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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상 단편소설
진화론, 그 믿음의 그늘
서쪽 하늘을 진흥으로 물들여 놓는 석양, 밤 하늘에 촘촘히 들어찬 별들, 숲속에 치솟은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눈덮인 산봉우리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 강풍에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 김형국 박사는 이러한 것들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머릿속에 그려보며 기쁜 마음과 경외감에 사로 잡혔다. 25층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창 밖을 내다보면서 김형국 박사는 부인이 갖다놓은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또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그마한 새인 ‘워블러’는 대서양 위를 높이 날면서 남아메리카로 가는 도중에 아프리카로 향했다. 6천미터 가량의 상공에서 그 새는 남아메리카로 가게 되는 우세풍을 잡아 탔다. 이주移住 본능의 인도를 받아 그 새는 며칠동안 자기의 길을 따라 약 3천8백킬로 미터 이상으로 날아갔다. 체중 20그램의 깃털로 싸인 용감한 새다. 참으로 김형국 박사의 마음속은 감탄과 경탄으로 가득 찼다. 김형국 박사는 대학에서 생물학을 강의하는 교수다. 정년을 두 달 남겨 놓은 요즘 그는 생물학의 진화론進化論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모든 생물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모든 생물이 진화되었다면 이럴 수가 없어...없구 말구....학문을 해도 똑바로 해야지 이건 처음부터 내가 잘못 배운거야....그리고 잘못 가르쳤구...’
김형국 박사는 마음속에서 중얼거리며 갖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머릿속을 휘감고 들어왔다. 박쥐는 음파탐지기를 사용한다. 뱀장어는 발전을 한다. 갈매기는 바닷물에 염분을 걸러낸다. ‘나나니벌’은 종이를 만든다. 흰개미들은 통풍장치를 설치한다. 문어는 제트분사장치를 사용하여 여행한다. 새들은 아파트처럼 집을 엮거나 짓는다. 개미들은 정원을 가꾸느라 바느질 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일을 한다. 개똥벌레에게는 회중전등이 내장되어 있다. 김형국 박사는 이러한 동물들의 재주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코 이런 것들이 진화에 의해 저절로 이뤄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진화론進化論을 믿고 그렇게 배우고 가르쳐 온 것이 물에 젖은 흙담처럼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우리를 매혹시키는 재주 있는 것들을 생각할 때 김형국 박사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과연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한 것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들로 머리는 복잡하게 꽉차 있다. 5년전이다. 아들이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가겠다고 하자 김형국 박사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면서 펄쩍 뛰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신학대학에 가겠다는 아들이 보기 싫어 내쫒 듯하여 아들은 결국 미국에 건너가 혼자 고학을 하다시피 신학대학에 들어갔고, 이제는 졸업을 하고 지금은 미국 파킨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은 물론 모든 동물과 식물은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던 아들의 말이 새삼 뇌리에 떠올랐다.
김형국 박사는 중.고교를 거쳐 대학에서도 모든 생물은 진화했다고 배웠다. 말하자면 <다원의 진화론>을 추종해 왔던 것이다.
그후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거치면서도 생물의 진화론進化論에 대해 조금도 의심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김형국 박사가 최근에 와서는 진화론進化論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날 김형국 박사는 어린 외손자 하고 동물원에 갔다가 울안에 갇힌 원숭이를 보았다. 그 원숭이를 보면서 문득 생각난 것은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했는데, 저 원숭이는 왜 인간으로 진화되지 못하고 원숭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동일한 어느 한 개체가 한 쪽은 진화하고 한 쪽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김형국 박사는 생각했다. 결국 모든 생물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창조론創造論 때문에 김형국 박사는 흥분되어 요즘 잠을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진화론進化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확증된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사전에 나오는 ‘사실’이라는 말의 정의대로 진화가 ‘실제로 발생한 일’ ‘현실’ ‘진리’라고 그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김형국 박사도 물론 그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는데 김형국 박사는 의문의 초점을 맞추었다. 한 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지구는 공처럼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게 확증되지 않았는가? 한 때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천체가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의 궤도를 따라 공전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것 또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한때 논쟁을 벌이던 학설에 불과 하던 많은 것들이 증거로 확고한 사실, 현실, 진리임이 확증되었다고 생각하자 김형국 박사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생물의 진화론進化論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이 마음속에서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현관문 밖에서 초인종이 울리자 김형국 박사의 부인이
“어서 오세요.”
하는 목소리와 동시에
“김교수님 계십니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박성규였다. 박성규는 대학 강사로서 생물학을 강의하고 있다. 연륜으로 따지면 김형국 박사보다 한참 후배였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보니 서로 알게 되었고, 그런 친분으로 김형국 박사가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 강사로 추천한 것이었다. 김형국 박사는 몸을 일으켜 박성규를 맞았다.
“어서 오게!”
“집에 계셨군요!”
두 사람은 베란다의 안락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일요일마다 두 사람은 가끔 이렇게 만나 환담을 나누곤 하였다.
“자네 크리스찬이라고 했지?”
“예.”
“예수를 믿은지 얼마나 되었는가?”
“아직 병아립니다.”
“어서 커서 어미 닭이 되어야지.”
“그래서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기독교 교인은 진화론을 안 믿지 않는가?”
갑자기 진화론이 나오자 박성규는 의아한 얼굴로 김형국 박사를 쳐다보았다.
“기독교 교인들은 창조론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모든 생물은 창조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순간 박성규는 앗불사 싶었다.
“아닙니다. 모든 생물은 진화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순이 아닌가. 자신은 창조론을 믿으면서 학생들에게는 진화론을 가르치다니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구만. ”
순간 박성규는 피식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야!”
“교수님! 사실은 그래서 제가 생물을 전공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생물교사가 될려고 사범대학에 간 것이 말입니다.”
“언제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그 꼴이 되었는가? ”
“제가 교인이 된 것은 3년전이었으니까 이미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난 후였습니다.”
“음. 그랬구만... ”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고 지금까지 배운 학문을 버릴 수도 없구요. 그래서 지금 고민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나도말일세. 지금까지 배운 진화론에 상당히 모순이 있다고 생각되네...학문이야 늘 모순을 등에 엎고 발전하고 있는 것이지만 새로운 학설이 불그져 나오면 옛날의 그 학설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학문이 아닌가. 하자만 학문은 그렇다치고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지 말해 보게나.”
“우리 사회에서 생물의 진화를 확증된 사실로 보는 것은 어딘가 왜곡된 감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생물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창조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창조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젭니다..”
김형국 박사의 부인이 커피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와서 내밀자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김형국 박사와 박성규는 커피 잔을 들자 김형국 박사의 부인은 안으로 사라졌고,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김형국 박사는 말했다.
“그 문제라면 이미 생물학자들 사이에 큰 논란이 되고 있네...”
