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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윈도에 사람을 전시하고 있다. 야릇한 홍등 불빛 아래에 젊은 여자들이 여럿 앉아있다. 드러난 맨살 때문인지 농익은 관능미에 눈이 부시다. 오래전 교육원에 입소하기 위해 새벽에 내린 역전 뒷골목의 풍경이다. 2004년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된 이후로 풍속은 급변했지만, 그땐 그랬다.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에 몰락하여 대신동을 떠났다. 남의 집 셋방살이를 전전하다가 다섯 번째에 이사 간 곳이 음산한 분위기의 적산가옥이었다.
충무로 로터리 부근에 위치한 이 적산가옥은 2층으로 된 낡은 목조 주택이었다. 2층은 나무판자에 시멘트를 덧씌운 복도를 따라 12개의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1층에는 아래 위층 공동으로 사용하는 수도와 빨래터가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서 천장까지 사각형으로 뻥 뚫려있어, 2층 복도에서 난간을 잡고 고개를 내밀면 빨래터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이면 도로로 나가는 출입구 한 편에는 재래식 공동화장실이 있었다.
내가 이 집 2층 방 한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한창 감수성으로 예민할 시기인 중학교 2학년 말부터였다. 학교는 지천에 있어서 통학하기는 편했지만, 동네가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학우들이 알까 봐 전전긍긍했다. 만약 그 동네에 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슨 말들을 해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우리 방의 구조는 창호지로 된 방문과 나란히 붙은 벽체의 중간쯤에 유리로 된 창문이 복도 쪽으로 나 있었다. 방의 사면 중에 삼면은 벽이고 한 면만 트여 있는 구조였다. 방안은 장방형 다다미가 여덟 장 가로 세로로 깔려 있었고, 겨울에는 한가운데에 배관을 달아낸 연탄난로를 설치하여 난방을 해결했다. 복도는 사람 한 명이 서로 비켜 갈 정도로 좁았다. 거기서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 둘, 다섯 식구가 살았다. 아버지는 작은형 가내 공장에 딸린 방에서 기거를 하다가 1주일에 한 번씩 다녀가시곤 했다.
우리 쪽 복도에는 방 3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제일 안쪽 방은 비어 있은 지 오래되었고, 우리 방, 바로 옆의 가운데 방에는 마흔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초등학생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바짝 마른 체형에 말할 때 혀 짧은소리를 냈는데, 간혹 발작적인 기침을 숨넘어가듯이 했다. 그래서인지 그 방 근처만 가면, 가래 해소제인 용각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듣기로는 사창가에 찾아오는 일본인 손님을 상대로 통역을, 하거나 아가씨들의 일본인 단골고객 편지를 번역, 대필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젊은 아가씨들이 우리 방문 앞 복도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어떤 때는 편지에 고액 엔화가 동봉되었다고 감격스러워하는 들뜬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 아가씨들은 아주머니를 ‘엄마’라고 불렀고, 아주머니는 그녀들을 ‘이년 저년’ 하며 딸처럼 대했다. 그중에 키가 크고, 작은 두 명의 아가씨가 유독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작고 아담하게 생긴 아가씨는 양딸로 삼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아가씨는 항상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언젠가 한여름이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책상에 잠시 엎드려서 졸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맡이 쐐 한 느낌이 왔다. 얼른 고개를 드니까 그 양딸이라는 아가씨가 복도에 서서 야릇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참 묘했다. 그날 이후로 그 아가씨 말소리가 들리면 괜히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한편, 우리 방 뒤편 복도 쪽도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우리와 벽을 사이한 방에는 택시 운전을 하는 노총각이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이 착한 남자는 우리 누나를 많이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 집에서 그런 뜻을 어머니 편에 전달해 왔으니 자연스레 혼사가 오간 형태가 되었다. 내가 보기엔 나이 차이도 있고 인물도 별로인 데다 중졸 학력이라, 인물도 보통은 넘고 고졸 학력의 누나가 많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는 스물을 넘긴 나이긴 해도 아직 시집갈 생각이 없었기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또 우리 방의 복도 입구 쪽 사통팔달로 통하는 곳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열여덟의 곱상하고 생활력이 강한 아가씨가 중학교만 마친 채 부모님과 같이 충무동에서 과일가게를 하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어머니에게 상당히 살갑게 굴었는데, 어머니는 꼭 미래의 며느리 대하듯 곰살궂었다. 언젠가 어머니와 같이 제수용 과일을 사러 그 점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시어머니 대하듯이 깍듯했다. 아무리 조혼이 성행하는 시절이라 하더라도 나는 아직 여드름이 송송할 때라 어안만 벙벙할 뿐이었다.
그리고 1층에는 물귀신이라 불리는 공공의 적이 하나 있었다. 아가씨들에게 각종 빨랫감을 받아와서 생업을 하는 드센 아주머니가 그 장본인이다. 수돗물이 시간제로 나오던 시절이어서 물이 나오면 자연스레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 아주머니는 특화된 체질로 수돗가를 지배해 나갔다. 시비가 붙으면 커다란 덩치에 천둥 같은 목소리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상대방을 기어이 두 손 들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아예 공동수도의 주인 노릇을 했다. 나는 어머니가 빨래터에 내려가면 이 아주머니와 부딪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사교성이 좋은 어머니는 물귀신과도 친해서 할 일을 제때 다하고 올라왔다.
