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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고찰
2021. 8. 6. 이현래 목사
오늘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성경을 보다 보니까 이 말이 나온다.
만민의 구속,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만민의 구속과 율법 안에 있는 유대인의 구원이 충돌하게 된다. 이것이 지금 바울의 고민이다. 왜 충돌하는가? 다 같은 구속이고 구원인데 왜 충돌하는가? 대속이냐? 구속이냐? 이것 때문이다. 사도들의 서신들 대부분은 대속적인 개념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기독교에서도 대속을 주로 생각한다. 대속이라는 것은 속죄의 개념이다. 옛날에 유대인들은 속죄하기 위해서 제물을 드렸다. 그래서 속죄라고 이야기 하면 비교적 쉬워진다. 왜냐하면 제물만 바뀐 것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양이나 염소나 이런 것으로 제물을 드리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물로 드린 것은 영 단번에 드린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제물이라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것을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양이나 염소가 어떻게 사람을 완전하게 대신하겠는가? 형상이 되고 의식은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대속이 될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사람이 제물이 되니까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히브리서를 읽을 때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물만 바뀐 것이니까 그렇게 어려운 게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더 좋은 제물이 드려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이 완전한 제물이니까 이제 우리는 소나 이런 것으로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다면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말을 쓰지 않았는가 싶다. 속죄라는 말을 계속 쓰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것을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난번에 말한 대로 도올 같은 사람은 인류 최대의 사기라고 하였다. 어떻게 남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나도 평소에도 그랬지만 마지막에 그런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법적인 문제는 되어도 실제적인 문제는 안 된다. 단지 법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도 역시 법적인 개념 이상이 안 된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가 믿음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것이 잘못 왜곡되면 은혜가 아니다. 나도 믿음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완전한 은혜가 될 수가 없다. 로마서 3장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가 없다면 완전한 은혜가 될 수 없다. 내가 믿었다. 완전한 은혜란 나와 관계가 없어야 된다. 그런데 내가 협력을 해야 되면 완전한 은혜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다면, 전적인 은혜라면, 그것도 우리의 믿음과 관계가 없어야 된다. 그런데 자기들도 버리고, 온 인류가 버린 예수가 구속이고 구속 자체라는 것이다. 구속을 해 주었다는 말만 아니고 구속 자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30절이 그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하였다. 구속을 해준 분이라는 말이 아니고, 구속이 되었다. 구속 자체라는 말이다. 지혜 자체고, 의로움 자체고, 거룩함 자체고, 구속 자체라는 말이다. 대신 죽어 주었다고 하면 봐 줄 수 있지만 그 자신이 바로 내 구속이라고 하면 그런 인간이 내 구속이란 말인가? 그 말은 곧 내가 그런 인간이라는 말이다. 율법을 위반해서 죽은 사람이고, 온 인류가 다 버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나의 구속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잘 생각하면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다. 이것을 지금 기독교인들은 쉽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별로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교리적으로 믿고 있으니까 자기에게 영향이 올 게 없다. 나를 위해서 내 아들이 죽었다고 하면 실감이 나겠지만, 예수님이 날 위해서 죽었다고 하면 실감이 날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실감나게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실감이 나도 별게 없다. 결과를 보면 별게 없다. 울고불고 할 때 보면 굉장한 것 같은데 별게 없다. 예수가 구속 자체라는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실제적으로 지금도 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대신 죽어 주었다고 받아들인다. 그분 자신이 나의 구속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게 문제가 아니겠는가? 내 대신 죽어 주었다. 감사하다. 이게 아니겠는가? 그 귀한 피를 나를 위해 흘려주었다. 알고 보면 감정적인 문제고 감상적이다. 율법을 위반하고 더군다나 인간의 운명을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다. 천사보다 못한 인간의 운명을 아주 노골적으로 내놓은 사람이니까 얼마나 인간을 부끄럽게 한 사람인가?
저 사람이 인간의 표준이라면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가. 우리가 노골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가 아니고 솔직하게 생각해 보면 굉장한 사람이 우리가 존경할만하고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내 구속이 된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예수를 어떻게 자랑하겠는가? 율법도 위반한 사람이고, 인간의 운명 자체를 부끄럽게 한 사람이다. 이 부끄러움 때문에, 이것을 벗어 보려고, 하나님 같이 되어 보려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 안에 나와 너의 구속이 들어 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겠는가? 하나님이 직접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직접 말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믿는다고 한다.
