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국토 경주 토함산 산행(35차)과 석굴암(石窟菴) 불국사(佛國寺) 한시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청동산악회 산행팀 6명은 2026년 7월5일(일욜) 경주시 토함산으로 제35차 산행을 나섰다. 경주시 토함산(吐含山)은 높이는 745m이며,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은 경주국립공원의 대표적인 영산으로,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토함산은 바다와 가까워 안개가 자주 끼며, 마치 토함산이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토하고 머금는 산’이라는 뜻의 ‘吐含山’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부처님의 진리를 머금고 토해낸다’는 의미로 덧붙여 사용되고 있다.
오늘 경주 토함산 산행은 단순히 산 정상을 오르는 일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꿈꾸었던 불국토를 1300년의 시간을 관통해서 걸었다. 때론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옛 정취에 고요한 위로의 마음을 느끼며, 다시 현재 21세기로 되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잔뜩 흐린 날씨 속에 토함산이 남긴 불국토의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 우리 청동산악회원들은 2026년 7월5일(일욜) 아침 8시 30분에 ‘대구스타디움 동편 주차장’에 집결하여 불국사 주차장에 10시에 도착하였고 잠시 여장을 푼 후, 10시 10분 쯤 본격적인 등산을 할 수 있었다. 불국사 일주문 왼편 ‘경주국립공원 탐방 안내소’에서 시작된 등산은 드넓게 포장된 돌길과 계단이 넓게 이어져 있었고 산길 폭이 자동차 2대가 비켜 다닐 정도로 넓고 경사도 심하지 않아 순조로운 산행이 이어졌다. 약 40분 가량 등산을 하다가 ‘오동수 약수터(화장실)’ 인근에서 1차 휴식 겸 간식타임을 가졌다. 이어 대략 약 1시간 후, ‘석굴암 일주문(주차장)’에 도착하였고 여기서 ‘토함산 석굴암 일주문’을 통과해서 약700m 거리의 ‘석굴암’을 탐방하고 난 후, 다시 석굴암 일주문으로 돌아와 왼편 토함산 탐방로를 따라 산행을 이어갔다. ‘성화 채화지’에서 2차 휴식 및 간식타임을 가진 후, 추령을 거쳐 토함산 정상에 도착했다. 수많은 산의 정상에 올라 봤지만 토함산 정상석에서 느낀 감동은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아무런 특색도 없이 밋밋하다 보니 특별한 풍광도 없고 자연의 신비함이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화 채화지’ 또한 오묘하고 신비함과는 관계없이 조잡하고 장난스런 모습에 볼품이 없었다. 또 제단 옆에 성화 도구를 넣어 놓은 나무 상자가 유적지의 경관을 망치고 있어, 성화 채화지라는 자취와는 관계없이 그야말로 볼거리로는 최악이었다. 다만 1200년을 이어온 석굴암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자랑스런 문화유산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석굴암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사찰 목재사찰 건축물은 내부의 위대한 석굴암의 웅장함과 신비스러운 면을 우스광스럽게 만드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부탁하건대 밖에서 햇빛이 어느 특정한 시각에 석굴암 본존불을 비추는 그 아름답고 오묘한 석굴 건축의 경외심을 다시 되살려 주길 소망한다.
<청동산악회 35차 산행 안내>
(1) 토함산 산행 일정 : 불국사 공영 주차장 도착 ~ 토함산 탐방 지원센터 ~ 오동수 약수터 ~ 석굴암 일주문 ~ 석굴암 구경 ~ 석굴암 일주문 ~ 성화 채화지 ~ 추령갈림길 ~ 토함산 정상 ~ 불국사 원점회귀코스다. 대략 왕복 9km 미만(석굴암 탐방 포함)이고 산행 총시간은 3시간 40분 정도(휴식 3차례 포함) 걸렀다.
(2) 참고 : 토함산 최단 코스는 석굴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토함산 정상까지 갔다 오는 코스인데, 왕복 1시간 30분(왕복 3km)이면 두어 차례 쉬어 가도 충분함.
*모든 산행을 마치고 불국사 주차장에 돌아와 불국사 경내와 인근 지역을 구경하고 나니 또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어 자동차로 6~7분 거리인 ‘복주쌈밥’ 집(성산 선배 고향 동기)에 가서 불고기와 구운 고등어로 맛있게 식사를 하고 난 후, 돌아오는 길에 ‘경부고속도로 경산휴게소’에서 함께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먹으며 다음 36차 청동회는 8월2일 문경 주흘산 산행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내 헤어져 집에 돌아오니 오후 6시 15분이었다.
*이번 산행은 그간의 산행과 특별히 달랐던 점이 하나 있었다. 1차 휴식 때부터 평택에 근무하는 37세 미여군 ‘켈리’라는 분과 함께 산행을 시작해 불국사 탐방까지 이어갔다는 점이다.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유식한 영어 솜씨를 뽐내며 모두를 즐겁게 만든 운곡 선배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우리들의 자존심을 지켜준 성산 선배의 유쾌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켈리는 키도 크고 늘씬하며 미국인다운 수려한 풍모를 지닌 건강한 여성이었다. 스스럼없이 간식도 나누어 먹고 농담도 하면서 우리의 산행을 더욱 알차고 풍성한 이야깃거리로 만들어 주었다. 운곡 선배와 손까지 잡아주는 대범한 면까지 보여줘, 좌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록 끝까지 동행하진 못했지만 추억의 한 편린으로 남게 될 것 같다.
