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맑은 주말아침 게으름을 피우기엔 조금함이 나를 부산하게 만든다.
늑장을 부린다고 딱히 누가 뭐라고할것도 아닌데,애초 자신과 약속이 영글지 못한 100일 정진이라
200일 정진을 향한 워밍업쯤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염불원으로 다짐을 등에 메고 집을 나선다.
한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나타내기도 참 쉽지 않은데 사상을 이 세상에 펴내어보이시는 원장스님을 뵈니
결코 작지 않은 체격이건만 왜 이렇게 자신이 작고 초라한지...
딱히 이것입니다라고 내어보일 살림살이가 없는 자신에게, 또 다시 조급함이 밀려온다.
하나의 사상집이 탄생되기까지의 가슴울리는 원장스님의 말씀을 오늘부터 나눠 함께 익히며
정진을 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신행집이면서 중요한것입니다.
욕도 정확하게 해야되듯이 말도 정확해야됩니다.갈수록 불자가 감소하는 심각한 현실입니다.
10년동안 1년에 30만명씩 줄어드는 현실앞에서 1년에 4번 -백중(천도재 합동으로 지낼려고 가고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바빠도 안 갑니다), 부처님 오신날(할머니 어머니도 다니시던 곳이니까 한번 가보자고 하는 약간은 다르죠.)정초기도(올해부터 한번 해볼까 마음먹고 가보는것이고 ),그리고 동지...불교인구 조사를 하는데서 고민을 합니다.일년에 4번 가는 사람을 불교인구에 포함 시킬건지를 다른 종교는 전혀 해당이 안 되고 불교만 해당이 됩니다.일년에 4번 정도가는 사람을 제외하고 5백만입니다.이런 사람들은 불자로써 역활은 전혀 안 하는것이죠.
그래서 이것(신행집)으로 한번 해 볼려고합니다.
찬불가는 양념으로 부르지말고 잘 부릅시다.
절에서 찬불가를 잘 부르면 바깥에서 들었을때 교회에서 목탁을 치는것처럼 들립니다.
한국에서 정토조사들을 소재로해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데 그 첫번째가 원효성사617(진평왕 39)∼686(신문왕 6입니다 ,그 다음이 의천(1055(문종9)-1101(숙종6),나옹(1320년(충숙왕 7) ~ 1376년(우왕 2),네번째가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 ~ 1433)입니다.
저와 연결이 되는 참으로 희유한 분들이십니다.
이 분들중에 원효성사께서만 저보다 많은 연세로 열반에 드셨고 나머지 세분은 저와 비교했을때 제가 너무 오래 살고 있는것입니다.
반야심경 오가해는 어느 역사에 다시 펴보이게 될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기존에 나온 반야심경에 수정할곳이 더러 있지만 왜 그것이 수정이 되질 않느냐?
그것은 자존심 때문입니다.
원효성사께서 686년에 열반에 드셨지만 원효의 저술이 역사에 남을수 있는 자료로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글로만 떠돌아 다녔지...
1101년(속장경)에 완성했으니까 기가 막힌겁니다, 이것을 눈물나게 써야지 한국 불교사를 알것 같습니다.
의천이 1055년에 태어나서 1101년에 열반을 했으니까.저는 제 눈을 의심하면서 계산기를 두들겨봤습니다.
46세에 열반하셨습니다.
처음에 초조대장경(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불이 나버린겁니다.뒤에 의천이 고민을 한것입니다.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팔만대장경에 빠진것을 전부 목록을 만드니까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송나라로 가서 경을 모으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모든 조사들것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원효성사것도 그 때 모은것이죠.
9년 동안에 속장경을 만든것입니다.
의천이 송나라에 가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누가 제일 존경하게 되냐?하면 제가 특별한 분으로 생각하는 정원법사입니다.
몇살에 만나게 됐는지를 정리해보니까 1085년 송나라 갔으니까 정원법사가 74세,의천스님이 서른살정도입니다. 그 때 송나라도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많이 훼손을 당할 때인데 화재로 경전이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그 때 송나라에는 경전이 없어서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보내줄 정도였습니다.
