏嬪) 박씨였다. 일반적으로 '綏'를 '수'로 읽어 수빈이라 칭하는데, 그녀의 제사 때 사용한 한글본 진향문에는 '유빈'이라고 적혀 있다.#고종 때 순조 숙황제로 추존된다.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해 11살에 즉위하는 바람에, 당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1805년 사망 시까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와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고, 신유박해 등 천주교 박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순조의 장인이자 한 때 정조의 충신이었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이들을 몰아내고 60년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연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이 후 세도정치는 무너져가던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이는 순조가 선왕들과 달리 신하들을 단속하는 데 신경쓰지 않았던 점도 크다. 영조 시절엔 초기에는 과열된 붕당으로 조정이 거의 피바다가 되었고 후기에는 척신정치로 귀결되었지만 영조는 초기에는 완론 탕평책, 후기에는 압도적인 왕권을 바탕으로 제어했고 정조 시절엔 준론 탕평으로 남인과 벽파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이어졌지만 정조가 체제공과 김종수 등을 동시에 우대하면서 지속적 관리를 하여 조정의 균형이 무너지진 않았다.
순조의 시대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32년에는 영국[4]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5] 물론 그 이전에도 다른 이양선은 왔지만 교역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6]
순조는 뒤에 즉위하는 헌종과 철종과는 달리 나이나 혈통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 순조 본인의 권한은 강한 편[7]이였지만 수렴청정이 끝난 후 재위 기간 내내 병을 달고 살게 되었는데다가, 홍경래의 난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지독할 정도의 무기력함을 보이게 된다.
순조는 즉위 초까지만 해도 벽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이었고 순조 11년의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진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 하지만 그 열심히 정사를 본 기간에도 국정 장악엔 별 관심이 없어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고 홍경래의 난까지 터진 다음엔 김재찬, 남공철, 심학규, 이시수 등 노회한 신료들이 가득 차 있는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기면서 세도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엔 김재찬 등 안동 김씨의 입김이 닿는 대신들을 통한 간접적 막후통치를 했으나 순조 32년 김조순 사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안동 김씨가 아예 모든 것을 다 먹어버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정치가 된다.
남인, 벽파 숙청은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의 업무 거부가 겹치면서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참사로 이어졌다. (물론 만력제처럼 일체 국정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병약하자 세자에게 사실상 전권을 대리청정으로 맡기고, 세자가 죽은 후에는 다시 정사에 나섰다.)
숙종~영조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당파 정치의 붕괴[8]는 왕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몰아주다 보니 왕이 조금이라도 관리 안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영조와 정조는 이런 점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권세가 강한 신하들이 나오기는 했어도 왕이 신하들을 제어해 사고가 나는 것을 막아 왔지만, 순조가 관리에 손을 놓자 그 붕 뜬 통제가 세도가문들에 넘어가면서 조선 정계는 가문간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막장으로 변해가게 된다.
아들 효명세자가 매우 영특해 나름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신하들 앞에서 스스로 무능한 임금임을 자처하며 양위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9] 효명세자는 똑부러진 일처리로 조정의 기강을 잡으며 신하와 순조의 기대를 한몸에 샀지만 불과 2년 좀 넘어서 병에 걸려 일찍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도 사망했는데, 이로 인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어 순조도 얼마 후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여덟살 헌종이 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병으로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의학자들은 순조의 증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홧병이라고 본다.
순조 말년엔 안동 김씨에 거슬리는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 등이다. 이에 순조는 "우리가 백성들 먹여살리려고 정치하는데 오늘 나는 어찌 죽이거나 탄핵하는 말 말곤 한마디도 들은게 없냐?"라고 탄식하기도 했고 막판에 왕권을 휘둘러 김노경 등을 석방하고 안동 김씨 반대파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순조 32년 이후의 실록은 김조순의 장남 김홍근이 군국의 사무를 맡았다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으며, 다음 해 음력 11월 28일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포함한 궁 전체가 인조반정 이래 최초로 깡그리 불타버렸다.[10] 여러모로 조선의 쇠퇴가 명확해지는 시기였다.
순조 개인은 국정을 위한 연감인 '만기요람'을 편찬하는 등, 그다지 무능한 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물려받은 재능에도 불구, 무엇보다 세도가문에 적극적인 견제를 할 의지가 없었다. 그동안 축적되었던 삼정의 문란과 같은 제도적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곡산 민란, 홍경래의 난, 쌀폭동[11]을 비롯한 농민봉기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물론 제대로 폭발한 것은 철종 말이었지만.
국사 교과서에서는 세도정치기의 3왕과 묶여 (헌종, 철종) 굉장히 안습한 취급을 받지만, 헌종과 철종의 재위 기간을 합쳐도 순조보다 짧다. 헌종 15년, 철종 14년인데 반해 순조는 장장 34년을 재위했다. 자세한 사항은 세도정치 항목 참조.