○ 이번 토함산 산행은 ‘자연의 품에서 만난 쉼과 자연과의 호흡의 시간’이었다. 거대한 대자연의 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번잡한 세상의 소음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들이마신 청량한 공기는 가슴속 깊은 곳까지 맑게 정화해 주었다. 발걸음마다 밟히는 흙과 돌, 바람에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는 지친 몸과 마음에 온전한 치유와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마침내 도달한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번 여정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토함산이 준 생명력의 에너지, 불국사가 보여준 문화의 찬란함, 그리고 석굴암이 각인시킨 신비로운 평온함이 하나로 어우러진 시간이었다. 천 년 전 신라 백성들이 이 길을 걸으며 빌었던 염원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도 와닿아, 일상을 살아갈 새로운 힘과 깊은 위로를 얻었다.
○ 「토함산(吐含山)」 토함산(吐含山)은 경상북도 경주시 보국동·불국동과 문무대왕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745m이며, 신라시대에는 5악 가운데 동악(東嶽)이라 하여 호국의 진산으로 신성시하였으며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 경주국립공원을 대표하는 지구 중 하나인 토함산지구에는 고위 평탄면, 토르, 타포니군과 같은 다양한 지형 경관이 나타난다. 토함산을 포함하는 경주국립공원은 지리산에 이어 1968년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토함산 가까이에 위치한 동해의 영향으로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안개가 끼고 걷히는 경관이 마치 산이 안개를 들이마시고 토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토하고 머금는 산’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
토함산은 태백산맥의 한 줄기인 해안산맥(海岸山脈) 중의 한 산인데, 해안산맥은 중앙산맥(中央山脈)의 동쪽에 있어 해안을 따라 연속되는 구릉성 산맥으로 울산만에 이른다. 해안산맥은 토함산을 최고점으로 하며, 경상북도의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을 토함산맥이라고도 부른다. 산의 서쪽에는 불국사 선상지가 전개되어 있다. 북서쪽에는 추령(楸嶺), 남쪽으로는 동산령(東山嶺)이 있고, 경주에서 감포(甘浦)에 이르는 도로는 추령을 통과하며, 특히 경치가 수려하다. 하천으로는 토함산의 서북 계곡에서 발원하여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남천과 장항리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이 있다. 토함산에는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경주 불국사와 경주 석굴암’ 석굴이 있다. 토함산 서남쪽 중턱에 있는 불국사는 서기 540년(법흥왕 27)에 창건하고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이 중건한 사찰로, 대웅전 앞에는 1962년 각각 국보로 지정된 다보탑과 불국사 삼층 석탑(석가탑)이 있다.
○ 「석굴암(石窟菴)」 석굴암(石窟庵)은 재상(宰相)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8세기 중반 경주 동쪽 토함산 정상부에 전세(前世)의 생모를 위하여 창건한 석굴 형식의 불교 사원이다. 20세기 초의 ‘근대적 재발견’ 이후 석굴암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으며, 지금도 매년 세계 각지에서 백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창건 당시 석굴암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한편 석굴암 석굴은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 사원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751년에 창건하였다고 나오지만,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문서에 의해 742년까지 창건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생겼다. 1960년대의 보수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석굴은 방형 전실과 원형 주실, 반원형의 천장으로 구성되었다. 본존불상과 보살상, 제자, 사천왕 등은 계급적 위상에 따라 배치되었다. 1962년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에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석굴암은 통일신라 시대(8세기 중반)에 화강암을 다듬어 인공으로 쌓아 올린 ‘세계 유일의 인공 석굴 사원’이다. 또한 석굴암은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와 경건함 그 자체였다. 인간이 돌이라는 거친 재료로 이토록 투명하고 무해한 평온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태초의 고요함이 흐르는 석굴 안에서, 나는 단순한 탐방객이 아니라 거대한 우주의 신비 앞에 선 정결한 인간이 된 듯한 경건함을 느꼈다.
○ 「불국사(佛國寺)」 불국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서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751년 김대성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석가탑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경덕왕이 즉위한 742년 불국사의 두 탑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하여 창건 연대가 정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주요 전각이 불타 없어져 17세기에 중창하였으며, 1970년대의 복원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두 탑과 석조물은 창건 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복원된 목조건물의 시대양식은 혼재되어 있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사는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여준다. 주요 건물들은 모두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크고 작은 석재를 쌓아 반듯하게 석축을 만들고, 그 위에 건립하였다. 삼층석탑과 다보탑, 석축과 석교, 기단 등은 대부분 신라의 유구이며, 대웅전과 일부 목조건물은 조선 후기에 재건되었다. 비로전을 포함하여 경루와 회랑 등은 문헌 기록과 유구를 바탕으로 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는 지상에 구현된 찬란한 불국토였다. 석축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사찰은 거대하지만 결코 위압적이지 않고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마주한 다보탑의 화려하고 영롱한 자태, 그리고 석가탑의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미학은 천 년 전 장인들의 순수한 열정과 숭고한 정신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1) 다음 ‘微’와 ‘支’ 자를 통운한 칠언율시(七言律詩) 「석굴암(石窟菴)」은 조선후기 문신 관복재(觀復齋) 김구(金構, 1649~1704)의 한시다. 이 시는 기묘한 자연 풍경과 불교적 정취가 어우러진 석굴암을 찾아가며 느낀 감흥을 노래한 작품으로, 그의 문집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 권1(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 내용을 살펴보면 이 한시는 칠언율시의 전형적인 4단 구조(수련-함련-경련-미련)를 따르고 있다. [수련(首聯·1~2구)]에선, 석굴암으로 향하는 길이다. 험난한 산길을 헤치고 안개속으로 들어가니 마침 해가 저물며 은은한 종소리가 들린다. 시각(안개)과 청각(종소리)의 대비를 통해 신비롭고 고요한 절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함련(頷聯·3~4구)]에선, 석굴암이 얼마나 높고 깊은 곳에 있는지 묘사했다. 하늘과 맞닿을 듯 높은 누각과 구름, 그리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공간감이 대구를 이룬다.(대구 : 白雲樓 ↔ 石窟菴, 天窺近 ↔ 客到稀) [경련(頸聯·5~6구)] 시선을 안으로 돌려 절 주변의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섬돌 앞에 피어난 꽃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불교적인 예스러움(古意)을 느끼고, 산을 물들이며 올라가는 단풍을 통해 가을의 생동감을 표현했습니다.(대구 : 花 ↔ 楓, 前砌 ↔ 翠微) [미련(尾聯·7~8구)]에선, 마지막으로 시선이 수평선 너머 동해 바다로 확장된다. 석양(또는 일출)이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장관을 보며, 이번 산행에서 만난 가장 극적이고 기이한 아름다움이라며 찬탄하며 시를 마무리했다.
