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대 한국 문단에 홀연 나타나 모더니즘 문학의 큰 성을 쌓은 천재 시인·소설가 이상 (李箱·1910~1937)이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전위적 실험정신과 해체적인 서사를 앞세워 분열된 내면세계를 탐험했던 이상의 문학은 지금도 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창작의 샘물이다. 한국 문학의 영원한 '모던 보이' 이상(李箱)의 짧은 삶과 문학,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예술가들의 풍경을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씨가 매주 연재한다. - 편집자 2010.01.05 |
1 回 · 상투 자른 '아해들' 욕망의 질주를 시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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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의 기수들금시계 · 여우 목도리 두른 '모던껄', 양복에 중절모 쓴 '모던뽀이'백화점 옥상정원에서 해방된 연애를 만끽했으니…
| | ▲ 여우털 목도리를 감은‘모던 걸’. 조선일보 1933년 10월 25일자에 실린 안석영의 만문(漫文). | | | | 1930년대는 '모던뽀이' 와 '모던껄' 들의 전성시대였다. 미적 혁신을 표방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들, 거리로 쏟아져나온 유행과 소비의 첨병들이 '모던' 의 시대를 이끌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을 타고 조선반도까지 밀려온 '모던' 은 낡고 오래된 것을 잘라내는 데서 시작됐다.
'모던(modern)' 은 곧 '모단(毛斷)' 이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지난 시대와의 단절, 인습에서의 자유를 뜻한다. 새로운 미학적 규준에 몸을 맞추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문화적 단절에 따른 충격이었다. 수백 년 동안이나 머리에 이고 있던 상투를 자른 '아해들' 이 시대의 '막다른 골목' 을 향하여 질주를 시작했다 (이상, 〈오감도〉시 제1호). 그 막다른 골목은 모더니즘의 도주로였다.
그런데 왜 1930년대일까?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유화정책으로 전환 하면서 느슨해진 탓이 컸고, 아울러 카프(KAPF)나 민족주의 진영과는 다른 이념과 미적 규준을 가진 예술가들의 분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진·박영희 등이 이끌던 카프에 반발한 일군(一群)의 문인들이 1933년에 '구인회(九人會)' 를 결성했다. 그 초기 구성원들은 김기림·이효석·이종명·유치진·김유영·조용만·이태준·정지용·이무영 등이었다. 이 중에서 몇이 빠지고 그 자리를 박태원·이상·박팔양·김유정·김환태 등이 채웠다. '구인회'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시작점이다. 그 모더니즘 대열의 맨 앞자리에 선 인물이 이상(李箱)이었다.
당시 경성의 상징은 도심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고급백화점들이었다. 백화점은 근대문명의 전시장이자 상품에 대한 소비욕망을 부추기는 카니발의 장소였다. 판탈롱 바지와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한껏 멋을 부린 모던 걸과 양복을 걸쳐 입고 중절모를 쓰고 스틱을 든 모던 보이들은 욕망의 각축장인 백화점 옥상정원(屋上庭園)에서 '노골하게 해방된 연애' 를 즐겼다.
| | ▲ 1930년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사교 공간이있던 미쓰코시 (현 신세계)백화점의 옥상 카페. / ‘사진으로 보는 서울’ 中에서 | |
1920년대 말부터 경성에는 동아부인상회 · 화신상회(뒤에 화신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꿨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하라다 · 조지야 · 미나카이 · 미쓰코시 같은 백화점들이 들어서며 경쟁을 했다. 특히 미쓰코시 백화점의 옥상정원은 경성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경성 최고의 연애 명소였다. 이곳은 항상 조선인과 일본인 신여성과 여학생들로 차고 넘쳤다.
1930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경성역에 도착한 박태원은 짐꾼을 시켜 짐은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곧바로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가서 옥상정원 파라솔 아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박태원은 도쿄 유학을 떠난 지 몇 달 만에 병이 재발하고 실연의 상처까지 겹쳐 견딜 재간이 없었다. 간다의 진보초 서점에서 구한 제임스 조이스와 아쿠타가와의 소설들을 끼고 하숙집에 틀어박혀 종일 읽다가 지치면 잠을 청하다가 짐을 쌌던 것이다.
1930년대 경성 인구는 40만에 가까웠고, 거리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달렸다. 이상은 자동차 행렬을 보고 '발광어류(發光魚類)의 군집이동(群集移動)'(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이라고 썼다. 이상이 이태준의 소개로 박태원을 처음 만난 1933년 이후 그들의 우정은 급격하게 깊어졌다. 두 사람이 혼마치(충무로)와 황금정(을지로)을 나란히 걸어가는 걸 목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소공동에 있던 끽다점 '낙랑파라'에 들러 가배차(茶·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이야기를 나누고, 레코드를 들었다. 그러다가 유학을 간다는 어느 화가의 '도구유별전(渡歐留別展)' 이 열리는 화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들 모던 보이들은 커피 대신 청량음료수 칼피스를 마시기도 했고, 상류층에서는 아지노모도를 넣어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신여성들은 미쓰코시나 화신에서 최신 양장을 사서 입거나, 종로2정목 한청빌딩 1층에 있는 수향상회에서 고급 양장을 맞춰 입었다. 금시계와 다이아몬드 반지는 당시 신여성의 첨단 패션에서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다. 지금부터 이들 '모던 뽀이' 들이 걸었던 경성 거리와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자.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1. 05.
| | ▲ 구본웅 作 ‘친구의 초상’. 죽마고우가 그린 담배 피우는 李箱 | | | | 서양화가 구본웅(1906~1953)과 소설가 이상(1910~1937)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친구의 초상'(1935)을 작업할 때 구본웅은 이미 결핵 3기에 각혈이 심했는데도 모델이었던 이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웠다. 키가 큰 이상과 작은 구본웅이 함께 걸어가면 사람들은 "곡마단패가 들어왔나 보네" 하고 수군거렸다. 最 後 능금한알이墜落하였다. 地球는부서질程度만큼傷했다. 最後. 이미如何한精神도發芽하지아니한다. | | ▲ 구본웅 (1906~1953) | | | | 구본웅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친모 대신 계모 변동숙의 손에 자랐다.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 를 들어 낳은, 26세 차이 나는 이복 여동생이 변동림. 변동림은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져 폐병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상과 결혼한다. 신혼 1년도 못 채운 이상의 마지막 말은 "멜론이 먹고 싶소" 였다.
2 回 · 너무 일찍 이 지구에 온 사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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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저주받은 일세의 귀재퇴폐 · 폐륜의 표상, 狂人 취급 받아존재 그 자체로 시대의 개벽 예고 |
1933년 경성(京城), 늦여름 저녁 무렵. 예사롭지 않은 외모의 남자 넷이 황금정 (지금의 을지로)을 거쳐 종로를 걷고 있었다. 백구두에 봉두난발, 갈색 나비넥타이, 얼굴의 반쯤을 덮은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창백해서 양인(洋人)인가 싶은 사나이, 그 곁에 중산모를 눌러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흐느적흐느적 걷는 폼이 마치 인조인간처럼 보이는 사나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갓빠'머리(머리 꼭대기를 일자로 깎은 머리) 스타일의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아냐. 활동사진 변사 일행이야."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힐끔거리며 한마디씩 던졌다. 스틱을 들어 공중에서 휘휘 돌려대던 백구두의 사나이가 돌연 "캬캬캬캬…" 하고 웃었다. "이 꼴들을 보게. 참, 정말 곡마단 일행이 왔다구 애들이 또 줄줄 따라오겠어." '19세기와 20세기 사이에 끼어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의 웃음소리는 독특했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일세의 귀재(鬼才)'로 불리게 될 이상(李箱·1910~1937)이었다. 그리고 꼽추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 흐느적거리며 걷는 소설가 겸 번역가 양백화(梁白華·1889~1938), 소설가 구보 박태원(朴泰遠·1909~1986)이 그 일행이었다.
