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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내 속에 괴물 로마서 7장10-14절 / 김병삼 목사 ➤“10.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정하신 명령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 내가 알았나니 11. 죄가 명령을 통해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12.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13.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죄가 명령을 통해 넘치도록 죄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4.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이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0-14 KJV) 서론 어떤 스승이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첫 번째 제자에게 썩은 생선을 건네며 물었습니다. “무슨 냄새가 나느냐?”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것은 네 마음이 썩었기 때문이니라.” 두 번째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저 밤하늘이 무슨 색깔인고?” “예, 검은색입니다.” “그건 네 마음이 검은 탓이로다.” 세 번째 제자에게는 마늘장아찌 간장 맛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무슨 맛이 느껴지느냐?” “짠맛입니다.” “그래, 그건 네가 짠돌이라서 그렇다.” 이어 그 옆에 앉은 제자에게 간장 맛을 보라고 했습니다.“ 머리를 굴린 제자가 점잖게 말을 합니다. “아주 단 맛이 느껴집니다.” “그래, 원 샷!” 우리가 흔히 듣던 이야기지요. 머리를 굴리다 낭패를 본 이야기 말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놀부가 지옥에 갔을 때 선택권을 줬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보는데 가장 쉬워 보인 지옥방 중의 하나가, 지저분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인분 통에 들어가 있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명령이 떨어집니다. 천 년에 한번 오는 휴식기 끝났다고 “잠수!” 제가 오늘 왜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느냐 하면 스펄전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대가 바로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요, 눈으로 보이는 것을 진리로 여기며 탐구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기독교 역사에 기억될 만한 19세기 영국 최고의 설교자라 일컬어지는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사상과 설교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가 살았던 1834-1892년은 소위 영국의 전성기였습니다. 빅토리아 1세가 통치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철도가 발달하며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던 시대, 그래서 뉴턴의 과학과 로크의 합리주의 등의 신사조가 등장하고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여 성경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부인하던 시대에 복음을 사수했던 사람입니다. 합리주의와 진보주의 낙관주의 사조에서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죄 성, 즉 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철저하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설교의 제목은 바로 그의 영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 찰스 스펄전의 삶 그는 아주 철저한 청교도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무릎에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성경을 읽고 경건 서적을 읽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이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은, 1849년 결정적인 구원의 체험이었습니다. 그가 뉴 마켓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된 것입니다. 늘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너무 힘든 죄의 짐을 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율법적인 요구로 인하여 점점 죄의식이 깊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울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지요. 경건한 그의 삶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 교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날 눈 때문에 목사가 오지 않아 한 구두 수선공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나를 바라보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제목이었고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보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습니다. 손과 발을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금 현재 예수님은 '나를 바라보라'라고 하십니다.” 그는 스펄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당신이 할 일은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그는 바로 그 순간 구원받았음을 확신하였다. 그는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나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한량없는 은총이여! 죄인이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의 영혼은 쇠사슬이 끊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느꼈습니다. 나는 자유로워진 영혼이요, 천국의 상속자이며 용서받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며 더러운 진흙과 끔찍한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림을 받았고 나의 발은 단단한 바위 위에 서 있으며 나의 앞길도 탄탄히 다져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은혜를 체험하고 마을을 돌며 설교하는 순회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의 나이 17세 되던 해인 1851년 10월 워터비치 마을의 침례교회의 정식 목사로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853년 12월 그는 런던의 뉴파크 스트릿 교회에 초빙 받아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시골에서 하던 설교와 다름이 없었고 그가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때의 상황이 이렇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말씀을 들은 기쁨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아침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후 예배에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같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예배가 마쳤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저녁 예배 때의 회중은 더 많았다. 집사들은 그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스펄전에게 목사가 되어 달라는 청탁을 하였다.” 19세의 나이에 런던 강단에 서게 된 스펄전 목사의 교회는 2천 명의 좌석을 만들어도 모자랄 만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넓은 음악회장을 구하여 설교하게 되었는데, 그가 설교하는 날이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1861년 그는 1만 명 이상이 모이는 메트로폴리탄의 테버네클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목회자 훈련학교인 페스터즈 대학도 세워 순수 복음을 전하는 제자를 양성하게 됩니다. 그는 평생을 다 바쳐 열정과 영혼을 토하며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죄는 장벽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가 사단과 같이 검을지라도, 죄와 친구일지라도, 이 밤에 믿기만 한다면 모든 죄가 용서받을 것이며 모든 악이 없어질 것이며, 모든 불경스러움이 씻어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고민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고민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확신 가운데 살았고 또한, 은혜를 받고 나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의 내부에 또 다른 나, 은혜 받은 나와 싸우려는 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그의 신학이 체계화되고 그의 설교가 힘을 얻게 된 것은 은혜 받은 감격이 아니라 은혜 받고 나서 그의 내면에서 시작되었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곧 그의 갈등은 성숙의 시간이었고 그 갈등을 통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2. 내적인 고민 혹시 여러분도 동일한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 속에 괴물이 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지요. ➤로마서 7장 21-25절입니다. “21.