“그렇습니까.”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생물학자들이 진화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들었네. 미국에서 발행하는 ‘사이언스 투데이’지 인터넷 판에서 보았는데 논쟁의 기사가 실렸더군.. 아직은 일부 생물학자들의 주장이긴 하지만 말일세.. ”
“그렇다면 교수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진화론 쪽이냐 창조론 쪽이냐 그 말인가?”
“그렇습니다.”
“글쎄 딱이 진화론이다 창조론이다 이분법으로 결론 짓기는 아직 이르지만 우리는 지난 날 모든 생물은 진화했다고 하는 진화론을 배웠고 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왔으니 당장 진화론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도 없지 않는가?”
“잘못된 학설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자네와 나 두 사람이 나서서 주장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세. 아직도 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학자들간에 많은 토론과 연구가 필요하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어느 학설을 신봉하든지 간에 한가지 종류의 생물이 다른 종류로 변하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가 적어도 약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치적 아닙니까?”
“그건 그러네.”
“그러나 화석 기록에서 발견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생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와 오늘날 지상에서 사는 서로 다른 유형의 생물들 사이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다아윈의 진화론을 뒤집을 만한 획기적인 학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학설을 주장하는 생물학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일세. 또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온 적자생존에 관한 다아윈의 개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보면 또 다른 점이 나타나지.. 다아윈은 이것을 자연선택 또는 자연도태라고 했지. 말하자면 적합한 생물이 생존하도록 자연이 선택했다고 믿는 것일세....."
그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적합한 것들이 자신들의 우위에 기여한 새로운 특징들을 획득함에 따라 서서히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아윈의 진화론 이후 지난 127년간의 증거가 보여 주듯이 실제로 적자가 생존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 생물이 어떻게 도태했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였다. 어느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보다 덜 적합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떻게 그 동물이 호랑이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모든 후손은 진화된 어떤 다른 동물이 아니라 여전히 호랑이일 것이라고 김형국 박사는 말했다.
진화론進化論을 주장하는 생물학자(김형국 박사)가 이런 주장을 피력한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라고 생각하면서 박성규는 말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 조상을 원숭이(類人猿)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동물원이나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원숭이는 왜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원숭이로 존재하고 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은 원숭이 같이 생긴 조상들로부터 생각해 보면 당치도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네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뭐라고 가르치는가?”
김형국 박사의 질문에 박성규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박성규는 자신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학에 나가 강의할 때는 인간은 원숭이처럼 생긴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성규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도 생물의 진화론進化論인 것이었다. 자신은 창조론創造論을 신봉하는 기독교 교인이면서 학생들에게는 진화론을 가르친다는 것이 박성규로서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진화론을 거부하고 성경책을 들고 학생들에게 창조론을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물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지금 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교수님! 인간의 조상은 과연 원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성규의 질문에 김형국 박사는 웃음이 나왔다. 아직은 무어라고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사실 김형국 박사도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였다고 하는 데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진화론에 따르면 동물들이 진화의 단계를 밟아 올라감에 따라 생존능력이 더 커졌다고 했다. 그런데 열등한 원숭이과科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진화론에서 보다 진보된 형태로 추정하는 가상적인 중간 형태들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김형국 박사는 그것이 궁금했다.
진화론進化論이 직면하고 있는 모순은 또 있다. 한가지 생물이 다른 생물로 진화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기본적인 기능은 세포 핵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모든 돌연변이가 진화론을 뒷받침 하는데 상당히 유익하다 하더라도 돌연변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은 없다는 것이 김형국 박사의 생각이었다. 다만 돌연변이는 이미 존재하는 특성을 변형시킬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이 다양성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결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는 것이 김형국 박사가 진화론進化論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돌연변이는 사람의 머리털 색상이나 결을 바꾸어 놓을 수는 있을거야. 하지만 머리털은 일년이 가도 머리털이고. 십년을 가도 머리털이지 그것이 깃털이나 꼬리털로 변하는 일은 결코 없네.”
김형국 박사의 말에 박성규는 가슴벅찬 감희를 느꼈다. 생물학 교수가 이만큼 진화론進化論을 부정하는 이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김형국 박사는 말했다.
“손가락이 여섯 개가 되거나 다른 어떤 기형이 되는 경우가 있지. 그러나 손가락이 다섯 개가 되던 여섯 개가 되던 손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네. 그것이 결코 진화는 아니지, 진화론자들은 돌연변이는 진화의 기초라고 주장하지, 그리고 진화의 원자재라고도 하지, 그러나 아무 돌연변이나 다 진화에 필요한 것은 아닐세.....”
김형국 박사는 진화론을 주장한 미국의 생물학 교수 ‘칼 세이컨’의 말이 문득 뇌리에 떠올랐다.
- 유전자 위에 돌연히 일어난 변화를 돌연변이라고 하는데 그와 같은 변이는 자손에게 계승되어 진화의 소재가 된다. 환경은 생존에 적절한 몇 개의 돌연변이 종(種)을 선택한다. 그 결과 그 생물의 형태가 서서히 변해가며 그것이 새로운 종(種)의 기원이 된다 -
그러나 ‘칼 세이컨’의 이 말에 김형국 박사로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돌연변이가 진화의 기초라면 돌연변이 중 유익한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1000번 중에 999번 이상은 해로운 결과를 가져온 과정이 유익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운전기사가 버스를 운전 할 때 한번 올바른 판단을 할 때마다 수천번 잘못된 판단을 할 경우 그런 운전기사의 버스에 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박성규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말했다.
“사실 저도 우발적 유전자 변화가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한 종류의 생물이 다른 종류로 변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유전자 돌연변이가 자연선택과 관련된 진화과정에서 원자재 운운하는 독단적인 단언은 신화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원숭이 같이 생긴 조상들을 거쳐 지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성경 창세기에서도 여호와 하느님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 교인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인간이든 동물이던 모든 생물은 진화가 아니라 독창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 데에는 찬성하네. 이 지구상에 아니 전우주에 나타나 있는 놀라운 설계 솜씨와 복잡성과 다양성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것들이 저절로 생겼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이러한 것들은 최고의 지성을 지닌 분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일세....자네에게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별이 총총한 밤 하늘을 보고 경탄해 왔네. 맑은 날 밤 하늘에 떠 있는 아름다운 별들은 캄캄한 우주를 배경으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면 참으로 탄성이 흘러 나온다네. 이런 아름다운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거나 진화되었다고 하는 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닐세.”
“그렇다면 교수님은 진화론에 의심을 하십니까?”
“의심이 아니라 한 마디로 노우(no)일세.”
박성규는 김형국 박사의 손목을 잡았다.
“교수님! 교회에 나오십시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교회에 나오시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김형국 박사는 말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네.”
“할 일이라니요?”