1931년에 개점한 경성 최초의 커피다방 낙랑파라에서 구인회(九人會) 모임을 마친 일행은 근처 골목길에 있는 우고당(友古堂)에 들러 구본웅을 대동하고 한 잔하러 나선 길이었다.
경성역 대합실의 끽다점(喫茶店)과 더불어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던 낙랑파라의 주인은 일본 동경미술학교 도안과 출신의 화가 이순석이었다. 이순석은 경성부청(府廳)과 마주 선 건물 이층에 화실을 꾸리고, 아래층에는 끽다점을 냈다. 입구는 파초 화분으로 장식하고, 내부 널마루 위에 톱밥을 펴서 사막에 온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낙랑파라는 훗날 배우 김연실이 인수해 이름을 낙랑이라고 바꾸고 해방 후 까지 운영했다.
| | ▲ 이상의 절친한 벗이었던 화가 구본웅이〈친구의 초상〉 (1935년 작)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이상의 초상화 | |
구본웅이 1935년 3월경 우고당 2층에 마련한 화실에서 그린 〈우인(友人)의 초상〉이란 작품이 있다. 봉두난발에 상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이상의 초상화다. 파이프 담배는 본디 이상의 것이 아니라 구본웅의 것이었다. '배고픈얼굴을본다./ 반드르르한머리카락밑에어째서배고픈얼굴은있느냐./ 저사내는어데서왔느냐./ 저사내는어데사왔느냐.'(이상의 시 〈얼굴〉)
이상은 거울을 보며 자주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는 퇴폐와 패륜의 표상으로, 때로는 광인(狂人)으로 오해받으며 냉대와 수모를 당하고, 병고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내면에 은닉된 스캔들의 원소, 존재 그 자체로 시대의 개벽을 예고하는 천둥이며 번개였던 이상! 위트와 패러독스로 무장한 천재는 너무 일찍 이 지구에 온 것인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했다. 물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는 이상 자신이었다. 김기림은 이 최초의 모더니스트 시인에게서 해학과 야유와 독설로 '세속에 반항하는 악한 정령(精靈)' 을 보았다.
이상은 조선중앙일보 1934년 7월 24일자에서 8월 8일까지 연작시 〈오감도〉를 발표했다. 이때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집어치워라!" "이상이라는 작자를 죽이고 말겠다!" 는 야유가 쏟아졌다.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결국 연재는 15회로 중단됐다. 그는 항변했다.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2000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다들 야단하는 바람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이상은 시대를 너무나 앞질러갔기에 이해받지 못했다. 세상을 뜬 뒤에야 당대의 냉대와 몰이해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그는 '박제' 가 되어버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날개〉를 쓴 것은 아닐까. 이상의 삶은 '전통(친부·親父)' 에서 내쳐져 '근대(양부·養父)' 로 입양되었다가 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아해' 의 슬픈 종생기(終生記)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1. 12.
3 回 · 기자 김기림 '천재 이상' 멘토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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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기자' 김기림과의 우정조선일보 기자 활약… 별명 '모범 청년'이상, 새작품 쓸 때마다 항상 품평 부탁 |
1930년대 경성은 강렬한 음향과 색채로 충만하고, 상쾌한 만보(漫步)와 새로운 미적 규준, 그리고 동경(憧憬)의 '울트라 모던' 이 꽃피는 장소였다. 그 자신 대표적인 '모던 뽀이' 였던 시인 김기림은 당시 경성인들이 선망하는 것이 '다이야 반지-양식(洋食)-오후의 산책로-백화점-극장의 특등석-예금통장' 이었다고 했다.
'모던 뽀이'들은 상징적 아버지(조선 · 전통 · 과거)를 살해하고 스스로 부왕(父王)의 권좌에 앉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은 미개한 '원주민', 전근대의 '낙후' 와 '봉건' 의 잔재들이었다. 그것은 '모던' 으로 나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데 아버지의 상징적 살해가 필요했다. 이상은 '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 (시 〈오감도〉 제2호)가 되는 것이냐고 탄식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대신에 '모던' 을 손에 쥔 '13인의 아해들' 은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들이며,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상)들이었다.
| | ▲ 조선일보 기자 시절의 김기림 시인. 동료 문인이자 문학기자로서 이상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 | | | 시인 김기림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가까운 학성군 출신이었다. 1908년생이니 이상보다 두 살 연상이다. 주로 종로서를 외근 구역으로 맡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기림은 '북구(北歐)적인 선이 굵고 축구감독 같은 풍모' 를 지녔고, '근심·우울·센티멘털리즘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명랑성이 농후한 사람'이었다. 신문사 안에서의 별명은 '김모범 청년'이었다.
1930년대 조선일보에는 염상섭·현진건·김동인·채만식·홍기문·함대훈·이원조 등 문인들이 기자로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이익상·주요섭·윤백남·이무영·홍효민·주요한·이은상·변영로·심훈 등이 있었다. 당시 문단의 헤게모니는 지면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 문인기자들이 쥐고 있었고, 그 중심에 김기림이 있었다.
김기림과 이상의 우정은 호혜평등 관계이기보다는 이상이 자신의 지지자이자 멘토였던 김기림에게 일방으로 기대는 형국이었다. 일찍이 이상의 천재성을 알아봤던 김기림은 이상에게 "파리 가서 3년간 공부하고 오자. 파리에 있는 슈르 리얼리스트들하고 싸워서 누가 이기나 내기하자" 고 제의했다. 이상은 김기림에게 편지를 보내 "형, 도동(渡東)하는 길에 서울 들러 부디 좀 만납시다. 할 이야기도 많고 이일 저일 의논하고 싶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새 작품을 쓰면 김기림에게 보냈다. "졸작 〈날개〉에 대한 형의 다정한 말씀 골수에 숨이오. 방금은 문학청년이 회로(灰爐)에 돌아갈 지상최종의 걸작 〈종생기〉를 쓰는 중이오. 형이나 부디 억울한 이 내출혈을 알아주기 바라오!"
그 무렵 이상은 거듭되는 카페 경영의 실패, 금홍과의 이별, 나태와 방종, 질병 등으로 몸과 의식이 퇴락하고 있었다. 구인회 멤버인 정인택과 윤태영이 황금정 뒷골목의 어두컴컴한 셋방에 숨어 지내던 이상을 찾아 "지금까지 걸어오던 불건강한 악취미는 청산하고 건강한 생활을 찾으라"고 호소했다. 이상은 얼마 뒤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에 교정부 직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김유정이 가끔 나타나 이상의 책상 맞은편에 우두커니 앉았다가 갔다. 김유정이 "해경, 그건 뭐하라는 표시요?" 라고 물으면 이상은 "이건 거꾸로 박힌 활자를 바로 세우라는 표시요" 라고 답했다.
1936년 7월 김기림의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가 나왔을 때 동북제대에 유학 중인 김기림의 부탁으로 이상이 본문 편집과 표지 장정을 떠맡았다. 책에 쪽수 표기를 하지 말자는 이상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김기림은 "책인데 어떻게 쪽수 표시를 안 하느냐" 고 난색을 표했다. 구본웅은 "한 1000부 박아서 팔자" 고 했고, 이상은 100부만 찍자고 했다. 결국 200부를 찍고자 했던 김기림의 뜻대로 되었다.
이상은 그해 10월경 동경행을 감행하면서 김기림에게 편지를 썼다. "골맹에 든 이 문학병을―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의… 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제법 근량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여기서 같은 환경에서는 자기 부패 작용을 일으켜서 그대로 연화(煙火)할 것 같소. 동경이라는 곳에 오직 나를 매질한 빈고가 있을 뿐인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컨디션이 필요하단 말이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1. 19.
