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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교수-
[프롤로그]
이 책에서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맞고 보내며 인생과 사회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더 늦기 전에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과제들을 모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문제를 먼저 제시하고 이론적 설명을 찾기보다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하고 처리하는 삶의 지혜를 추구해 보고 싶었다.
나는 우리 50대 이상의 어른들이 독서를 즐기는 모습을 후대에게 보여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시급하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행복인 동시에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진입, 유지하는 애국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나이들어 느끼는 하나의 소원이기도 했다. -2016년 여름- 1. 똑같은 행복은 없다.
[성공하면 행복할까]
행복은 모든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며, 같은 내용이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행불행이 달라질 수 있다.
[인격 수준과 재산의 관계]
내가 항상 가족들이나 제자들에게 권하는 교훈이 있다. “경제는 중산층에 머물면서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이 행복하며, 사회에도 기여하게 된다.”는 충고이다.
재산은 인격의 수준만큼 갖는 것이 원칙이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다 떠나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70대 후반부터 80대가 되면 얻어지는 것은 없고, 잃어가는 것이 현저히 많아진다. 그렇게 왕성했던 소유욕까지도 사라진다. 소유해보니까 별 것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소유해 보겠다는 욕심조차도 약화되고 만다.
93세 되는 가을, 나는 자다가 깨어나 메모를 남기고 다시 잠들었다. “나에게는 부 별이 있었다 진리를 향하는 그리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이었다. 그 짐은 무거웠으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향백의 나이가 된 지금도 누군가가 저기에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다.
2. 사랑 있는 고생이 기쁨 이었네
나는 아내를 보내고 몇 해 동안 그런대로 지냈는데 보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내 신세가 초라해 보였던 모양이다.
내가 84세때 20여년을 병중에 있던 아내가 내 곁을 떠났다. 그보다 7년 전에는 100세를 사셨던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가셨을 때는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쌀가마니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슬프기는 했으나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백수를 사실 때까지 건강하셨고 자식이나 손주 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병중에 있는 아내보다 먼저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렇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마저 보내고 나니까 나머지 쌀 한가마니까지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짐은 내려놓았는데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지? 하는 허전함을 느꼈다.
내 아내는 인생의 목표가 나를 돕는데 있었다. 내가 없으면 삶의 모든 미래와 희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애들이 있으니까 절망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인생의 전부였다.
[황혼기 이혼에 관하여]
나 같은 사람은 예수의 교훈 이상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찾을 길이 없어 신앙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열심히 싸우는 부부는 이혼하지 않는다]
아내가 20여년 병중에 있다가 먼저 갔다. 13년 전이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부부싸움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는 모르겠으나 60이 넘어서는 안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비결은 간단했다. 한 장로의 얘기다. 밖에 났다가 집에 들어서면서 목사님은 항상 사모님의 눈치와 안색을 먼저 살펴본다. 좀 이상하다 싶으면,그저 내래 잘못했지요...“라면서 인사를 대신한다. 사모님이 ”내가 뭐라고 했소?“라고 말하면 ”그러니까 내래 잘못했다는 거지요....“라면서 또 사과한다. 그러면 사모님이 말없이 지나간다는 얘기였다.
대부분의 부부는 나이 들수록 부부싸움을 많이 한다.
[뜻대로 안 되는 자녀 교육]
인생은 50이 되기 전에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녀들을 키울 때도 이 얘들이 50쯤 되면 어떤 인간으로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생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 가정은 기독교와 더불어 자랐다. 나 자신이 그러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얘들에게 신앙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결정하는데 기독교 정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알려주고 싶었다. 신앙은 가장 소중한 인생의 선택이다.
3. 운명도 허무도 아닌 그 무엇
인생의 목적과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두 가지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 하나는 인생은 운명적인 존재라는 결론이다. 인도의 업보사상이 그랬고 동양인들의 운명론도 그랬다. 인과법칙을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고 자랑했던 그리스 철학자들도 운명론을 극복하지 못했다.