이 시는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저자가 토함산 석굴암을 직접 방문하여 지은 기행시다. 시인은 속세를 벗어나 험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높은 곳에서 느끼는 고요함, 가을 산의 정취, 그리고 마지막으로 펼쳐지는 호쾌한 동해바다의 풍경까지를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게 담아냈다. 특히 5~6구의 정적인 꽃과 동적인 단풍의 대비, 7구에서 '금빛 물결(金波)'로 표현된 바다의 시각적 이미지는 시인의 뛰어난 회화적 감각을 보여준다. 깊은 산중의 고요한 사찰(석굴암)과 끝없이 넓은 동해바다의 공간적 대비를 통해 자연의 경이로움과 호연지기를 잘 드러낸 명시다.
**「석굴암(石窟菴)」** 관복재(觀復齋) 김구(金構)
崎嶇山路入烟霏 험하고 가파른 산길 따라 안개 속으로 들어가니
古寺鍾鳴欲暮時 저물어가는 무렵 옛 절의 종소리 울려 퍼지네.
白雲樓逈天窺近 흰 구름 속 다락 멀리 솟아 하늘이 가까이 엿보이고
石窟菴深客到稀 석굴암 깊은 곳이라 찾아오는 나그네 드물구나.
花含古意留前砌 꽃은 예스러운 뜻 머금은 채 앞뜰 섬돌에 남아 있고
楓帶秋光上翠微 단풍은 가을빛을 띤 채 푸른 산기슭으로 올라가네.
海門日照金波動 해문(海門)에 해가 비치니 금빛 물결 넘실거리는데
又是登臨一段奇 이 또한 산에 올라 바라보는 한바탕 기이한 절경이로세.
[주1] 기구(崎嶇) : 산길이 험하고 가파름.
[주2] 연비(烟霏) :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안개나 연기.
[주3] 루형(樓逈) : 누각(또는 높은 건물)이 멀리 높게 솟아 있음.
[주4] 객도희(客到稀) : 나그네의 발길이 드묾. 세상과 떨어진 고요한 공간을 나타냄.
[주5] 취미(翠微) : 푸른빛이 도는 엷은 안개가 낀 산기슭이나 산 중턱.
[주6] 해문(海門) : 바다의 입구. 여기서는 석굴암에서 내려다보이는 동해 바다의 탁 트인 풍경을 뜻함.
2) 다음 ‘東’ 운목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석굴암(石窟菴)」은 한말의 대유학자이자 문인인 암서(巖棲) 조긍섭(曺兢燮, 1873~1933) 선생이 경주 석굴암을 배관(拜觀)하고 지은 작품으로, 그의 문집 《암서집(巖棲集)》 제5권 시(詩)편에 수록되어 있다. 불교의 핵심 진리인 '공(空)'의 관점에서 석굴암의 불상을 바라보며 유학자 특유의 비판적이고도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글이다. 이 시는 석굴암의 뛰어난 예술성을 단순히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모든 형상은 본질적으로 비어 있다"는 불교적 진리를 역설적으로 들어, 눈에 보이는 불상(형체)을 만들고자 인간의 엄청난 노동력과 공력을 소모한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한 웅장하고도 철학적인 작품이다.
**「석굴암(石窟菴)」** 암서(巖棲) 조긍섭(曺兢燮)
千億如來相 천억 여래의 상이란
元來一切空 원래 일체가 공(空)이라,
形成苦不壞 형체 이룬 것 참으로 안 무너지니
枉女費人工 너 때문에 사람들 공(工)을 허비했네.
3) 다음 ‘先’ 운목의 칠언절구 「석굴암(石窟菴)」은 조선말기 및 일제강점기 유학자 수산(秀山) 김병종(金秉宗 1871~1931)이 지은 측기식 한시다. 「석굴암(石窟菴)」은 토함산 석굴암의 건축학적 신비로움과 본존불의 압도적인 종교적 숭고함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글에는 화가이자 문인인 저자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시각적 형상화와 불교적 우주관이 돋보인다. 또한 이 시는 석굴암이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종교적 에너지를 문학적으로 포착해 냈다. 그의 문집 《수산문집(秀山文集)》 권1(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석굴암(石窟菴)」** 수산(秀山) 김병종(金秉宗)
石竇谽谺世界圓 돌구멍(석굴)은 깊고 넓은데 부처님 세계는 둥글고
一跏趺坐壓三千 한 번 가부좌 틀고 앉으시니 온 우주(삼천대천세계)를 압도하네.
也知媧柱神工妙 여와가 하늘을 받친 기둥처럼 신비로운 장인의 솜씨를 알겠으니
曾是如來頭上天 일찍이 이것이 바로 부처님 머리 위의 하늘(돔 천장)이었구나.
[주1] 석두(石竇) : 돌구멍, 즉 화강암을 깎아 만든 '석굴암'의 내부 공간을 뜻함.
