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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태일 목사
요즘 날씨를 보면 봄이 오는 것을 상당히 시샘하는 것 같습니다. 절기상으로 지난주 3.6(목)이 경칩입니다. 옛부터 경칩에는 개구리가 긴 동면을 깨고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다가옴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요즘 날씨를 보면 어떤 때는 완연한 봄 날씨같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찬바람이 불다 영하의 날씨로 내려가고 눈이 좀 오다가 비로 바뀌고 다시 눈이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강원도 동해쪽에는 30-40cm 이상의 폭설이 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날씨의 변화를 보면서 때로는 우리의 삶도 그러하고, 영적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늘 좋은 날만 있는 것 아니고 늘 건강한 것만 아님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형통한 날이 있는가 하면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쥐구멍이라도 별들 날이 있다"는 말처럼,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되듯이 서로 왔다갔다 합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여당이 야당되기도 하고 야당이 여당되기도 합니다. 올라 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권력이나 부를 쥐기도하지만 그것을 다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경제적으로 보아도 실패하기도 하고 부도가 나기도 하고 기업이 사업이 잘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형통한 날이 왔을 때에는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곤고한 날이 왔을 때는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괴로워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는 두 가지 착각입니다.
지구촌 어디에서 살아가든 모든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의 삶은 기쁨과 고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밤과 낮이 있고, 여름과 겨울이 있듯이 인생의 삶에도 행복이 있나 싶으면 곧 불행이 찾아오고, 절망 속에서 고통의 삶을 사나 싶으면 다시 찬란한 여명이 깃드는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성도라고 해서 항상 형통한 일만 계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안믿는 불신자라고해서 곤고한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누구나 가는 길에는 순탄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경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가 있는 반면에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칫하면 환경자체를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따라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 용기를 잃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발생하는 제반사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결코 우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계획임을 믿어야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과 환난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생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시련과 환난을 당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 시련을 당하였을 때에라도 그 시련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채 불평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처럼 시련을 회피하거나 불평하는 행위를 금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개인의 삶의 행로를 굽게 하시고 환난을 주셨다면 그 환난은 환난을 당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아름다운 계획에 한 부분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게 하사" 그랬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하나님께서 병행케 하시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형통이요, 다른 하나는 곤고라고 하였습니다. 형통과 곤고한 날들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통한'이란 말은 '좋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이란 '성공한 날', '번영의 날', '평안의 날',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즉 육신적으로 강건하고, 사업이 잘되고, 영적으로 평안한 때를 말합니다. 이런 삶을 누구나 다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성도는 어떻게 해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을 순종할 때입니다.
신명기 29:9에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여호수아 1:8에도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수1:7,왕상2:3).
2) 하나님을 구할 때입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 교회를 사랑할 때입니다.
시편 122:6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4) 회개할 때입니다.
잠언 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5) 부지런할 때입니다.
시편 128:2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구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며 부지런함으로 살아갈 때 형통케 됩니다. 결코 인간의 잔재주를 가지고 형통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통할 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뻐하라'는 말은 '좋게 되라' '행복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좋은 시대에 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때를 이용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형통한 날은 성공하는 날이요 기뻐하는 날이요 영광의 날입니다. 이런 날을 맞이하면 보통 사람들은 교만하여 쾌락과 방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형통하다고 해서 먹고, 놀고, 마시고 인생을 엔조이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사업이 잘될 때, 정신 차려서 바로 믿으라는 것이고, 몸이 건강할 때, 정신 차리고 예수를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더욱 겸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나의 형통은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좋은 시절에 방종하여 게으르며, 교만하며, 특별히 불신앙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평안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육체를 많이 위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너무 고파도 힘이 없어 일을 못하지만 너무 배가 부르면 잠이 오고 몸이 둔해지고 일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일이 잘될 때, 형통하게 될 때 방탕하기 쉽습니다. 가난하고 궁핍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는데, 부하게 되니 교만하여지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배반하는 성도의 모습들이 비쳐지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박해가 없을 때는 오히려 세속화되어 타락하는 경우들이 많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시대를 만났으면 또한 언제든지 좋지 못한 곤고한 날이 다가올 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변함없이 믿음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12:4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형통한 날을 만났을 때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잃지 않고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솔로몬은 전도서 3:12에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라고 하였습니다. 전5:19절을 보면 "즐거워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뻐하며 행복을 누리며 선을 많이 행하시기를 바람니다.
2.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에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곤고'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보면 '곤란하고 괴로움'을 뜻합니다. 일이 뒤틀릴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이란 환난의 날이요, 실패의 날이요, 불행의 날이요, 재난의 날을 말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지배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언제 이런 곤고한 날이 다가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1) 하나는 하나님이 성도를 훈련하시기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고(욥이라든가 다니엘과 세 친구라든가...)