운명적 존재인 인간도 영원 앞에 서게 되면 결국은 허무로 돌아가게 된다. 수백 광녕의 시간 속에서 100세 시대를 떠들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달나라에서 바라다 보았을 때 A군의 키가 B 군의 키보다 10cm가 더 크다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 그지없다. 결국 유는 무로 화하고, 존재는 비존재인 허무로 돌아가고 만다. 존재의 무의미를 우리는 허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글들을 쓸 때는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면 무엇인가?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둘 다 아닌 또 하나가 있었던 것 같다. ‘섭리’였던 것 같다.
[현대인에게도 종교는 필요한가]
어떤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한 사람이 ‘무한’이라고 불러서 좋은 넓은 강가에 서서 당 저편을 응시하고 있다. 그때 한 사람이 옆에 다가와서 ‘나는 당신이 젊었을 때 이 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디서 헤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느냐? 고 물었다.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시간과 더불어 살면서 어떤 영원한 것이 있는가 싶어 여러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학문과 예술이 있는 곳도 갔었고 정치나 경제적 이념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영원은 없었습니다. 더 늙기 전에 혹시 이 강을 건너 저 피안에는 영원이 있을까 싶어 다시 이곳까지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옆에 섰던 사람은 다시 돌아가 찾아보세요. 이 강은 건널 수도 없고 한 번 건너가면 되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라고 권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은 다 다녀보았습니다. 다시 간대도 저에게는 해답이 없을 것입니다. 알고 싶은 것은 이 강 저 편에는 영원이 있는가 묻고 싶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옆의 사람이 강 저편에는 영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강을 혼자 건널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건너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강가에 섰던 사람이 다시 물었다 강 저편에는 영원을 확증할 무엇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강 이편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강 저편으로 가겠다고 결단을 내린다면 내가 안내해 드리지요 그러면 나를 찾아온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인생에 걸쳐 단 한 번이면서 마지막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를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라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선택과 결단은 그런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기독교의 경우 과거에는 자신을 믿고 스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살았으나 이제부터는 예수의 교훈과 삶의 내용을 나의 가치관과 인생관으로 삼고 살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다. 그것은 스승이나 존경하는 어떤 사상가의 교훈보다도 예수의 교훈 이상이 없고 사회적 희망을 안겨주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교훈이 내 인생의 진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따르는 동안에 어떤 은총의 체험을 통해 확고한 생의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은총의 체험이란 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윤리적 규범과 합치되면서도 초월하는 것이다. 자연세계에는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을 어기거나 거부하면 삶이 유지되지 못한다. 그것은 법칙인 동시에 자연적 질서라고 보는 편이 더 좋을지 모른다. 그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질서들이다. 경험과학에 속하는 규범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삶은 그것으로 채워지지 못한다. 그와 더불어 어떤 정신적 질서가 있어 삶의 역사와 사회적 가치가 성립된다. 원리적 귭머도 있고 선의의 가치도 있다. 정의의 규범과 질서도 있다. 평화를 위한 의무도 있고 불의를 억제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도 있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와 질서가 무너진다면 인간들의 삶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적 ㅅ람의 전부라면 종교의 필연적 가치는 인정되지 못한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그 정신적 가치와 질서 속에 어떤 은총의 가치와 질서를 체험하는 때가 있다.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체험을 통해 신앙의 높은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은총의 선택이 그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선택을 받고 있다는 체험이다. 성경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인간적 자유에 의한 것도 아니고 자연이나 정신적 질서를 넘어선 어떤 부르심을 받는다든지, 택함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런 체험은 역사를 통해 수없이 나타나며 종교의 생명적 흐름을 주도해왔다.
그와 맥을 같이하는 은총의 체험 중의 하나는 섭리의 체험이다.
