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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중심으로 살펴 본 고구려 영토
김 용 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 역사이해와 지도.
2. 고구려 역사 전개와 영토의 변화
3. 고구려 영토의 몇 가지 문제
4. 고구려 영토 지도 어떻게 이해할까
1. 역사 이해와 지도
『신당서(新唐書)』〈양관(楊綰)〉전에는 양관이 출세하기 전 홀로 공부를 하면서
좌우에 지도와 역사서를 놓고 공부했다(左右圖史)는 말이 있다.
이 말에서 유래된 좌도우사(左圖右史)는 역사를 공부할 때에 인간의 삶의 궤적을
시간은 물론 공간적인 이해도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역사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면서 겪었던 이야기다. 어떠한 공간에서 활동했는
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역의 변화가 촉구되기도 하지만, 지리적 조건과 그 변화에
의해 인간의 삶은 큰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지리적 인식을
함께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현행 초중고의 역사교육은 역사 교과서와 함께 사회과부도를 공부하도록 하고 있고,
교과서에도 상당량의 지도가 삽입되어 역사 이해를 돕고 있다.
글보다 그림이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데 보다 효과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잘 그려진
지도 한 장은 한편의 논문 이상으로 더 강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던져 줄 수 있다.
특히 현대는 이미지와 감성의 시대다.
영상매체와 접한 빈도가 높은 젊은 세대일수록 두툼한 분량의 책을 독서하기 보다는
사진과 그림이 많이 삽입되어 읽을 량은 적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을 선호
한다.
따라서 근래에 출간된 역사 서적들도 과거에 비해서는 지도를 비롯한 시각 자료를
더 많이 삽입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들에게 지도 한 장을 그리는 것은 매우 고된 작업이다.
지명 고찰의 어려움이 덜한 조선시대 보다 상대적으로 지명 고증이 덜된 고대사 분야는
더욱 그렇다. 고대 국가의 영토는 지금처럼 국경선이 철책으로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잦은 전쟁, 불철저한 지역 지배, 인구의 이동 등으로 국경의 변화가 매우
잦았다. 따라서 시점에 따라 영역의 표시는 큰 차이가 날 수도 있다.
한국 고대사에서 지도를 통한 역사 이해의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역시 고구려다.
일반인들이 고구려에 대해서 갖는 첫 번째 이미지는 대체로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한
대제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고구려사에 대한 첫 이미지는 고구려를 특정한
시각에서만 바라보게 하는 단점도 있다. 더불어 한국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가 곧 민족의 영광이라고 해석하는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연구자들의 관점
마저 흐려놓게 만들기도 한다.
현행 국사교과서는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남쪽은 남양만에서 포항을 잇는 선까지
서쪽은 요하 주변, 북쪽은 송화강 이남, 서쪽은 흑룡강성 일대의 대부분을 제외시킨
지역만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지도는 과거 일제시기의 식민사학자들의 연구결과
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지도를 그려내는 것에 부담을 가진 연구자들이 다시 지도를 그려내는 것에
소홀했기 때문에 한번 그려진 지도는 그간의 새로운 연구 성과들과는 상관없이 계속
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북한 손영종의 『고구려사2』는 길림성, 흑룡강성 전역과 요서북부, 그리고 연해주와
흑룡강 이북의 넓은 시베리아까지를 고구려 영토로 그리고 있다.
또한 윤내현의 『열국사연구』는 고구려의 영토를 오늘날의 동북3성과 내몽고 동부
일대를 다 포함한 거대한 영역으로 그렸다.
이러한 지도는 고구려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갖는 독자들의 요구에 맞는다.
따라서 이것이 고구려 영토를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 다르게 그려진 지도는 독자들의 역사 이해에 혼동을 초래하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고구려를 과장되게 이해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고구려의 역사 자체가
과장된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고구려의 영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고구려 역사 변천에 따른 영토의 변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2. 고구려 역사 전개와 영토의 변화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서기 668년까지 705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지속해왔다. 긴 시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변화를 겪어왔다.
