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청소년들에게 성년이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어 보면 열 명중 아홉 명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면허증을 취득하여 차를 몰고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삶을 즐기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8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전면허 시험이 고시보다도 어렵다며 운전면허 시험을 치루는 것을 힘들어했다. 1종 보통 운전면허증, 나도 운전면허를 얻기 위하여 필기시험과 코스, 장거리 부분의 실기시험을 쳤다. 필기시험은 암기력 시험이었고 코스실기시험은 암묵적 수학 공식이 적용되었다. 장거리 실기시험은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며 운동장 한 바퀴를 주행하면서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을 정해진 시간 안에 통과하여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시험이었다. 면허 획득을 위하여 나는 운전학원에 등록을 하게 되었고 필기시험과 코스시험은 바로 통과하였지만 장거리 시험은 똑같은 시험을 두 번 실패한 후에 합격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운 고시를 통해 얻어진 나의 면허증은 나의 생활의 전부가 되었고 생존면허증이다. 나의 직업은 대중교통버스를 몰거나 택시를 운전하는 직업 운전기사가 아니다. 물건을 납품하는 소위 배달민족의 한 일원이다.
나는 강원도 산골에서 자랐다. 부모님과 2남 4녀의 많은 식구들은 넉넉하게 생활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적 궁핍은 언니와 오빠를 대구로 내몰아 노동자로 만들었다. 언니와 오빠 덕분에 나는 강원도에서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무렵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오빠가 공장에 필요한 부자재를 판매하는 가게를 시작하였다. 오빠의 사업은 사람을 필요로 하였고 강원도에 살던 부모님과 나는 대구로 이사를 왔다. 오빠의 가게에서 나는 경리업무 뿐만 아니라 가끔씩 물건을 납품하는 일까지 하였다. 화물차에 재료들을 싣고 신호를 기다릴 때면 보시는 분들마다 여자가 화물차를 몰고 있다고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곤 했다. 거래처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다고 칭찬과 격려를 주시는 분들과 남자들이 활동하는 영역을 침범했다고 보이지 않게 무시를 보내시는 분들로 나누어졌다. 나를 향한 타인의 눈들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였지만 이런 고생이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 새 차에 짐을 싣고 첫 운행을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직진 신호가 바뀌어 천천히 출발을 하였고 사거리를 통과하고 다음 도로로 진입할 때 갑자기 택시가 우회전을 하였다. 급정거를 하였지만 빗길 미끄러운 노면은 내가 타고 있는 화물차를 택시 뒤까지 보내주었다. 다친 사람도 없었고 택시도 부서진 곳이 없었다. 그러나 택시운전수는 많이 아픈 표정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였으며 합의금 요구는 현실성이 없었다. 부탁과 사죄로 어렵게 서로 합의점에 도착하여 사고 수습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상처를 입었다. 여자가 화물차를 운전한다고 질타하시던 배려 없고 욕심 많은 택시기사님을 원망하면서 나는 첫 운전의 문을 첫 사고로 열었다.
어느 해 초겨울, 서리가 내려 고속도로 곳곳에 빙결이 있다는 기상안내를 들었다. 이 날도 나는 납품을 위하여 짐을 가득 실었다. 도착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진입하려고 회전을 하는 순간 내가 운전하는 화물차가 하늘을 날았다. 실린 짐들이 기우뚱하며 기울어졌고 차는 짐들의 무게 때문에 옆으로 넘어졌다. 굽어 있는 내리막길과 과속, 도로의 빙결과 무거운 짐 등 모든 요소들이 어울려 차가 전복되었다. 화물차 운전석 좌측면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많이 찌그러졌다. 접촉사고가 아니라서 사고 수습은 간단히 견인차를 부르고 물건들을 정리하여 납품을 완료시켰다. 대구와 멀리 떨어진 곳이라서 이 모든 일들을 혼자 처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큰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그만 찰과상도 없는 외관상 멀쩡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고 수습도 혼자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의 교통사고는 나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다. 어디든 나와 함께 움직여주던 차가 무서워졌고 차를 타면 비행기처럼 공중으로 붕 뜨던 사고의 기억에 두려웠다. 나의 일부가 되어 함께 움직이던 차를 멀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였게 되었으며 복잡한 대중교통은 타인들과 부딪치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고 승차해야하는 차를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은 여유라는 휴식으로 내게 즐거움을 주었다. 운전여부를 따지지 않아도 나는 모든 차를 탈 때마다 그날의 사고가 눈에 선하다. 사고의 휴유증은 나에게 생존면허증을 생활면허증으로 바꾸어 주었다. 생활면허증으로 갱신한 나는 운전 습관부터 바꾸었다. 나를 살게 해 준 안전벨트는 최고의 친구로 먼저 생각하고 빨리 빨리라는 조금함을 사고라는 위험 표지판으로 속도를 줄이며 운전했고 안타까운 신호등의 경고에는 멈춤이라는 건널목을 세웠다. 필요에 의해 가던 곳을 힐링을 위한 여행으로 계획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의 생존면허증은 각양각색의 색깔을 띄우는 생활면허증으로 변하고 있다. 하늘이 다시 준 삶을 후회하지 않고 살고자하는 나의 작은 바램이다.
첫댓글
한선생님, 대단하십니다. 트럭에 짐까징
생존면허증이 되고도 남습니다.
지금은 생활면허증으로 바뀌었으니
트라우마도 사라져야겠죠?
그 여리한 외모에 짐을 싣고 배달까지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워낙 겁이 많아 운전은 꿈에도 생각 안하고 삽니다.
나만 다치는 게 아니라 상대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으니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