쇼펜하우어는 “젊었을 때는 모두가 자유를 외치다가도 늙으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인정하게 된다” 고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운명론자가 된다는 뜻이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보면 운명론도 허무주의도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인생관이 있다. 그것이 섭리의 길이다 섭리를 거부할 수도 있고, 섭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소유하는 종교적 경전인 구약과 신약은 사실 역사적인 기록이다. 그런데 그 모든 기록은 섭리에 대한 인ㄱ나적 해석이다. 섭리는 자연법칙 속에는 없다. 윤리나 도덕 질서 안에도 없다. 섭리의 주관자는 자연과 인간을 떠난 제 3의 실재이다. 구약과 신약은 그 인격적 타자를 신이라고 불렀고 또 유일신으로 믿고 살았다.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나와 신’, 세계 역사와 신의 관계를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섭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그 섭리에 해당하는 체험을 쌓아온 것이다.
[흑과 백 사이의 수많은 회색]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가장 어른다운 대접을 받은 때가 언제쯤일까. 70세를 넘기면서부터 몇해 동안이었던 것 같다. 80이 지나고 나니까, 어른보다는 늙은이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색에는 네 가지 원색이 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이다. 그 네 원색이 밝은 방향으로 삼각형의 한 방향과 같이 올라가면 끝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 흰색이다. 그와 반대로 네 원색이 어두운 방향으로 내려와 모든 색이 다 사라진 정점에 이르면 흑색이 된다. 이때의 백과 흑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ㅅ리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모든 색이 다 채워진 원점도 없고 다 사라진 끝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가정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면 흑과 백을 연결짓는 중간색이 있는데 그것이 회색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의 현실 속에는 백과 흑은 존재하지 못한다. 오로지 밝거나 짙은 회색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가장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회색ㅂ누자이다. 그것은 원리적으로는 악이 되고 논리적으로는 거짓이 된다. 그렇다고 회색을 모두 배제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삶의 현실은 내팽개쳐지게 된다. 그러니까 흑백논리를 가지고 싸우는 동안에 인간 사회는 버림받거나 병들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나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그렇다. 비교적 선한 사람과 정도에 따라 악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앵글로색슨 사회에 비하면 독일 민족이 흑백논리에 가깝고 독일적 사고, 즉 대륙적 사고방식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절대 유일이면서 흑백론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프랑스나 독일의 합리주의보다 경험주의 가치관을 개발했다. 합리주의가 논리적 가치를 추구한 데 비해 경험주의는 실리적 가치를 존중히 여겼고, 합리주의자들이 이상에 현실을 맞추어간 데 비해 경험주의자들은 현실에서 이념을 거쳐 더 높은 현실을 추구했다. 이에 비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현실은 하나의 이념을 위한 수단과 방법일 뿐이다.
어떤이들은 경험주의는 발이 커지는데 따라 신발을 바꾸어 신으면 된다고 보는데 비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구두에 발을 맞추어가는 우를 범한다고 말한다. 발을 잘라서라도 신발에 맞추면 된다는 식이다. 경험주의자들은 그 표준을 공리주의에 두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를 모색, 추구해가면 된다고 본 것이다. 그 사고가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민주주의를 창출했고 경제에 있어서는 복지사회주의를 정착시킨 것이다. 미국은 다시 그 뒤를 계승해 그 방법이 무엇인가를 모색했다. 그 결과 탄생된 것이 실용주의 철학과 가치관이다. 어떤 독일의 철학자는 그것을 열매 많은 것이 사회적 진리라고 평했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정신적 과제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사회과학적 가치의 기준이 되는 휴머니즘과 인간애의 가치이다. 궁극적으로 열려 있는 사회를 위한 이상이다. 이 모든 노력의 목표는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열린 역사의 길을 개척하는 데 있다.
[죽음에도 의미가 있는가]
90 고개를 넘기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곤 한다.
죽음이 아주 가까이까지 와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로 하자. 조만간 죽음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의 빈 그릇에 어떤 ㅅ람의 내용을 채워 가겠는가?라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일에 최선을 다하다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값있는 인생을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죽음을 예상하기 이전보다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게 될 것이다.