“진화론을 주장하는 생물학 교수라는 직업부터 바꾸어야 하네! 물론 자네도 마찬가질세.”
“그렇군요.”
“나야 정년퇴임이 두 달 밖에 남지 않아서 생물학 교수직을 그만 두어도 상관없지만 자네는 식솔들을 벌어 먹어야 하는데 당장 그만두면 어찌할 것인가?”
박성규는 말했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들도 하나님께서는 먹여 살리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딸을 굶겨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대학 강사직을 그만 둘 셈인가?”
“학생들에게 창조론을 가르치지 못할 바에야 그 방법 밖에 없질 않습니까. 창조론을 신봉하는 기독교인이 양심상 진화론을 가르칠 수도 없구요.”
“하긴 그렇구만....그렇다 하더라도 강사직을 그만 두면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만 두고 구해 봐야죠.”
“구해 놓고 그만두지 그래.”
“그랬으면 좋지만 그게 쉽지 않죠. 진화론을 강의한다는 것도 양심에 찔리구요.”
“하기야 요즘 양심에 찔러 병역을 거부하는 종교인도 있다고 하니 종교인으로서는 양심에 찔리는 일은 안 하는 것이 좋지....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진화론을 믿는 또 한가지 부가적 이유는 전통 종교들의 가르침과 행위에 있어서 거둔 실패와 성서의 창조 기록을 올바로 설명하지 못한 것일세.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을 배척하고 진화론을 믿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배우는 것 때문이지. 과학 교과서에서는 거의 언제나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보니 학생들이 반대 논증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지... 사실상 진화론을 반대하는 논증을 흔히 학교 교과서에 나오지 못하도록 제지를 받고 있는 일이었지. 그러다보니 학생들은 무턱대고 진화론을 배우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 말한 김형국 박사는
“사실 나도 요즘 성경을 좀 읽고 있네. 이제 나이 들어 죽을 때가 되어선지 자꾸만 마음이 그쪽으로 옮겨가는 기분일세.. 요즘 와서 내가 진화론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도 그렇고... ”
“교수님도 기독교를 믿으십시오..”
“막연하게 믿는 것보다 하나 하나 문제를 풀어가면서 접근하는 것이 좋을 듯 싶네.”
“좋은 말씀입니다. 성경은 모든 삶의 방법과 지혜가 녹아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문학작품이기도 하죠.”
“그건 나도 동감일세.... 내가 만일 기독교를 믿게 되면 자네가 다니는 교회에 나감세... ”
“제가 인도하겠습니다.”
“인도는 뭘... 스스로 내 발로 걸어서 갈텐데...”
“하하하...”
“하하.. ”
두 사람은 한바탕 웃었다. 김형국 박사는 더 이상 학생들에게 진화론進化論을 가르치고 싶지 않았지만 두 달 밖에 남지 않는 정년퇴직을 명예롭게 마무리 하기 위해 가능한 진화론에 대해서는 피해가면서 강의를 했다.
그런데 다음 날 김형국 박사의 대학연구실에 미국인 여자 선교사 한 사람 찾아왔다. 자신을 ‘바이론 존 메리’ 라고 소개한 미국인 여선교사는 한 시간 가량 자신과 대화할 시간을 내주기를 요청했다. 마침 그 날은 강의도 끝난터이라 김형국 박사는 OK 하였다. 연구실에서 김형국 박사와 마주 앉은 ‘바이론 존 메리’는 가방에서 두툼한 성경을 꺼내 펴 들고는 유창한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창세기의 창조 기록은 모든 생물이 종류대로 즉 기본 군(群)에 따라 창조되었다고 기술 합니다.”
하고는 창세기 1장 12절과 24절, 25절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김형국 박사의 코 밑에 내밀었다.
“여러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이 성서 기록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교배나 돌연변이로 인해서 신종이 생긴적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개는 아직도 여전히 개이며, 고양이는 여전이 고양이이며 돼지는 여전히 돼지입니다. 최초의 곤충 화석 가운데서 발견되는 바퀴벌레까지도 현대의 것과 사실상 동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주에 떠 있는 희귀하고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은 참으로 경이로운 행성입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외계에서 볼 때 지구의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야말로 지구를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가장 매혹적인 것이 되게 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구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 과학의 모든 수수께끼 중에서 아무리 이해 하려고 노력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는 지구입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과학자들은 태양계 내의 모든 행성 가운데서 오르지 지구에서만 생명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미생물, 곤충류, 식물, 물고기, 새, 동물 및 인간 등 생물들의 종류 또한 참으로 경탄스러울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구는 그 모든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 풍부히 들어 있는 창고이다. 지구는 우주의 경이驚異요, 독특한 구체球體이다. 과학자들이 다른 행성들도 탐색해 보았지만 생명은 전연 없다고 하였다. 지구만은 생물로 가득하여, 빛과 공기, 열, 물 및 식물 등 모든 것을 균형 잡히게 잘 공급해 주는 매우 복잡한 체계가 그 생물들을 계속 살게 해 주고 있다.
나타난 증거에 의하면 지구는 웅장한 저택처럼 생물들은 안락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건축되어 있다. 지구에 사는 생물에게 필수적인 여러가지 정교한 상태들 중에는 태양으로부터 받는 빛과 열의 양이 있다. 지구는 태양 에너지 가운데서 아주 적은 부분만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양은 모든 동식물들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데 필요한 최적정량이다. 이유는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인 평균 14억 9천 7백만 킬로미터가 최적 거리이기 때문이다.
“지구와 태양간의 거리가 훨씬 더 가깝거나 더 멀다면 온도가 너무 덥거나 너무 추워서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연히 저절로 되었다고 판단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주가 있단 말이군요.”
“바로 그것입니다. 좀더 말씀드리면 지구는 일 년에 한 번씩 태양의 주위 궤도를 따라 돌면서 시속 약 10만 7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운행합니다..”. 그 속도는 태양의 인력을 상쇄하고 지구가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최적정 속도이다. 그 속도가 떨어지면 지구는 태양을 향해 끌려갈 것이다. 그러면 지구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수성처럼 초토화된 황무지가 될 수 있다. 수성의 낮시간 온도는 섭씨 영상 310도 이상이나 된다. 그러나 지구의 궤도 비행 속도가 빨라지면 태양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나가서 태양에서 가장 먼 궤도를 돌고 있는 명왕성처럼 얼음 덮힌 불모지가 될 수 있다. 명왕성의 온도는 섭씨 영하 약 180도나 된다.
그뿐 아니라 지구는 스물 네 시간마다 그 축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완전하게 한 바뀌 회전을 한다. 이로 말미암아 빛과 어둠의 주기가 정기적으로 있게 된다. 그러나 가령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일 년에 한 번만 회전한다면 어떠할까? 그것은 지구의 한쪽 면만 내내 태양을 향하고 있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쪽 면은 아마도 용광로 같은 사막이 되는 한편 태양으로부터 반대쪽은 영하의 불모지가 될 것이다.