4 回 · 김해경은 왜 이상이 되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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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人에서 문학人으로 '탈출 선언'가난한 집 장남이었지만 가족 부양보다 예술 택해 |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강릉을 본관으로 하는 김연창(金演昌)이 그의 생부다. 김연창은 얼굴이 얽은 사람으로, 형 김연필(金演弼)의 주선으로 구한말 궁내부(宮內府) 활판소(活版所)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 세 개를 절단당한 뒤 작은 이발소를 개업해서 호구지책을 삼았다.
이상은 〈슬픈 이야기〉라는 글에서 그 사연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어머니도 우리 아버지도 다 얽으셨습니다. 그분들은 다 마음이 착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손톱이 일곱밖에 없습니다. 궁내부 활판소에 다니실 적에 손가락 셋을 두 번에 잘리우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생일도 이름도 모르십니다. 맨처음부터 친정이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외가집 있는 사람이 퍽 부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장모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김해경이 1910년 9월 23일 새벽 6시경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중인 계급의 가난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을 지은 이는 조부 김병복(金炳福)이었다. 해경은 집안의 자랑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었다. 그런 까닭에 조부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 | ▲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의 이상. 그림을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뿔’제공 | |
어린 해경은 젖을 떼자마자 총독부 상공과의 하급 관리직에 있던 자식 없는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백모는 해경에 대해 엄격했다. 백부가 안아줄 때도 겁이 난 어린 해경은 늘 울곤 했다. 해경의 내면은 어리광과 유희 본능을 억압당하고 낯선 세계가 주는 공포와 불안에 착색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상(李箱)'이란 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혼재한다. 해경이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반 시절 공사장에 감리감독을 나갔을 때, 인부들이 그의 성을 잘못 알고 일본식으로 '리상(李樣)!' 하고 부른 데서 기인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상'이란 필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경성고공(京城高工) 제8회 졸업앨범이다. 조선인 학생 17명이 이름을 올린 그 명부 안에 해경은 이상(李箱) 이란 필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1931년에는 김해경이란 본명으로 《조선과 건축》 (7·8·10월호)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 21편의 일어(日語) 시를 연이어 내놓는다. 그리고 아홉 달 뒤인 1932년 7월 같은 잡지에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제목 아래 7편의 시를 내놓으며 비로소 '이상'이란 필명을 쓴다. 전통과 탈전통, 어른과 아이, 혈통적 의무와 예술적 자유 사이에서 공포와 불안의 운명에 주박당한 기호인 김해경은 이상이라는 귀면(鬼面)을 쓰고 탈주한다.
김해경이란 이름은 강릉 김씨라는 핏줄을 잇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라는 정언적 명령이자 세속적 가치의 기호라는 함의를 갖는다. 1931년 백부 김연필이 죽고 해경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 다가온 것은 "젖 떨어져서 나갔다가 23년 만에 돌아와 보았더니 여전히 가난하게들 사십디다" 에서 볼 수 있듯 가난의 참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였다.
'해경'은 그의 생식력과 노동력이 온전히 이 가족적 가치의 재생산에 바쳐져야 함을 의미하는 가족명이다. 따라서 '이상'이란 필명의 참칭은 '김해경' 의 전면부정이자 그것이 강제하는 일체의 운명으로부터의 탈주와 새로운 주체 탄생, 그리고 근대적 가치에 의한 봉건적 가치의 죽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시인 김승희는 이 변성명 (變姓名) 행위를 '억압과 위기에 대응하는 자아변형과 제의적(祭儀的) 변화의 추구' 로 설명한다. 아울러 그것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된 운명으로 주어진 '김해경' 의 상징적 죽음과 함께 이루어질 이질적인 삶으로의 분열 · 분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고, 평론가 신형철의 지적대로 '자연인 김해경에서 문학인 이상으로의 탈출' 이다.
이상은 정지용이 주재하던 잡지 《카톨릭청년》(1933.7.)에 한국어로 된 시를 발표하며 자신의 문학을 한국문학의 영토 안으로 편입시켰다. 그중 〈1933, 6, 1〉이라는 시에서 "나는 그날 나의 자서전에 자필의 부고(訃告)를 삽입하였다" 라는 표현을 썼고, 이어서 같은 잡지(1933.10.)에 내놓은 〈거울〉이라는 시는 자아가 '거울 밖의 나' 와 '거울 속의 나' 로 분열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그려낸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1. 25.
5 回 · 이상과 김유정, 폐결핵으로 무너진 '운명 공동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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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우한 두 천재, 그들은 서로 거울이었다가난 · 병마 속에 신음하던 나날이상은 "함께 죽자" 했지만…유정은 앙상한 가슴 내밀며"아직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
1931년 이상(李箱)은 한 공사 현장에서 처음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 이후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그는 1933년 3월 조선총독부 건축기수(技手) 직을 사직하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 여행을 떠났다. 소설 〈봉별기(逢別記)〉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스물세살이오―3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 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폐결핵은 가난과 과로를 달고 사는 예술가들의 질병이다. 예술가들이 삶의 추잡함을 정화하고 날마다 소멸하는 비루한 이승의 삶에 불을 밝히는 영혼의 질병으로 받아들이는 폐결핵을 두고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죽음과 삶이 기이할 정도로 뒤섞여 있는 나머지, 죽음이 삶의 홍조와 빛깔을 취하고, 삶이 기분 나쁘고 소름 끼치는 죽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질병" 이라고 썼다.
1935년 1월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이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기(後期)구인회(九人會) 멤버로 들어왔고, 이미 구인회 멤버였던 이상과도 친교가 이루어졌다.
| | ▲ 단편〈소낙비〉로 1935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을 당시의 김유정. | | | | 이상은 김유정에 대해 '운명 공동체'라는 연대감을 느꼈다. 그것은 유정이 어린 시절에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듯 자신도 생부모를 떠나 백부에게 입양되며 '정신적 고아'가 된 것, 자신이 가난의 신고(辛苦) 속에서 허덕이듯 유정 역시 토호(土豪)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이 가산을 탕진한 탓에 가난 속에서 신음한 것,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 등의 공통점에서 비롯됐다.
이 무렵 김유정의 폐결핵은 연속되는 과음과 철야 집필로 깊어진 상태였다. 1936년 7월 그는 서울 정릉(貞陵) 근처의 산중 암자로 요양을 갔다. 암자에서 술과 담배를 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오한과 열이 내리고 기침도 줄었다. 이처럼 그의 병세는 한때 호전되기도 했지만 8월 하순경 급격하게 다시 나빠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조카 영수와 매형 유세준 등이 정릉 암자로 달려와 유정을 업고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김유정이 푸른 포장을 방안에 치고 촛불을 켠 채 글을 쓰고 있는데, 이상이 찾아왔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불우함을 공유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갔다.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다면…" 하고 이상은 귓속말로 동반자살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情死)' 제의를, 유정은 "이것 좀 보십시오" 하고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명일(明日)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 라며 끝내 거절했다. 이상은 그 앙상한 가슴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걸 반복하며 거친 호흡을 하는 유정을 서글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김형! 나는 일본으로 떠나오" 라고 이상이 작별인사를 하자, 유정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울었다.
1937년 2월에 김유정은 거처를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상곡리에 있는 매부 유세준의 집으로 옮겼다. 문단에서는 병고(病苦) 작가 구조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유정은 세상을 뜨기 열하루 전에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유정은 병마와 최후 담판의 시각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유정은 안회남에게 탐정소설을 번역해서 보낼 테니, 극력 주선하여 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 돈으로 "닭 삼십 마리를 고아 먹고, 땅꾼을 사서 살모사와 구렁이를 십여 마리 달여 먹겠다" 고 했다. 그러나 유정은 답장을 받기도 전인 3월 29일 새벽 세상을 떴다. 그리고 20일 뒤인 4월 17일, 이상 역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불우한 두 천재 작가들은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운명을 달리했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2. 04.