4.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인간다운 삶의 궁극적 목적]
인간다운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학문도 귀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다. 예술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을 즐기는 사람은 특혜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다. 교회와 신앙생활도 축복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죽음과 싸워가면서 생명을 유지해야 할 사람들은 삶 자체의 여유가 없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삶의 가치와 행복을 그대로 상실하고 만다. 그들이 버림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학문을 즐기고 예술을 찬양하며 교회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생의 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슈바이처는 자신을 위한 모든 삶의 소유와 자산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5. 늙음은 말없이 찾아온다
-구름 사진가가 되면 어떨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은, 사진 기술을 배워가지고 구름을 찍어 사진으로 찍는 작업이다. 그런 작업을 한 사람의 사진첩이 있다면 구해서 보고 싶은데 아직은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하늘과 구름 그 속에는 무한에 가까운 예술품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한다. ‘구름 사진가’ 그런 예술가도 있었으면 좋겠다. [Review]
"백년을 살아보니"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말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렇게 책을 쓰신 분이 교수님 한 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학자로서 고답(高踏)한 철학 교수님의 글이지만 이제는 그 복잡한 학문의 수식어들을 다 떼어내고 오직 자신의 모습만을 담담하게 진술했다는 느낌이 든다. 1920년생이시니 올해가 지나면 우리 나이로 백 한 살이 되신다. 아직도 가끔 방송이나 신문에서 얼굴을 뵐 수 있으니 건재하시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실 것 같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교수님을 떠올릴 때마다 따라오는 수식어다. 그래서 지금처럼 서로에 대한 비난과 증오심으로 갈등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더욱 빛이 난다. 두세 사람만 모여도 시국 이야기로 얼굴을 붉히다가도 교수님의 이야기가 등장하면 분위기가 바뀌고 잠잠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항상 웃는 얼굴, 특히 웃으실 때 이가 모두 드러나는 특유의 입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러나 그 특유의 미소가 어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셨을까. 과학자들은 사람은 얼굴 근육 두 개만 움직여도 300가지 조합이 생겨난다고 한다. 세 번째 근육을 추가하면 400가지가 넘고, 다섯 가지를 조합하면 얼굴 형상이 1만 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항상 삶의 소중한 실천으로 여기며 만들어낸 교수님만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백세를 사셨지만, 아직도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남아있다고 하셨다. 행복의 비결이 물질에 자족하는 마음이요, 정신으로는 끝없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다는 뜻이 책 속에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런 뜻에서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정신적으로는 상위층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교수님에게도 후회는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그 후회는 좀 더 사랑하지 못함이었다고 고백했다. 수상을 받는 자리에서 소감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제가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90이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아오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한 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정성껏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해주고 싶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은 저와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새 출발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제 나이가 되면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과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것으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 십 년 동안 아내의 병시중, 임박한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 기독교 신앙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리하지 말고 열에 하나는 남겨두라는 말씀, 그리고 제자들과 동료 교수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담았던 이야기들이 이 책 속에 들어있다. 특히 동년배로서 한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고 안병욱. 김태길 교수님과 남다른 우정을 고이 간직하고 계신 모습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젊은이들에게는 50이 되면 자신의 모습이 어떠할까를 미리 생각해 보라는 말씀도 가슴에 닿는다.
그러나 이 책은 젊은이들보다는 나이가 더 든 분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유익하다고 본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한(悔恨)과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가?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직도 막연한 꿈과 근심에 눌려 있다면 이 책 속에서 평생 가장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진리를 찾고 실천한 모델을 발견하고 새로운 꿈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찌 생활하시는지 근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책 말미에 하신 말씀이 여운처럼 남는다.
" 누구 곁으로 갈까 했으나 이제는 누가 내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을까, 하는 마음이다.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여인이 곁에 있으면 고맙겠다. 그러나 내가 떠난다고 해서 아픈 마음을 갖지 말고 조용히 감사히 생각할 정도로 성숙된 인간애를 갖춘 여자였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슬퍼할 여인이어서는 내 마음이 무거워질 것 같다. 미소를 머금고 보내줄 사람은 없을까. 이별까지도 감사히 생각하며 보내줄 수 있는……. 그런 여성이 없다면 요양병원에 있는 의사, 간호사같이 사람들을 위해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지내다가 감사한 마음을 안고 떠났으면 좋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