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2. 6세기 고구려의 정치변동과 불교계 분열
토착-신진 ‘귀족 대립’ 속에 왕권불교 쇠퇴
① 고구려 불교사상사의 전개과정
격의불교-공인불교-중도공관불교 단계로 발전
고구려 불교사상사의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 번째는 격의불교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고구려의 도인과 지둔도림이 당시 유행하던 격의불교의 사상을 서신으로 교환하던 단계이다.
두 번째는 공인불교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순도와 아도, 담시와 담초 등이 중국 남조 및 북조로부터 고구려에 와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법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소수림왕 이후 고국양왕.광개토왕.장수왕.문자명왕대까지 계속되면서 국가불교적 성향이 강조되었다.
세 번째는 격의불교뿐만 아니라 국가불교적 성향의 공인불교단계까지 극복하면서, 중도공관(中道空觀)에 대한 이해가 점차 심화되어 가는 중도공관불교의 단계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승려로는 중국에서 신삼론(新三論)사상을 확립한 승랑을 들 수 있다.
<사진> 집안 시내 민가의 채마밭에 있는 이불란사지 석주로 추정되는 돌기둥. 이불란사는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지 3년 뒤인 소수림왕 5년, 수도 집안에 건립한 사찰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리고 고구려말기에는 보덕의 열반종사상이 보이고 있다. 이외에 서촉지역에서 신삼론종을 홍포한 것으로 보이는 실법사(實法師)와 인법사(印法師), 천태교학을 배운 파야, 담천과 교유하면서 섭론종을 배운 것으로 보이는 설일체유부학의 지황, 멀리 천축에까지 유학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이는 현유 등이 있다. 한편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를 배운 후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 혜자, 도등 등의 사례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한 승려들도 다수 보이고 있다.
② 6세기 고구려 정치변동과 불교계 분열
왕위계승 놓고 귀족들 갈등…왕실도 통제 못해
6세기 이후 고구려불교계 동향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시기의 사회변동과 다양한 불교계 동향을 알 수 있는 관련 자료가 거의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안원왕(531~ 545).양원왕대(545~559)의 정치변동을 전하고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분석하면 6세기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동향이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박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은 중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삼았는데, 이를 지지하는 세력을 ‘추군(群)’이라고 하였다. 또한 소부인에게도 왕자가 있었는데, 이를 후원하는 집단을 ‘세군(細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박곡향강상왕이 병들어눕자, 추군과 세군은 각각 그 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면서 궁문에서 싸웠다. 그 결과 세군으로 죽은 자가 2000여명이었으며, 박곡향강상왕도 이때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안원왕은 안장왕이 훙거한 후 아들이 없으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안원왕으로부터 양원왕으로의 왕위계승에도 별다른 문제점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후계자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문자명왕의 아들인 안장왕(519~531)이 시해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안원왕도 박곡향강상왕으로 불려지다가 말년에 왕위계승분쟁에서 희생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 국보 119호인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된다.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스님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문화재청
이때 ‘박곡향강상왕’이라는 왕명에 보이는 ‘곡향(鵠香)’에는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 불교왕명을 표방하던 국왕의 사례가 찾아진다. 한편 박곡향강상왕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했던 추군과 세군의 실체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추군은 국내성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던 귀족불교세력이며, 세군은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영향력을 강화해나가던 신진귀족불교세력이었다. 6세기 대에 고구려는 불교왕명을 표방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국왕중심적 불교가 점차 쇠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뉘어진 귀족불교세력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신라가 점차 강성해져서, 한강과 함흥평야지역에까지 그들의 세력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혜량법사는,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가 혼란해져서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컨데 나를 신라로 데려가 달라”하면서 신라로 망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6세기 당시 고구려사회는 안으로 왕위계승과정을 둘러싼 귀족들간의 대립이 극심하였고, 외부로는 신라의 북진이 계속되고 있었던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③ 의연의 활동과 사상
6세기에 표면화된 귀족들간의 대립은 평원왕대에 귀족연립정권을 형성하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 시기에 활동한 의연을 통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가 해결하고자 했던 사상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의연은 고구려 평원왕 18년(576) 이전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대승상 왕고덕의 요청으로 북제로 구법의 길을 떠나고 있다. 이로 볼 때, 의연이 주로 활동한 시기는 고구려 양원왕(545~559)과 평원왕대(559~590)로 생각된다. 또한 대승상 왕고덕은 그 성씨로 미루어 보아 낙랑군과 대방군 이래 황해도 일대의 토착호족세력인 왕씨계의 인물로 추정된다. 또한 그가 대승상에 있을 당시의 정치상황은 평양과 낙랑국 출신의 신진귀족세력과 국내성파인 구 귀족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대승상 왕고덕은 평양을 배경으로 등장한 신진귀족세력으로 이해된다.