똑 같은 일에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지 믿기 싫은 것은 안 믿는다고 한다. 솔직하게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번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이 죽었다고 했으면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가 없다. 말이 간단하다. 제물도 그랬지 않느냐? 제물을 드린 이유는 분노를 삭이기 위한 것이다. 빚을 갚기 위한 것이고 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제물을 드린 이유다. 그것은 이해가 된다. 염소보다도 사람이 드려진 게 얼마나 더 온전한 제물인가. 우리나라에도 그런 게 있다. 에밀레종이 있다. 또 우리지방에 가면 수문이 있다. 바다를 간척해서 막았기 때문에 물이 들락날락하는 문이 있어야 된다. 완전히 막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나면 물이 나가야 되기 때문에 문이 있어야 한다. 그 문이 나무로 짠 것이다.
시멘트나 돌에 붙여 놓은 것이니까 온전하겠는가? 그래서 물이 들어올 때는 많이는 안 들어오고 조금씩 들어온다. 그래서 물을 저장해 놓는다. 거기 들어올 때 ‘웡웡웡.’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자세히 듣고 있으면 ‘넌들넌들 네 탓이냐, 낸들낸들 내 탓이냐’ 이렇게 들린다. 그래서 동자 둘을 거기에 빠트렸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문소리가 ‘넌들넌들 네 탓이냐, 낸들낸들 내 탓이냐’ 꼭 그렇게 들린다.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보면 딱 그렇게 들린다. 수문을 막는 일이 지금도 굉장히 어렵다. 새만금 사업을 할 때, 큰 들판을 막아 놓았는데 마지막에 수문을 막아야 하는데 물이 싸서 막을 길이 없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그것을 막았다. 고철이 된 큰 배를 가져다가 가로 막아서 공사를 했다고 한다. 기발한 분이다. 수문 막는 공사가 굉장히 어렵다. 물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한다. 바울은 이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다. 이래야 되는가? 저래야 되는가? 어느 편을 들어야 되는가? 이런 심각한 문제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참 지혜로웠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따질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붙잡았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다. 사람들이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요구하는 때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면 저것이 반대하고, 저것을 말하면 이것이 반대한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은 절대주권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아주 유명한 비유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것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것을 만들 권이 없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비유다. 도자기를 만드는데 가 보니까 깨버린 도자기가 수북이 쌓여 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자기의 작품이다. 꺼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나눠주는 게 아니고, 그 자리에서 깨어 버린다. 우리 생각 같으면 나누어주면 고양이 밥그릇으로라도 쓸 것인데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망치를 가지고 다 두들겨 깨 버린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의 명예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자기들이 나가면 자기 명예에 손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 깨 버린다. 그것을 처리하기도 곤란하다. 도자기를 깨 놓으면 땅에 묻기도 곤란하고 처리하기도 곤란한 데 수북이 쌓아 놓고 있다. 아깝다. 그런데 도자기 만든 사람의 권리인데 어쩌겠는가? 자기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것이니까 누가 그것을 뭐라고 하겠는가. 절대주권을 말하게 된 것은 바울도 대단히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냥 된 것 같으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유대인과 우리가 생각하면 그렇게 충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누가 무엇이 어떻게 그 일을 했던 간에 사람이 상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을 하면 반론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이 너를 여자로 만들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말은 인간의 찬반을 초월한 것이다.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이게 아니다. 이것과는 상관이 없다. 왜 그런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주권을 잘못 사용하면 사람이 이것을 사용할 경우에는 여러분은 다 아실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독한 일을 행했는지 알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빙자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은 유대인과 이방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 중에 그 누구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 백성이든지 아니든지, 율법을 지키든지 못 지키든지, 어떤 경우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 단번에 속죄와 사함을 받는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사람은 되고, 저런 사람은 안 된다면 영원한 속죄가 안 된다. 율법적인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왜 우리가 지금 죄인이 되었는가? 죄인이 된 것은 내가 무엇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게 아니고, 하나님을 이탈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행위 이전이다. 행위를 잘못해서 죄인이 된 게 아니다. 이것을 알기 어려웠다. 내가 뭘 잘못해서 죄인이 되었는가? 어떤 사람들은 전도하러 다니면서 생짜배기를 앉혀 놓고 죄인을 만든다. 성경을 펴 놓고 이래도 죄인이 아니냐고 한다. 이 사람들은 성경의 절대권을 먼저 이야기 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저런 이런 일이 있다고 해 놓고 그런 다음에 죄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맞다고 한다. 