그러한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물은 없을 것이고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축을 중심으로 회전할 때 지구는 태양에 대하여 23. 5도 기울어져 있다. 지구가 기울어져 있지 않다면 계절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기후는 내내 똑 같을 것이다. 그 때문에 생물이 살 수는 있겠지만 생활은 별로 흥미롭지 못할 것이며, 여러 지방의 현행 작물 재배 주기는 엄청나게 바뀔 것이다.
만일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더 기울어져 있다면 여름 날씨는 극도로 뜨겁고 겨울 날씨는 극도로 추울 것이다. 그러나 23. 5도만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다양한 계절의 변화가 살맛나는 즐거움을 준다. 지구상의 여러 지방에서 싱그러운 봄철에는 식물이며 나무들이 소생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는가 하면 따뜻한 여름철에는 갖가지 야회 활동을 할 수 있고 시원한 가을 날씨는 매혹적으로 단풍이 들게 하는가 하면 겨울에는 산과 숲과 들판에 눈이 덮여 아름다운 설경雪景을 이루게 한다.
“교수님! 이런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하겠습니까?”
김형국 박사는 ‘바이론 존 메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정면으로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김형국 박사는 ‘바이론 존 메리’의 말을 듣고 보니 흥미롭게 점점 그 속으로 빨려 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는 교수님한테 예수를 믿으라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이 사는 이 지구가 과연 저절로 생겨 났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인지. 또 창조되었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만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성경을 통해서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바이론 존 메리’는 성경 히브리서 3장 4절의 귀절을 펼쳤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무한하게 더 크고 놀라운 집.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사는 지구地球입니다. 지구에는 놀라울 정도로 지성적인 설계자요 건축가이신 하나님이 계셔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공기)는 어떻습니까?”
대기는 태양계 내의 어떠한 다른 행성에도 없다. 말하자면 대기大氣는 지구에만 있다. 달에도 대기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비행사들은 달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산소통을 짊어지고 우주복을 입어야 한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산소통과 우주복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대기권에는 생명에 필수 불가결한 기체(공기)들이 알맞은 비율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그 자체만으로 치명적인 기체들도 있다. 그러나 공기 중에는 그 기체들이 안전한 비율로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러한 기체들을 코로 들이 쉬고도 해를 입지 않는다. 그중 한 가지 기체는 산소인데 산소는 우리가 흡입하는 공기의 21퍼센트를 구성한다. 산소가 없으면 인간과 동물은 죽고 만다. 그러나 산소가 너무 많아도 인간과 동물의 존재는 위험하다.
왜 그럴까? 순수한 산소를 너무 오래 흡입하면 유독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산소가 많으면 물질은 불에 타기가 그만큼 더 쉬워진다. 대기중에 산소가 너무 많으면 가연물들은 극도로 불에 타기가 쉬울 것이다. 쉽게 불이 붙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산소에는 다른 기체들 특히 대기의 78퍼센트를 구성하는 질소로 희석되어 있다. 하지만 질소는 희석제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다. 전 세계에서 매일 뇌우雷雨가 내리는 곳에서는 수백만의 번개가 친다. 이러한 번개 때문에 얼마의 질소가 산소와 결합을 한다.
“그렇게 생긴 화합물은 비雨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오고 식물들은 그것을 비료로 사용하죠 ”
김형국 박사는 ‘바이론 존 메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말 한마듸 한마듸가 이치적이고 사리에 맞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많이 알고 있구나 싶었다. ‘바이론 존 케이츠’의 말은 계속되었다.
“대기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호용 껍질 역할도 합니다.”
지상 약 24km 상공에 있는 얇은 오존층은 태양에서 나오는 해로운 방사선을 걸려내 준다. 이 오존층이 없다면 그러한 방사선은 지상 생물을 파멸시킬 수 있다. 또한 대기는 지구가 운석에 난타亂打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운석이 지면에 닿지 못하는 이유는 대기를 거쳐 떨어지면서 전소全燒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별똥별로 보인다.
그렇게 전소되지 않는다면 수백만 개의 운석들은 지구의 모든 지방을 난타하여 생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것이다.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형국 박사는 속으로 역시 그렇구나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었다. 말을 듣고 보니 점점 흥미가 솟구쳤다. 이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면 창조론에 대한 상당한 지식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김형국 박사는 지례 짐작했다. ‘바이론 존 메리’는 다시 말했다.
“대기는 생명에 필수적인 것일뿐 아니라 더욱 아름다운 광경 중의 하나로 하늘색깔을 변화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 규모와 웅장함은 그저 상상을 초월하죠.”
지구를 감싸고 있는 하늘은 끝없이 장엄하고 다채로운 색깔의 전경으로 가득차 있다. 동녘의 황금빛 햇살은 새벽을 알리고, 서쪽 하늘은 멋지게 물들이는 연분홍빛, 오렌지빛, 붉은빛, 자주빛 저녁놀은 하루에 작별을 고한다. 하얀 솜같이 일어나는 뭉게구름은 화창한 봄 날 혹은 여름 날을 분명히 알려준다. 가을 하늘을 덮는 양털 구름은 겨울이 가까워 왔음을 알려 준다. 반짝이는 별들이 찬란하게 수 놓은 밤 하늘은 장엄하고, 달빛 어린 밤하늘은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산한다.
“이런 것들이 저절로 생겼다고 하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죠. 지구에는 생명에 필수적인 것들과 더불어 엄청난 양의 물이 있습니다. 물의 여러가지 유익한 특성들 중에는 물의 형태가 기체인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액체인 물이 되기도 하고 고체인 얼음이 되기도 하는 특성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지상의 기온 범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인간과 동물과 식물에게 필요한 수천가지 원자재들 역시 피나 수액水液같은 액체 속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 이 일에 물이 가장 이상적인 이유는 물은 다른 어떠한 액체보다도 많은 물질을 용해하기 때문이다.
“물이 없으면 영양 공급이 계속될 수 없습니다. 산 유기체들은 섭취한 물질들을 용해하는 일을 물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흙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말한 ‘바이론 존 메리’는 성경 예레미아 10장 12절 구절을 펼쳐서 김형국 박사에게 보이며 말했다.
“흙에는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화학 원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이 먼저 이러한 원소들을 체내에서 소화시킬 수 있는 형태로 전환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함께 거드는 미세한 산 유기체들이 있습니다. 단 한 숟가락의 흙에서도 수백만에 달하는 유기체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무수한 형태로 설계되어 있어 각각 죽은 나뭇잎 풀잎과 그와 폐물을 유용한 형태로 다시 전환시키기도 하고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흙을 헐겁게 하여 공기와 물이 들어갈 수 있게도 합니다. ”
질소를 식물 성장에 필요한 화합물질로 전환시키는 박테리아도 있다. 굴을 파고 다니는 벌레나 곤충들이 하층토下層土의 입자들을 지표로 계속 가지고 올라옴에 따라 상층토上層土의 질이 좋아진다.