순조의 어진. 이후에 그려진 고종 황제의 어진과 유사하게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형태다. 문제는 얼굴을 포함해서 절반이 타버리는 바람에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이 불운은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들 에게까지 이어지고 말았다.수난이대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왕실 족보인 선원보감에 남아 있는 순조의 초상화.[12] 아버지의 외모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실록에서 순조의 용모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왕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게 덕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 순조실록,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순조는 일반적인 미남상은 아니지만 나이들수록 멋들어지고 푸근해지는 그런 외모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순조가 어떤 면에서는 세종대왕(!) 비슷한 점이 있다. 아버지로부터 (순조의 경우에는 증조 할머니에게도)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 우수한 두뇌와 늠름한 체구, 하지만 청년기를 넘기면서부터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피를 보기를 싫어했다는 점이 같다. (실제로 두 왕 모두 옥사를 벌이거나 기존의 옥사를 새로 뒤집지 않았다.[13]) 그래서 두 왕 모두 신뢰받는 대신들을 (비리가 있어도) 중용하였고, 말년에는 똑똑한 세자와 대신들[14]에게 나라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 똑똑한 세자는 요절하면서 왕실은 어린 계승자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단명한 방계의 인물이 즉위하게 되고 나라는 훈신, 척신에 의해 기강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평행이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바로 외척을 등용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차이였다. 영조 시대, 아니 어쩌면 선조 말년 ~ 효종 때부터 느슨해진 외척에 대한 경계는 기어이 세도정치의 파탄으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위험이 직접 드러나진 않았다. 세종 때도 태평성대는 사대부에게만 해당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순조의 통치가 적어도 당대 경화(京華) 사대부들에게는 특별히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다.[15]순조의 통치는 두드러지는 붕괴가 아닌 장장 34년간 진행된 평화로운, 그러나 서서히 조선의 몰락이라는 늪으로 빠져드는 침체기였다.여러모로 부지런한 만력제
인터넷상에서 순조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글들이 사실인 것마냥 돌아다니는데 매독 썰은 그냥 카더라 수준의 이야기지 정확한 근거가 있는 글이 절대 아니다. 당뇨병(임질) 가지고 매독이라는 이야기 나오는 세종대왕이랑 이것도 닮았네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서학(가톨릭)을 탄압해 "이단"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철종 8년에 "순조"로 올려지게 된다. 영조와 정조의 묘호도 원래는 영종·정종으로, 영조는 고종 때 여러 공이 많다는 이유로, 정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자신의 3대조라는 이유로 묘호를 바꾸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로, 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통을 이었으므로 양아버지를 높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 역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양아들로 들어갔기에, 순조는 여러모로 인효현숙-영정조의 유일한 직계 계승자로서 대접받을 수밖에 없었다.
담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왕으로 우리나라 애들은 젖만 떼면 담배를 찾아서 문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조선왕조실록 1808년 11월 19일자에도 담배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순조는 "담배가 소화를 돕는다, 담 치료에 좋다 하는데 확실히 모르겠다. 다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고질병이 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고, 젖먹이를 면한 어린아이들까지 담배를 배워 황죽으로 피운다."며 개탄을 했다. 아버지인 정조와는 많이 다른 면모. 또한 의외로 담배의 중독성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그런데 헤비스모커였던 부왕 정조보다도 오래 못 살았다는게 함정(...)
의외로 평등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건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아무리 날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라는 논리로 1801년 나라에 속한 6만 5천명의 공노비를 해방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는데, 노비 신분이 없어진 갑오개혁(1894) 때와 비교하면 무려 1세기 이른 정책이다. 근데 이건 정순왕후의 수렴 시기에 내려진 것이니 사실상 정순왕후의 정책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지어 정순왕후를 반동으로 폄하하는 이덕일 계열에서도 "정조의 개혁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반동정치를 했으니 민심을 무마하려면 이 정도는 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공노비를 풀어준다고 사대부 민심이 무마될까?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는 아들의 즉위를 살아서 본 유일한 조선 후궁이었다. 순조가 즉위하고도 20년도 넘게 지켜봤던 현숙한 여인. 순조는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하진 못했지만, 사당을 높이고 상복을 오래 입는 등 최대한의 예의를 지켰다. 순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유일한 일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가 순조의 딸이다. 그 뒤로는 왕의 적녀가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더라도 공주로 봉해지기 전에 죽었다.
순조의 능은 서울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으로 근처에 태종의 능인 헌릉이 있어서 '헌인릉'이라고 불린다. 헌인릉 묘역을 나오면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 어떤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표지도 없고 안내 표석 같은 것도 없다. 그 건물이 다름 아닌 회사. 처음에 순조는 죽은 후 파주에 묻혔었지만 철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천장 이듬해 순원왕후가 죽자 합장되었다.
