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陶谷) 정기호(鄭琦鎬) 공을 기리며!
이런 분을 다시 만나지 못하리란 것을 안다.
2023년 4월 5일 밤, 오랜 가뭄에 촉촉이 비가 내린다. 눈부시게 빛나던 산록의 벚꽃이 내일의 새싹 잎을 잉태하리라는 것은 알지만, 마치 백발처럼 흩날리며 땅으로 쏟아지는 꽃잎들이 안타깝고 가련하다.
오늘 낮 동두천 정진호 종숙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도곡 정기호 박사님께서 3월 20일 별세하셨다는 소식이었다. 금년 93세이시다.
가장 최근 뵌 것이 지난해 1월 23일이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음식점의 점심식사 자리도 같이 못하고 집으로 귀가하셨었다. 요즘 비교적 잘 지내시다 갑자기 편찮아져서 병원 중환자실에서 20일을 지내셨다고 한다. 고령이신데도 최근까지 그동안 모아둔 집안과 선대의 행적에 대한 글을 모아 책을 내서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
아쉬움도 묻혔다.
내 자신 역시 모아둔 글을 「광주세설」이라는 가 책자라도 우선 인쇄하여 따뜻한 봄날에 찾아뵈려 계획 중이었다. 별세 소식을 듣고 슬픔이 밀려온다. 하늘의 큰 별이 떨어지고 태산이 무너졌다. 광주정씨의 북극성이 진 것이니 애닮은 마음을 어찌 형용할 수 있겠는가! 배우고 여쭙고 싶은 것도 참으로 많고, 그 궁금증과 상의 드리고 싶은 갈증도 많지만 고령이시어서 마냥 그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집안의 정신적 지주로서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던가! 정년퇴직 후 1년 4개월이 지난 시점인 2018년에 처음 뵌 것인데 도곡재에 철쭉이 흐드러지고 화단에 목단 꽃이 붉게 피어올랐던 날이었다. 고작 네 번 정도 안흥을 방문하여 뵌 것이 전부이다.
학문적 업적이야 잘 알지 못하지만 국문학자로서 신라향가 연구의 대가이시고 정년까지 대학에서 후학을 많이 키우시며 바쁜 일상이셨지만, 광주정씨 집안 대소사에 기여하신 공적 또한 열거할 수 없다. 2001년 도유사로서 발간 편집하신 신사보 족보를 수없이 읽었는데 그 고충과 노고는 책갈피 갈피마다 맺혀있고 찬란한 금자탑이 되었다. 또한 2007년에는 가전 고문서를 시도유형문화재로 등재시키고 화곡 정사호공의 묘지는 동두천시 향토사적으로 지정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이셨다. 그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따님이 연안이씨 가문에 출가하여 외손봉사하셨던 정지당(鄭之唐)공의 묘소가 의정부시에서 발굴되었을 때 참여하여 동백공 선영에 이장해 오셨다. 이 밖에도 광주정씨 어느 집안 가리지 않으시고 선조님의 묘갈과 공적문을 지어 후계에 남기시니 공의 발자취는 전국 경향의 어느 산야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럼에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은 말이 없으시고, 내세우지 않으시고, 자랑하지 않으셨으므로 그 뜻은 없는 듯 모르는 듯 보통사람의 범주를 초월하셨기 때문이다. 한 번을 뵈어도 ‘인자(仁者)’의 품향을 지니셨음을 바로 알 수 있으니 그 기품은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며, 선하신 인상과 여운이란 마치 신선(神仙)이 오셨다 가신 것이다. 단 한 번 뵈어도 사제지간처럼 존경이 우러나고, 부모님 같은 따스하고 인자한 여운이 흐른다.
아! 앞을 막아선 큰 산의 끝이 보이지 않듯, 마음에도 솟구친 천주(天柱)가 있음을 알았다. 도봉산에 오르면 북쪽의 불곡산과 그 너머 동백공 송추를 생각하고, 다시 그 너머 북쪽 안흥의 도곡 박사님과 종숙님을 항상 떠올리곤 하였는데, 차 향기처럼 온화한 인품과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이 맴돌기 때문이다. 그러한 따스한 온기는 멀리 선대의 아름다운 행적에서 비롯되어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인데 참으로 본받을만한 가풍이다.
따스한 봄날은 왔건만 님의 뒷모습조차 사치였구나!
아! 이제 이러한 분을 다시 뵐 수 있겠는가!
이런 분을 다시 만나지 못하리란 것을 안다.
부디 천상(天上)에 안주하시어 속계의 번잡을 벗어나시길!
창밖으로 내다보는 깜깜한 도봉산 산록에 가뭄을 해갈하는 비는 촉촉이 내리는데,
이 슬픔과 아쉬운 물리적 인연의 단절은 무상함 뿐이다.
2023년 4월 5일 밤. 종질 철중(喆重) 근상
< 2018년 5월 2일 처음 동두천 안흥 도곡재(陶谷齋)를 방문 했을 때 >
< 2019년 배송된 도곡공의 선물과 편지 >
철중(喆重)님
여기 신촌(山村) 까지 간본(刊本) 「광주정씨유물집(光州鄭氏遺物集)」 상하권(上下卷)을 손수 들고 와 건네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선대(先代)의 유묵(遺墨)·유품(遺品)을 그렇게 잘 간직하고 정리편집(整理編輯)하고 해제(解題)를 붙여 상제(上楴)한 위선(爲先)의 성심(誠心)을 송축(頌祝)해 마지않습니다.
「고문서집성 71(古文書集成 71」은 간행(刊行)된지 15년이 지났습니다. 그 해제(解題) 특히 가계(家系)에 오식(誤植)이 많습니다. 우리 수상공계(遂相公系) 가계(家系)의 오식(誤植)은 눈에 띄는 대로 내가 수정(修正)을 했으나, 성원공(星源公), 제상공(濟相公) 양계(兩系)는 내가 잘 모르니까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 점 염두(念頭)에 두고 참고(參考)하시기 바랍니다.
「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한 권으로는 상자가 차지 않아, 포장이 어려워 보공(補空)으로 「회갑기념논총(回甲記念論叢)」과 「시가문학논고(詩歌文學論藁)」를 넣었습니다. 두 권 모두 철중(喆重)님 인생(人生)과는 아무 관련(關聯)도 없는 문학(文學)들인데 “이런 종친(宗親)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으로 받아 두십시오!
그동안 한자교육운동(漢字敎育運動)을 하면서 발표(發表)한 논설(論說)이나 잡문(雜文), 종사(宗事)를 하면서 쓴 계보(系譜)나 묘소(墓所) 변증문(辨證文) 같은 것이 몇 편(篇) 있어 그것을 모아 한 권(卷)을 만들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중(喆重)님과도 좀 관련(關聯)이 있을듯하니 예정(豫定)대로 금년(今年) 말(末)쯤 출간(出刊)되면 보내드리지요.
2019년 3월 22일 족말(族末) 기호(琦鎬)
< 2022년 1월 22일 정영호 회장님댁에서 >
첫댓글 정기호 박사님의 부음을 받지 못하였는데
종숙 철중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삼가 정기호 박사님의 편안한 영면을 바랍니다.
23년4월 06일 족손 정윤칠 근상
저도 몰랐습니다. 대종회에는 알렸다고 합니다. 지난 토요일 종친에게서 듣고 연락드렸더니 전화를 주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https://im.newspic.kr/vgG3sxT
https://im.newspic.kr/TUunk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