반드시 앞선 시대보다 뒷시대가 더 큰 영토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 초기
에는 한 동안은 대외팽창정책을 펼치며 영역이 확대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왕 명 |
년 대 |
세력 확대 |
진출 방향 |
1대 추모왕 |
37 |
비류국 |
홀본 부근 |
32 |
행인국 |
동쪽 방향. 백두산? 동남 | |
28 |
북옥저 |
동쪽 방향. 간도 또는 함경북도 | |
2대 유리명왕 |
bc 9 |
선비 |
서북 방향. 천산산맥? 요하인근? |
ad 14 |
양맥 |
서쪽 방향. 천산산맥 주변 | |
3대 대무신왕 |
22 |
(부여국왕의 종제) |
북쪽 방향. 부여국의 일파 |
26 |
개마국, 구다국 |
동쪽 방향. 개마고원? | |
37 |
낙랑국 |
남쪽 방향. 평안남도? | |
5대 모본왕 |
49 |
(상곡, 태원) |
서쪽 방향. 기습 작전 |
6대 태조대왕 |
55 |
요서 10성 |
서쪽 방향. 요서지역? |
56 |
동옥저 |
남동 방향. 함경남도, 강원북부 | |
68 |
갈사국 |
북쪽 방향?. 부여국의 일파 | |
72 |
조나 |
고구려 인근? | |
74 |
주나 |
고구려 인근? | |
98 |
(책성 지역 巡狩) |
동쪽 방향 | |
105 |
(요동군 공격) |
서쪽 방향 | |
118 |
(현도군 공격) |
서쪽 방향 |
고구려 초기 대외 팽창 과정을 다음 도표를 통해 살펴보자.
고구려가 건국한 홀본 지역과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 지역은 압록강 물줄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산지가 많아 농사짓기에는 그리 좋은 곳은 못된다.
반면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고구려는 서기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국내성 일대를 국가의 중심지로 삼아 사방으로 영역을 확대해갔다.
고구려가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딛고 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
해야 핵심지대가 있다. 그것은 평야가 많은 요동에서 한강유역에 이르는 황해안의
비옥한 반달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강력한 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힘이 부족한 상태에서 고구려
가 이곳으로 돌진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먼저 주변의 작은 세력부터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위 표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추모왕 시기에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고구려 인근
과 백두산 동쪽 산간지대의 약소국부터 공략을 시작했다. 2대 유리명왕은 서쪽 지역
으로 진출을 했는데, 특히 선비족을 굴복시킨 것은 특별히 기억할 만하다.
유리명왕 시기까지 고구려는 평지보다는 주변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
왔다.
이렇게 실력을 다진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 시기부터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서기 21년 고구려에게 조공을 하라는 압력을 가해온 부여국을 선제공격한다.
전쟁은 고구려의 패배로 끝났지만, 부여왕이 죽음으로써 부여는 내분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전쟁 후에는 고구려가 부여국과의 경쟁에서 앞서는 결과를 낳았다.
부여의 약화는 고구려로 하여금 갈사국, 개마국, 구다국 등 주변의 소국을 통합하는데
가속도를 붙게 했다. 고구려는 발전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서기 37년 낙랑국을 멸망
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7년 후에 후한이 살수 이남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
고구려가 주변의 군소 국가들의 통합을 완료하고 핵심지대로 본격 진출을 모색한 것은
6대 태조대왕 시기였다. 이때 고구려는 동옥저, 갈사국, 조나, 주나 등 주변 소국들의
통합을 완성하여 대체로 동해안에서 남만주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서쪽의 후한과 격돌했다. 고구려는 후한이 가진 평야지대를
차지해야만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서기 49년 5대 모본왕은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에 이르는 장거리 기습작전을
수행했고, 후한으로부터 막대한 물건을 받은 후에야 무력시위를 중단한 바가 있었다.
이후 55년 태조대왕 시기에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태원 공격은 약탈을 위한 기습 공격일 뿐, 영토 확보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요서 10성 기록인데, 아직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신뢰하지는 않고 있다.
고구려는 2세기 초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거듭 공격한다. 후한은 고구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고구려가 잡아간 포로 1명당 비단 40필을 주는 조건으로 고구려
와 화해를 추구한다.
당시 고구려는 영토를 적극적으로 지배하려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재물과 사람을
약탈하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었다.
태조대왕은 후한을 상대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후방에 배후기지를 건설하게 된다.
그 결과 주목하게 된 곳이 현재 연변자치주 일대인 책성지역이다. 서기 98년 태조
대왕은 무려 6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한다.