6 回 · 변동림과의 짧은 결혼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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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트 넘치던 그가 그녀 앞에선…말없이 각설탕만 만지작만지작 |
| | ▲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수 화 김환기 화백과 재혼하고 이름도 김향안으로 바꾼 뒤 수화를 정성스럽게 뒷바라지했다. 사진은 1960 년대 초의 김향안 여사. | | | | 모더니티(modernity)의 본질은 새로운 것, 영원한 것, 덧없음에 대한 추구이다. 그 새로움은 낡은 것과의 단절에서 당위를 얻고, 그 영원함은 찰나의 소멸 속에서 빛을 얻고, 그 덧없음은 사라짐으로써 존재의 견고성을 이끌어낸다. 모더니티가 자주 자신을 드러내는 가시적 표층(表層)은 패션(fashion · 유행)이다.
1930년대 '모던' 경성이 보여준 최고 패션은 '자유연애' 였다. 자유연애의 대유행을 빼놓고는 이 시기 경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때 자유연애의 이념은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진실한 사랑이었다.
1916년 경성에서 태어나고,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 신여성 변동림(卞東琳) 역시 자유연애론자 중의 하나였다. 변동림은 이상이 단골이었던 커피 다방 낙랑파라에서 자주 마주쳐 알던 당대의 지식인 변동욱(卞東昱)의 동생이자, 이상의 절친한 친구 화가 구본웅의 서모(庶母)와는 이복지간이었다.
이상이 변동림을 '낙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이 벌게지면서 각설탕만 만지작거려 다방 아가씨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이상은 좌중을 압도할 만큼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변동림을 만난 자리에서는 변변히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상은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럼에도 변동림이 "당당한 시민이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자, 이상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랐습니다" 라는 이상의 훗날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금홍과 헤어진 뒤 의식이 황폐해진 이상이 일종의 도피로써 변동림을 선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 번?" "한번" "정말?" "꼭" 이래도 안 되겠다고 간발을 놓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고문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윤 이외에?" "하나" "예이!" "정말 하나예요" "말 마라" "둘" "잘 헌다" "셋" "잘 헌다, 잘 헌다, 잘 헌다" "넷" "잘 헌다, 잘 헌다, 잘 헌다" "다섯" 속았다. 속아 넘어갔다.〉(소설 〈실화(失花)〉의 한 대목)
이상이 변동림의 남자관계를 캐는 장면이다. 이상은 〈단발〉 〈실화〉 〈동해(童骸)〉 〈종생기(終生記)〉 등에서 변동림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상은 아내가 간음한 경우라면, 특히 자신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를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앞선 동거녀 금홍의 방종한 남자관계에는 그토록 관대했던 이상이 변동림의 정조(貞操) 관념에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상은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 라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 서둘러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黃金町)의 허름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셋방에서 이상은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폐결핵은 깊어졌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갔다.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상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파경(破鏡)을 맞았다. 불과 넉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몇 달 뒤 날아온 것은 이상이 동경 제국 부속병원에 입원했는데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신여성 변동림은 1930년대에 돌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이상을 배우자로 선택함 으로써 남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추구했지만 그 꿈은 실패했다. 그는 1944년 5월 화가 김환기(1913~1974)와 재혼하고, 프랑스 유학을 거쳐 1964년 이후 뉴욕에 정착해 뉴요커로서의 삶을 살았다. '변동림' 에서 '김향안(金鄕岸)' 으로 개명함으로써 낡은 봉건 도덕과 낙후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것에서 벗어나 첨단의 삶을 향한 주체적 의지를 드러냈다. 김향안은 1974년 김환기가 죽은 뒤 그의 그림과 유품들을 정리해서 1992년에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했고, 2004년 2월 29일 뉴욕에서 세상을 떴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2. 09.
7 回 · '경성의 만보객(漫步客)' 박태원과의 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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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서로 겨 묻은 개요, 똥 묻은 개였다"퇴폐와 우울까지 함께한 그들…이상이 금홍에게 맞았을 때도몸을 피한 건 구보의 집이었다 |
| | ▲ 1930년대 경성의 대표적‘모던 뽀이’의 하나였던 박태원은 독특한 헤어스타일로도 유명했다. | | | | 이상을 동갑내기 소설가 박태원(1910~ 1986)에게 처음 소개한 사람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이자 소설가였던 이태준이었다. 신문사를 찾은 박태원과 함께 밖으로 나온 이태준은 화신상회 서관 쪽으로 걸어가며, '김해경'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박 선생, 김해경이라는 이름 들어봤소? 경성고공(高工) 건축과를 졸업한 사람인데, 총독부에서 기수(技手)로 한 3년 일하다 폐병 때문에 그만두고 애인하고 다방을 차리고 글을 쓴다네. 그의 시는 작금의 조선 문단에서 볼 수 있는 시와는 아주 다른 쉬르레알리슴이라네. 곧 두각을 나타낼 사람이라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조선광업소 건물 1층의 '제비' 다방이었다. 마침 다방 마담이나 주인은 어디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심부름하는 아이만 있었다. 외관의 세련된 치장에 비해 다방 내부는 흰색 페인트칠이 대충 되어 있고, 탁자와 의자가 턱없이 낮아 선뜻 앉기가 망설여질 지경이었다. 벽면에는 큰 벽화와 주인이 그렸다는 10호 안팎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얼마 후 주인이 돌아왔는데, 마르고 키가 크고 봉두난발에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무성한 사나이였다. 바로 이상이었다. 이 뒤로 박태원은 '제비'를 드나들며 이상과 급격히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태어난 해가 같고, 태어난 곳 역시 경성 사대문 안으로 동일했다. 두 사람 다 서울 토박이라는 점은 이들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구인회 멤버 중에서도 유독 가까운 사이였다. 이상과 박태원은 시간 날 때마다 다방 '낙랑파라'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골수 단골들이다. 두 사람이 혼마치(충무로)와 황금정(을지로)을 나란히 걸어가는 걸 사람들이 목격하는 일이 빈번했다.
부친이 약국을 경영하던 중인 집안에 태어난 박태원은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뒤 동경 호세이대학 예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33년 조용만의 추천으로 구인회에 들어간 뒤 이상·이태준·정지용·김기림·조용만·이효석 등과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펼쳤다. 박태원은 독서광이자 능숙한 영어 해독자로 서양과 일본의 현대작가 작품을 폭넓게 섭렵했다. 영미(英美)의 모더니즘 세례를 듬뿍 받은 박태원은 단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나 장편 《천변풍경》(川邊風景)(1936)에서 여급·부랑자·도시빈민·룸펜 예술가 같은 밑바닥 계층을 중심으로 당대의 세태풍속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박태원의 문체를 '경알이'(혹은 경아리, '서울 방언'이란 뜻) 문체라고 하는데, 서울 방언으로 쓰인 소설들은 그의 문학적 고현학(考現學)의 실현물이다. 특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1930년대 식민지 수도 경성의 골상학(骨相學)을 완성해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박태원은 동리에 전당(典當) 나온 십팔금 팔뚝시계를 탐내는 자신의 욕망과 함께, 조선 국토의 칠할을 광구(鑛區)로 만들고 '이 시대의 무직자들은 거의 다 금광 뿌로커'로 변신한 금광 광풍(狂風)에 휩싸여 금을 좇는 세태와 '벰베르구 실로 짠 보이루 치마'를 갈망하는 소녀들의 욕망을 버무려 그려냈다.
박태원과 이상은 연인처럼 늘 붙어다녔고, 이상이 동거녀 금홍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할 때마다 몸을 피했던 곳 역시 박태원의 다동 집이었다. 두 사람은 문학의 동반자였을 뿐 아니라 퇴폐와 방종, 우울과 슬픔까지 함께했다. 그래서 박태원은 "이상과 나는, 당시에 있어 서로 겨 묻은 개였고, 동시에 서로 똥 묻은 개였다"라고 썼다.