[주2] 함하(谽谺) : 골짜기나 굴이 '깊고 텅 비어 넓은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 계열의 한자다. 거대한 석굴 내부의 공간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주3] 세계원(世界圓) : 석굴암 본존불이 모셔진 주실(主室)이 원형 구조로 설계된 점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불교에서 '원(圓)'은 모나지 않은 완벽한 진리와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한다.
[주4] 가부좌(跏趺坐) :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자세로, 양발을 각각 반대쪽 허벅지 위에 얹고 앉는 자세다. 석굴암 본존불의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좌상을 묘사함.
[주5] 압삼천(壓三千) : 三千은 불교의 우주관인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온 우주와 삼라만상을 뜻한다. 부처의 깨달음과 위엄이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압도한다는 종교적 경외감의 표현이다.
[주6] 외주(媧柱) :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 여와(女媧)의 기둥을 뜻하는 고사성어적 표현이다. 신화 속에서 하늘이 무너지려 할 때 여와가 거대한 거북의 다리를 잘라 하늘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으로 삼았다는 전설에서 유래.
[주7] 신공묘(神工妙) :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의 솜씨처럼 기묘하다'는 뜻으로, 석굴암을 조성한 신라 장인들(김대성과 아사달 등)의 예술적, 과학적 성취에 대한 극찬이다.
4) 다음 ‘灰’ 운목의 오언절구 「오릉 도중에(五陵道中)」는 조선후기 유학자 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 1773~1832)의 측기식 한시다. 이 시는 그의 문집 《호고와집(好古窩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으며, 경주(金城)의 유서 깊은 풍경과 역사적 무상함을 담백하고 직관적인 언어로 표현한 명작이다.
○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자연과 인간의 대조(영원성과 무상함)를 서술했다. [1~2구]에선, 달이 뜨는 '토함산'과 바람이 부는 '봉황대'를 통해 경주의 변함없는 자연을 시각적·청각적(촉각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영원하다. [3~4구]에선, 화려했던 과거의 인물들(공자)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오직 외로운 나그네(저자)만이 홀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간다. 인간 역사의 유한함과 쓸쓸함이 강하게 대비된다. 두 번째는 대구(對句)의 미학이다. [1구와 2구]에선, '명월(밝은 달)'과 '청풍(맑은 바람)', '토함산'과 '봉황대'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시각적으로 고정했다. [3구와 4구]에선, '오릉공자(과거의 무리)'와 '유인필마(현재의 개인)', '거(떠남)'와 '래(찾아옴)'가 대조를 이룬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쓸쓸함을 효과적으로 연출했다. 이 시는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 구조다. 앞선 두 줄에서 경주의 아름다운 밤 풍경을 먼저 보여준 뒤, 뒤의 두 줄에서 역사적 명소를 지나며 느끼는 맥수지탄(麥秀之歎, 고국의 멸망을 탄식함)과 인생무상을 노래하였다.
**「오릉 도중에(五陵道中)」** 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
明月吐含山 밝은 달은 토함산 위로 솟아오르고
淸風鳳凰臺 맑은 바람은 봉황대에 불어오네.
五陵公子去 오릉의 옛 귀공자들은 모두 떠났는데
遊人匹馬來 나그네(시인)만 한 필의 말을 타고 찾아왔구나.
[주1] 오릉(五陵) : 경주에 있는 신라 초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등 5위의 무덤. 다만 한시 전통에서는 중국 한나라 때 황제들의 무덤인 오릉(장안 근처)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곳에 살던 부유하고 권력 있는 귀족 자제들을 빗댈 때 쓰인다. 여기서는 신라의 옛 번영을 상징함.
[주2] 토함산(吐含山) & 봉황대(鳳凰臺) : 경주의 대표적인 명소다. 토함산은 동쪽의 거대한 산이며, 봉황대는 경주 시내에 있는 거대한 신라 고분(황남동 고분군)이다.
[주3] 공자(公子) : 옛날 오릉 주변을 누비던 신라의 귀족 자제, 화랑, 혹은 번성했던 과거의 주인공들을 뜻한다.
[주4] 유인(遊人) 필마(匹馬) : '유인'은 유람하는 나그네(자신)를 뜻하며, '필마'는 외로운 말 한 마리다. 과거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현재의 쓸쓸함과 고독을 극대화했다.
5) 다음 ‘陌‘ 운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 「불국사(佛國寺)」는 조선후기 유학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작품이다. 이 글은 그의 문집인 《식산집(息山集)》 권4(卷之四) 지행록(地行錄)에 수록된 한시다. 「불국사(佛國寺)」는 조선후기 지식인의 시선으로 신라의 천년 고찰 불국사를 바라보며 느낀 감흥과 비판적 성찰을 담은 작품이다.
○ 내용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유학자인 이만부가 경주 지역을 유람하며 지은 전형적인 기행 현장시(紀行詩)이자, 옛적을 돌아보며 감회를 읊은 회고시(懷古詩)다. 시의 구조는 선경후정(先景後情, 먼저 풍경을 묘사하고 뒤에 정감을 서술함)의 방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글은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먼저 뛰어난 회화성과 묘사력을 보인다. 전반부는 불국사의 석축, 청운·백운교, 그 위의 누각들을 매우 입체적이고 화려하게 묘사했다. 무지개, 봉황, 옥, 용 등의 시어를 사용하여 당시 불국사가 가졌던 시각적 압도감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다음은 유학자의 이중적 시선(감탄과 비판)이 돋보인다. 이 시의 가장 큰 묘미는 '감탄'이 '비판'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시인은 불국사의 예술적 완성도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극찬하면서도, 동시에 유교적 민본주의(백성이 근본이다) 사상에 입각하여 "이 화려한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이 고초를 겪었겠는가"라는 탄식을 내뱉는다. 이어 역사적 가치로써 소중한 기록물이다. 서문에서 언급된 "12루(十二樓)"나 "정교하고 사치스러운 석탑(다보탑과 석가탑)"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중창 정비를 거친 조선 후기 불국사의 실제 규모와 형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학적·역사적 사료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이 시는 단순히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적 극치에 대한 찬사와 지나친 토목공사로 백성을 피폐하게 만든 과거 왕조에 대한 유학자로서의 준엄한 성찰이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는 수작이다.
