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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논이 다말을 내쫓음
(사무엘하 13:15~22)
* 본문요약
다말을 욕보이고 나니 다말을 향한 암논의 마음이 극도로 증오하는 마음으로 돌변합니다. 암논은 다말을 마치 천한 계집 쫓아내듯 밖으로 내쫓고는 문을 닫고 문빗장을 질렀습니다. 이에 다말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채색옷을 찢고, 머리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압살롬이 다말을 위로하고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합니다. 다윗이 이 모든 것을 알고 크게 분노하였으나 암논을 징계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잘잘못을 일체 말하지 않았으나 그 마음에 암논을 향한 증오심을 키워갑니다.
찬 양 : 190장 (새 258) 내 주의 보혈은
198장 (새 264) 정결하게 하는 샘이
* 본문해설
1. 암논이 다말을 내쫓음(15~17절)
15) 그렇게 다말을 욕보이고 난 후에 암논이 다말을 심히 미워하니(극도로 증오하는 마음으로
돌변하였으니), 지금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훨씬 더 커졌습니다. 암논이 다말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습니다. “여기서 당장 일어나 나가거라!”
16) 다말이 암논에게 말했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고서 나를 쫓아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 큽니다.” 그러나 암논이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17) 자기의 시중을 드는 하인을 불러 명령하였습니다.
“이 계집을 당장 내 앞에서 쫓아내고, 문을 닫고 문빗장을 지르라!”
- 심히 미워하니(15절) : 매우 심한 극도의 증오심을 뜻하는 것.
2. 고통 가운데 울부짖는 다말(18~19절)
18) 암논의 하인이 다말을 밖으로 끌어내고, 문빗장을 질렀습니다. 그때 다말은 소매가 긴
채색옷(색동옷)을 입었습니다. 공주들은 시집가기 전에는 옷을 이렇게 입었습니다.
19) 다말은 머리에 재(먼지)를 뒤집어쓰고, 자기가 입던 채색옷을 찢고, 머리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울며 떠났습니다.
-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옷을 찢고, 머리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울며(19절) :
이런 행위는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그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는 여인들의 애곡의식입니다(창 37:29,34, 삼상 4:12). 때때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수 7:6, 왕하 22:11), 치밀어 오르는 분노나 슬픔을 표시할 때(민 14:6, 삼하 13:31, 15:32)에도 이런 행동을 합니다. 여기에서는 다말이 이제 자기 인생은 죽은 것과 같다는 의미로 애곡의식을 행하였습니다.
3. 암논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가는 압살롬(20~22절)
20) 다말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물었습니다.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너를 건드린 자가 네 오라버니 암논이냐?) 얘야, 암논도 네 오라버니이니 지금은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말고 잠잠히 있어라. 이 일로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그리하여 다말은 자기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습니다.
21) 다윗왕은 이 모든 일을 듣고 몹시 분노했습니다.
(70인 역에는 이런 구절이 첨가돼 있습니다. )
다윗 왕이 암논을 징계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자기의 장남이었으므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22) 압살롬은 암논이 자기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앙심을 품었지만,
암논에게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잘잘못을 일체 말하지 않았습니다.
* 묵상 point
1. 암논이 다말을 밖으로 내쫓아버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말을 취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간절함을 갖고 있던 암논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치르고 나니 다말을 향한 생각이 극도의 증오심으로 바뀝니다.
1) 감정의 극적인 반전
암논 안에 있는 감정의 극적인 반전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상사병까지 걸릴 만큼 사랑했던 사람을 바로 그 자리에서 정 반대로 극도로 증오할 수가 있을까요? 암논이 다말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남녀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진실 된 것이라면 상대방의 연약함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단지 욕망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그 욕망이 해소되고 난 후에 상대방은 더 이상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암논의 마음이 이렇게 돌변한 것은 그는 다말을 결코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덧없는 욕정이 지나고 남은 것은 좌절감과 허무뿐
덧없는 욕정이 지나고 난 후에 남은 것은 좌절감과 허무뿐입니다. 내가 이런 정도의 욕망도 이기지 못했나 하는 패배감만 남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의 후유증이 크기에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그 욕망의 자리를 찾게 됩니다. 적어도 그 욕망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유혹에 넘어진 패배자라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회하다 또 찾고, 넘어지다 또 찾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치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그것들이 결국 나를 파멸로 이끌 것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악마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고통과 슬픔과 절망만 안겨준다.
악마는 이렇게 그의 추종자들에게 술과 마약처럼 죄에 중독되게 합니다. 계속 그 죄의 쾌락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슬픔과 절망만 안겨줍니다. 죄의 쾌락이 클수록 그 때의 고통과 절망감 또한 큽니다. 다말을 향한 암논의 마음이 극도의 증오심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조금 전에 그가 경험한 죄의 쾌락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이나 마약이나 그 밖의 세상의 죄의 쾌락 속에 빠져 살더라도 고통과 절망이 없이 영원히 그 쾌락 속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예수께서도 굳이 그것을 죄나 악이라며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쾌락 뒤에는 반드시 고통과 절망과 멸망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결코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죄에 빠져 있는 동안만 그 죄의 쾌락을 느낄 뿐입니다. 암논이 그랬던 것처럼 그 마지막에는 고통과 절망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내 감정을 휘두르는 악마
처음에 암논이 다말을 보며 그 사랑하는 마음에 죽을 것 같았던 것도, 그리고 일을 치르고 난 후에 극도의 증오심을 품었던 것도 모두 암논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마귀가 암논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한 것입니다. 암논은 그 모든 것이 자기의 감정인 줄 알고 그저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다 다말로 슬프게 하고 자기도 파멸됩니다.