“이런 것들이 모두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저절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구상하고 설계한 바에 따라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경의로운 하나님의 창조물은 이것뿐만 아닙니다. 북미산北美産 지빠귀는 흉내장이로 유명합니다.”
어떤 것은 한 시간 동안에 55종의 다른 새소리를 흉내 내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을 황홀케 하는 것은 그 지빠귀가 원래 작곡한 감미롭게 지저귀는 소리다. 확실히 그 새들이 내는 음조는 영역을 주장하는데 필요한 몇가지 간단한 음조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또 음악가인 굴뚝새들은 남미南美에 사는데 굴뚝새들도 지빠귀 못지 않게 경탄스럽다. 짝을 이룬 다른 열대 새들처럼 짝을 이룬 굴뚝새들은 이중창을 부른다.
굴뚝새들의 음악 공연은 독특하다. 암컷과 수컷은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하고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같은 노래의 서로 다른 부분을 번갈아 가며 부르기도 한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전체 노래는 마치 한 마리의 새가 노래하는 것 같이 들린다.
“짝을 이룬 굴뚝새끼리 의사 소통을 하느라고 발산하는 그토록 감미롭게 음악으로 주고 받는 대화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런 새들이 그저 우발적으로 생긴 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성경 계시록 14장 7절을 펼쳐서 김형국 박사에게 보이며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하고는 하나님께서 놀랍게 설계한 씨앗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다양하고 기묘하게 설계된 씨앗들은 자기 갈 곳으로 갑니다. 난초씨는 매우 가볍기 때문에 먼지처럼 떠 다닙니다. 민들레 씨들은 날개가 달려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떠나 갑니다. 어떤 수생水生 식물들은 씨에 공기가 들어찬 구명대를 갖추어 주며 떠내려 보냅니다. 이처럼 과학적이고 섬세한 구조로 된 식물을 우연히 저절로 생겨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
또한 꼬투리가 툭 터진 씨들을 방출시키는 식물도 있다. 북미산北美産 조롱나무의 미끈거리는 씨들은 먼저 압착된 다음에 아이들이 수박씨를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내쏘듯이 튀어 나온다. 씨를 내쏘는 오이는 수리학을 이용한다. 오이가 자라감에 따라 표피는 안쪽으로 두꺼워지고 액체로 된 중심 부분이 받는 압력이 커진다. 씨가 성숙할 즈음이면 그 압력이 너무 커져서 코르크 마개가 병에서 뽑히듯이 꼭지를 밀어내고는 씨들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놀랍게 설계된 씨를 저절로 생겼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는
“분명히 창조한 분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바이론 존 메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상에서 가장 큰 생물인 거대한 세쿼이어 나무는 다 자라면 백미터도 넘습니다.”
지상에서 백 이 십미터 높이에 직경이 11미터가 되는 나무도 있다. 하나의 나무에서 나오는 목재만으로도 방이 여러 개 있는 집 50채를 지을 수도 있다. 두께가 60센티미터나 되는 나무껍질은 타닌산 냄새를 풍겨 곤충들을 쫒아버리며 푹신푹신한 섬유질 조직 때문에 그 나무는 거의 석면만큼이나 방화력이 있다. 그 뿌리가 뻗는 넓이는 12,000 내지 16,000
평방미터나 된다. 수명은 3,000년을 넘는다.
“이처럼 나무들도 3천년을 사는데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왜 100년도 살기가 어렵습니까? 처음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100년을 살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교수님!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형국 박사는 “글쎄요" 하고 빙그레 웃으며 잠시 사색에 잠겼다. ‘바이론 존 메리’의 말처럼 나무도 수천년을 사는데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간은 왜 100년도 살지 못하는가 하는데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바이론 존 케이즈’는 말했다.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아담은 998살을 살았습니다.”
천년에서 두 살이 모자랐다.. 하지만 수천년을 사는 나무에 비하면 998살도 일찍 죽은 것이다. 나무도 수천년을 사는데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간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시속 200km 이상은 달릴 수 없이 만든 자동차를 만일 200km 이상 250km나 300km로 달렸다고 한다면 그 자동차는 고장이 나서 조기에 폐차해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처음 창조된 인간 아담이 창조주가 말씀하신 것처럼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는 다 따 먹어도 좋으나 무화과 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담은 그에 대한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바닷가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린아이가 스스로 바닷가에 갔다가 파도에 떠밀려 죽었다면 어린아이가 잘못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공통된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전세계에 전쟁과 재난같은 고통이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토록 수없이 자행되어 온 전쟁, 잔흑행위, 시위로 인한 유혈, 및 노골적인 악행은 무고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 모든 일을 허락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성경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장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해 줍니다. 거기에서는 고통 없는 세상이 창조된 것을 묘사해 줍니다. ”
처음 창조된 남녀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의 환경속에서 에덴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정원 같은 거처가 주어졌고, 그들에게는 즐겁고 해볼만한 일들이 있었다. 땅과 관련하여 그들은 또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피조물들과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산 피조물들도 감독했다. ‘바이론 존 메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성경을 펼쳐 창세기 1장 28장과 2장 15절 성경귀절을 김형국 박사에게 보이며 말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 아담과 하와 부부는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지시도 받았습니다. 그들이 자녀를 낳음에 따라 인간 가족은 증가하고 낙원의 경계를 확장하여 나감으로 마침내 이 땅이 낙원이 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연합된 가족으로서 모두가 지상낙원에서 완전한 건강을 누리며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화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는 인간사를 다스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 들여야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것이 합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을 만든 자에게는 자기가 만든 것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를 가할 권리가 분명히 있다. 여러 세기동안 이 원칙은 소유권 법률에 반영되어 왔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분의 인도를 받아 들여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사실 때문이다. 즉 그들은 창조주를 떠나서 스스로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먹고 마시고 숨쉬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는 성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정확함을 증명해 주었다. ‘바이론 존 메리’는 예레미야 10장 23절의 귀절을 펼쳐서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 ”
라고 읽고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설정하신 지침 안에 머무는 한 지속적이고 성공적이고 행복한 생명을 누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유 행위자가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들(첫인간)은 로봇트와 같은 반응을 보이도록 창조되지도 않았고, 동물이나 곤충들처럼 주로 본능에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되어야 하였다. 공통의 유익을 위해 작용하는 하나님의 법의 경계 안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하였다.
“성서에서 이 원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유의 하십시오.”