**「불국사(佛國寺)」**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1664~1732)
*서문(序文)
불국사는 토함산 속에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 두 다리가 있고, 언덕 위에는 12개의 누각이 있으며, 뜰 아래에는 석탑이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정교하고 사치스럽다.(寺在吐含山中 有靑雲白雲二橋 岸上有十二樓 庭下有石㙮 制極巧侈)
*본문(本文)
吐嶽連月峽 토함산은 월성(경주)의 골짜기로 이어져 있고
道塲千年闢 불법을 닦는 도량은 천년 전(신라)에 열렸네.
靑雲白雲橋 청운교와 백운교 두 다리는
雙虹起邃壑 쌍무지개처럼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오른 듯하구나.
駕噓十二樓 (다리는) 허공에 걸린 십이루를 떠받치고 있어
爭挐矯鳳翼 누각들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다투어 날아오르는 듯하네.
礱玉更標直 옥을 갈아 만든 듯 돌 기둥과 난간은 곧게 뻗어 있고
蛟螭拱欄轆 이무기와 용 형상이 난간의 도르래(둥근 기둥)를 받치고 있구나.
鐫鑿參造化 돌을 쪼고 새긴 솜씨는 대자연의 조화(천지창조)에 참여한 듯하니
工倕應歎息 전설적인 장인 공수(工倕)라도 분명 감탄하며 탄식했을 것이네.
異哉雞林國 기이하도다, 신라(계림)라는 나라는
佞佛浚民澤 부처를 아첨해 섬기느라 백성의 은택(고혈)을 말려버렸구나.
西歸爲迤程 이제 서쪽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껴 잡아
訪古撫遺跡 옛 고적을 방문하여 그 남겨진 자취를 어루만져 보노라.
[주1] 쌍홍(雙虹) : 두 다리의 아치형 구조(홍예공법)를 깊은 계곡에서 피어오른 '쌍무지개(雙虹)'에 비유하여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주2] 봉익(鳳翼) : 지붕의 처마선이 하늘로 뻗은 모습을 날개를 활짝 편 '봉황(鳳翼)'으로 형상화하여 역동성을 부여했다.
[주3] 공수(工倕) : 중국 전설 속 최고의 장인인 '공수(工倕)'조차 울고 갈 만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조화(參造化)'에 이른 솜씨라고 감탄했다.
6) 다음 ‘文’ 운목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영동사 110(詠東史 其一百十)」은 조선후기 문신‧학자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의 측기식 한시다. 이 글은 신라 내물왕(내물마립간) 시절의 극적인 항왜(抗倭) 승리를 기린 시다. [삼국유사] 기이편 '미질왕과 죽엽군편에 기록된 '토함산 허수아비 계책'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내물왕의 기만책과 매복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하여 왜병을 전멸(섬멸)시키고 나라를 구한 위대한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며 마무리했다.
참고로, 이 시(詩)는 《무명자집(無名子集)》 시고 제6책(詩稿册六)에 실린 것으로, 작자 나이 67세인 정묘년(1807, 순조7) 세모에 지은 시부터 70세인 경오년(1810)에 지은 시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창작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명자집》 시고 제6책의 후반부에 실린 〈득실에 대해 읊다(詠得失)〉라는 시의 원주에 “모두 9수인데 한 수는 제8권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무명자집》 시고 제5책 〈영사 93〉의 주석에 ‘12권 기묘조(己卯條)’에도 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원래 제6책 이후로도 많은 시가 있어서, 최소한 12책 이상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811년에서 1826년 작고할 때까지 만년에 해당하는 15년간의 시는 산일된 듯하다.
**「영동사 110(詠東史 其一百十)」**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
羅王奈勿亦能軍 신라의 내물왕은 용병에도 뛰어났으니
草偶吐含乍作羣 토함산 허수아비 순간에 대군 되었네.
勇士千人騰斧峴 천 명의 매복 용사 부현에서 활약하니
殲倭此日奏奇勳 왜적 섬멸한 이날 큰 공훈을 거두었네.
왜병(倭兵)이 대거 몰려오자 신라 내물왕(奈勿王)이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병기를 들려서 토함산(吐含山) 아래에 늘어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斧峴)에 매복시켰다. 왜병이 군사의 숫자가 많은 것만 믿고 곧장 진격해오자 매복한 군사들이 일어나 급습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倭兵大至 奈勿王造草偶人數千 持兵列吐含山下 伏勇士一千於斧峴 倭恃衆直進 伏發掩擊殺之幾盡)
[주] 왜병(倭兵)이 …… 죽였다 : 신라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9년(364) 4월의 일이다.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3 奈勿尼師今》
7) 다음 조선후기 시인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지은 ‘歌’ 운목의 칠언절구 「불국사(佛國寺)」는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아 불국사의 옛 탑을 바라보며 느낀 고국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평기식 한시다. 이 글은 그의 문집 《유하집(柳下集)》 권7(卷之七)에 수록되어 있다.
○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천년 동안 변함없이 서 있는 '쌍탑'과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오릉'을 대비시켰다. 또한 나라는 망했어도 의연하게 불도를 행하는 '승려'의 모습과 가을날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의 시각적 이미지가 겹치며 애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글은 역사 변혁에 대한 감회, 맥수지탄(麥秀之嘆)과 인생무상을 노래한 시이다.