박태원은 〈애욕〉 〈제비〉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에서 이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는데, 이상에 대해 "마르고 키 큰 몸에 어지러운 머리터럭과 면모(面毛)를 게을리 한 얼굴에 잡초와 같이 무성한 수염이며, 심심하면 손을 들어 맹렬한 형세로 코털을 뽑는 버릇에 이르기까지, 〈애욕〉 속의 하웅은 현실의 이상을 그대로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라고 썼다. 실제로 하웅이란 이름은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연재할 때 이상이 삽화를 그리며 썼던 화명(畵名)이었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2. 16.
8 回 · '조선의 로트렉' 구본웅과 동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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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를 했어도 대성했을… 어쨌든, 이상은 천재였어"초상화와 詩 속에 서로를 새기고파산에 신음할 때도 손내민 우정 |
| | ▲ 벌거벗은 가슴을 두드러지게 강조한〈여인〉(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구본웅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 | | | 이상을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이다. 이상은 여덟 살 되던 해에 서울 누상동에 있는 소학교인 신명학교(新明學校)에 들어갔는데, 이상보다 네 살 연상인 구본웅도 같은 해에 입학했다. 세 살 때 마루에서 떨어져 불구가 되어 몸이 쇠약했기 때문에 입학이 늦어졌던 것이다.
구본웅은 경신고보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의 세계에 입문했다. 구본웅이 경신고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상도 바로 이웃한 보성고보에 다니며 그림에 빠져들었다. 구본웅은 토요일에는 서양화로 일가를 이룬 고희동(高羲東)이 이끄는 YMCA의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그림을 배웠는데, 그때 함께 그림을 그렸던 사람에 장발(張勃) 이제창(李濟昶) 안석주(安碩柱) 등이 있다. 그는 1925년부터는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밑에서 사사하며 회화와 함께 조각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7년 5월 열린 제6회 조선미전(朝鮮美展)에서 〈얼굴 습작〉이란 조소로 특선에 올라 화단의 주목을 받은 구본웅은 이듬해 도쿄로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다음 해 봄 일본대학 예술전문부로 옮겨 졸업했다.
1920년대 일본 화단은 후기인상파의 유습을 청산하며 마티스와 루오로 대표되는 야수파 운동이 크게 유행했다. 구본웅 역시 이런 일본 화단의 영향 아래에서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강렬한 원색을 쓰며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야수파적인 흔적은 이상이 개업했던 '제비' 다방의 한쪽 벽면에 걸린 구본웅의 나부(裸婦) 그림에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는 1931년 동아일보 초청으로 〈양화가 (洋畵家) 구본웅 개인미술전람회(個人美術展覽會)〉를 열었다. 신문에는 구본웅을 두고 "수년 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조각을 출품하여 특선된 일이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제전(帝展), 이과전(二科展), 독립전(獨立展), 태평양전(太平洋展) 등에 출품하는 대로 다 입선이 되어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로 소개했다. 50점의 작품을 내놓은 이 개인전은 큰 성공을 거두고, 이때부터 구본웅에게는 '조선의 로트렉'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상과 구본웅의 우정은 각별했다. 1933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이상은 총독부 기수직을 사임하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휴양을 떠났는데, 이때 동행한 사람이 구본웅이었다. 구본웅은 1935년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이상을 모델로 〈우인(友人)의 초상〉 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이상이 경영난으로 '제비'의 문을 닫은 뒤 새로 인수한 인사동의 카페 '쓰루' 경영에도 실패하는 등 연이은 사업 실패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 구본웅은 아버지 구자혁이 경영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창문사(彰文社)에 친구의 일자리를 만들어 밥벌이를 하도록 도왔다. 1936년 10월 이상이 그토록 갈망했던 도쿄(東京)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구본웅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비' 다방이 파산하고 집달리가 기물들을 거리에 내놓고 건물의 출입구를 봉쇄 하기 직전,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입선한 이상의 십 호짜리 '자화상'을 떼어내 자기 화실로 옮겨 보관한 이도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소설 〈봉별기〉에 나오는 K군이 바로 구본웅이고, 일본어로 쓰인 시 〈且8氏의 出發〉도 구본웅에게 바쳐진 작품이다. 그동안 해석이 분분했던 '且8氏'가 '具(구)'자를 파자(破字)한 것이고, 이 시에 언급된 '곤봉' 은 남성 성기를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유화를 그릴 때 쓰는 붓의 환유임을 국문학자 권영민은 밝혀냈다. 이 해석에 따르면 〈且8氏의出發〉은 '성적 표상의 새타이어' 가 아니라 육체의 불구라는 장애를 딛고 '산호나무'와 같이 조선의 화가로 우뚝 일어선 구본웅의 빛나는 성공을 기린 작품이다.
화가 이승만의 증언에 따르면 구본웅은 이상이 그림을 그렸더라면 화가로 대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어쨌든, 이상은 천재였어"라고 자주 이상의 천재성을 안타까워하며 먼저 세상을 뜬 친구를 그리워하곤 했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2. 23.
9 · 끝 回 · 동경에서 길을 잃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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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상(李箱). | | | | 경성 시내에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길게 울려 퍼지자 이상(李箱)은 걸음을 멈추고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는' 거리에서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그러나 이상은 날개를 퍼덕거리기도 전에 '몇 편의 소설과 몇 줄의 시를 써서 쇠망해가는 심신 위에 치욕을 배가' 하고 추락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시점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의 파시즘 속에서 근대를 겪은 이상의 시에는 근대의 표상물인 백화점과 키치적 환상이 차고 넘쳤다. 그의 전위적 실험주의 문학에 내장된 도약의 동기는 '근대 넘어서기' 였지만 이상 자신은 그 문턱에서 넘어졌다. 이상은 선조(先祖)와 문벌(門閥), 전통과 인습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破片)'의 운명을 제 몫으로 수락했다. 수학과 건축의 기호들, 말장난과 숫자들로 조합된 시들을 써서 근대를 희롱하던 천재 시인은 마침내 근대의 바다에서 난파당한 채 근대의 이단아로 떠돌다가 돌아갔다.
1936년 10월 이상이 폐결핵이 깊어진 몸으로 감행한 도쿄(東京)행도 근대의 첨단과 세계 정신의 중심지를 몸으로 겪어보고자 함이었다. 경성에는 더 이상 새로운 문학으로 비상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고 판단한 이상은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를 찾아 도쿄로 건너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긴자(銀座)의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화려한 거리와 신주쿠(新宿)의 소란함은 낡고 진부한 식민지 수도 경성과 다를 바 없이 서양을 흉내냈을 뿐인 '모조(模造)된 현대(現代)' 였다.
이상은 깊이 절망했고 환멸을 느꼈다. 이상은 도쿄 체류의 많은 날을 간다(神田) 진보초(神保町) 3정목(丁目) 10―1―4 이시카와(石川)의 하숙집에 칩거하며 소설과 수필을 써 나갔다. 단편 〈동해(童骸)〉 〈종생기(終生記)〉 〈환시기(幻視記)〉 〈실화(失花)〉 〈단발(斷髮)〉 등과 수필 〈19세기식〉 〈권태〉 〈슬픈 이야기〉 〈실낙원〉 〈최저낙원〉 등이 이 시기에 쓰였고, 대개는 유작(遺作)으로 발표됐다.