책성 지역은 고구려 5개 지방의 장관인 욕살이 머무는 동부지역의 중심지로 확실한
영토가 된다.
태조대왕 시기 고구려는 부여보다 앞선 국력을 자랑하며 동북방의 숙신의 조공도 받는다.
반면 고구려는 서쪽의 후한, 북쪽의 부여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함에 따라
122년 이후 오랫동안 적극적인 대외 경략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
도리어 197년 왕의 동생인 발기와 소노부의 공손씨 정권에 투항 사건 등으로 인해
고구려의 서부지역 영토는 축소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요하 주변과 평안남도와 황해도
에 이르는 동방의 핵심지대를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다.
이후 고구려는 238년 위나라가 요동에 위치한 공손씨를 공격할 때에 원군을 파견하는
등 요동 방면으로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몇 년 후 위나라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도망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고구려는 259년 위나라 대군을
침입을 양맥곡에서 대파하지만, 여전히 요동 전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이후 서쪽 보다는 북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270년에 즉위한 서천왕은 숙신과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곧 새롭게
요서지역에서 성장한 모용선비와 부여 쟁탈전쟁을 벌이는 결과를 낳았다.
300년에 즉위한 미천왕은 요동진출을 모색하는 한편, 313년 중계무역기지로 전락해
버린 남쪽의 낙랑군, 다음해에 대방군을 완전히 동방지역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미천왕은 319년 우문선비, 단선비, 서진 등과 함께 대릉하 주변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공격하기도 했으나, 연합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고구려의 발전을 막은 것은 모용선비였다.
모용선비는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를 몰아내고, 단선비를 격파하고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를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적의 주력군이 오는 길을 잘못 탐지하여 수도를
함락당한 고구려는 왕모와 전왕(前王)인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겨 할 수 없이 모용선비
에게 굴욕적인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모용선비가 우문선비를 물리치고 황하 일대로 남하하여 강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고구려는 뒷날을 기다려야 했다.
도리어 고구려는 371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국천왕이 살해당하는 등 시련을 연속으로
겪어야만 했다.
고구려가 다시 대외팽창에 나선 것은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이후 부터다.
그는 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했으며,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거듭 격파하여
한반도의 패자로 군림했다. 또 동북 방면에서는 동부여의 굴복을 받고 64개성을 점령
하였고, 숙신족을 정벌하였으며, 서북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일파인 비려를 격파하고
서요하 상류인 염수(鹽水)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모용
선비이 세운 후연을 적극 공격하여 이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시기 고구려는 엄청난 팽창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들이 있다.
고구려가 백제의 58개성을 점령하고 신라 수도에 주둔군을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남방
경영에 나섰지만, 백제의 수도가 여전히 한강변의 한성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후연을 멸망에 이르게 했지만, 후연 땅에 고구려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다. 또 신라도 완전히 병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완전히 자국의 영토로 삼는 공간과, 단지 항복과 충성 맹세를 받고 인질과
노획물을 얻어감으로써 정복의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공간을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 구별했기 때문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백제, 가야, 신라, 후연을 직접 통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고구려 중앙정부에 복종하는 제후국이 다스리는 지역이면 만족
했던 것이다. 또 제후국으로 삼지도 않지만, 반드시 격파해야 할 외부의 공간도 구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 개념은 고구려의 천하관으로 나타난다. 광개토대왕릉비문과 중원고구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천하관이 나타난다.
고구려 천하관에는 고구려가 지켜야 할 천하와 그 외의 천하가 구분되어 진다.
신라 등의 제후국은 고구려가 지켜야 할 천하 즉 제국의 범주에 포함시켜 보았다.
후연이 멸망한 후 탄생한 북연에 대해 고구려가 종족의 예를 베푼 것은 북연을 제후국
으로 인정했음을 뜻한다. 고구려는 북연을 제후국으로 인정했기에 요서 방면으로
경략을 멈추었다.
북연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중원의 여러 세력들과 충돌을 방지하여 변방의 완충지대라는
의미가 있었다.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는 요동에서부터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평야지대를 완전히 장악
했다. 고구려는 이를 국가의 핵심지대로 삼고, 동쪽의 책성 지역, 북쪽의 부여 지역을
강력한 배후기지로 삼아, 전통의 압록강 중류 지역과 함께 다중 거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제국의 주변지대에는 고구려의 통제를 받는 거란, 북연, 신라, 숙신과 같은 제후국을
거느렸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국의 기본 틀을 완성한 것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4대 강국의 하나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435년 북연이 척발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어 북위와 대릉하 연안
에서 대면하게 되었으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백제가 부흥하여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이를 먼저 탐지하고 475년 백제를 공격
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를 남쪽의 웅진으로 몰아세웠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산만에서 대전을 거쳐 포항에 이르는 선까지 남하했다.