● 묵상 :
내 마음에 있는 미움과 증오심, 염려와 걱정, 집착과 질투, 좌절과 절망감이 내 감정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이런 감정이 내 안에 불같이 일어나면 누군가 내 감정에 불을 지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께 내 감정을 조절해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마귀가 내 감정을 가지고 계속 장난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2. 죄의 아픔을 피해자 다말에게 뒤집어씌우는 암논
1) 그 고통은 비록 늦었더라도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라는 경고
죄의 달콤한 쾌락 뒤에 찾아오는 그 슬픔과 고통과 절망감은 또 한편으로 보면 비록 늦었더라도 자복하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죄의 쾌락 속에 빠져 있으면 말씀을 보아도 기쁨이 없고, 찬송을 불러도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저 슬픔과 고통뿐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이런 허무가 가득하다면 죄를 회개하라는 경고로 알고 시급히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머뭇거리다가 이때를 놓치면 마귀가 내 안에 죄의 독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사울과 암논처럼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2) 그러나 암논은 회개하는 대신 피해자 다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지혜가 있는 자라면 죄의 쾌감 뒤에 오는 그 허무와 절망감이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 앞에 찾아옵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이 그랬습니다. 비록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였으나, 그가 죄를 범하였다는 나단 선지자의 말 한 마디에 회개하는 신앙의 자리를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암논은 그 모든 절망감의 책임을 피해자인 다말에게 뒤집어씌웁니다. 마치 다말이 자신을 유혹해서 내가 이 더러운 죄에 빠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다말을 천한 죄인 취급하며 내쫓습니다.
3) 결국 파멸과 멸망을 택한 암논
다말을 불러들인 것도 암논이었고, 다말을 자기의 침대 가까이 오게 한 것도 암논이었으며, 강제로 그를 욕보인 것도 암논이었습니다. 그러나 암논은 단지 자기 마음이 허무하게 됐다고 해서 그 모든 책임을 다말에게 뒤집어씌우고 다말을 거리에 내쫓습니다. 그리하여 암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다말은 애원했습니다. “나를 내쫓는 일은 조금 전에 오라버니가 나에게 한 일보다 더 큰 악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의 일은 그래도 죄에 유혹이 되어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 유혹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기분이 좀 나쁘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다말을 가해자 취급하여 내쫓는 것입니다.
암논은 오라버니라는 권세를 이용하여 약자인 다말을 짓눌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연약한 자를 짓누르는 것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사울이 바로 그 죄로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3. 고통 속에 슬피 울부짖는 다말
다말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채색옷을 찢고 머리에 손을 얹고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여인들이 하던 애곡(哀哭)의식입니다. 다말은 이제 자기의 인생은 죽은 것과 같다는 의미로, 자기 자신의 곡절 있는 삶을 슬퍼하며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을 통하여 저 사악한 권세자 암논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슬픔의 고발을 첫째로 하나님께서 보셨고, 둘째로 그의 친 오라버니인 압살롬이 보았습니다.
● 묵상 :
내가 가진 권세로 연약한 자를 괴롭게 하는 이들은 더 큰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암논처럼 그 경고를 무시하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4. 다윗의 실수 : 분노는 하나 암논을 징계하지 않음
다윗이 이 모든 것을 듣고 크게 분노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분노만 하고 징계는 하지 않습니다. 왕자를 죽일 수는 없었을 테니 우리나라처럼 유배를 보내든지, 하여튼 다말과 압살롬의 마음을 진정시킬만한 어떤 징계라도 내렸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암논을 사랑하여 도저히 징계할 수 없다면, 반대로 다말과 압살롬에게 무엇인가 위로의 일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심신이 피패해져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암논에 대한 징계도, 다말과 압살롬에 대한 위로도 하지 않았습니다.
● 묵상 :
권세를 가진 이는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내리고 아픔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를 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이 바르게 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쌓여서 더 큰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5. 조용히 증오심을 키워가는 압살롬
그렇게 조용히 일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말이 친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서 패배자처럼 그렇게 처량하게 지내고 있을 때에 압살롬은 암논에 대하여 증오심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암논이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에 대한 잘잘못을 일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을 오히려 더 두려워했어야 했습니다.
● 묵상 1 : 권세를 가진 이들은 연약한 자들의 아픔을 잊지 마십시오.
권세를 가진 이들은 아픔을 겪은 자들이 말하지 않고 잠잠히 있다고 해서 일이 해결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마음에 분노를 쌓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묵상 2 : 마음에 증오심을 품지 말고 원수 갚는 이에게 넘기십시오.
그러나 압살롬 역시 그 증오심을 그렇게 품고만 있으면 결국 자기 자신도 파멸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수 갚는 일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가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면 나도 파멸되고 맙니다. 내 마음에 있는 증오심을 그대로 두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 기도제목
1. 이 땅의 권세를 가진 이들이 연약한 자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도록
2. 내가 가진 힘으로 연약한 자를 짓누르는 파렴치한 일을 행하지 않게 되도록
3. 내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는 마귀에게 이겨 승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출처: 가애교회 글쓴이: 송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