이상은 간간이 김소운(金素雲)이나 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들인 이시우 · 정현웅 · 조풍연 등과 어울렸다. 답답할 때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1937년 1월 21일부터 27일까지 히비야공원 공회당에서 바이올리니스트 미샤 엘만(1891~1967)이 방일(訪日)연주회를 가졌을 때 이상은 끽다점 낙랑파라에서 레코드로 들었던 이 유대계 러시아인의 연주회를 들으러 갔다. 아내 변동림은 이상에게 어서 돌아오라고 엽서를 보냈고, 이상도 3월이 되면 경성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2월 어느 날 이 식민지 청년은 하숙집과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거동 수상자라는 명목으로 연행됐으며, 바로 사상 불온자라는 혐의로 도쿄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수감됐다. 경찰서에서 한 달여가량 조사받던 이상은 폐결핵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도쿄제국대학부속병원으로 이송됐다.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이상은 26년7개월의 삶을 이국의 한 병원에서 끝냈다. '사과한알이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정도로아팠다. 최후. 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아니한다.' (시 〈최후〉) 지구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의 작용으로 사과 한 알이 떨어지듯 시인의 '최후' 는 그렇게 덧없이 다가왔다. 천재 시인도 이 종말의 세기, 단절의 세기, 파국의 세기에서 오는 인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상이 죽기 하루 전 부친 김연창과 조모가 사망했다. 이상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현해탄을 건너온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서울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조선문단은 이 천재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특히 김기림과 박태원 등이 이상의 때이른 죽음에 비통해 했다.
이상의 운명은 병사(病死)였고, 그 삶의 형식은 위악과 파란 그리고 요절이었다. 실은 시대가 공모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 억울한 죽음이었다. 아니, '자연인 김해경' 은 절망이라는 흉기를 써서 '천재 시인 이상' 을 암살한 것이다. 이상의 시는 여전히 비학(秘學)이나 비교(秘敎)의 경전보다 난해하다. 그 난해성은 현전(現前)을 새롭게 해석하고 당대의 낡은 문법을 넘어서서 상상하려는 자의 불가피성에 의해 정당화됐다. 이상이 남긴 작품의 총량보다 더 많은 주석(註釋)과 논의와 해석이 뒤따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을 전위(前衛)에서 이끌던 '모던 뽀이' 이상 신화(神話)는 그가 태어난 지 백년이 되는 기점에서 다시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 了 -
※ 작가 장석주의 한마디 : 사과를 두 개 가진 사람이 행복할까요, 사과를 한 개 가진 사람이 행복할까요? 물론 한 개가 되었든 두 개가 되었든 그걸 깨물어 먹으며 사과를 먹는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겠죠. 행복은 조건의 문제이기보다는 향유의 문제죠. 행복을 향유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 [조선일보 인터넷신문] … 시인 · 문학평론가 장석주 2010. 0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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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에 관한 오해. 진실 밝히다
…평론가 장석주가 쓴 ‘이상과 모던 뽀이들’
모던 보이 이상(李箱·1910년 8월 20일 ~ 1937년 4월 17일)은 한국의 근대 작가이다.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지상에서 딱 26년 8개월을 살다간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이상은 소설 ‘날개’ 의 첫 문장에 이렇게 적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친구인 척추 장애인 화가 구본웅이 1935년 3월 그린 ‘우인의 초상’ 이란 그림에 상아파이프를 문 채 봉두난발의 머리와 텁수룩한 구레나룻을 기른 퇴폐와 패륜의 표상으로 새겨져 있다. 파이프는 이상의 것이 아니라 구본웅의 것이었다. 이상은 가끔 담배를 피웠으나 평상시에는 거의 흡연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비흡연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 구본웅의 그림과 더불어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라는 ‘날개’ 의 한 구절을 통해 그는 헤비 스모커로 인식되었다. 잘못된 인식은 모독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1930년대 '모던' 보다 얼마나 더 '모던' 해졌을까
이상異常한 인간 이상李箱이 그리 좇았던 이상理想을 아오? 마치 오늘 같은 1930년대 지식인들과의 생생한 산보!
탄생 100주년이 지나도록 늘 새로운 이상에 대한 비평적 도전 결정판 이상과 그의 벗들, 우리 근대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유쾌한 탐문 우리 시대의 ‘모던뽀이’ 장석주의 전방위적 사유의 글쓰기 성취!
“나의 종생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는 끝나지 않는다” 는 이상의 유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상 이후 우리 현대문학은 그 증보판 쓰기에 급급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시인은 그 어떤 인물보다 긴 신드롬을 형성하며 2011년에도 매일 젊어지고 날마다 진화하고 있다. 우리 시대 대표적인 탐서가이자 제너럴리스트, 느림과 비움의 철학과 글쓰기로 다양성의 시대에 ‘마이너리티’의 롤모델이 되고 있는 장석주가 문학 · 역사 · 사회학 · 심리학 · 철학을 넘나드는 근대 사유를 종합하여 인간론이자 작가론이며 문화사이자 비평 에세이인 전혀 새로운 ‘이상과 그의 시대’ 평전을 내놓았다. 모던의 적자로서 ‘댄디’ 작가-지식인들의 산책과 전차 · 백화점 · 카페가 뒤섞인 근대 공간 경성을 생생히 복원하며 19세기와 20세기 사이의 디아스포라 였던 이상과 모던뽀이들의 삶과 문학이 20세기와 21세기에 끼인 오늘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함께 살핀다.
이상異常한 사람, 이상李箱은 최고의 천재이자 최악의 불운아?
한국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소설가-화가-건축가라는 멀티플레이어로 각광을 받은 이상은 사후 74년이 지난 오늘도 연극과 소설, 다큐와 영화 등 각종 콘텐츠의 원형으로, 확장되는 비평 텍스트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 건축과 의학 전문용어의 남용, 주문과 같은 해독 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내면, 악질적인 문법 해체 등 시대를 크게 앞지른 그의 모더니즘 문학과 상궤를 벗어난 기행들은 지금까지 주로 텍스트와 개별자로서의 천재성으로만 부각되어 알려져 왔다. 그런 이유로 이상에 대한 평가 역시 ‘식민지 시절의 폐병쟁이 퇴폐 예술가’와 ‘도저한 실험의식으로 우리 근대 문학을 현대 예술로 견인한 천재 예술가’라는 극단을 오갔다. 한국에서 이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누구도 그의 실체를 정말로 안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56 · 위 오른쪽 사진)의 ‘이상과 모던 뽀이들’ (현암사)은 이상에게 씌워진 이러한 모독을 벗겨내고 19세기에서 20세기로 힘껏 탈주하려 했던 그의 맨 얼굴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장석주는 이상에 관한 지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적 서술을 시도한다.
1935년 가을의 어느 날 해질 무렵, 스무 살의 문학청년 서정주와 몇 명의 청년 들이 이상의 집에 들이닥친다. 서정주와 함형수, 오장환, 이성범 등 네 명이다. 이상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뒷골목에 변동림과 막 신혼살림을 차린 뒤였다. “그들은 무릎을 맞대고 두세 시간 정도 문학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었다. 이상은 별다른 말없이 ‘네에, 네, 네…’하거나 ‘준데, 괜찮아, 준데 괜찮아, 준데 괜찮아…’ 라며 동생뻘인 청년들을 상대했다. 서정주의 귀에 ‘준데’ 라는 발음이 특이하게 들렸다. ‘좋은데’ 라는 말을 이상은 그렇게 독특하게 발음했다.”(57쪽)
“산보나 나갑시다” 라며 이들을 끌고 나가 새벽까지 술추렴을 하던 이상의 기이한 행동은 다시 서정주에게 목격된다. 소공동의 한 선술집에 들렀을 때 이상은 느닷없이 서른댓쯤 되어 보이는 주모의 검정 스웨터 앞가슴에 달린 단추를 누르기 시작한다. 그 행동을 두고 미당은 “이런 SOS의 초인종의 진땀나는 누름, 거기 뚫어지는 한정 없이 휑한 구멍”이라고 회고한 바 있는데 저자는 “서정주가 SOS의 누름이라고 했던 이 행위는 탈아에의 무의식적인 갈망을 드러낸다” 면서 “이 탈주의 현실적 행위로 선택된 것이 동경행” 이라고 쓰고 있다.