우리 교회에 오신 한 분은 어떤 전도인이 자기에게 와서 일주일 동안 죄인이라고 고백하라고 졸랐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인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아니라고 하니까 할 수 없어서 갔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죄가 뭔지 모르니까 죄를 만든 것이다. 교리라는 게 그렇게 무섭다. 맨 정신에 살고 있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니까 성경을 아는 사람 같으면 성경의 권위를 믿고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들이대고 있으면 그게 되겠는가? 우리가 불교인에게 가서 성경의 절대성을 주입시키려면 되겠는가? 스님들에게 가서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면 받아들이겠는가? 뺨 안 맞으면 다행이다. 예수의 구원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다. 성경에 정죄가 되었든지 안 되었든지 그것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죄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슨 죄, 무슨 죄 해서 항목별로 다루어서 검토할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있을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계속 죄인이라고만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분은 순진한 분이다. 어려서부터 아버님이 무슨 이상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절대로 악한 짓을 못하게 했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려니까 그 사람도 아주 한심했을 것이다. 이렇게 완악한 사람이 있나하고 갔을 것이다. 자기가 완악한 사람인데 자기가 완악한 줄 모르고 그 자매님에게 완악하다고 한 것이다. 예수의 구원은 아주 다른 구원이다. 나를 그분의 죽으심 안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불러들인 것이지 내가 변화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그분을 인정한 것이다.
아, 저 사람이 진실이다. 저 사람이 참 사람이다. 이렇게 인정한 것이다. 내가 생활이 바뀌었는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정죄할 수 없다. 저 사람이 참 사람이다. 그래야 내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이 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나는 거짓된 사람임을 안다. 참이 없는데 거짓을 어떻게 알겠는가? 금이 없는데 어떻게 금을 구별하겠는가? 순금보다 14K가 훨씬 보기에 좋다. 그래서 일부러 합금을 하게 된다. 순금 반지보다 14K 반지가 훨씬 더 빛이 나고 아름답다. 순금을 모르면 14K를 취하지 누가 순금을 취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르면 내가 왜 죄인인가? 예수를 모르면 나는 잘못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고 세상에서는 칭찬받는 사람이다. 무슨 그냥 살만큼 사는 사람이지 가짜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간은 가짜이고 인간은 이렇다는 것을 말해도 소용이 없다. 진짜를 보여줄 때 가짜라고 아는 것이다. 진짜를 보고 나면 내가 가짜라고 아는 것이다. 내가 피조물이라는 것도 내가 모르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내가 피조물임을 아는 것이지 교리적으로 배워서 피조물로 아는 것은 아무리 알아도 아무 소용도 아무 효과도 없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피조물 아니라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다 피조물이라 한다. 그냥 외워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못 만났는데 자기가 어떻게 피조물이 되는가? 하나님이 없는 나는 피조물이 아니다.
우연히 생겼을지라도 아니고 차라리 아메바에서 생겼다고 하는 게 낫다. 내가 피조물이라고 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게 심각한 문제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 아들이 되는 명분에 참여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이룬다.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한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이 그 말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말이지 그냥 믿어서 되겠는가? 그런데 이 쉬운 것이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어서 누구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이성으로 생각해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주 쉬운데 아주 어려운 일이다. 너무 쉬운데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세계가 다르고 상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신성한 율법을 받은 사람들, 그것으로 사는 사람들, 그것으로 자랑을 삼는 사람들,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 이방인을 왜 멸시하는가? 율법이 없는 자들이라 멸시한다. 그러니까 더욱 그렇게 할 게 아닌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더 분노한다. 타 종교 혹은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다. 사람을 무시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수 안에 구속이 있다,
예수 안에 참이 있다고 하면 지성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너희가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렇지 너희가 뭘 아느냐? 우리 주변에도 너희가 뭘 아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불교도 알고 뭣도 알고 다 안다. 너희가 무식하니까 그렇지 모르니까 그렇지,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을 못 받아들이니까 공부를 하는 것이다. 불교도 가보고 어디도 가보고 사방에 가 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종합해서 종합 종교를 만든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 바하이교는 모든 종교를 다 믿는다고 한다. 다 합해서 좋은 것만 골라서 믿는다고 한다. 세상 어디에나 그런 사람이 있다.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믿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자기가 너무 비참해지는 것 같고 무식해지는 것 같은 것 같다.