하고 ‘바이론 존 메리’는 성경 베드로 전서 2장 16절의 귀절을 펼쳐 보이며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호 관계를 다스리는 법이 없다면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의 생활은 해로운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자유는 바람직 하지만 자유가 너무 많은 것은 좋지 않다. 자녀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면 자녀는 번잡한 거리에서 놀거나 뜨거운 난로 위에 손을 얹게 될 수도 있다. 우리를 지으신(창조) 분(하나님)의 인도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결정을 우리(인간) 나름대로 내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는 온갖 문제들을 유발할 수 있다.
첫 인간(아담과 하와)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자유라는 선물을 남용하는 길을 택하였고. 그들(아담과 하와)은 그릇되게도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아담과 하와)은 옳고 그른 것을 자기들 스스로 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이론 존 메리'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창세기 3장 5절의 귀절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아담과 하와인 첫 인간들이 창조주의 인도를 거부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선풍기의 전기 플럭을 뽑았을 때 일어나는 일과 유사했습니다. 선풍기가 전원에 꽂혀 있는 한 선풍기는 잘 돌아 갑니다. 그러나 전원에서 플럭을 뽑으면 속도가 점점 떨어지면서 결국은 완전히 정지하고 맙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에게 불복종하고 창조주에게서 떨어져 나갔을 때 지으신(창조주) 분에게서 독립하는 행로를 고의적으로 택하였기 때문에 그분(창조주)은 그들(아담과 하와)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그들(아담과 하와)의 선택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바이론 존 메리’는 성경을 펼쳐 역대한 15절 2절의 귀절을 보이며
“너희가 만일 하나님을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하였습니다. 생명을 유지 시켜주는 창조주 하나님의 힘이 없어짐으로 인해 정신과 신체는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쇠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이 땅에 사망이 온 것입니다. ”
하고는 창세기 3장 19절과 5장 5절을 보이며 말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을 지으신(창조) 분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길을 택하였을 때 그들(아담과 하와)은 완전성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결과 후에 그들에게 자녀가생겼을 때 이들은 부모가 갖게 된 상태 곧 불완전성을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마치 결함이 있는 틀과도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출산되는 모든 후손은 역시 결함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불안전한 유전인자를 받고 태어난 것이죠. 따라서 우리 인간은 모두 불안전한 상태로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등 무기력한 특징들을 유전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불안전해지고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 법에서 떨어져 나와 있게 되자 인간의 온갖 어리석은 행위가 물밀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는 고통과 슬픔과 질병과 사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악이 전적으로 인간에게서만 시작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원인은 또 있습니다. ”
인간만이 지성 있는 피조물로 창조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이전에 하늘에 무수히 많은 영물들을 창조하였다. 그 영물들 역시 자유 행위자들이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들이는데 있어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영물들 중 하나가 자기 마음대로 독립하려는 욕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의 야망은 점점 커져서 급기야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수준에까지 되었다. 그는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도 결코 죽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였다. ‘바이론 존 메리’는 창세기 3장 4절과 야고보 1장 13절 및 15절 귀절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은 그들이 생명과 행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 창조주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 하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범법행위가 실은 그들의 처지를 향상시켜서 그들이 하나님 같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하나님 율법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실상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권리 자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허위 진술 때문에 그는 ‘반항자’ 라는 의미로 ‘사단’이라 불리게 되었고 ‘중상자’라는 의미로 ‘마귀’라 불리게 되었다. 지난 6000년 동안 사단의 이러한 태도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주어 지배가 아니면 파멸이라는 정책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법자들인 인간과 영물을 모두 처음 시발점에서 멸망시키지 않으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지성 있는 피조물 앞에 의미 심상한 쟁점이 제기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쟁점과 관련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의문시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과연 항구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인도하는 것이 더 유익한 것인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이 세상을 과연 폭력과 분쟁없이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인간에게는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시간이 흘러야만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약 6천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러가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문제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단을 없애 버림으로서 만족스럽게 해결 할 수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그렇게 하셨드라면 인간이 효율적인 정부를 세우고 모두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는데 필요한 기술을 발전시킬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비난을 미리 아시고 슬기로운 지혜로써 제기된 쟁점들을 해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6,0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사단을 제거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단에게 충분한 시간을 줌으로써 제기되는 쟁점을 슬기롭게 풀어 나가겠다는 그런 생각이었던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지구촌에서는 갖가지 정부, 갖가지 사회제도, 갖가지 경제제도가 시도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원자를 이용하고 달 여행을 하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기술적 발전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전인류 가족에게 참된 축복이 될만한 세상을 가져왔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시도해 온 그 어느 것도 인류 모두에게 참다운 평화와 행복은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상태는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불안했다. 범죄. 전쟁. 가정파탄. 빈곤. 굶주림이 여러 나라를 휩쓸고 있다.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피괴력을 가진 핵폭탄은 인류를 전멸시키지는 못한다 해도 대부분을 멸망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수천년간 노력하고 여러 세기에 걸쳐 경험을 쌓고 기술발전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직도 대부분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이론 존 메리’는 어느새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변은 계속 되었다.
“심지어는 땅 자체도 해로운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태만은 보호가 되는 수풀을 벌거숭이로 만듦으로써 특정지역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화학물질과 기타 폐기물은 토지와 바다와 공기를 오염시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지상에 있는 생명의 상태에 관한 2000년 전의 성서 묘사는 오늘날의 상태를 한층 더 적합하게 묘사해 줍니다. ”
‘바이론 존 메리’는 전도서 8장 9절 귀절을 김형국 박사에게 보이며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의 질서와 정밀함과 비교할 때 인간의 노력은 참으로 재난만 가져 올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인간사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인간은 바로 그러한 인도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감독을 무시하는 것은 재난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공기와 물과 먹을 것이 필요한 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함이 참으로 항상 입증되어 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 통치에 관한 쟁점을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심으로써 장래를 위한 영구적인 판례를 확립하였다.
그것은 판단 기준이 되는 대법원의 판례에 비할 수 있다. 그 쟁점은 항구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통치는 지상에 바람직한 상태를 가져 올 수 없다. 그러므로 장차 그 어떤 자유 행위자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도전한다 하더라도 그의 주장을 증명해 보도록 수천년을 또 다시 추가로 허락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 6,000년의 이 기간 중에 증명되어야 할 모든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는 영원토록 다시는 어떠한 반역자도 지상에서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파괴하거나 우주의 그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훼방하도록 허락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이 오면 다시는 이 지구에 재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바이론 존 메리’는 손목시계를 들어다 보고는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된 듯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겠다는 그런 표정으로 말했다.
“진화론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창조론을 지지하는 모든 증거를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무조건 물리쳐 버립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고려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까지도 그러한 편협한 태도로 인해 증거를 저울질 해보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과연 창조론創造論이 옳은지는 하나 하나 면밀히 분석하고 연구와 검토를 해 봐야 한다.