어릴 때 백부에게 입양된 후 21살 때 본가로 돌아온 이상에게 아버지는 둘이었지만 사실은 그에게 아버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상에겐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심리적 고아라는 정체성에 고정될 수밖에 없고, 불가피하게 입양아적 분열증세 상태에 놓인다. 정신을 좀 먹는 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진짜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61쪽)
진짜 아버지를 찾아 동경행을 감행한 이상은 거기서 무국적자로 떠돌다가 체포되어 일본 경찰서에 구금되고 결국 폐결핵의 급격한 악화로 죽음을 맞는다.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후 혼자 남겨진 신여성 변동림도 화려한 남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변동림의 오빠인 변동욱이 소공동에서 운영하던 카페 낙랑파라를 소설가 박태원 등과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상은 당시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 하고 수필가로 막 등단한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은 변동림의 문학에 대한 이해, 교양주의, 이화여전 출신이라는 아우라에 끌렸다. 36년 6월 친구들도 부르지 않고 둘 만의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그러나 10개월도 안돼 파탄을 맞는다. 37년 4월 변동림은 이상의 위독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도쿄로 건너가지만 이상은 아내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사인은 결핵성 매독이었다. 변동림은 1930년대의 걸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 이상과 함께 남다르게 살고 싶었으나 그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동경에 있던 김소운이 전보를 받고 동경제국대학부속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화가 길진섭은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뜨고 있었다. 영안실에는 변동림과 예닐곱 명이 둘러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굳은 석고를 떼어내자 수염 몇 가닥이 뽑혀 나왔다. 이상의 시신은 화장터로 운구되었고 유골함을 안고 경성으로 돌아온 변동림은 며칠 뒤 미아리 공동묘지에 유골을 안장시킨 뒤 비목에 묘주 변동림이라고 명기하는 것으로 이상과의 인연을 끝맺는다. 변동림의 애도 속에 모던 보이 이상의 짧은 인생은 막을 내렸지만 변동림은 44년 5월 화가 김환기와 재혼 직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개명한 뒤 프랑스 유학을 거쳐 64년 뉴욕에 정착한다. 변동림의 근대 실험은 이상 사후 67년째인 2004년 2월 그가 뉴욕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자 장석주는 “이상과 모던 보이들이 겪은 악몽과 끔찍한 불행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이 책이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탐구와 보고서가 되기 바란다” 고 말했다.
- 조선일보 정철훈 선임기자 2011.07.01
생애 : 1910년 서울에서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 (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BOITEUX·BOITEUSE〉, 〈파편의 경치〉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3년 3월 객혈로 총독부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가 기생 금홍(본명 연심)을 만나게 되어, 후에 서울로 올라와 금홍과 함께 다방 '제비'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5년에는 다방과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연인 금홍과도 결별하였으며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낸 뒤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으며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 6월 변동림과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옮겨가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를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 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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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絶對의 愛情’ 을 찾아 헤맨 李箱 · 朴鳳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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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도무지 어느 나라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여기는 폐허다. 피라미드와 같은 코가 있다. 그 구멍으로는 ‘悠久’한 것이 드나들고 있다. 공기는 퇴색되지 않는다. 그것은 선조가 혹은 前身이 호흡하던 바로 그곳이다. 瞳孔에는 蒼空이 凝固하여 있으나 太古의 影像의 略圖이다. 여기는 아무 기억도 유연되어있지 않다. 문자가 닳아 없어진 石碑처럼 文明의 ‘雜踏한 것’ 이 귀를 그냥 지나갈 뿐이다. 누구는 이것이 ‘데드 마스크(死面)’라고 그랬다. 또 누구는 ‘데드 마스크’ 는 도적 맞았다고도 그랬다. 주검은 서리와 같이 내려있다. 풀이 말라버리 듯이 수염은 자라지 않은 채 거칠어갈 뿐이다. 그리고 天氣모양에 따라서 입은 커다란 소리로 외우친다- 水流처럼. ”
이것은 李箱의 ‘自畵像’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노래하든 李箱도 어쩔 수 없이 지금은 무덤에 누워있고 李箱과 같이 친했던 몇몇 벗들은 오늘도 저물어 가는 명동의 酒店에서 술을 나누며 이따금 당신을 추억하고 또한 당신을 두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많은 미련과 향수를 남기고 젊은 나이로 황혼을 장식했습니다. 결코 불안하지 않는 조용한 餘裕같은 것을 남기면서...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神話와도 같은 무한한 화제를 담고... 그만 가셨습니다.
箱! 오늘 밤은 당신을 이야기할 밤입니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멀리서 귀뚜라미 울음이 들려올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당신은 젊은 청춘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하였을지라도 당신의 지나치게 ‘데카단’적인 생활과 문학은 많은 이들의 심중에 귀중하게 간직되고 또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箱! 그러면 당신의 이야기로 고달픈 하룻밤을 잊어버릴 렵니다. 혹시 당신에 대한 어긋난 일이 있더라도 당신은 그것마저 倦怠로운 이야기라고 외면해버릴 것입니다. 별조차가이렇게 싱거운 당신의 밤입니다.
<말없이 그림을 그리는 소년> 李箱시인은 1910년에 서울 通仁洞에서 아버지 金演昌 씨, 어머니 朴世昌 씨의 장남으로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 너무나 유명한 李箱이가 아니라 金海卿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별로 말이 없이 자랐으며 노상 혼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자랐답니다. 어쩌면 그것이 구슬프게 보인 인상이었다고도합니다. 이것이 李箱을 短命하게 한 동기가 된 것인지 모릅니다. 李箱은 여덟 살 때에 서울 樓上洞에 있는 新明學校 1학년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퍽 손재주가 있었고 그림도 제법 잘 그렸다고 합니다. 李箱이가 普成高普 시절에는 油畵 ‘風景’을 출품하여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우등상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李箱은 이러한 것에 만족치 않고퍽 보기 드문 성격의 소유자로서 묵묵히 성장해왔다고 합니다. 李箱은 열 일곱에 普成高等普通學校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東崇洞에 있는 京城高等工業學校 建築科 제1학년에 입학했던 것입니다. 李箱은 누구보다도 희망이 컸던 것입니다. 그는 평범하지 않고 뛰어날려는 성격을 다분히 지녔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흡족하지 못하고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실망을 처절하게 갖게 되는 李箱이었습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습니다. 건축과에 다니면서도 많은 철학서적과 문학서적의 수풀 속에서 씨름했던 것입니다. 그 비상한 재주야 말로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합니다. 붉은 선지피를 흘리면서 책읽기에 밤을 보낸 李箱! 이렇게 해서 李箱은 일찍 죽게된 병을 얻었을 것입니다. 李箱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朝鮮總督府 內務局 建設課 技手로 근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技手도 詩作을 발표한다> 李箱은 스물 둘에 최초로 詩作을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稀有한 資質을 가진 천재가 그렇듯이 李箱은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그의 奇怪한 시가 朝鮮中央日報 學藝面에 연재되었을 때 신문사 내부에서는 말할 것 없고 외부 독자들로부터 비난이 자자해서 당시 학예면 책임자이던 분 [李泰俊=註]은 이런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揭載를 계속하느라고 사표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것은[이는 虛說=編者]너무나 유명했던 이야기입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오. (길은막다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略.....)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 事情은 없는 것이 차라리났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 시는 李箱의 ‘烏瞰圖’(抄) 詩 제1호입니다. 여기서 李箱의 세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건축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詩史의 遺物로 남기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鬼才李箱’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夢遊病者 李箱’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현대에 있어 과학적인 수수께끼 투성이 뿐인의문에 사는 모든 인간들에게 많은 흥미를 느끼게 하였으며 의문의 詩를 깨뜨려보려는 열쇠를 제작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의 詩나 소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될 때면 그의 독특한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허허, 그럴 테지....” 하고 槍대 검은 수염을 쓰다듬어 내리면서라기는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으니 이렇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하는 고독한 시인이었습니다. -<계속>-
2 ‘絶對의 愛情’ 을 찾아 헤맨 李箱 · 朴鳳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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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의 主人 李箱 > 李箱은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썼던 것입니다. 하여튼 어떤 의미에서든지 李箱은 우리 문단에 風雲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는 각혈로 인하여 건축과 기수를 스물 네 살에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黃海道 白川 溫泉으로 療養行을 떠났던 것입니다. 李箱의 몸은 극도로 허약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도 돌보지 않고 책과 더불어 살았던 것입니다. 얼굴은 날이 갈수록 핏기를 잃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양은 말뿐이지 李箱은 매일같이 지나친 무리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선 生에 대한 어떠한 애착도 없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몸도 돌보지 않고 술을 마셨던 것입니다.
