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2장 통일교가 세상에 태어나다 4. 청파동에서 세계 선교를 계획하다 1955년 10월 4일 출옥 후 교회는 새출발을 했다. 장충동 교회 전세비 2백만원으로 청파동 언덕(용산구 청파동 1가 71-3)의 허물어져가는 적산가옥을 샀다. 그것이 10월 5일이었다. 20평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집이었지만 훗날 세계로 뻗어가는 통일교 본산지가 되었고 현재 통일교 성지가 되어 신도들의 순례 여행지로 뽑힌다(통일교에서는 '전본부교회'라 부른다). 새까만 집을 양잿물로 닦고 청소하고 수리해서 새롭게 단정했으며 통일교회가 소유한 건물로서 첫 정착지가 되었다.
1년 후 신도는 400명을 넘어섰다. 대단히 빠른 속도였다. 문선명은 자신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요소가 되었으며, 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래서 사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그것을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들어주었다. 눈물을 흘리며 밤새 기도를 하는 날도 많았다. 교회를 시작하던 무렵 미군이 입던 점퍼에 검정 물을 들인 노동복을 입고 단상에 서서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설교했다.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지도자들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는 것도 시원찮아서 하루 보리밥 두 끼로 견뎠다. 반찬이라야 날김치를 담가 하룻밤 재워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많은 신도들의 노력에 힘입어 교회는 부쩍부쩍 성장했으며 중고등 학생으로 구성된 성화학생회도 조직되었고 전국 곳곳으로 전도를 나갔다. 흉측한 소문이 워낙 많아 통일교라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지만 동네 청소도 하고 일손 없는 집에 식모살이도 하면서 밤이면 야학을 열어 글을 가르치고 말씀을 전했다. 그렇게 봉사하면서 교회는 점점 커나갔다.
처음에 서울, 대구, 부산에만 교회가 있었으나 1954년에 경북 경산군에 노변교회가 창립됐고, 54년 겨울에 전북의 무주교회, 55년 12월 25일에 전북 정읍의 망담교회, 56년 1월 29일 강원 춘천교회, 4월 4일 전주교회, 여름에 원주교회, 대전교회, 경기도 포천군의 선단리 교회 등이 차례차례 세워졌다. 그러나 문선명은 자신의 사명이 한국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195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후 충청도 갑사에서 휴양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신중히 검토한 끝에 신도 최봉춘을 갑사로 불렀다. 갑사 뒤뜰 소나무 숲에서 "너는 지금 당장 현해탄을 건너가야 한다.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해외 선교의 첫 번째로 일본을 택했고, 최봉춘을 첫 선교사로 임명한 것이었다.
최봉춘의 호적 이름은 최상익이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은 이름은 니시가와 마사루(西川 勝)이다. 1925년 부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살았고, 귀국 후 미군 2사단 통역관을 지냈으며 1952년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 성결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강제 송환됐다. 1957년 4월 10일 통일교에 입교했다. 최봉춘은 문선명의 축도를 받고 일본으로 떠났다. 선교자금 150만 원은 빚을 내서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과 국가가 국교가 맺어지기 전이라 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봉춘은 목숨을 내놓고 밀항선에 올랐지만 3차례나 체포, 추방되었다. 심지어 일본 경찰들에게 심하게 매도 맞았다. 생사를 건 3년의 각고 끝에 1958년 드디어 일본에 정착했다. 그리고 통일교 일본 시대가 활짝 열렸다(여기에 대해서는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일본편」에서 상세히 들려준다).
"원수의 나라 일본에 밀항을 보낸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을 거부하고 관계를 끊기보다는 일본을 교화시킨 뒤 주체적으로 그들을 끌어안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일본의 위정자들과 통하는 길을 뚫어 일본을 업어야 하고, 또 어떻게든 미국과 연결되어야 미래에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보았습니다. "
1959년에는 미국에 선교사를 보냈다. 그 시절 미국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먼 나라였고 강대국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너무 작고 가난한 나라였다. 신도들은 "우선 한국에서 교회를 더 키운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문선명은 세계를 향한 원대한 꿈이 있었기에 그 반대를 모두 물리치고 이화여대에서 쫓겨난 김영운 교수를 1959년 1월 3일 미국에 파송했다. 그 뒤를 이어 9월에 김상철 선교사가 미국에 도착하여 전 세계를 향한 선교 역사의 첫발을 내딛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