의천이 정원법사에게 화엄경 80권을 보내줄 정도였습니다.심지어 돈까지...
어찌됐든 의천이 정원법사를 만난것은 제가 원인론을 보는데 연결이 된것입니다.
내가 쉽게 보게 된것이 정원법사의 해설 때문에 보는 거라고...
원효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415년만에 판각이 되었습니다.
쭉 이어지다가 의천 그리고 나옹스님이 1320년에 태어나서 1376년 57세로 열반하셨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불교는 원효한테 있고 기록으로 남는것은 나옹에게 아주 많은 정토 법문이 있습니다.
나옹스님께서 열반하시던 그해(1376년) 함허득통이 태어나셨습니다.
함허득통이 태어나면서 그 정신을 이어가면서 한국적인 정토 법문을 많이 남깁니다.
함허득통이 1433년에 열반하시는데 그 분은 현정론을 쓰신 분입니다.
함허득통이 열반하신 후로 지금까지 맥이 이어지질 않고 있습니다.
현정론은 조선시대때 불교에 대한 핍박이 심하니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불교는 진리라고 쓴것이 현정론(국립도서관 소장)입니다.그 이후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쓴 논문은 하나도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그리고.....2017년에서 1433년하면 584년입니다.
584년동안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펴 내는 신행집입니다.
여기에 원효 나옹 함허득통을 이어져내려오는 정신입니다.
(신행집이라고 하기전에 사상을 담아놓은 책이니까 달리 거창 제목을 붙여되는게 아닌가 싶다.개인적으로...)
원효가 세친의 사상을 이었습니다,나옹이 보니까 맞거든요.그래서 이어진겁니다.
나옹스님은 관상 염불을 이야기했습니다.
함허득통은 시와 법문이 많습니다,제가 지금 펴 내는 신행집을 한국에서 크게 유통될거라는 큰 기대는 않지만
최소한 여러분들은 알고 계셔야됩니다.
(교회는 통일된 성경으로 신행생활을 하게 되니 나름 당당하다, 나름의 역사를 배워 익혀 알고 있으니.
우리 불자들은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어디서나 울퉁 불퉁하지 않고 둥글 둥글 원만함이 최상의 미덕인냥 표방하기 때문에 오히려 디테일한 종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교인들보다가 사실 뒤쳐짐을 인정해야한다.대체적으로...
자기를 바로 아는것이 상대를 이기는것이라면 우리도 불교 역사에 대해서 ...바로 알게 된다면...
삼국-통일신라-고려 -조선 -대한민국 나아가 일본과 중국의 역사까지 두루 섭렵하게 된다, 뚜렷이 확립된 사상의 바탕위에 역사까지 바르게 꿰차게 된다면 어딜가서나 어디서나 당당함 그 자체인 전천후 염불행자가 되지 않을까???
나아가 역사를 바로 알고 비추어 보는 현실은바로 설 수 밖에 없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최소한 종교에 함몰되지 않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시야를 넓혀서 가치관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공부는 누가 권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 계신 명광스님께서도 스스로 자처해서 공부에 열정을 보이시는데 참으로 희유한 인연입니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시간이 가면 알든 모르든 간에 두세배로 머리가 좋아집니다
우리 불교사에 머리가 뛰어난 그 첫번째가 원효스님입니다.
두번째가 나옹 다음이 함허득통입니다.외국에서는 원효는 神가 가깝다고 해서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허득통을 가장 좋게 봐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 규봉종밀과 정원법사입니다.
저는 그런 조사들것만 봅니다.해서 내 머리가 아무리 나빠도 거의 닮아갈려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상적으로 한국에 가장 뛰어난 사람을 다산 정약용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평가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함허득통이라고...
원효는 손을 못 대고 있습니다.
원효는 평가자체가 어쩌면 나쁜일일수도 있습니다.
함허득통이 현정론을 쓴 것은 조선 초기 정도전등에 맞서기 위해서 쓴것이죠.
이 신행집은 제가 혼신을 다하는것입니다.