李箱은 이 온천에서 처음으로 後日 다방 ‘제비’ 마담 ‘錦紅이’(假稱)를 알게 되었습니다. 李箱은 냉철한 애정을 금홍이에게 은근히 품었습니다. 李箱은 지나치게 무심한 듯한 사람의 對話에 취한 금홍이는 평생에 빗질을 해본 일이 없는 텁수룩한 머리와 洋人같이 창백한 얼굴에 숫한 수염이 槍대같이 뻗치었고 보헤미안 낵타이에 겨울에도 흰 구두를 신고 언듯 보아 활동사진 辯士같은 말투인 李箱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백천 온천의 사랑은 가을의 열매처럼 익어갔던 것입니다. 李箱은 몸도 생각지 않고 금홍이와 함께 서울에 돌아와서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했습니다. 李箱은 다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창백한 음악을 듣고 무엇을 골똘이 생각하는 것으로 終日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文友들도 알게 되어 ‘제비’에 모여들었습니다. 서로 문학과 인생의 우주를 논하고 해가 지면 주막에 가서 술을 취하도록 나누고 또한 문학적 논쟁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李箱도 ‘烏瞰圖’ 를 발표하여 難解詩로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람에, “미친놈의 잠꼬대야.” “무슨 개수작이냐?” “烏瞰圖라고 誤字를 내는 것부터가 알 수 없는 수작이 아니냐?” 여러 독자나 동료들로부터 수 없는 공격을 받아도 李箱은 아무렇지 않은 듯 너털웃음을 웃을 뿐이었습니다.
金海卿이란 本 이름을 남이 ‘이상’이라고 불렀다고 그대로 ‘李箱’ 이라고 고쳐버리는 정도로 생활태도에서 보듯이 그에게는 세상의 도덕이라든지 상식이라든지 예의라든지 가 모두 쑥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런 李箱에게 있어서 자기 작품을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도 흥미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웃는 것만이 이유를 아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李箱은 ‘제비’를 경영하면서 얼마 후에 금홍이와 동거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李箱에게 있어서는 결혼한다는 수속마저 못마땅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靑春은 彷徨한다> 李箱은 스물 다섯 살 때 ‘九人會’ 에 立會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會員은 鄭芝溶, 李泰俊, 李孝石, 金起林, 李無影, 趙容萬, 朴泰遠이었습니다.
李箱의 문학은 여기에서 고비를 지나가는 무렵이었습니다.
“歷史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 내어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좋아 나가보니 危險하기 짝이 없는 큰 길가더라. 그 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必是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줄을 알면서도 내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詩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李箱은 아무런 불안도 없으면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詩는 이상의 ‘이런 詩’ 란 것입니다. “내 한평생에 차마 그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줄을 알면서도 내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라.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이것은 李箱의 아주 평범한 祈禱이면서도 詩요 작문일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원히 한 구석에 정착하려고 잦은 몸부림을 했습니다. 그에 있어서 절대란 먼 彼岸의 것일지라도 찾고 싶은 욕망의 것이었습니다. 李箱은 여자를 이야기합니다. “안해는 駱駝를 닮아서 편지를 삼킨 채로 죽어가나 보다.” “마리아여 마리아여 皮膚는 새까만 마리아여” “저 여자의 下半은 저 남자의 上半에 恰似하다” “女子는 트렁크 속에 흙탕 투성이가 된 즈로오스와 함께 엎드려서 운다.” “안해는 아침이면 外出한다. 그 날에 該當한 男子를 속이려 가는 것이다. 順序야 바뀌어도 하로에 한 男子 以上은 待遇하지 않는다고 안해는 말한다.” 李箱의 소설과 끼의 일면을 조종하는 ‘女’라는 것, 여자에 관한 그의 정신비대는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以上에서 例한 바와 같이 毒舌스러운 發言은 ‘여성’ 이라는 점 즉 ‘안해’ 이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不身의 행위 즉 심리상의 挑戰이라할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스스로 방황하는 李箱은 절대적인 애정을 꿈꾸는 것입니다. 별의 이름으로서 있기를 渴望하는 것입니다.
<詩人의 사업은 실패로> 李箱은 경영난으로 ‘제비’ 를 폐업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돈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단 하나 즐거운 것은 다방에 종일 앉아서 여러 가지 풍경들을 재미나게 생각해보는 것이 보다 큰 위안거리였는지 모릅니다.
얼마 후 李箱은 仁寺洞에 있는 카페 ‘쓰루(鶴)’ 를 인수 경영했던 것입니다. 이것도 오래가지 못해 실패하고 다시 종로 1가에서 다방 ‘69’-식스 나인-을 설계 하여 개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에게 讓渡 당했던 것입니다. 李箱의 心身은 한없이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점차로 병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李箱은 彰文社[畵家 具本雄이 운영: 註]에서 九人會 同人誌 “詩와 小說”을 편집하여 1집을 내고 그만 彰文社를 나왔습니다.
黃金町으로 이사를 하여 姙(假稱= 卞東琳이 本名. 箱이 他界 후 樹話 金煥基의 婦人이 됨.개명 金鄕岸=註)과 동거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실패를 거듭한 李箱은 成川, 仁川 等地로 逍遙하면서 방랑 생활을 계속합니다.
箱은 스물 여섯 살 때 東京으로 탈출하였습니다. 당시 箱은 모든 것에서 倦怠를 느끼고 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銀座거리를 걸으면서 그는 膚榮讀本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곧 親友 金起林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K兄 期必코 東京왔소. 와보니 失望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려! 동경 오지 않겠소? 다만 李箱을 만나겠다는 理由만으로라도-(中略) 편지주기 바라오. 이곳에서 나는 貧窮하고 고독하오. 住所를 잊어서 주소를 알아 가지고 편지하느라고 이렇게 늦었소. 동경서 만났으면 작히 좋겠소? 兄에게는 健康도 富貴도 넘쳐있으니 편지 끝에 常套로 빌[祈]만한 말을 얼른 생각해내기가 어렵소 그려.” [箱의 편지는 모두 日本語로 씌어있습니다. 여기 소개 분은 意譯으로 푼 것입니다= 註] 李箱의 동경 생활은 이 편지 내용대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李箱은 1937년(2월 경) 思想 嫌疑를 입어 일본 경찰에 被檢을 당해 拘禁되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됨으로서 保釋되어 나와 얼마동안을 앓다가 東京帝大 부속병원에서 스물 일곱의 젊은 청춘으로 異國의 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있었다. -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잤구나. 한번 더 날아 보자구나.”
李箱의 정신은 너무나 高度로 旋回하였고 그의 心像은 너무나 높은 極階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李箱은 자기의 작품이 이해되어 確然하지 못한다고 當代의 俗衆들을 罵倒하거나 知己를 百代의 뒤에 救하겠다고 悲憤을 吐한 일이 없건만 이제 李箱이 간지 20년도 못 되어 우리의 젊은 하늘 아래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反對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診察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지금 우리들의 영원한 李箱은 故國의 햇볕 바른 땅 미아리 공동묘지에서 우리 現代詩에 대한 새로운 가락을 빌고 있을 것입니다. 스물 일곱에 진 꽃은 아무런 슬픔과 反抗도 없이 갔습니다. 永遠으로...
= <女苑> 49호. 195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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