그래서 무식한 사람들이나 믿는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교회 안에 그런 사람들이 다 앉아 있다. 큰 교회에 많은데 그 교회 목사 설교가 들리겠는가? 그냥 모태신앙이니까 다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보니까 대부분 종교를 가지고 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한 쪽은 천주교, 다른 한 쪽은 기독교다. 프로필에 보면 쓰여 있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겠는가? 그냥 사회적인 조건으로 봐서 가지고 있는 게 낫다는 것이다. 손해 볼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예수는 자기 땅에 왔으나 아무도 영접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버린바 되었다고 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자기 땅에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의 땅에 온 것처럼 버림을 당했다.
네가 왜 우리 땅에 왔느냐? 이래서 버림당한 게 아닌가? 말을 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망하던 사람들이 기다리던 사람들이 버렸다. 지금도 통곡의 벽에 가면 ‘그리스도여 오셨습니까?’ 한다. 또 캄캄한 방에 들어갈 때도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까?’ 하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의 대망을 무색하게 해 버리고, 그렇게 신성하게 대를 거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 원자 폭탄이라도 하나 가지고 왔으면 당장에 아멘 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에 차겠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라고 하더라도 되겠는가? 미군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고 하니까 믿는다. 무슨 아프리카의 누가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런 이야기가 있다. 해방 직전에 일본에 대해서 도장을 찍은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계속 졸라도 거부하고 안 했는데 막판에 도장을 찍어서 친일파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분들이 끝까지 도장을 안 찍다가 마지막에 며칠 남겨두고 찍었다. 미군이 꼭 들어올 것이라는 확신만 있었으면 안 찍었을 것이다. 이분들이 영어를 잘 못하니까 영어 방송을 못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도장을 찍고 말았다. 찍고 나니까 며칠 있지 않아서 해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친일파다. 말을 타고 왔더라면 환영 외에 별 것을 다할 사람들인데, 십자가를 지고 죽었으니 버리지 않겠는가?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나타냈다는 이것은 합리적인 헬라인들에게 절대로 용납이 안 되는 말이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것은 희랍 철학의 근본이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냈다. 더군다나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다.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합리적인 지혜를 찾는 희랍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이렇게는 하지 않았어도 무시해 버렸다. 지성인들은 악질적으로 하지는 않는데 속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고 말했다. 이 절대적인 구원을 위하여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사람이다. 내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냥이 아니라 이 절대적인 구원, 유대인이 버리고 헬라인이 비웃는 이 복음을 전하려고 위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절대적인 구원, 이방인을 살리면 자신의 동족이 멸망이 되고, 그렇다고 그의 동족을 살리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이방인들이 살 곳이 없다. 이 구원을 떠나고 나면 유대인 외에는 아무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부처님에게 가도 구원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을 따라가겠는가? 공자님에게 가도 안 된다. 공자님처럼 살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이 사람이 아니면 인간은 영원히 위대한 사람만 쫒다가 가는 것이다. 할 수 없다. 이렇게 살자. 요즘 세상이 참 묘하게 돌아가는데 가상현실이 있다. 이게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거기에 아바타를 만들어서 내 분신으로 인간을 만든다. 바깥의 가상현실에서 가상 인간들이 사는 것이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있고, 가상현실 속에서 가상인간이 산다. 어떻게 그대로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계속 숨고 있는 것이었다. 숨지 않으면 자기가 폭로되어서 못 산다. 십자가에서 폭로 되니까 못 받아들인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으니까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고 했는데 3장에 가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한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숨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를 내 놓을 수 없다. 문명국가로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자기를 감추고 산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다 대신한다. 