2) 또 하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오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곤고한 날에 쉽게 비관하며,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역대하 28장 22절에 보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곤고한 날에 성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본문에 보면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말은 '보다', '관찰하다', '숙고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씀은 고난과 역경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잘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곤고한 때에는 보라는 말씀입니다. 왜 내게 곤고가 왔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곤고가 다가오면 그만 낙심부터 합니다. "아! 온 세상이 날아가 버렸구나. 이제 나는 혼자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먼저 찾아내고 다음에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곤고한 때에 생각하라고 하셨을까요? 인간은 곤고한 때에 가장 생각이 분명하고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병원에 갔다가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기도 하고 사람이 못고칠 병도 많고 아픈 사람도 많고 죽는 사람도 많그나.... 보통 때에는 건강은 누구나 누리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건강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런데 건강을 한번 잃어봐야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괴로움의 시간은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적당한 때입니다. 여지껏 보지 못하던 것을 곤고한 때에는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일이 잘 안되고 너무 아프고 힘들고 사업이나 직장, 인간관계속에서 힘들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일이 뒤틀릴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이 일이 주님의 섭리안에 이루어졌음을 감지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곤고한 날에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 고난을 통해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에 그 곤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71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곤고한 날에는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입니까?
첫째는 왜 내게 이 고난이 왔는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기도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는 절대로 우연히 오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또 잘못을 반복해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곤고가 죄를 회개하라는 말인지, 아니면 겸손하라는 신호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라는 말인지 그 곤고의 뜻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곤고의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죄 때문에 오는 경우와, 다음은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 곤고가 온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곤고가 올 때에 인생이 얼마나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아무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곤고가 다가옵니다. 물질을 너무 의지하다가 세상의 권세를 너무 의지하다가 곤고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바라보시기 바람니다.
셋째는 곤고가 우리에게 올 때에 우리는 어떻게 내가 이 곤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이란 바다에는 때때로 파도가 쳐옵니다. 인생의 파도가 높이 치면 칠수록 그것은 항구가 되시는 주님의 품에 안기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인만 알면 그 다음에는 쉽습니다. 사람의 질병도 자동차도 기계도 무엇도 원인만 제대로 알면 그만큼 쉽게 고칩니다.
죄 때문에 고난이 왔으면 회개하면 되고, 나를 연단시켜 정금과 같이 쓰시기 위해 고난이 왔으면 참고 견디면 그 어두운 터널만 지나가면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을 때에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 됩니다.
♬ 342장,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곤고한 날이 닥치면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결코 땅을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요, 하늘을 상대하는 신령한 자들입니다.
시편 34편 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곤고한 날에, 괴로울 때 주님을 바라봅시다.
찬양의 노래처럼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몸소 고난을 당하셨고 또 이 고난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곤고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그 괴로움에 빠져 방황하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괴로움들은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두가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유한한 인생은 무지하고 연약하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영적 소경입니다. 언제 형통한 날이 있을지, 어느 때 곤고한 날이 있을지 도무지 장래 일에 대해서는 무식한 자들입니다.
몇분은 고사하고 몇초 후에 일어날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줄 알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잇을줄 알았다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불을 내지도 마스콘키를 뽑고 방화샷다를 내리고 은폐내지 조작하는 일을 안했을 것입니다.
부산 지하철에서 대구 지하철화재사고로 놀란후라 어느 역에서 연기가 나니까 당장 전철이 멈춰 서고 무전을 치고 대피방송을 하고 대피하느라 야단법썩을 떨었다고 합니다. 후에 조사해보니까 공사장에서 쇠통에다 나무를 넣고 태운 연기가 환기구를 타고 들어가 지하도에 연기가 났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예민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 후에 일어날 그런 일을 알았더라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잘해 주었을 것입니다. 더 열심히 일했을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형통의 날과 곤고한 날이라는 두가지 실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의 아름다운 수를 과거에도 놓으셨고, 현재도, 앞으로도 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케 하심으로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도록 섭리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곤고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기쁨을 행복을 누리며 사용하며 헌신하며 사시기를 바람니다. 잘된다고 계속 잘될 것이라고 자만하지 말고 형통할 때 물질이든 건강이든 은사이든 직분이든 사람이든 있을 때 잘 하시기 바람니다. 있다고 엉뚱한데 펑펑 써도 안되고 곤고한 날을 대비해 많이 저축해두시기 바람니다.
곤고한 날에는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원인을 허물을 부족함을 회개하며 생각하며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며 정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잘 안된다고 없다고 낙심말고 끝장이구나 원망하지 말고 곤고한 자들에게도 머지 않아 연단이 다 끝난 후 다시 형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깨닫고 인내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날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행복하게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