**「불국사(佛國寺)」**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千年雙塔自新羅 천년의 두 탑은 신라 때부터 있어 왔는데
七級奇形巧琢磨 7층의 기이한 모양은 정교하게 다듬어졌네.
亡國有僧猶事佛 나라는 망했어도 승려가 있어 여전히 부처를 섬기는데
獨看黃葉五陵多 홀로 바라보니 누런 낙엽은 오릉 주변에 가득하네.
[주1] 쌍탑(雙塔) :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나란히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의미함.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라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대변한다.
[주2] 칠급기형(七級奇形) : 일반적으로 다보탑이나 석가탑의 독특하고 기이한 구조(당시 작가가 바라본 탑의 층수 표현)를 정교하게 쪼아 만들었다는 예술성에 대한 감탄.
[주3] 망국유승(亡國有僧) : 신라는 이미 천년 전에 멸망했으나, 절을 지키며 불도를 닦는 승려의 모습에서 변함없는 종교적 신앙과 인간 삶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주4] 황엽오릉다(黃葉五陵多) : '오릉(五陵)'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등 초기 왕들의 무덤을 뜻함. 왕조는 사라지고 무덤 위에 황량하게 떨어지는 '노란 낙엽(황엽)'을 통해 역사의 유한함과 쓸쓸한 가을의 정취(인생무상)를 극대화했다.
8) 다음은 조선후기 위항시인의 대표적 인물인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경주 불국사를 방문하여 지은 ‘蕭’ 운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불국사(佛國寺)」다. 이 시는 고풍스러운 불국사의 정경과 그 속에 녹아 있는 신라의 긴 역사, 그리고 깊은 산사의 고요한 봄 풍경을 감각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이 시는 임진왜란 이후 퇴락했으나 여전히 웅장함을 간직한 불국사의 가람 배치와 신라의 유구한 역사, 그리고 토함산의 고요한 봄 풍경을 감상적이고도 회고적인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 글은 그의 문집 《유하집(柳下集)》 권13(卷之十三)에 수록되어 있다.
○ 내용을 살펴보면, [1~2구]에선, 불국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장엄한 석축과 누각의 규모에 압도당하는 시인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웅장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시인은 이 절을 지은 신라 천년의 세월이 얼마나 아득하게 흘러갔는지를 직관적으로 깨닫는다. [3~4구]에선, 불국사 경내로 향하는 시인의 발걸음과 명승지 유람을 감흥을 담아 서술했다. [5~6구]에선, 산사의 한낮 풍경을 시각과 청각의 대비를 통해 묘사했다. 봄날 오랜 세월을 버틴 고목들(古樹)에는 새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며 연두색과 초록색, 혹은 꽃분홍색의 ‘짙고 옅음(濃淡)’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봄날에, 깊은 산사(深山)의 한낮은 지극히 고요하고 고적하다(寂寥). 화려한 봄의 색채와 대조되는 정막감이 깊은 여운을 준다. [7~8구]에선, 산사가 너무나 고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늘을 날고 숲에 모여드는 수많은 새들의 지저귐이 더 선명하게 귀에 들어온다. 새들이 지저귀며 서로를 부르는 소리는 역설적으로 사찰의 깊은 고요함(靜中動)을 극대화하며, 인간의 발길이 뜸한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력을 느끼게 돕는다.
○ 정리하자면, 이 시는 전형적인 선경후정(先景後情)과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담고 있다. 전반부(1~4구)에서는 불국사의 거대한 규모와 신라의 역사적 아득함, 그리고 백운교를 오르는 시인 자신의 동선을 시원하게 제시했다. 후반부(5~8구)에서는 시선을 주변 자연으로 돌려 봄날 한낮의 적막함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통해, 인간의 역사는 흘러갔어도 자연은 여전히 푸르게 순환하고 있다는 무상감과 자연의 영원함을 담담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명작이다.
**「불국사(佛國寺)」**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
佛國樓臺壯 불국사 불국토의 누각과 대는 장대하고
新羅歲月遙 신라의 아득한 세월은 멀기만 하구나.
何來綠玉杖 어디선가 푸른 옥지팡이(짚고) 와서
重踏白雲橋 백운교 돌계단 다리를 다시 밟아보네.
古樹春濃淡 오래된 나무에는 봄빛이 짙고 옅은데
深山午寂寥 깊은 산 속의 한낮은 고요하고 쓸쓸하구나.
惟聞百鳥語 오직 들리는 것은 온갖 새들의 지저귐뿐
翔集自相招 날아오르고 모여들며 저희끼리 서로를 부르네.
[주1] 녹옥장(綠玉杖) : 푸른 빛이 도는 아름다운 지팡이로, 주로 은자나 풍류객이 여행할 때 짚는 지팡이를 뜻한다. 시인은 자신을 낮추거나 혹은 나그네의 감흥을 담아 '어디서 온 지팡이인가'라며 자문하듯 표현했다.
[주2] 백운교(白雲橋) : 불국사 자하문으로 올라가는 국보 돌계단 다리다. 이곳을 ‘다시 밟는다(重踏)’는 표현을 통해 시인이 과거에도 이곳을 찾았거나, 혹은 선현들의 발자취를 자신이 이어 밟으며 감회에 젖어 있음을 보여준다.