1층에는 또 어머니와 둘도 없이 친한, 체구가 자그마한 과수댁이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남편은 오래전 폐가 안 좋아 병사했다고 한다. 이 아주머니에게는 군에서 갓 제대한 잘생긴 아들이 있었다. 학교는 K중학교, 명문 B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어찌 이런 환경에서 살겠느냐고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생뚱맞게도 내 중학교 교가를 피리로 불어 젖히는 게 아닌가. 그 남자도 미심쩍어하는 내 마음을 자기 어머니 편에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로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실이 그렇다면 곧 좋은 직장을 구해서 이 험악한 동네를 벗어나리라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더위도 한풀 꺾인 어느 날, 그 준수하게 생긴 남자가 나의 믿음을 저버리고 베짱이처럼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로 시작하는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노래 실력의, 좋고 나쁨을 떠나 나름 열심이었다. 음악 학원에 다닌다고도 했다. 나는 ‘그 좋은 머리로 뭐 하는 짓이지?’하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제법 흐른 후, 그 아주머니가 우리 방에 찾아와서 방바닥이 꺼지도록 장탄식을 하며 어머니에게 길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들이 옆방에 드나들던 그 양딸이라는 아가씨와 눈이 맞아 인근 아미동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그녀는 유명 탤런트 뺨칠 정도로 예쁘게 생겼지만 누가 봐도 그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짝임이 분명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처럼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렇게 적산가옥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마치 삶의 종착역에 선 것처럼, 은연중 그 환경에 걸맞은 행동 들을 하고 있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교육을 위해 집을 괜히 세 번씩이나 옮겼겠나.
나는 그곳에서 중3 시절을 지내다 K고등학교에 원서를 내고 보기 좋게 낙방을 했다. 나같이 나약한 의지력의 소유자가 당연히 받아들 성적표였다. 2차에서 아예 원서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정규 과정이 아닌 독학으로 앞날을 개척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하루라도 빨리 고졸 학력을 따서 보란 듯이 서울의 유명 대학에 합격하여 인생역전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각오였다. 실제로는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회비를 낼 수 없는 암담한 실정이 고졸 검정고시를 택한 결정적 이유였다. 선택이야 어떻게 하든 이래저래 미래가 불확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공납금을 못 내는 사정은 정말 심각했다. 어느 날 새로운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면서 1층 출입구 게시판에 수업료를 못 내는 학생 이름이 나붙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수업 중에 수시로 집으로 쫓겨 갔다. 그렇지만, 집에 가본들 해결 방법이 없는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게시판에 공시된 내 이름은 항상 전교 꼴찌에서 두 번째까지 남아있었다. 미술 시간은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해 제일 괴로운 과목이 되었고, 수학여행은 엄두도 못 내었다. 나의 학교생활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생일이 빨라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간 동생도 중학교에 가야 하고, 우리 집이 중, 고등학생 두 명을 동시에 건사할 형편은 절대로 못되었다. 결국, 나의 학창 시절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도합 9년으로 끝이 났다. 지금 학사 학위를 두 개 가졌지만, 고졸 학력부터는 모두 독학으로 이뤄낸 것이다.
나는 검정고시 공부하는 틈틈이 동생과 같은 또래의 이종사촌 동생을 방학 때 집으로 불러 공부를 봐주면서 용돈 벌이도 했다. 평준화 전형으로 중학교에 들어간 동생은 나한테 기초를 닦아서 그런지 1학년 때는 전교 수석을 다툴 정도였다. 가정방문을 온 동생 담임선생은 나를 보더니 동생이 공부를 잘하는 이유가 뒤에 훌륭한 형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극찬을 했다. 아마 동네 이름에 선입견을 가져 가정방문 전에는 정상적인 가정이 아닐 거라는 이상한 상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름대로는 방향을 잘 잡고 가던 어느 날 한밤중이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 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단말마처럼 귓전을 때려왔다. 얼른 복도로 뛰쳐나가서 보니 바로 앞쪽의 또 다른 적산가옥에 불이 붙어 우리 쪽으로 맹렬히 옮겨오고 있었다. 잘 마르고 오래된 목재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나고, 매캐한 연기가 바람 방향인 우리 쪽으로 거침없이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급히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을 깨웠다. 그런데 막넷동생이 꿈속을 헤매며 깨워 놓으면 드러눕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차분해졌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머릿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었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집에서는 내가 가장이 아닌가. 동생들은 책 보따리를 챙기고, 어머니와 누나는 돈 나가는 물건과 옷 보따리들을 챙겨서 연기가 자욱한 복도와 계단을 지나 길 밖으로 피신했다. 나는 맨 나중까지 남아서 몇 가지 물품을 더 챙기고,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내가 생각해도 사내다웠다.
나중에 불이 꺼지고 들어가 보니 희한하게도 우리 방부터 불이 붙지 않아 천장도 말짱하고 가구도 그을리기만 했다. 흙벽이 훌륭한 방화벽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는 택시 기사를 한다는 그 총각의 친척 집에서 며칠간 신세를 졌다. 그리고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기까지 폐허가 된 불탄 집에서 얼마간 더 생활하다가 친지의 도움으로 남부민동에 2층 독채 전세를 얻어 옮겨 가게 되었다.
새로 이사 간 곳은 천마산 자락에, 위치하여, 앞으로는 창문을 통해 산봉우리에 구름 모자를 쓴 영도 봉래산이 마주 보이고, 먼바다에는 점점이 떠 있는 배들 뒤로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아스라하게 펼쳐졌다. 대신동을 떠난 이후로 최적의 환경에서 나를 담금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부는 물론 동서양 고전, 철학, 과학서 등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문학적 기본 소양은 거기서 다듬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어둠의 장막을 넘나든 불의 정화(淨化)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다. 이제 그곳을 살짝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환경에 굴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내 젊은 날의 패기가 그리워진다.
첫댓글 집념이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집념 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게 있답니다.
선생님께서는 IQ도 대단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간 편안 하셨는지요? 별나게 무더운 올 여름, 잘 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