고구려는 남한강 상류인 충주 지역에 국원성을 세우고 남부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고구려 제국의 지배는 그리 견고하지 못했다.
백제는 곧 국력을 회복해 고구려에 반기를 들었고, 신라도 서서히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으로 성장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남쪽인 평양성으로 천도하는 등 남진 정책의 추진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북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5세기 고구려는 거란족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북방의 유목제국인 유연(柔然)과의
우의를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낀 대흥안령 일대에 거주하는 유목민 집단인 지두우를
분할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자 거란족은 큰 위협을 느끼고 남쪽
으로 이동하는 파장도 있었다.
문자명왕 시대에 가장 특기할 사항은 494년 부여의 자진 투항이다.
그런데 부여는 이미 346년 모용선비의 침략을 받은 이후부터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부여 지배는 그 이전부터 이루어져왔다. 고구려는 부여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실위족에게 철을 공급하며 회유책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물길족의 반란도 진압하는 등 고구려의 북부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다.
고구려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550년대였다.
유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돌궐이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침략해왔고, 고구려가
돌궐을 막는 틈을 타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와 화해하고, 신라로 하여금 백제를 견제하게 했다. 그 대가는
한강유역의 포기였다. 대신 돌궐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고구려는 돌궐과 첨예한 이권을 걸린 거란족 지배문제에 있어서 기득권을 잃지 않았다.
1992년 몽골공화국에서 현장 조사를 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몽골공화국 동부지역에서
여러 개의 고구려 성으로 보이는 유적과 고구려 유물흔적을 찾았다고 한다.
좀 더 정밀한 검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두우 분할, 또는 돌궐과의
전쟁, 실위에 대한 영향력 확대, 초원길을 통한 서방국가와의 교역 등에 이권(利權)이
걸린 고구려가 이곳까지 진출하여 기지를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는 요서남부지역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고구려는 520년대에 중원세력의 전진기지였던 대릉하 주변의 조양을 공격하여 포로를
잡아왔으며, 거란족을 시켜 만리장성을 넘어 현 북경 일대를 수시로 공격 약탈을 감행
하기도 했다.
6세기 이후 요서지역에 중원세력의 거점은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나라의 요서지역의 거점은 유성군 751호 뿐이었고, 이곳과 가까운 북경 북쪽의
어양군은 1현에 3,925호, 북평군은 1현에 2,269호로 각기 1만 명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이 보다 남서쪽인 상곡군은 6현 38,700호, 탁군이 9현 84,059호로 인구가
많았다.
요서 일대에 중원세력의 거점이 없었다는 것은 645년 고구려를 공격해온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
3. 고구려 영토의 몇 가지 문제
고구려 영토의 변화와 관련하여 아직 해결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먼저 고구려가 오늘날의 북경일대를 지배했는가라는 문제다. 고구려가 북경 일대를
장악했다고 보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408년에 죽은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그려진 13태수의 하례를 받는 장면과 묵서명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묵서명은 고구려가 자사, 태수와 현령까지 갖춘 구체적인 지배
체제를 가동하여 북경 인근의 구체적인 영토를 지배했다는 단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408년 이전에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학자들이 더 많다. 유주자사 진을 망명객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유주자사를 지낸 진이 설령 고구려의 지배체제의 틀에서 그곳을 지배한
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망명해 올만큼 고구려가 유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
했을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고구려가 404년 북경 인근으로 추정되는 연군(燕郡)을 공격한 기록도 있는 만큼
이 문제는 앞으로 더 많이 검토되어야 한다.
고구려 영토와 관련된 몇몇 중요 지명의 경우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 특히 낙랑,
서안평의 위치는 기존 통설이 많이 공격받기도 한다. 구체적 지명의 위치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검토가 있어야만 하겠다.
이런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검토해야 할 부분은 말갈 지배 문제다.
놓고 있다. 심지어는 고구려 동부 중심인 책성주변도 말갈의 영역으로 그린다.