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들 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도다.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 받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갈등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타락한 본성, 악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버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펄전의 경험입니다. 아마도 그가 오늘의 설교를 하게 된 이유일 것 같습니다. 먼저 그의 삶을 더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나의 죄의 짐이 내 등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은 내게 실제적인 용서와 실제적인 해방이었다. 내가 주를 믿고 얼마 되지 아니한 때 하나님을 만나는 은밀한 시간을 가질 때 부르는 노래마다 참다운 시편이었고 기도를 할 때는 얼마나 주의 말씀 따랐는지! 그것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와의 참다운 대화였다. 그리고 그때 내가 내 구주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는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한 때 나의 기쁨이 넘쳐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 춤이라도 추고 싶었던 그날 이후 닷새 동안의 날을 생각한다. 그때 갑자기 나는 낙심되는 슬픔에 빠졌다. 나는 그때 왜 그랬는지를 지금은 말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마귀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분명한 것은 마귀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으므로 다시는 나를 괴롭힐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완전해지려고 했다. 나는 이러한 생각에 깊이 빠졌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아니한 것 즉,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는 불신의 악한 마음이 내게 침입해 온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스펄전은 자신이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렸던 프리미티브 감리교회로 찾아가서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날의 본문 말씀이 로마서 7장24절의 “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는 사도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의 해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할 때에는 아직 믿는 자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고민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자유 함을 느꼈음에도 이런 고민이 자신에게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악을 행하려고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고민이 찾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리미티브 교회의 목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마음속에 이러한 갈등을 느낄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스펄전은 그 교회를 나오게 됩니다.” 그의 마음속에 찾아 왔던 은혜의 기쁨은 잠깐이었고 그에게 찾아온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스펄전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3. 사랑하는 여러분! 어쩌면 스펄전의 이런 신앙 고백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거룩한 고민과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야말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참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요? 잠깐 스펄전의 고백을 직접 접하는 것이 도움 될 듯합니다. “나의 영혼을 엄습하는 죄의 세력을 실감한 이후 내가 죄에 대해 얼마나 공포에 떨었던가! 오! 죄, 죄, 나는 너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구나! 너는 나를 잠시의 기쁨도 허락하지 않는다. 또한, 이 죄를 생각할 때 이날까지 내 마음속에 타는 것 같은 깊고 무서운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이 같이 죄에 대해 깊은 반응을 보일 때 어떤 사람은 이것을 소위 '병적인 민감"이라고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얼마나 벌벌 떨었던가! 이 죄가 그 당시에는 너무나 추악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돌이키고 나서 첫 번 일주일은 내가 잘못을 범할까 두려워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 발자국도 옮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스펄전이 위대한 설교가가 되고 전도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죄로 향해 가는 인간의 본성” “은혜를 받아도 남아 있는 내면의 괴물의 실체”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죄’가 율법으로 통하여 그 ‘악’을 드러냅니다. 심각한 것은 인간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그 악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드러나지 않은 죄가 무서움에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단은 은혜를 받은 우리를 유혹하여 다시 죄의 세계로 끌어 드리려고 합니다. 그 가장 적합하고도 무서운 무기가 ‘교만’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제는 만족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이제 완전한 존재로 착각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자신을 자랑하게 하는 것이지요. 라퐁텐의 [그림우화]에 나오는 ‘까마귀와 여우’라는 제목의 이야기입니다.) 까마귀 한 마리가 부리에 치즈를 물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 냄새에 유혹을 느낀 여우가 말했다. “안녕, 까마귀님! 당신은 정말 멋지군요! 무척 잘 생겼어요! 진심으로 말하건대, 당신의 목소리까지 깃털 색깔과 어울린다면 당신은 이 숲 속 최고의 주인이 될 거예요. 진심이에요.“ 여우의 말에 까마귀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부리를 크게 벌렸다. 그 바람에 입에 물고 있던 치즈가 떨어져 버렸다. 여우는 그것을 잽싸게 차지하고는 말했다. “친애하는 친구여, 모든 아첨꾼은 그의 말에 속는 사람들 덕분에 살아간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이 치즈는 아마도 그러한 가르침의 대가로 충분할 것 같소.” 까마귀는 부끄럽고 당황한 중에도 조금 늦긴 했지만 다시는 그런 말에 속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추구하면 인생의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산물, 돈과 권력들이 죄의 방편으로 복이 아닌 저주가 됩니다. 이것이 스펄전이 보았던 죄의 심각성, 우리의 본성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악에서 선을 창출해 내는데, 죄는 선에서 악을 뽑아냅니다. 이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이제 스펄전에게 주어진 고민과 숙제는 내면의 괴물 즉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고민이었습니다. 4. 구원을 받아라!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려고 합니다. 스펄전이 아주 멋진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빛을 비추는 자 앞에서 우리의 어둠을 발견하게 된다!” ➤시편 53편1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 이 뜻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반대이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필연적인 고민 앞에서 우리는 필연적인 결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면 은혜를 잊어버리고 옛 자아의 본성으로 돌아가든지 끊임없이 일어나는 육신의 본성을 제어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평화를 누리든지.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수없이 많은 간증을 하고도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고민이 아주 보편적인 고민이라는 점에서 오늘도 괴롭게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소망이 될 것입니다. 다시 스펄전의 고백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믿음과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라나기를 주께 구했을 때 그의 구원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그의 얼굴을 더 간절히 사모했을 때” 아주 재미있는 예입니다. 그가 느꼈던 죄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은혜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노릇 하면서 살 때보다 이집트 탈출해서 맞이한 두려움 더 컸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이집트 안에서 살았던 때에 물론 노예였지만,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서는 칼과 창을 들고 병거를 타고 쫓아오는 병사들에 비하면 그 두려움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탈출하여 올 때 분명히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소망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무시무시한 병거소리와 군사들의 외침을 들었을 때 그들은 뒤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맹렬하게 다가오는 이집트의 병사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이제 적들의 손에 완전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체험을 여러분이 해보지 않으셨나요. 