“저는 의과대학을 나온 후 8년간 주립병원인 메디칼센터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의사입니다. 제가 의사가 되어 놀란 것은 인체의 기적입니다. 특히 인간의 뇌腦야 말로 전 우주에서 가장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신비神秘에 싸인 물체라는 것입니다. 뇌는 어떻게 생각을 해내는가? 그것이 중심이 되는 과제이며 우리는 아직도 그 해답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부 지식이 꾸준히 축적되고 있는데도 인간의 뇌 작용은 여전히 심오한 신비 속에 싸여 있습니다."
컴퓨터를 전자두뇌라고 부르는 사람은 두뇌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인간의 활동적인 기억장치들이 수용하는 정보의 양은 현대의 연구조사용 대형 컴퓨터의 수 십억 배나 된다. 인간의 뇌腦는 알려져 있는 우주 내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엄청나게 더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열렬히 옹호했던 개념 몇 가지를 바꾸어야만 인간 두뇌의 신비스러운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의 공동 발견자인 ‘알프레드 알 월레이스’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거대한 격차에 관하여 다아윈에게 이렇게 편지를 하였다.
- 자연 선택으로 원시인이 가질 수 있었던 뇌腦는 겨우 원숭이의 뇌보다 약간 우월한 것이었을 것이오. 한편 원시인이 지닌 뇌腦는 우리 학회의 보통 회원의 뇌보다 별로 열등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오 -
“이처럼 시인하는 말에 흥분한 다아윈은 이렇게 답장을 하였습니다.”
- 자네와 나의 노력으로 생긴 자녀를 자네가 완전히 살해한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네 -
“인간의 뇌腦가 동물의 뇌腦에서 진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와 사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훨씬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뇌腦와 정신 사이의 관계를 설계하고 발달시킨 최고의 지성을 지닌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선택의 여지없이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관계는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에는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경외과 의사였던 ‘바이론 존 메리’의 말을 듣고 김형국 박사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지금까지 김형국 박사가 가진 진화론進化論에 대한 모든 지식이 한꺼번에 뿌리 채 뽑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맞다! 모든 생물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다. 모든 생물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단세포는 단세포 대로 다세포는 다세포 대로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 독창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년전 김형국 박사는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파란 이끼가 지금도 여전히 이끼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생물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창조된 것임을 확신하였다.
김형국 박사는 ‘바이론 존 메리’가 의사의 직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가 된 이유를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들이 신학대학을 가서 목사가 되겠다는 뜻도 이제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바이론 존 메리’는 성경책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형국 박사는 ‘바이론 존 메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배웠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생물학 교수로서 배우고 가르친 진화론이 참으로 터무니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당신의 말처럼 모든 생물은 진화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라고 믿고 싶소!”
“오늘 교수님에게 말씀 드린 것은 수 많은 하늘의 별 중에 가장 작은 별처럼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하나 하나 연구해 보시면 정말로 경탄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죠. 앞으로 시간이 있으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우주속의 많은 생물들을 창조하셨는지 함께 토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댕큐 베리머취.. ”
그로부터 두 달후 김형국 박사는 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정년퇴직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박성규도 대학 강사직을 그만 두고 부인과 함께 아파트 인근에서 조그마한 만두가게를 냈다. 김형국 박사는 가끔 만두가 먹고 싶을 때에는 박성규가 경영하는 만두집을 찾았다. 그 때마다 박성규는 부인과 함께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찜통에서 만두를 쩌 내느라 바빴다. 손님도 제법 북적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잘 나가던 만두장사가 요즘 와서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서 만두장사를 그만 두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쓰레기 만두 파문이 일면서 만두집을 찾는 손님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먹거리로 장난치는 일부 악덕 장사꾼 때문에 선의의 상인들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자 박성규는 이것도 사단 마귀의 소행이 아닌가 싶었다.
박성규는 하루 빨리 쓰레기 만두 파문이 사그라져 정상적으로 만두 장사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이 어려운 난관을 잘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늘 기도하였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욥’을 생각하곤 하였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에게 충성스런 ‘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온갖 고통을 다 겪도록 하였다. 아내와 자식들도 병들어 죽고 재산도 모두 상실하였다.
게다가 ‘욥’은 몸에 피부병까지 앓았다. 그야말로 사단 마귀는 ‘욥’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욥’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단 마귀에게 죽음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고난도 ‘욥’에게 가해도 좋다고 허락하셨기 때문이었다. ‘욥’을 폐인으로 만든 사단 마귀는 ‘욥’에게 말했다.
“욥아! 이제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잃은 아내와 자식들을 되돌려 주고 피부병을 앓고 있는 것도 말끔히 낫도록 해주마!”
하지만 하나님의 충성스런 ‘욥’은 사단 마귀의 어떤 고난과 유흑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단 마귀의 시험이 끝난 후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종전보다 수십배 더 많은 재산과 행복을 보상 받았다. 박성규는 이러한 ‘욥’을 생각하면서 불량 만두 파문으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믿음만은 잃지 않았다. 만두 파문이 가라앉고 박성규가 다시 만두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김형국 박사가 찾아왔다.
“그래 만두 장사를 해보니 어떤가? 대학강사 보다 나은가?”
박성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수입은 대학 강사보다 좋습니다.”
우리나라 대학 강사들의 푸대접은 국민이 다 하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부끄러울 만큼 적은 봉급으로 살아온 대학강사 생활을 생각하면 일찍이 대학강사를 접고 장삿 길로 나설 것을 그랬구나 싶었다. 지금 이렇게 만두집을 하고 있지만 짭잘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박성규는 이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닌가 싶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 온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따뜻한 봄에 이 땅의 교회들에게 또 하나의 기쁨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약속의 말씀대로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이었다. 김형국 박사는 박성규의 권유로 그가 다니는 교회에 나갔다. 부활절 기념 예배를 보기 위해서 나갔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이 다시 사심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들 역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새 생명을 얻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복음이 핵심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각 교회에서는 부활절을 주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함께 교회의 중요한 절기로 지키고 있다.
이 기쁜 절기節氣를 맞이하여 김형국 박사는 난생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연 역사적인 사건인가 하는 의문점 때문이었다. 이 의문점은 창조론과 함께 김형국 박사의 관심거리이기도 하였다. 많은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 김형국 박사는 박성규와 함께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교회의 김대헌 담임 목사가 오늘의 설교를 맡았다. 부활절에 대한 설교가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독특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바로 설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2천여 년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있었던 확실한 사건에 그 가르침의 근거를 두고 있는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그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 여러가지 사건 중에서도 그의 부활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의 죽음이 대속代贖의 죽음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여러 세기를 두고 내려오면서 속은 것이요, 설교자들은 거짓을 설교한 것이 되며 성도들은 헛된 구원의 소망에 기만을 당해 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이 아니며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 위에서 부활 신앙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내세관來世觀은 부활 신앙 위에 있다.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은 교인들 중에서도 부활 신앙만을 예외로 생각하고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다. 곧 기독교의 골자는 부활인 것이다. 인도의 선교사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특별히 대학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오랫동안 전통의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힌두교와 기독교가 차이가 무엇이길래 기독교로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썬다 싱’은
“부활하신 예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런 확실한 주님의 역사적인 부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첫째로 소위 기절설입니다.”
