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계탕
1390년경부터 개성과 그 이북 지방에서 유행하던 국요리.
주 재료로 이성계가 쓰이며 이성계 팔다리뼈를 우려낸 사골육수에 삶은 이성계 고기를 국거리로 넣어 만든다.
비계살이 많은 부위를 주로 쓰였으며 채소가 적게 나는 평안도 지방의 특성 때문에 파 이외에 정해진 채소 재료는 없으며 철에 따라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를 곁들여 넣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대중 사이에서 역시 사람이야 소나 돼지와는 격이 달라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절묘한 맛으로 호평 받았다.
당연히 실제로 이성계를 끓여 만든 탕은 아니다.
이성계의 고기를 씹는다는 의미에서 유행하던 음식으로,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 정벌이 좌절되고 최영 장군이 실각, 처형되고 고려왕조가 멸망, 조선이 건국되면서 살아남은 최영의 지지자들이 은밀하게 최영의 제사를 올리면서 제삿상에 올린 삶은 돼지고기에 이성계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아 성계육이라고 부르며 먹던 것이 바리에이션이 생겨 성계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으로 퍼져 나갔다.
그 당시 보존기술의 한계와 요리의 편의성 때문에 삶은 돼지고기 수육인 성계육보다는 국물이 있는 성계탕이 좀더 보존성이 좋고 적은 재료로 풍성하게 먹을 수 있어 민간 사이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
평안도 지방에서 원래부터 존재하던 돼지고기 사골국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성계탕은 밥 대신 좀더 돼지고기 건더기를 풍성하게 넣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현재 이와 가장 비슷한 음식이라 한다면 부산광역시의 향토음식 돼지국밥이 있다.
실제로 돼지국밥의 유래 중 이북 전래설이 있는데, 이쪽을 따르면 성계탕은 돼지국밥의 친척뻘 되는 음식.
고려대학교 국문과 유영대 교수가 집필한 책 '이성계설화'에 보면 조랭이 떡국도 이성계를 향한 디스용 음식이었다고 한다.
조랭이 떡국에 들어가는 특유의 누에 모양 떡을 만들 때 대나무 칼로 떡을 비트는 행위나 먹을 때 동그란 부분만 이빨로 끊어 먹는 행위를 이성계 목을 비틀어 죽이는 것으로 비유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성계를 모욕하기위한 정신승리탕 이라고 보면된다.
2. 우투리 설화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는 다음과 같아...
가난하게 사는 집안에 지리산 산신이 점지한 아기가 억새로 탯줄을 자르고 태어났다.
아기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서 천장으로 날아오르는 등 비범한 능력을 보여서, 이름을 우투리라고 불렀다.
우투리는 콩·팥 등의 곡식을 가지고 바위 속에 들어가 새 나라를 세우고자 수련을 하였다.
이때 이성계가 왕이 되기 위하여 산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팔도를 돌아다녔다.
한 소금장수가 이성계가 지낸 제사가 부정하여 산신들이 받지 않았다는 나무들의 대화를 듣고,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 제사를 다시 지내게 하였다.
다른 산신들은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을 찬성하였는데, 지리산 산신은 우투리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이성계는 우투리 어머니를 찾아가 거짓 혼인을 하였다.
우투리 어머니는 남편이 된 이성계가 끈질기게 우투리의 종적을 캐묻자, 그를 믿고 우투리가 있는 곳을 일러 주었다.
이성계는 이제 때가 되어 용마를 타고 막 거의(擧義)주 01)하려는 우투리와 그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 뒤 왕이 된 이성계는 지리산 산신을 귀양 보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우투리설화)]
이성계가 훌륭한 인물이고 고려인들에게 환영받는 인물이었다면 과연 이런 악담수준의 설화나 전설들이 현재까지 전해졌을까?
이런 설화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이성계를 당시 고려사람들은 침략자로 여겨서 굉장히 증오했기때문에 가능했던거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은 당대 고려인들도 반기지 않던일로 명분도 정통성도 없던 일이었다.
고려가 정말 조선왕조가 말했듯 나라가 나라가 아닌 쓰레기 왕조였고 이성계의 행동이 옳았다면 백성들이 저런 설화를 남겼을까?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나라를 세웠지만 이전왕조였던 신라의 역사를 지우지않았다.
오히려 신라인을 포용하고 계승 발전시켜서 더 좋은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고려의 역사서를 불태우고 흔적을 지워버렸다.
역사를 숨기고 백성을 통제하면서 왕조 유지하기에만 급급했다.
그짓을 지금 3대 독재 국가 김씨왕조가 그대로 따라하고있고..
역사는 반복된다.
최영이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개경의 상인들은 모두 가게 문을 닫아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 최영 장군의 시신이 길가에 누워있으니, 그동안 행인들도 모두 최영 장군의 시신을 훼손할까 두려워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무인으로서의 활약도 레전드 급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의 행동만 봐도 그는 단순한 명장이 아닌 고려의 수호신이자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40년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내고, 왕실의 존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쳤으며, 장군과 재상을 겸했으나 쌀궤는 항상 텅 비어있었고 단 한 번도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공을 세울 뿐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시대의 영웅이었던 최영은 형장에서 처형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최영의 죽음과 함께 고려의 운명도 끝에 이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