싸울 일도 내가 싸우면 안 되니까 변호사 시켜서 싸운다. 교통사고가 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소리 지르고 삿대질하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 양쪽에 다 변호사가 있으니까 변호사들끼리 싸우게 한다. 변호사들은 직업적으로 싸우니까 문제가 안 된다. 그게 아바타나 마찬가지다. 그 사람이 지금 와서 아바타가 된 것이다. 언젠가 아바타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말짱하게 아무개처럼 만들어서 찾아오면 속을까봐 걱정이다. 누가 와서 잘 계셨냐고 하고, 요즘 더운데 얼마나 고생하시냐고 하고 들어오면 구별을 못해서 큰일이다. 그럴 때 나도 아바타를 만들어서 내 놓으면 아바타끼리 인사하고 가는 것이다. 하여간 희한한 세상이 돌아오고 있다. 미국에 가면 사람들이 대단히 친절하다. 생전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짓고 Hi Hi 한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쑥스럽다. 고개를 돌리고 있다. 이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친절하다. 이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고 생각하지만 친절한 것이 아니고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거리두기 하는 것처럼 2미터냐 3미터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바타로 변한 것이 아니겠는가. 어제 밤에 메타포와 아바타에 대해 사랑방에 써 놓았다. 메타포는 가상현실이라고 하는데 가상현실에 가상인간이다. 잘 되어 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면 나는 숨어 있다. 가서 욕을 하든지 말든지 그것은 내가 아니니까 상관이 없다. 이런 짓을 하던지 저런 짓을 하던지 무슨 짓이든 다 해도 된다.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겠다. 사람이 살 곳이 없어진다. 있을 곳이 없어진다. 나무 뒤에 숨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어떻게 계속 숨어 지내겠는가? 숨어있는 것이 더 무섭다. 중요한 일들은 숨어서 한다. 스탈린은 숨어있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2천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아무도 스탈린이 자기를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단한 인물이다. 욕 한마디만 잘못해도 평생 원수가 지는데, 2천만 명을 학살했는데도 아무도 스탈린이 그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유대인을 학살할 때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이 재판소에서 얼굴도 변하지 않고 나는 명령 받은 대로 했다고 했다. 그것이 히틀러의 아바타이다. 한 번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고 나는 명령대로 했다고 했다. 이것이 기독교 안에도 있었다. 쇠기둥에 사람을 달아놓고 불을 지르면서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바타였다.
장작더미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생사람을 불태워죽이면서도 네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했다고 했다. 그것이 기독교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리가 살아왔다. 나무 뒤에 숨는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될 줄 누가 알겠는가? 만민을 살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만민을 살리는 주권이다.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면 아주 악해도 보통 악한 것이 아니고, 산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게까지 된다. 미국은 유럽의 마지막 집결지이다. 유럽에서 이런 것을 많이 경험하고 나온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이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인간의 주권을 최대한 제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인간의 주권을 최대한 제한 시켰다. 공산주의는 반대로 어떤 사람의 주권을 절대화시킨다. 다른 점이 그 점이다. 살아보니까 너무 안 되겠다는 것이다. 미국에 건너간 그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자유를 내세운 것이다. 다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인정받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법대로 살면 다 칭찬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유대사회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당연히 인정받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정해진 법을 어기면 벌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본능적인지 교육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알고 있다. 그래서 당연하게 여긴다. 자기 죄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도 마지막에 계속 조르다보면 마지막에 고백을 한다.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을 받는 것이 검찰에서 하는 일이다. 억울한 사람은 사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억울하다고 하는데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20년 30년 후에 밝혀지기도 한다. 사람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숨기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은혜라고 하면 받는 자까지도 받으면서도 의문이 생긴다. 공짜로 받는다면 의심이 생긴다. 누가 공짜로 돈을 주면 섬뜩하다.
