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빨리 깨어나고 싶은 악몽같은 다섯 달이 지나고 있다.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 선생님이 "수학여행 가는 배가 침몰했데, 전원 구조됐데". 나에게 이 악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뒤이어 목도하게 된 온갖 부정과 부패, 거짓과 기만, 조작과 왜곡은 쓰지 않아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된 터. 많이 울었고, 간간히 웃었고, 분노했고, 탄식했던 시간들이 기억 저편에서 너울거린다.
노란 리본을 달았다. 노란 리본 머리핀을 꽂았다. 노란 팔찌도 선물 받았다. 그런데 달고, 꽂고, 끼고 나오는 것이 어느덧 내 기억에서 가벼워지고, 시간은 그렇게 백일로 흘렀다. 백일이 되기까지도 나는 아이들과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내 속에서 뒤엉켜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아니, 어쩌면 할 말이 너무 많은데 그 얘기를 차근차근 풀어놓을 자신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진실은 저 멀리있다.
노란 리본, 노란 머리핀도, 노란 팔찌도 집에 놓아두고 광화문 농성장에 갔다가 음악으로 세상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기타 하나 들고 나와서, 해금과 가야금으로 연주하며, 상처받은 마음, 둘 곳 없는 머리에 우산을 받쳐주는 그들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아이들과 세월호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얘들아, 세상에는 음악으로 아픈 이들을 위로해주는 사람들이 있단다" 추모영상을 보며 노래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란 종이에 편지를 쓰고, 종이배를 접었다. 차곡차곡 모은 칠십 여개의 종이배를 상자에 고이 담아 청운동에서 노숙 농성중이신 유가족 분들께 보냈을 때, 비로소 나는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추석날 팽목항 가는 길, 역사유적지임을 알려주는 갈색 표지판이 너무 많아서 아팠다. 팽목이라는 이정표가 그리 특별하지도 않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아팠다. 4.16 이전에도 팽목은 팽목으로 거기에 있었던 거다. 팽목마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어찌나 이쁜지, 이런 곳에서 다섯 달을 가슴 졸이며 있는 유가족들. 빛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가로수 노란리본은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삼삼오오 차례와 성묘를 마치고 팽목항을 찾는 이들이 있어 그냥 반갑고 고마웠다. 우린 모두 그저그런 일상인. 바다는 여전히 눈부시고, 노란 리본은 여전히 바람에 흐느끼고 있었다.
다시 광화문 농성장에서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리본 공작소를 본다. 끝도 없이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리본, 노란 리본은 노란 목걸이가 되고, 노란 현수막이 되고, 노란 테이블이 되고 있다. 9월 13일, 노란 테이블 앞에 둘러 앉아 우리는 처음으로 지난 다섯 달간 꾸었던 악몽을 함께 내려놓았다. 차근차근 자신의 감정을 나누고, 4.16 이전과 이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교육을 바꾸는 천 개의 행동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적었다. 나는 다시 아이들과 노란 종이배 편지가 전해진 과정을 나누고 세월호 그림책을 읽겠다고, 그리고 우리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노란 테이블을 열 것을 다짐했다.
꽃다운 아이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달았던 노란 리본은 우리에게 무엇이 될까, 그 아이들의 목숨값으로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까. 세월호 150여일. 나는 다시 노란 팔찌를 끼고 노란 리본을 묶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