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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할 이유(롬 8:26-30)
벌써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됩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가지 시련도 있었고 가정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문제도 다 지나갑니다. 뒤돌아 보면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정을 잘 보내야 후회함이 없습니다. 조금 어렵다고 과정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결산할 날에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앞에 설 그 순간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의 종말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도, 열처녀 비유도 양과, 염소의 비유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결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후에 심판이 있다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결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한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 사업장, 일터를 돌아보면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일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닫고 또 다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여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은 이 '감사'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감사'로 마무리 하고 감사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오해하여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도피하고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가르치고자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결론으로 '감사하는 삶'을 권면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여기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일, 즉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오늘 한해의 마무리하는 송년주일에 지난 날의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원치 않았던 질병과 사고, 실패, 수치와 치열한 싸움이 있었고, 뼈아픈 고통이 있었는데도 과연 감사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가 바울 사도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왜 범사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우리에게 다가온 수많은 사건들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그 사건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사건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를 생각하며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사건을 통해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까?"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을 비교해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연약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내 뜻대로 살았기 때문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탄식합니다.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내가 나의 어리석음과 완악함, 내 무지, 내 실수를 보면서 고통을 느끼며 탄식합니다. 그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실까요? 그 대답이 27절에 나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간구가 있는데 어떻게 실패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간구하시는 결과를 28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철학자들은 인간의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여 왔습니다. 아리스토델레스는 인간의 최고선을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같은 철학자는 그냥 행복이 아니라 도덕적 법칙과 결합된 행복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것에는 고난과 영광, 슬픈 일과 기쁜 일, 좋은 일과 안 좋은 일 등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포함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향한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지나온 한 해 우리가 겪어 온 아픔, 고통, 시련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말은 우리가 겪어온 모든 악한 일들이 다 좋은 일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분명히 나쁜 일은 나쁜 일이고, 악한 일은 악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생의 장에서 경험되는 나쁜 일이 나쁜 일로만 끝나도록, 악한 일이 악한 일로만 끝나도록 버려 두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나쁘고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과 개입으로 궁극적으로는 선한 일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35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나쁜 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요셉의 인생입니다. 요셉이야말로 얼마나 나쁜 일들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까? 형제들의 질투와 핍박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막의 웅덩이에 던져져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은혜를 잊어버린 관원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의 입술에서 불평이나 원망의 언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비밀을 요셉이 자신을 사지로 내몬 형제들을 만나서 고백한 창세기 45:5이하의 간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계속해서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어떻게 험한 세월을 보내었던 요셉이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그 사건 속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2014년에 일어난 모든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앞에 전적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번 같이 고백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 모든 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엉망입니까? 여전히 고통은 계속되고 여전히 환경은 그대로 있고 도대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원망이 저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환경이 변화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변화되어지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환경이 바꿔지기를 위해서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 다음이 환경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에 왔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환난과 시험을 통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때 까지 기다립니다. 그 기간이 무려 25년이 걸렸습니다.
야곱도 옛사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훈련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계속해서 훈련하셔서 마침내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도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의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뭘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그아들의 형상은 예수님의 형상입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악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위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고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권면을 들어봅시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해산을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악한 상황이 선한 상황으로, 실패의 환경이 성공의 환경으로 바뀌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가르치는 두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동안 우리를 나쁜 상황 한 복판에 두신 채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싼 고난의 상황은 우리의 인격을 연단하는 작업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인격적 주조의 가장 전형적인 모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29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마음에 두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할 모든 상황을 아시면서도 그런 상황을 통과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영광의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영광의 작업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통과해야 할 광야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작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은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시험장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때는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고 우리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광야를 지나면서도 물이 넘치는 오아시스를 지나면서도, 하늘에서 날마다 내리는 만나를 통해서도, 또 고기를 달라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주시면서도 언제나 저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주목하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시험의 기간이고 연단의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나 한해동안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 주셨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영광의 시험장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인 것입니다.
영광의 시험장의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생의 모든 것으로 그 분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랑을 배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슬픔의 파도 속에서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을 배우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불화의 딜레마 속에서 화평의 진리를 배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오래 참는 인격을 연단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억지로 손해 보는 경험을 통해 관용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온 결과물로서의 업적이 아닌 우리가 빚어온 인격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어떤 존재, 인격으로 빚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우리의 '존재'입니다. 이런 일생을 통해 하나님의 합격을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이 무슨 거창한 업적을 남긴 것이 있습니까? 굳이 업적이라고 한다면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시련들을 무던히도 잘 견디고 인내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내 종 욥"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표상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야고보서 5:11에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라고 증거합니다. 욥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지독한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 낼 수 있었을까요? 욥기 23:10이 그 대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온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순금과 같은 인격으로 연단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모든 시련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위로자를 자청하고 와서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만 주었던 친구들까지 용납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순간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완전하게 끝내셨습니다.
욥에 대한 연단의 작업의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됨을 보신 까닭입니다. 욥42:10을 보십시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렇습니다. 욥의 순금의 인격이 증명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욥에게 더 이상의 고난이 불필요한 것을 아시고 고난의 세월을 끝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축복의 드라마 제2막을 올리셨습니다.
이 일을 행하신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여러분 인생에 고난이 아직 안 끝났습니까? 그러면 아직 시험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시험에 임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함으로 기대하십시오. 시련을 이겨낸 순금같은 축복된 인생을 기대하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께서 내게 펼쳐 주실 인생의 제2막을 말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그 날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는 네 가지 구원의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1)"또 미리 정하신"-하나님의 예정, 2)그들을 또한 부르시고-하나님의 소명, 3)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칭의, 4)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영화
이 네 과정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황금사슬의 교리들(doctrines of gold chains)'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당신의 자녀로 정하시고 때가 찬 어느 날 복음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 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가 인생의 모든 상황속에서 인격적으로 연단하사 마침내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영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홀연히 우리의 몸이 변화될 것입니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합니다. 고린도전서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이처럼 온전한 몸으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 교회의 소망이요, 우리의 완성될 구원의 모습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하늘 새땅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할 것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사도요한이 보았던 새예루살렘성, 천국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한 부분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천국에 누가 들어갑니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돈갖고 지식으로 권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그 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환경보다 물질보다 무엇에 더 관심을 써야 합니까?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도들이 지혜로운 성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의 몸이 홀연히 변화하여 영화스러운 몸으로 바꾸리 것을 기대하며 오늘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합시다.
또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영광의 작업임을 깨닫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그날 우리의 몸이 홀연히 변화하여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할 것을 바라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