참고로 장소가 장소인지라 순조의 인릉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는다. 능침이나 정자각 등은 찍어도 상관없는데 '회사'가 있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돌리지 말 것. 까딱하다간 코렁탕을 찰지게 먹을 수 있다. 그래도 인터넷상에는 그걸 찍어 올린 용자들도 있긴 하다. 그런데 같은 능역으로 묶은 태종의 헌릉에서는 회사와 좀 떨어져 있어서인지 인릉처럼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헌릉은 자유롭게 촬영해도 되고, 인릉에서만 주의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마지막으로 거북선이 언급된 것이 이 때이다.(순조 11권, 8년(1808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월 10일(정미) 2번째기사) [1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꽤 부정적인 평을 받는 왕이기도 한데 가장 큰 문제로 정치적 무관심이 심했다는 점을 깐다. 민생에 관심을 가진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긴 하나 정작 그것을 실행할 신하들을 관리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며 부지런했지만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처신이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순조의 손자인 헌종도 세도정치로 왕권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20세가 되자 한때 안동 김씨에게 위협감을 줄 정도로 과감한 공세를 취했던 걸 보면, 순조가 세도정치에 왕권이 위축돼서 못했다기 보다는 그냥 하기 싫었다는 느낌을 준다. 순조의 이러한 태도가 되려 안동 김씨의 세력이 더 확장되었고, 세도정치 기간을 늘린 꼴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본인의 무기력함과 더불어 신하들 관리도 제대로 못한 암군에 가깝다.
박시백 화백은 아버지 정조와 마찬가지로 선원보의 초상화와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순조의 얼굴을 묘사했는데, 초상화보다 비교적 젊고, 살집이 더 오른 후덕한 이미지로 그렸다. 그런데 시종일관 입을 벌리고 있어서 왠지 좀 멍청해 보인다. 실록에 적힌 '네모난 입'을 묘사하려 그런 듯? 그리고 나이가 먹을 수록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진해져서 기운이 빠져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병환에 시달리고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모습을 표현하려는 듯.
[1] 사악한 학문인 천주교로부터 나라를 지킨 공이 있다하여 조로 격상되었다.[2] 사후시호[3] 1897년 순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4] 이때 이들은 자신들을 '영길리국'이라 칭했다.[5] 하지만 이때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핑계로 교역을 거부하고 그들이 요구한 물자와 식량을 제공하여 빨리 내보내는 데 급급했다.[6] 암허스트호의 선원들 중 한 명이 한자를 잘 알아 글을 써서 대화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양선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해당지역 수령들은 이들에게 손짓 발짓으로 떠나라고 요구하였고, 그 이양선들 역시 교역요구가 목적이 아닌 해양탐사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빨리 떠났다.[7] 자기 가족들과 종친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나름 목소리를 크게 냈고 관철시킨 것도 많다.[8] 신하들에게 꼼짝 못하는 임금들로 묘사되는 사극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후기 왕들은 후견세력이 미미했던 철종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당파싸움을 이용한 환국을 통해 왕권이 지속적으로 강해졌고 영조 시절에는 아예 서슬 퍼런 태종 시절에도 왕에게 대들던 근성을 보이던 사관들이 임금에게 벌벌 기는 상황까지 연출된다.[9] 한가지 재밌는 것은 대개 양위니 대리청정이니 소리가 나오면 온 나라가 뒤집혀서 반대를 하지만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온 신하들의 종사의 무궁무진한 복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10] 1803년 이미 인정전이 소실되어 다음해 복구한 상황이었다. 1820년에 그려진 동궐도는 이 불타기 전의 창덕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11] 순조 말년에 한양의 쌀상인들이 쌀을 가져다놓고도 없다면서 팔지 않으며 쌀값으로 농간을 부리다가 분노한 한양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쌀전들을 약탈한 사건. 분위기가 하도 흉흉해서 폭동 주모자 7인과 함께 상인 두명도 처형하여 민심을 달래야 했다.[12] 어진이 전해지지 않거나 얼굴이 타버렸으나 선원보감에 초상화가 남아 있는 조선 왕은 세조, 정조, 순조, 헌종이다. 철종은 여기에 초상화가 남아 있지만 불탄 어진에 얼굴이나마 남아 있다. 선원보감에는 추존왕인 원종(인조의 아버지)과 효명세자(익종)의 얼굴도 남아 있다.[13] 세종은 심온의 복권을 거절했으며, 순조는 벽파 경주 김씨들을 석방하긴 했으나 옥사를 뒤집어 새로운 옥사를 낳을 수 있는 김한록의 상소 등을 물리쳤다.[14] 조선 조 최고의 정승인 황희, 맹사성보다는 못하지만 김조순만 해도 스팩이나 평판으로서는 황희에 밀리지는 않았다. 처신이란 측면에서는 황희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15] 조부 김익순을 욕한 김삿갓의 시로 알려진 시 가운데 (거꾸로 조부와 김립을 함께 조롱하기 위해서 쓰였다고도 하는) "아, 태평스러웠던 신미년에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만 해도 그렇다.[16] 고종실록에서 거북선이 다시 언급되긴 하지만, 고종 및 순종 실록은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