평원왕 때 귀족연립정권 안정…의연, 북제 파견
중국서 지론종 사상 수입…‘佛性과 열반’ 부각
의연이 왕고덕의 요청으로 북제로 구법의 길을 떠난 것은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국제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중국 남북조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불교와 도교와의 우위논쟁을 살펴보면, 이 당시 고구려의 대승상 왕고덕이 의연을 북제로 보내어 법상에게 불(佛)의 생멸연대와 함께 불교역사를 알아오게 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의연이 귀국하여 활동하던 당시 고구려 사상계의 동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북위시대에 이미 불교와 도교간의 우열논쟁에서 부처님의 생멸에 관한 기년문제가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의연이 북제로부터 귀국하였을 당시에 고구려 국내에도 도교세력이 있었다. 또한 당시 국내에서도 불교와 도교세력간의 우위논쟁이 제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연의 귀국 이후 활동을 후원해주는 세력으로는 먼저 북제로 구법의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승상 왕고덕을 들 수 있다. 또한 平原王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왕실세력도 의연의 활동을 후원해 주고 있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이때 의연이 북제의 법상으로부터 불멸연대와 불교역사를 배워 온 이유는 당시 고구려 국내에서 점차 세력을 얻어가고 있던 도교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의연이 북제로 구법하여 법상에게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불교 경론의 사상을 배워오고 있음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법상은 세간법과 불법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보살지법이 바로 불법의 체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법상은, “진여는 불성이고 진체이며, 제일의공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의연은 법상으로부터 불성의 체를 진여로 보는 사상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고구려불교는 승랑에 의해 중도공관불교로 체계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사상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자 할 때 제기되는 문제로는 불성의 문제와 열반의 부각을 거론할 수 있다. 이러한 불성의 문제와 열반의 부각은 이후 고구려불교사상의 내용을 전하고 있는 의연과 보덕의 사상으로 계승되어 나갔다. 즉 고구려후기 불교는 의연에 이르면 불교에 대한 이해를 보다 깊이 하고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의연은 북제의 법상을 통해 십지론.지도론.금강반야론.지지론 등의 보다 폭넓은 대승경전의 이해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6세기 당시 고구려불교계 또는 의연이 보다 더 깊이 있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불교사상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지가 궁금해진다. 의연이 북제의 법상으로부터 배우고자 한 불교사상의 내용은 역시 <십지론>과 <지지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의연은 중도공관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성의 문제와 열반의 부각에 보다 더 큰 관심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말하자면 격의불교.공인불교.중도공관불교로 발전한 고구려 불교사상의 흐름은 이후 불성의 문제 해결과 열반의 부각으로 발전해가게 된다. 이때 의연에 의한 지론종사상의 수입은 고구려불교계로 하여금 불성의 문제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의연은 불멸연대 및 불교역사를 북제의 법상으로부터 배워오는가 하면, 지론종 남도파의 “진여는 불성이다”라는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세력을 얻어가고 있던 도교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당시 국왕전제권의 약화와 귀족연립정권이라는 국내문제와 함께 수나라와의 전쟁이라는 정세 변동 속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덕은 연개소문에 의한 도교진흥정책을 비판하면서 열반종을 개창하였다.
남무희/ 국민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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