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대만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이다.[1] 말하자면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선 것이다.
1927년8월 1일: 의열단은 난창 폭동에 참여 이날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무장하여 싸운 날로 나중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의열단이 와해되는 결과를 맞았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 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11월 10일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었다 (공산주의자 소비에트 그런 문구가 들어가 있다)
1929년에와서 비공산주의자 의열단원 중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반발하여 단원들이 이탈함에 따라 겨우 잔당에 의하여 명맥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전 피압박대중이 요구하는 조직은 단순히 어떤 일계급의 전위적 조직이 아닌 대중적 협동전선의 형태인데 본단(本團)은 근본적으로 그 취지에 부응치 못하였다”라는 해체 성명서를 내고 스스로 해체하였다 .
3. 조직원
창립을 함께 한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이었다.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단원 중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김익상은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또 김익상은 이종암, 오성륜과 함께 상해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 시도하였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김지섭은 일본 동경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은 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總領事館)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