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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이 머무는 마음의 고향 원문보기 글쓴이: 月田(金直漢)
군위, 고려를 열다 주체적 시각 '휘찬려사' 완역 된다면 국보급 가치 | |||||||||||
삼국유사와 보각국사 일연이라는 소중한 '보물'을 가진 군위는 '휘찬려사(彙纂麗史·간추린 고려의 역사라는 의미)'라는 값진 '보물'도 갖고 있었다. 군위 부계면 삼존석굴(국보 제109호) 옆 양산서원 뒷마당에는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휘찬려사 목판(경북도 유형문화재)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양산서원을 관리하는 한밤 돌담마을(석굴 아랫마을로 부림 홍씨 집성촌)의 홍상근 부림 홍씨 운영위원장 안내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층을 나눠 촘촘히 자리한 목판이 한눈에 들어왔고, 겉만 봐도 귀중한 문화재라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보관을 잘해 목판의 글씨들이 선명했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고려의 역사가 소중히 담겨 있으리라. 휘찬려사는 우리에게, 왜 얼마나 중요한 문화유산일까? 휘찬려사의 저자는 목제 홍여하(1621~1678)선생이다. 본관은 부림 홍씨로, 과거를 거쳐 우의정 등 요직을 거쳤으며 당시 남인으로 성리학과 사학에 조예가 깊어 사림(士林)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목제는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목제는 편찬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만 좋아하고 자국의 역사를 모르는 것을 안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여기에다 조선 초 정인지, 김종서 등에 의해 편찬된 139권의 고려사의 오류를 바로 잡고, 대의명분에 투철한 사림의 사관(史觀)에 입각해 47권의 휘찬려사를 지었다. 고려사의 3분의 1인 셈. 휘찬려사의 목판은 모두 831장이다. 정종로(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의 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목판 제작 시기는 19세기 초로 추정된다. 목판은 보관 장소의 이전과 관리 소홀로 한때 4장이 사라졌다가 되찾은 바 있다.
◇ 삼존석불 목제는 고려사를 간략하게 줄여 휘찬려사를 편찬했다. 하지만 고려사를 그대로 줄인 것이 아니라 고려사를 대본으로 하되, 나름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그 내용을 재구성했다. 실례로 우왕과 창왕을 반역전에 둔 고려사(조선의 역사가들은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이유 등으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와는 달리 국왕의 이야기를 다룬 파트(세가·世家)에 배치했다. 또 고려사의 반역전에 들어있던 인물을 명신전에 편제한 것도 새로운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휘찬려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국제정세에 대해 많은 내용을 담았다는 점이다. 중국의 역대 사서들은 외국의 흥망과 전쟁, 영토의 변화 등을 반드시 기록했다. 그러나 고려사에서는 중국 내부의 사실은 물론 외국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다. 목제는 "국내만 다루는 역사 서술은 역사가의 가장 큰 강령을 어그러뜨린 것"이라면서 송(宋), 금(金), 원(元)이 흥망할 때의 전쟁과 분열상을 자세하게 적었다.
또 목제는 거란과 여진, 일본의 정세 등을 다룬 외이부록을 뒀다. 휘찬려사 이전에 나온 우리나라의 역대 사서에서 외이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없다. 홍연백 군위군 기획감사실장은 "목제 선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북방족과 일본에 대한 국제 정세 파악이 한 나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 북방족과 일본에 대한 국가로서의 위치를 반석에 올리고, 국가의식을 높이기 위한 의지가 지대했다"고 평가했다. 휘찬려사는 고려의 사서들 중 유일하게 고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거란, 여진 등에 대한 동향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아니겠는가. 그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또한 휘찬려사는 역사 주체의식이 강한 역사서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주체성을 더욱 다져야한다는 저자의 시각이 책에 그대로 묻어난다. 중국을 존중하고 왜(倭) 등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대외 정책을 책에 반영한 것이다. 목제는 당시 군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입장에서 책을 편찬했다. 정통성 확립 차원에서 신라 중심의 역사 서술과 고려를 군왕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 군주의 도가 없는 시대로 비판하며 왕권 강화를 특히 강조했다.
휘찬려사는 영남 남인(18세기 이후 중앙에서 밀려났다)의 사관이 담긴 역사서이다. 뭘 뜻할까? 고려 역사서로 대표되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은 당시 중앙집권적 시각이 적잖게 담긴 반면 휘찬려사는 영남 지식인의 역사관이 담겨 있다는 의의가 있다. 중앙중심적 사관에서 벗어나 지방을 주체로 한 새 사관을 열었다는 것이다. 홍연백 군위군 기획감사실장은 "국내 몇몇 사학자들은 단군 조선이 위만 조선에 밀려 금마(전국 익산군 금마면)로 남하해 마한(馬韓)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韓' 유래가 민족 중흥을 뜻하는 마한의 한에서 유래되었고, 다시 대한민국의 한으로 이어진다는 역사적 사실이 휘찬려사에 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군위는 민족 역사의 중요한 뿌리를 가진 고향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보옥 같은 가치를 지닌 휘찬려사가 왜 지금까지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너무나 의아했다. 분명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는데, 하루빨리 그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하는 데 말이다. 휘찬려사는 고려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방대한 내용을 갖춘 사서이다. 따라서 국가 주도의 번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번역 사업은 주로 중앙정부에서 발간한 사서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17, 18세기 정계에서 소외된 영남 남인의 사서이기 때문에, 당시 주류의 사서와 사상이 아니라는 점 등으로 인해 번역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부분이 적잖다는 것이다. 또한 휘찬려사는 고려시대와 조선후기에 사용된 용어가 혼재한데다 국제정세 서술에는 몽골어, 만주어 등이 적잖은 것도 번역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기관에서 번역을 주관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번역 비용이 엄청나 재원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지방 정부 차원의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는 대목이다. 박수호 군위문화원장은 "중앙중심적 역사 사관을 극복하고, 지방 주체 역사학 연구를 위해서라도 휘찬려사는 반드시 번역되어야 한다"며 "번역 후 휘찬려사는 고려시대사와 조선후기 사상사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상근 부림 홍씨 운영위원장은 "휘찬려사는 현재 어떠한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지에 대한 총괄적인 분석은 끝났고, 완벽한 번역을 기다리고 있다"며 "번역 후 휘찬려사가 화려하게 부활하면 고려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가치가 세상에 등장할 것이고, 보물 이상의 국보급 문화재로 거듭날 것"이라고 했다. 휘찬려사가 화려하게 부활해 세상과 만나는 날, 고려의 역사는 새 지평을 열 것이고, 군위의 역사는 새로 쓰여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