내가 이것을 받아도 되나 한다. 무조건적인 은혜는 받는 사람도 불안해진다. 이래도 되는가? 이럴 수 있는가? 올가미 씌워지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무조건적으로 준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야생동물들은 사람이 먹이를 주면 바로 받아먹지 않는다. 혹시 해서 그렇다. 왜냐하면 공짜로 받아먹어본 경험이 없다. 그렇게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자기 생각과 경험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 사람도 그런 셈이다. 무조건적인 은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 밑에 자리는 것이 중요하다. 뭔가를 받아먹었다. 그냥 엄마의 젖을 자기 것인 줄 알고 받아먹었다. 그런 경험이 있어야 되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면, 항상 자기가 한 것만큼만 받아먹었다면, 참 남을 믿기가 아주 어렵다. 잘해주면 잘해주는 대로 의심이 생긴다. 잘못해주면 잘못해주는 대로 의심이 생긴다. 참 어렵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이다. 이 은혜를 안 받아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도 받기 어렵다. 의심이 생기니까 그렇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더욱 그렇다.
내가 뭔가를 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이 다 인정이 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나보고 의롭다한다고 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지겠는가?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바보처럼 여겨진다. 저거 바보지 인간인가? 이렇게 생각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도 우리의 협력을 통한 구속이라면 누구든지 인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협력과 관계없기 때문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죽임 당하신 그 안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은 더군다나 믿어질 일이 아니다. 미국이 힘이 컸기 때문에 우리를 해방했다는 것은 다 인정한다. 그런데 만일 반대로 되었다면 사람들이 믿겠는가? 죽임 당한 사람 안에 힘이 없어서, 내려올 수 없어서, 죽임당한 그 사람 안에 우리 구원이 있다. 그러니까 의심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전에 어떤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권위에 대한 지식이랄지 이런 것이 있어서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서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쉽게 받아들인 것은 별로 효과가 없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누구나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다. 더구나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은 더구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예수 앞에 와서 찬양을 드렸던 사람들은 전부 그 어떤 제도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행동으로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가치가 없는 그 사람들이 와서 그래도 은혜를 받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안 되는 사람들이니까, 배고픈 사람이니까, 그냥 죽을지 살지 모르고 먹는 게 아니겠는가? 옛날에 배고플 때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를 가지고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배고프니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나쁜 것이 들었는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배부른 사람은 그것을 먹겠는가? 남이 먹다 남은 쓰레기를 가지고 끓여놓은 것을 먹겠는가? 선악과를 먹은 인간으로서는 누구도 믿지 못할 일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은혜이다. 한번보고 그 안에서 참 사람을 시인만 하면 저 사람이 진짜 사람이구나.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저 사람이 참 사람이구나. 그래서 아, 나는 가짜였구나. 이렇게 시인만 하면 그와 그냥 연합이 되는 것이다. 연합을 하려고 할 것도 없고 그냥 연합이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놋 뱀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장대에 뱀을 달아놓고 쳐다봐라. 쳐다보니 살았다는 것이다. 이 옛 얘기를 예수님이 자기 자신으로 적용을 시켰다. 아주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런데 이 안에서 사람의 생각과 정반대로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의 약속, 부르심, 긍휼, 율법, 이런 것이 다 완성이 되는 자리이다. 헬라인들이 찾는 참 지혜가 다 완성되고 실제화 되는 자리다. 예수 안에 있는 그 구속,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실제화 된다. 그 자리가 없으면 모든 것이 실제화가 안 된다. 성경에서 본 모든 것이 다 오리무중이고 확실한 대답이 안 된다. 우리가 확실한 대답을 하려면 성경 없이 대답을 해야 한다. 성경이 이렇다고 대답을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대답이 될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대답이 안 된다. 성경을 놔두고 대답을 할 수 있어야지 그래야 참 대답이 된다. 그러면 스님에게 가도 대답이 되고 마호멧에 가도 대답이 되고 대답이 된다. 왜? 실제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자신이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그 사람들과 상대가 되겠는가? 수양을 많이 해서 상대가 되겠는가? 아무리 수양을 하고 공부를 해도 실제화가 안 되면 허망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실제화 된 사람에게 지게 된다. 이때 하늘로 눈이 뜨이고 문이 열리는 것이다.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회복되고, 모든 것이 완성되고 실제화 된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 자리에서 완성되고 실제화 된다. 이 자리가 희미하면 모든 것이 다 희미하다. 어느 하나도 확실한 것이 없다. 절대주권에 대한 반론이나 왜곡이 없어진다. 절대주권이 맞느냐? 틀리냐?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권이다. 마음대로 하기 위한 주권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왜곡, 악용한 것이 사실이다. 유대교 이슬람 천주교 개신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종교치고 이 역사에서 자유로운 종교가 없다. 아무 데도 없다.