9) 다음 ‘虞’ 운목의 오언율시(五言律詩) 「불국사동(佛國寺洞)은 조선 후기 위항 문학의 대가인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가 경주 불국사 골짝(佛國寺洞)을 찾아가서 느낀 감흥을 노래한 작품이다. 세속을 벗어나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인의 설렘과 정적인 자연 풍경, 그리고 종교적·초월적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잘 녹아 있다. 이 글은 그의 문집 《유하집(柳下集)》 권7(卷之七)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단순한 경치 유람을 넘어, 신분제 사회(조선 후기 중인 신분)에서 오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정신적 해방을 찾고자 하는 시인의 내면이 투영되어 있다. '부처를 닮은 바위(肖佛)'와 '하늘로 가는 길(天路)'이라는 시어를 통해 불교적 색채와 도교적 신선 사상을 아우르며, 불국사 주변 토함산의 장엄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절묘하게 형상화한 수작이다
○ 내용인즉, [1~2구]에선 골짜기에 발을 디디는 순간, 세속의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신령한 기운을 느낀다. 눈앞의 산과 물이 원래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준다. [3~4구]에선 불국사 주변의 분위기를 묘사했다.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세속의 때를 씻어주듯 엄숙하며, 계곡에 솟아오른 기암괴석들은 수행에 정진하여 야윈 부처나 고승의 모습을 닮아 신성함을 자아낸다. [5~6구]에선 수행하는 스님조차 보이지 않는 고요하고 절제된 공간이다. 혼자 걷는 외로운 나그네(시인) 곁을 하늘의 외로운 구름(孤雲)이 친구처럼 동행해 주며 깊은 고독감과 청량함을 동시에 준다. [7~8구]에서 시의 주제가 집약되는 부분이다. 불국사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인간계를 벗어나 저 하늘(부처의 세계)로 연결되는 신비로운 길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는 초월적 염원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며 끝을 맺었다.
**「불국사동(佛國寺洞)**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入洞心先得 골짝에 들어서니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溪山若有須 시내와 산은 마치 나를 기다려 준 듯하네.
吹人松氣肅 사람에게 불어오는 솔바람 기운은 엄숙하고
肖佛石容癯 부처를 닮은 바위 모습은 야위고 수척하구나.
細草僧行少 부드러운 풀 길엔 스님의 발길마저 드문데
孤雲客與俱 외로운 저 구름만이 나(나그네)와 함께 가누나.
但能尋上去 다만 이 길을 따라 계속 찾아 올라갈 수만 있다면
天路不應無 하늘로 통하는 길(극락세계)이 없을 리 없으리.
10) 다음 ‘陽’ 운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 「불국사(佛國寺)」는 퇴계 이황의 수제자이자 영남의 대유학자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경주 불국사를 방문하여 지은 한시다. 이 시는 단순한 풍경 유람을 넘어, 과거 불국사에 발자취를 남겼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추모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채 늙어버린 자신을 돌아보는 유학자의 학문적 성찰과 탄식을 담고 있다. 이 글은 그의 문집 《간재집(艮齋集)》 권2(卷之二)에 수록되어 있다.
○ 내용인즉, 이 시는 불국사라는 불교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내용은 철저히 유학자의 학문적 고뇌와 도학(道學)적 성찰로 가득 차 있다. 전반부[1~6구]에서는 불국사의 장엄하고 화려한 풍경(연화교, 청운교, 단청, 샘물 등)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며 공간에 몰입했다. 후반부[7~14구]에선 사찰 벽에 남겨진 선배 유학자 김종직의 시를 발견하고는, 대유학자의 자취 앞에서 '나는 과연 올바르게 학문을 닦아왔는가?' 자문한다. 머리는 허옇게 늙었으나 여전히 학문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자신을 '길 잃은 양'에 비유하며 깊은 슬픔과 탄식을 쏟아낸다. 종장에서는 변함없이 푸른 '울창한 숲'을 보여주며, 인간의 유한함과 학문의 아득함을 대비시키며 여운을 남겼다. 불교 사찰의 아름다움을 빌려 성현의 도(道)를 쫓는 유학자의 숭고한 정신과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명시다.
**「불국사(佛國寺)」**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
步入蓮花上 걸어서 연화교(蓮花橋) 위로 올라서니
香風襲我裳 향기로운 바람이 내 옷자락에 스며드네.
飛泉刳木咽 날아내리는 샘물은 나무 관에 목메어 흐르고
石橋帶虹長 돌다리(청운·백운교)는 무지개를 띤 듯 길게 뻗었구나.
壯麗千間屋 수많은 전각(천 칸의 집)은 장엄하고 화려하며
丹靑十分光 단청 빛깔은 눈부시도록 가득 빛나네.
堪嗟佔畢齋 참으로 탄식하노라, 점필재(김종직) 선생이시여
壁上空留芳 벽 위에 부질없이 꽃다운 이름(시)만 남겨두셨구려.
恨我未摳衣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白首猶迷方 흰머리가 되어서도 여전히 나아갈 길을 잃고 헤매누나.
遠期尙未酬 원대한 기약(성현이 되겠다던 다짐)은 아직 이루지 못했고
惕若悲亡羊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듯(亡羊之歎) 두렵고 슬프기만 하네.
對君三歎息 그대(김종직의 시)를 마주하며 세 번 탄식하노니
高林鬱蒼蒼 높은 숲만이 푸르고 울창하게 우거져 있구나.
[주1] 연화상(蓮花上)과 석교(石橋) : 불국사의 대표적인 석조 문화재인 연화교·칠보교와 청운교·백운교를 묘사한 것이다.
[주2] 고목인(刳木咽) : '나무를 파내어 만든 관(물길)에 물이 목메어 흐른다'는 뜻으로, 졸졸 흐르는 정형화된 사찰의 수로 풍경을 시각적·청각적으로 세밀하게 표현했다.
[주3] 점필재(佔畢齋) : 영남 사림파의 종조(宗祖)인 김종직(金宗直)의 호. 김종직이 과거 불국사를 다녀가며 벽에 남긴 시(유묵)를 이덕홍이 현장에서 직접 보고 깊은 감회에 젖은 것이다.
[주4] 미구의(未摳衣) : '구의(摳衣)'는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공경히 나아가는 모습을 뜻함. 즉, 김종직 같은 대선배 학자에게 직접 배움을 얻지 못한 시대적 아쉬움을 말한다.