예수는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한 후에는 정신이 되돌아 와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무거운 향유를 온 몸에 발랐고 허리에 창을 찔려 물과 피를 쏟은 예수님이 장성 20명이 움직일 무거운 돌을 굴러내고 로마 군사들의 감시를 어떻게 뚫고 나올 수 있었을까? 부활만이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무덤을 잘못 찾았다는 설입니다.”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을뿐 아니라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해 두었었고, 베드로, 요한. 다른 여인들도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장소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판단 착오를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로 도난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훔쳐서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제자들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이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이었다. 설흑 그렇다 하더라고 제자들 11명 모두가 순교 했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부활을 확실히 믿은 신앙만이 순교의 자리까지 제자들을 인도했던 것이다.
“넷째로 환상설이 있는데 주님의 부활은 없었는데 주님이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머릿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눅 24 : 13 - 35) 도마에게는 상처를 만져보게 하셨을 뿐 아니라(요 20 : 28) 떡과 고기를 잡수시기도 하셨던 것이다.(눅 24 : 39 - 49 )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반론을 제기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신앙은 우리 인생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첫째로 부활을 통해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다. 죽음이란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 부딪친 한계 상황이다. 생명이 있는 자는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 하게 되어 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인간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 있는 인간에게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승리의 빛을 주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신 주님의 선포는 위대한 승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처음 열매가 되셔서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 19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의 부활의 영광에 반드시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평강의 복을 누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불안에 떨며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있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하신 첫 마디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즉 ‘샬롬’이라고 하였다. ‘샬롬’이란 평안하다. 풍요롭다. 범사에 잘 된다. 건강하다는 말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샬롬의 새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셋째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산 소망을 얻게 된다. 사람이 고작해야 70 - 90년 살고 그것도 슬프고 고통스럽고 몇 날을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뿐이라면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릴 위치에 있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소망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요 11 : 35)고 했습니다.”
이 세상엔 참 소망이 없다. 사람도 떠나고 물질도 없어지고 권세도 무너지고 인기도 날아 간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주심 소망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산 소망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소망인 산 소망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넷째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호 받는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분은 죽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삶이 그토록 힘들고 무겁습니까? 그것은 무능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무능을 숨기고 만난 문제가 너무 크다고만 말합니다.”
그래서 환경 탓으로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빠지려고 한다. 그래서 점점 원망과 불평이 늘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이 되어 간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부활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한다. 믿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사망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능력을 덧입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따뜻한 봄과 함께 부활절이 찾아 왔습니다.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평강의 복을 누리며 산 소망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거듭 당부 드립니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에 어느 날 파란 싹이 돋아 납니다. 즉 겨울에 죽었던 풀들이 봄이 되면 싹이 돋아납니다. 그것이 생명의 능력, 바로 부활의 큰 능력입니다.“
하자 성도들은 일제히 “할레루야“를 외쳤다. 김대헌 목사도 “할레루야”
하고는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지금까지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노아 홍수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입니다. 그런데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언어(말)를 한 가지만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이후에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수 없이 많아졌다. 지금 지구상에서 모든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는 백여 종이 넘는다.
“왜 이렇게 언어가 많아졌는지 아시는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김대헌 목사는 말했다.
“아무도 모르시는군요. 아무도 모르시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는 한가지 언어(말)만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후 하나님이 보니까 인간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등 그야말로 인간들 행동이 너무 사악하고 악랄해서 이렇게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서로 흩어져 살도록 하기 위해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끼리 뭉쳐서 국가를 만들었다. 그 결과 지금은 이 지구상에 이백 개가 넘는 국가가 생겨났고, 국가들간에 전쟁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 노아 홍수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두 번의 기회를 주셨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사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세 번째 기회를 주시겠다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셨다. 이 세 번째 기회는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이 기회가 바로 아마겟돈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마겟돈이 오기 전에 모두 하나님 품안에 들어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겟돈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아마겟돈 이후에는 두번 다시 이 땅에서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전쟁도 없을 것이며, 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모든 무기는 불에 녹여서 밭을 가는 쟁기를 만들 것이며 사단 마귀는 무지갱에 갇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가출한 자녀를 기다리고 있듯이 하나님의 품안으로 오지 않는 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기다리다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날이 바로 아마겟돈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지 아니한 분들은 아마겟돈이 오기 전에 하나님 품안으로 돌아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자 성도들은 모두 “아멘" 하였다. 김대헌 목사는 말했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부활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헌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성도들의 박수갈채가 한바탕 폭풍처럼 교회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기도로 이어졌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성가대의 합창소리도 이제는 조용해졌다. 예배가 끝나고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을 빠져나간 빈 자리에 김형국 박사는 무거운 침묵으로 혼자 앉아 있었다. 옆에서 박성규가
“교수님! 가시죠. 예배가 끝났습니다."
김형국 박사는 침묵으로 말없이 무엇인가 골돌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김형국 박사가 말했다.
“내가 지금 뒤늦게나마 창조주 하나님을 찾은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구만... 사실 말이야. 인간에게 부활이라는 소망이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가 없지를 않는가. 창조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은 허망한 존재일세. 그러니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마시고 즐기며 살자는 것이 아니겠나.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진화론이야말로 인간의 죄악을 부추긴 가장 악랄한 학설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만. 나는 오늘 이 교회에 와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부활을 믿지 않고는 결코 사망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우리는 죽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부활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통쾌하고 아름다운 말인가.
“그래 나도 오늘부터 부활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보겠네.”
“ 박님님!”
박성규가 김형국 박사의 손을 잡자 김형국 박사도
“자네가 오늘 참으로 좋은 곳으로 나를 인도했네.”
하면서 박성규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껴안고 감격의 눈시울을 적셨다. 김형국 박사가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물었다.
“그래 처음 교회에 나가보니 어떻습디까?”
“나 오늘부터 하나님을 믿기로 하였소. 다음 일요일엔 당신도 함께 교회에 나갑시다.”
“안 그래도 이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내일 우리 창석이가 목사가 되어 미국에서 돌아온다고 합니다. 조금전에 미국에서 전화 가 왔어요.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고 합디다. 이제 성직자 집안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믿어야죠...”
김형국 박사는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 날 아들이 신학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지 못하게 했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혼자 미국에 건너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목사까지 되었다니 아들이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김형국 박사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름답게 핀 화분속의 백합 꽃을 보면서 새삼 꽃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하였다.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