다 이것을 악용하고 잘못 사용해서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반 주권적인 종교를 따르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이런 주권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런 종교는 믿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많이 나오고 있다. 반 주권적 종교, 그런 절대적 종교를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왜 그 절대적인 주권, 절대적인 유일한 신을 사람들이 말하게 되었는가? 원래는 다신교였는데 통일 왕국시대가 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유일신 종교가 생겼다는 것이다. 예리하다. 도올이 그 얘기한다. 원래는 다신교였는데 다윗 왕국이 생겨서 절대 유일한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왕이 둘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유일신이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은 영신시대라고 한다. 신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는 것도 많고 그 사람한테 가서 기독교 신학자가 아무도 대들지 못한다. 그만큼 공부를 하거나 더 알아야 하는데 알 수 없다. 신학자들 중에 아무도 말을 안 한다. 그렇게 떠들고 다녀도 아무도 말을 못한다. 그러면 진 것 아닌가? 그 사람 앞에 우리가 꼭 복음을 전해야겠더라. 그 사람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수없이 많고 그런 제자들이 많다. 또 그 사람의 강의를 듣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다. 유튜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사람이다. 강대상 두드리며 설교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런 사람이 한번 휩쓸고 가버리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진짜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왔다. 반주권적 충족, 유일신 하나님을 믿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일 필요도 없는 종교가 생긴다. 다 그런 종교 믿기를 원한다. 편하다. 특별히 지성적이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요즘 교회를 악세세리로 가는 것이지 심각하게 가는 사람이 없다. 어떤 교회는 교수들끼리 모이는 모임이 있고, 이렇게 되어 버렸다. 겉만 교회지 속은 아니다. 절대주권적인 종교는 야만적이고 독선적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봐왔다. 절대주권을 주장하던 종교가 독선 때문에 야만적이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오히려 더럽힌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주권이 죽이기 위한 주권으로 바꿔졌으니까 오용으로 쓰여졌으니까 비난하는 그 사람들을 나무랄 수 없다.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제는 그 왜곡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실상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의 살리는 주권을 더욱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죽으심 받은 것이 이런 구속이다. 말을 타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음으로 구속이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것도 아니고,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우리도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내놓은 것이다. 내가 공든 탑이 무너지라고 쌓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려놓은 것보다 허물어져버린 것이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이다. 내 일생의 모든 노력을 다 내놓은 것이니까, 그냥 허물어져버린 것이니까, 가장 큰 대가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구속을 해 놓으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만민의 왜곡을 소멸하고 참다운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고 만민을 살리는 신성한 축복이 되도록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 앞에 가면 누구든지 산다. 이런 주권이 되어야지 하나님 앞에 가면 너는 죽고 너는 산다는 주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산다는 주권이 되어야지 하나님의 주권은 못 살릴 사람이 없다는 이런 주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짜 주권이 아니겠는가! 대통령의 권한도 마지막 권한이 하나 있다. 자기 혼자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면권이다.
어떤 죄인이라도 대통령이 사면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주어져 있다. 왜냐하면 대통령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한다. 법의 제한도 있고, 주변의 제한도 있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아무리 잘난 대통령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한가지만은 절대적으로 자기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사면권이다. 그런데 이것을 내놓으려니까 벌떼 같이 일어나서 반대해서 입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수감되어 있는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야 된다고 내놓으니까 대번에 벌떼같이 일어나서 안 된다고 하니까 대통령이 입이 쏙 들어갔다. 하나님도 이렇게 되면 불쌍한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 이 절대주권이 악용되어버리면 하나님이 악질이 된다. 무서운 죄다. 엄청난 죄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원망한다.
저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하느냐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모독하는 것이 되겠는가? 사형에 해당되는 일이다. 삼족을 멸해야 할 그런 죄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왜곡된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사람들이 비난하는 절대주권의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 죽은 것이다. 못 살린다. 살리지 못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폭력적인 절대 주권을 가졌다는 말을 못 한다. 하나님이 살렸으면 진짜로 절대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인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해도 못 살렸다. 알고 보면 그것이 못 살린 것이다. 그 절대주권이라고 믿고 있던 그 사람들에게 완전히 죽은 것이다.