나옹이 57세에 열반
함허가 58세에 열반
의천이 46세에 열반
그 분들이 십년씩만 더 살으셨더라도 불교 역사의 지도는 분명하게 바뀌었을겁니다.
제가 출가해서 전문으로 공부를 30년을 했는데 이 좋은 세상에서 머리가 얼마나 안 좋으면 이 일을 못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겁니다.그러니 잠이 오질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난 급인정을 한다. 아미타파와 인연이 되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데 난 되돌이표만 만들고 있었으니.
어느날 문득 아미타파 인연되고 보낸 시간을 계산해보니 엄마야~소리가 절로 나왔다.
날마다 일심정토 공부한다고 동네방네 큰소리 치고 다녔는데...정작 내놓을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느날 부터 밀려오는 급불안감...점점 소심해지는것같기도하고 셩격은 오히려 더 옹졸해지는것 같고...
더 내려갈 바닥이 없는데...)
시간을 늘이는 방법은 잠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의천이 불교를 빛내겠습니다하고 구걸하다시피해서 중국에서 3천여권을 가지고 온것입니다.
그래서 속장경이 탄생하는데 불이 난것입니다.
불이 났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났거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탔거나...원효의 저술들이 가운데가 아니고
한 귀퉁이에 있었다니까. 그게 안 타고 남았습니다.이건 영화로 제작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니까 한 귀퉁이에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몇 백년동안 몰랐던것입니다.
조선의 역사가 518년 동안에도 캄캄했고 ,그 앞의 고려시대때도 캄캄했습니다.
불이 나고 어디에 보관했는지도 모르고... 몇 권이 남은지도 모르고 ,일본에서 어느날 갑자기 신수대장경이라고 세상에 선을 보인것입니다. 그 안에 원효의 저술이라고 남아 있는것입니다.
이런 측면은 일본을 높이 사야됩니다. 만약에 다른 마음으로 한번 더 태웠다면 오늘이 있을까요??
너무 오래데서 법화경종요같은건 글자가 조금 마모가 되긴 했지만 원효성사의 것은 제가 필요한것은 고스란히 보존이 되어 온 것입니다.기가 막힌 일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도무지 근접이 어려운 기신론 소 무량수경종요,유심안락도 아미타경소 이런것이 남아있습니다,원효는 일부에서 파계승이라고 하지만 계율에 대해서 오히려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 字도 손실없이 남아있는것이 보살계본지범요기입니다.
앞으로 불교는 어떤 방법으로 유지를 하든 향후 숫자는 감소하는것입니다.
늘어나는것은 기대 할 수없습니다. 燈도 안 답니다, 왜 이런 현상을 초래하게 된 걸까요?
한계가 온것입니다.기복불교는 아니라고...
(기복불교에 대한 대안이 부족하다,사회적으로 일반인들의 의식은 향상되어있는데 무얼 목말라 하는지 뭘 필요로하는지 진정한 자성이 있지 않고는 계속되는 침체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불교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세계와 인간의 존재방식,인식의 문제 가치의 문제를 깨달아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돌아가야됩니다.
--처음 아미타파에서 공부를 시작했을때-- 절에 가면 설겆이하고 법당 청소하고 연세드신 보살님들 옆에서 조용히 차 마시고 돌아오는 불교가 아니라 -정체성이 확립될수 있다는 사실앞에서 양동이로 물을 들이키듯 시간을 쏟았다.
일심정토 염불수행에 눈을 뜨고 아이가 말을 배우듯 더듬거리며 밖으로 내뱉기 시작할때 기쁨은 참으로 컸다.
밥상머리 앞에서 경험적인 훈육이 아니라 사상과 불교철학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행동이나 가치관 정립에 엄마 말이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조금씩 흡수가 될 때 이 공부가 희망인것은 알았지만...
이제 옹알이 단계는 지나고 다른 불자들과 간혹 소신을 나누게 되는 자리에서 느끼는 갭은 오히려 더 갑갑함을 불어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자신이 깊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는 일시적 현상임을 알게 된 지금...
방법을 모르는것도 아니요.스승님이 옆에 계시지 않음도 아니요.
환경이 부족하지도,공부꺼리가 부족한것도 아니다.