[주5] 비망양(悲亡羊) : '망양지탄(亡羊之歎)'이라는 고사에서 온 말로, 갈림길이 너무 많아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듯, 학문의 길이 깊고 넓어 유학자로서 온전한 깨달음의 경지(성현)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매는 자신에 대한 반성과 탄식을 비유한 핵심 구절이다.
11) 다음 ‘蒸’ 운목(韻目)의 오언율시(五言律詩) 「숙불국사(宿佛國寺), 불국사에서 묵으며)」는 조선후기 퇴계학파의 관료학자 학림(鶴林) 권방(權訪 1740~1808) 선생이 경주 불국사에 머물며 신라의 옛 자취와 역사의 무상함을 노래한 글이다. 이 시는 그의 문집 《학림집(鶴林集)》 권1(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 내용인즉, [1~2구] 수련(首聯)에선 시의 도입부로 불국사에 도착한 소회를 밝혔고 [3~4구] 함련(頷聯)에선 불국사 주변의 깊고 장엄한 풍경을 묘사했다. [5~6구]경련(頸聯)에선 밤이 깊어가는 경주의 처량한 야경을 감각적으로 표현했고 [7~8구] 미련(尾聯)에선 나라를 잃은 역사적 아픔을 모른 채 불공을 드리는 유민들을 보며 느끼는 비장함을 드러냈다.
○ 요약 해설하건대, 이 시는 한밤중에 경주 불국사에서 묵으며 느낀 망국의 무상함과 비장미를 노래한 전형적인 회고시(懷古詩)다. 작가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신라의 찬란한 문화유산(청운·백운교, 다보·석가탑)을 눈앞에 두고 깊은 감회에 젖는다.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웅장하지만, 그것을 만든 왕조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특히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이는데, 시각적(무지개다리, 층층이 쌓인 탑, 떠오르는 반달) 요소와 청각적(닭 울음소리) 요소가 어우러져 한밤중의 고요하고도 쓸쓸한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마지막 구절인 미련에서는 시인의 고뇌가 깊어진다. 신라의 후손(유민)들은 나라가 망한 서글픈 역사적 한을 잊은 채, 그저 눈앞의 등불 아래서 복을 빌며 절을 하고 있다. 시인은 이를 비판하기보다,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묵묵히 이어지는 민초들의 삶과 불교적 신앙의 생명력을 바라보며 서글프고 복잡한 감정으로 시를 마무리 지었다.
**「숙불국사(宿佛國寺)」** 학림(鶴林) 권방(權訪 1740~1808)
千載羅王跡 천 년 전 신라 왕들의 자취인데
空悲佛國僧 불국사 승려들만 부질없이 슬퍼하네.
溪深虹隱隱 계곡은 깊어 무지개(청운교·백운교)가 은은하고
殿古塔層層 법당은 오래되었으며 석탑(다보·석가탑)은 층층이 솟았구나.
遠落金雞響 멀리서 금계(닭) 우는 소리 들려오고
寒城半月升 쓸쓸한 성곽(경주 월성) 위로 반달이 떠오르네.
遺民不知恨 망국의 유민들은 옛 한(恨)을 알지 못하고
猶自禮龕燈 여전히 불감(감실)의 등불 앞에 절을 올리고 있구나.
[주1] 라왕적(羅王跡) : 신라(新羅) 국왕들의 흔적을 뜻함. 천년왕조 신라의 찬란했던 번영을 상징한다.
[주2] 홍은은(虹隱隱) : '은은한 무지개'라는 뜻으로, 실제 무지개라기보다 불국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아치형 다리(홍예교)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
[주3] 탑층층(塔層層) : 불국사 마당에 나란히 서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층층이 쌓인 웅장한 모습을 가리킨다.
[주4] 금계향(金雞響) : 신라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계림(鷄林) 혹은 경주 인근에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를 비유함.
[주5] 반월(半月) : 신라의 궁궐터였던 반월성(半月城)을 중의적으로 표현하여, 달이 뜸과 동시에 신라의 옛 궁터를 연상시키게 만듬.
[주6] 감등(龕燈) : 부처님을 모셔둔 감실(龕室)이나 불단 앞에 켜놓은 등불.
12) 다음 ‘冬’ 운목의 오언율시 「불국사에서 판상운에 차운하다(佛國寺用板上韻)」는 한말의 대유학자이자 문인인 암서(巖棲) 조긍섭(曺兢燮, 1873~1933) 선생이 경주 석굴암을 배관(拜觀)하고 지은 작품으로, 그의 문집 《암서집(巖棲集)》 제6권 시(詩)편에 수록되어 있다. 이 한시는 저자가 불국사를 다시 방문한 감회를 읊은 작품으로, 천년 고찰의 역사와 세속의 인연 사이에서 느끼는 아쉬움을 다루고 있다. 다보탑·석가탑과 종소리를 통해 경건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점필재 김종직의 시를 감상한 뒤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불국사에서 판상운에 차운하다(佛國寺用板上韻)」** 조긍섭(曺兢燮)
名藍今再到 유명한 절에 지금 다시 이르니
雲水更重重 운수는 더욱 겹겹일세.
佛護千年塔 부처는 천 년의 탑을 지키고
僧鳴半日鍾 승려는 한나절 종을 울리네.
羅王事多幻 신라 왕의 사적은 허황한 일 많고
畢老句偏濃 점필재(佔畢齋) 선생의 시는 매우 좋네.
復此怱怱去 다시 지금 바쁘게 떠나니
塵緣不我鬆 속진의 인연 나를 한가히 두지 않네.
[주] 판상운 :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과거 불국사를 다녀가며 벽에 남긴 시(유묵)를 말한다. 《점필재집(佔畢齋集)》 권3에 실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