저러면 하나님을 부르짖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저런 하나님이면 부르짖을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예수 같은 분이 그 절박한 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데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이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 이것과 좀 다르게 진짜로 하나님이 죽은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 죽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왜곡시킨 인간도 예수와 함께 거기서 죽은 것이다. 신도 죽고 인간도 죽고 다 죽은 자리가 예수 십자가이다. 함께 죽은 자리다. 이제 예수님께서 여기 죽었으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사람을 죽여도 되고 살려도 되고 마음대로 하면 된다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완전한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도 또 그랬다. 그것을 보고도 절대주권을 그렇게 사용했다. 다 죽었다.
이제는 그런 주권이 없다. 하나님의 주권은 살리는 주권이지 절대로 죽이는 주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증명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구속 예수의 죽으심으로 얻은 구속, 그 안에는 살리는 하나님의 주권만 온천지에 편만하게 된다. 이렇게 증명이 안 되면 증명이 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못 할 일도 있구나. 자기 맘대로 못 할 것도 있구나. 이렇게 된 것이다. 예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그 자리에서 보면 하나님도 마음대로 못하는 게 있구나. 이렇게 된 것이다. 옛날에 그 하나님은 죽은 것이다. 다 죽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다시는 밤이 없고 저주가 없고 눈물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다. 왜 그런가? 이렇게 돼서 그런 것이다. 그 남용되는 절대 주권의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다시는 밤이 없겠는가?
어떻게 다시 저주가 없겠는가? 구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저주가 많다. 하나님 백성 말고 다른 사람을 저주한 데가 굉장히 많다. 그런데 어떻게 저주가 없겠는가? 다시는 밤이 없고 저주가 없으면 눈물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이것이 없다고 했다. 왜? 예수 때문에, 이제는 그런 주권이 없어졌다. 마음대로, 인간의 생각대로 사용되던 그런 주권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는 밤이 없고 저주가 없고 눈물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22:20,21) 이렇게 말했다.
주모든 사람에게 있을 은혜가 지금 막혀 있는 것이다. 누구 때문에 꽉 막혀 있는 것이다. 우리라도 그것이 막히지 않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살아야 될 이유가 있다면 이것 때문에 살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더 살려 주시면 나는 할 일이 이것밖에 없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주 예수가 오시니까 이 세상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다. 하나님도 정상적인 하나님으로 돌아가고, 인간도 정상적 인간으로 돌아가고, 모든 게 다 정상화된다. 만물이 다 참되지만 오직 사람의 마음만 잘못됐다고 한다. 사람만 제대로 되면 모든 것이 다 정상으로 돌아온다. 가정에서 부모 때문에 상처받은 아이들이 참 많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아이들을 고치려고 해봐도 안 된다.
아버지 한 사람만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대로 다 평정이 된다. 나 한 사람만 안정이 되면 내 주변이 다 안정이 된다. 모두 내게 달렸다. 내가 안정되어 있으면 교회도 안정이 된다. 그런데 내가 안정이 안 되면 교회도 다 불안하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1) 예외 없이 그 예수의 은혜 때문에 저주받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때문에 저주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복음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위한 것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시편 23편에 자기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분이 우리를 참된 길로,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으면 그분 자신이 불의한 하나님이 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2절에 자기 이름을 위해서 나를 살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은 영원히 전해져야 될 복음이다. 우리가 혹시 받아들이지 않아도 할 수 없다.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계속해야 한다. 자기가 의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하나님도 불의한 하나님이 된다. 사람들이 그렇게 사용하니까 그 절대주권 때문에 불의한 하나님이 된다. 사람들이 다 불의한 하나님을 만들어 버리는데 하나님이 내가 아니라고 한다고 되겠는가? 하나님을 살리기 위해서는, 참된 하나님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 복음이 꼭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주 좋아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할 때 굉장히 좋아하실 것 같다. 하나님이 나를 참 좋아하시겠구나. 너 참 수고한다고 할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