스펄전도 주께 돌아오고서 이와 똑같은 경험을 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의 세력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탄은 한 영혼이 자신을 떠나가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따라붙으려고 합니다. 이집트는 강대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어도 그렇게 해 될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세계의 역사를 보십시오. 무섭게 땅을 지배해 가는 세력들을 보면 자신의 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넓혀가려는 탐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 마치 그와 같은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후, 그리고 죄의 위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후에도 무서운 죄의 세력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대로 죄의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 죄 된 본성, 노예의식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과 불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우리에게 이 같은 일시적인 자유를 주었는가? 우리가 대적에 의해 더 큰 고통을 당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일어났던 은혜의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제정하셔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은혜를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전쟁에서 승리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세요. (1,3-5,12절) ➤“1. 그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창조주}께 노래하고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창조주}께 노래하리니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도다. 그분께서 말과 거기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3. {창조주}는 전사시니 {창조주}가 그분의 이름이로다. 4. 그분께서 파라오의 병거들과 그의 군대를 바다로 던지시니 그가 택한 대장들도 홍해에 잠겼고 5. 깊음들이 그들을 덮으매 그들이 돌처럼 바닥에 가라앉았다. 12. 주께서 주의 오른손을 내미시니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의 경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솟아나는 내 속에 괴물에 대하여 선포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이 드러날 때 그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때 끊임없이 승리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31-34절입니다.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33. 누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느니라.” 5. 승리하는 삶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부터 사단은 여러분 속에서 계속해서 괴롭히는 일을 시작합니다. 감히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할 수 없도록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속해서 넘어지고 실패하게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의 기억을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스펄전이 은혜 체험 후에 이런 고민을 하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고민을 이야기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이 확실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이처럼 악한 생각들을 내가 가질 수가 있겠어요?” 그러면 다정하신 할아버지께서는 “정신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챠알스야, 네가 이처럼 유혹을 받는 것은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야. 이러한 나쁜 생각들은 네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마귀의 새끼들이란다. 마귀는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인의 문에 놓아두기를 좋아한단다. 그것들을 너의 것으로 여기지 말고 집안에나 마음의 방 속에 자리를 주지 마라.” 악한 생각을 이기는 법에 대하여,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스펄전은 아주 확고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면 구원은 행위로 획득될 수 없으며 은혜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속에 끊임없이 고개를 드는 악한 본성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악한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변화되려면 성령의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머리 위에 안수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고쳐 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향했던 우리의 시선이 세상을 향할 때 그 평화는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를 그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안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 안에 있는 괴물을 누르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최하진의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류바이진에게 받은 이 질문이야말로 정말 제대로 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이 질문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을 주관하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내 삶에 대한 결정권을 쥔 존재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I’m a Christian.”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인생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쫓기는 인생’이다.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 나는 굉장히 성공을 갈망했다. 공학박사로 업적을 쌓아서 노벨상 같은 큰 상을 타고 싶었다. 그런데 연구 업적과 명예를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나중에 나의 삶을 돌아보니 나는 성공을 향해 질주했던 것이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돈을 더 벌려고 아등바등 살았던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 삶은 부를 향해 달렸던 인생이 아니라 가난해질까 봐 마음에 쫓기는 인생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또 하나는 ‘따르는 인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명을 좇는 인생이다.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이다. 나는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생명을 찾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마 10:38-39)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내가 가야 할 인생길을 발견했다. 내가 청소년을 위한 사역을 하는데 주님 다음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분이 있다.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이다. 그는 1885년 조선에 도착한 외국인 선교사였다. 그는 원래 인도 선교사로 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에는 선교사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이렇게 독백했다. “Nobody for Korea. How about Korea?” “조선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구나. 조선은 어떨까?” 언더우드는 결국 이 생각이 계기가 되어 조선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고, 한국 사회에 지대한 기독교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130여 년 전 언더우드의 마음을 움직인 그 말, “아무도 없구나.”하는 말이 내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느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 같았다. “Nobody for children. How about children?” “아이들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구나. 아이들은 어떻겠니?” 나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였고 마침내 이렇게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음속에 괴물을 주의 이름으로 쫒아내고 주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