공부가 향상되지 않고 내 자신의 부족한 변화에 대한 구차한 이유를 이제는 외연에 둘 수가 없다.
사상의 자유와 삶의 자유를 찾아가는것은 온전히 내 몫으로 남았다.
가끔씩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져 있는 모습에 한번씩 혼자 흠칫한다.
사회구성원으로써,직장의 일원으로써 엄마로써 존재가 당당해지는길은 사상의 자유를 찾는 길뿐임을 진실로 인정합니다.
해서 자주 조급해지지만 원장스님의 법문중에 조급하더라도 천천히 조금씩 꾸준히 ...가 답이라고 하셨다.
빗나가게 될 약속일지언정 잦은 반복은 습관으로 굳어질거라고 믿습니다.
늘 이렇게 정리하면서 다시 각오을 다지게 되는 기회가 이렇게 내게 주어짐은 명백한 아미타부처님의 가피입니다. 녹록치 않은 길을 한결같이 걸어오신 원장스님께 100일 염불정진 회향을 앞두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100일 정진이 원만히 진행되게 이끌어 주신 명광스님, 그리고 회장님을 비롯해서 임원진 여러분의 마음씀이 컷기에 이렇게 무사하게 회향이 됨에도 감사드립니다.
늘 언제나 단정하게 정리된 염불원의 환경을 유지하게 되는데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음을 알기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원장스님의 법문은 다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필경님, 오늘 내려 주신 말씀을 다시 듣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
이렇게 어느새 글자로 보여 주시니 또 놀랩니다. 아~정말 누가 적어 주기라도 하신것 처럼 너무도 짧은 시간에
이토록 멀쩡하게 쓰서 내 놓으시니 감탄감탄 또 감탄하며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필경님 계셔서 문자로 두고두고 전해지고 전달될 원장스님의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波 _()()()_
귀한 법문을 같이 새기게 해주신
필경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파
필경 보살님의 원장스님 법문의 정리가 참으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 나무 아미타불타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 - (일심)(광명)(화신)
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필경님의 신심과 수고에 박수를 그리고 부러움을 함께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일체경계 본래일심
일심 광명 화신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귀한 가르침 함께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은혜에 보은할 수 있길 발원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필경님~어제의법문 다시 복습하며~원효성사의저서가 불에타지않고~정목원장스님덕분에우리들까지 가르침이 이어져가는것은 불가사의
한 가피입니다~가슴조아려지는 희유한인연에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모든 인연의 은혜에감사하고보은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일심 광명 화신! 일체의 인연에 감사하고 보은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필경님 의 신심에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필경님 !
일심광명.
아미타 아미타 아미타.()()()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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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후~1.000년후를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의천스님.고려시대나옹스님.신라시대원효스님.조선시대에함허득통.이조시대경허~
21세기원효후예"백송정목스님"
우리스님의 사상을 이어받는 아미타파회원들.....
불교가 왜? 인원이줄고 점점 전법이 안될까요?
저자신도 고민중입니다.
문제가무었인지는 잘알고 있습니다만!
문제에 답이있습니다.
정목스님과같은 전법의 인생을바치는 열정입니다.
왜??? 스님의용맹스러운 정진과수행의 과보의 저는 이순간에도
가슴이뭉쿨하여눈물이 납니다.
스님은 어깨에 날개를 달고 훠이훠이 양산에서 서울까지 왕래하시면서
"나는 사람이아니다"
부처종자를 이미얻어 인간과붓다의 차별하는 지혜를 얻었나니
저의 인생중에 가장행복한사건은?
백송정목스님과의 인연입니다.
제가 "작복"을 한것이 맞습니까?
정목원장스님?
원장스님의 상수제자필경님! 스님의 동영상 보는듯 드라마틱합니다.
한때 정목스님법문을 사경하여 올려 기록에남긴 "필경"
동영상은"길동"
인례집전"명광스님"
회장님"토각"
총무"우담바라" 부회장들 회계 등등
이모두는 성전에 모여~~~~~ 전법하느니라~~~~
역사에 남는 100일기도 이와같이 수행하고 중생돕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