고구려와 말갈을 철저히 분리시켜 보자는 시각이다. 고구려와 말갈을 분리시키려는
중국의 지도에는 단지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조공을 한 국가를
중국의 영역에 포함시킨 장면과 극도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지도에는 고구려의 입장은 철저히 무시되어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갈은 고구려의 주요 구성원이다. 고구려와 말갈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말갈은 고구려 군대에 속하여 적극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운명을 같이한 존재였다. 598년 영양왕은 말갈군 1만을 이끌고
영주를 공격했으며, 661년에는 말갈장군 생해는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뇌음신 장군과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말갈군은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당나라 주력부대와 맞서
싸웠다. 고구려 멸망 시점까지 말갈은 고구려와 분리시켜 볼 수가 없다.
수서에 기록된 말갈 7부 가운데 백산부, 안거골부, 호실부, 속말부, 백돌부는 고구려에
속한 부족들임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이는 최근의 중국학자들의 발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불열부는 아예 기록조차 없어 단정하기는 힘들고, 흑수부는 유독 다른 계통을
지닌 읍루-물길과 연결되는 종족으로 여겨지는데, 흑수부는 고-당 전쟁 때에는 고구려를
도와 전쟁에 참전했다. 만약 고구려와 말갈이 전혀 별개의 세력이라면 어떻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이 하나의 국가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겠는가?
가장 이질적인 흑수말갈 조차 고구려와 무관한 세력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말갈에 대한 어떤 통제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많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양자 관계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흑룡강가에 위치한 러시아의 국경도시 하바로브스크시 인근의 코르사코브스키 고분군
112호 고분에서 고구려의 금동불상과, 같은 고분군에서 고구려식 화살촉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이곳은 흑수말갈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삼강평원의 북쪽이다.
금동불상과 화살촉 유물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 사는 흑수말갈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그릴 때에는 말갈의 거주지로 알려진 동북 지역을 포함시키는
것이 당시 영토 개념에도 더 가까울 것이다.
손영종의 『고구려사2』의 지도는 고구려가 말갈 전역을 완전히 영토로 삼았다고
해석한 지도라고 볼 수 있다.
말갈 지역을 지도로 그릴 때에는 백산부와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호실부 지역은
고구려의 내지에 그려 넣고, 연해주 북부와 삼강평원 일대의 흑수부 지역은 고구려의
변방으로 그리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구려사2』 지도에 표시된 흑룡강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은 고구려 영토로
표시할 수 있을까?
먼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고구려를 그저 주변에 존재한 가장 강대한 국가 정도라고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담비가죽을 비롯한 산물을 거래하는 상업 활동의
보호, 여러 부족들의 산발적인 내침(來侵) 방지, 여러 부족들의 병사를 차출하여
외부와의 전쟁에서 동원 등을 목적으로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구체적인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가 이곳에 통치조직을
갖춘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보는 것은 아직까지는 무리한 역사 추론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간혹 무력시위를 하거나, 외교관을 파견하고, 소수의
부족장들에게 고구려 관직을 주는 책봉을 하거나, 또는 고구려의 선진 문물을 하사
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구려를 따르게 하는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만으로 고구려 영토를 이곳까지 그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만약 현대 중국의 영토 표시 방법에 준하여 고구려 영토를
그린다면, 고구려가 숙신에게 조공을 받고 말갈 등을 제어한 것만으로도 북쪽 영토는
무한정 확대되어 그려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 지도에 고구려 영토에서 말갈을
제외시킨 것은, 수와 당의 영토를 그린 방식과 전혀 다른 이중 잣대로 지도를 그린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지도 표시 방법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북한의 『고구려사2』 지도
역시 지나친 과장이 있지만, 중국의 지도 표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도 있겠다.
고구려 영토 표시에 있어서 또 하나 주목할 곳은 요서 지역이다. 대체로 고구려 영토를
표시한 지도에는 요서지역이 빠져있다. 일부 지도에 무려라 등 요서에 고구려 전진
기지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요하를 건너 국경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특히 고구려의 것이 아니면 모두 중국의 것으로 표시하는 안일한 지도 표기가 문제가
된다. 대다수의 한국의 역사지도에는 고-수 고당 전쟁 시기 양국간 국경을 요하로
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수나라와 당나라는 요서 지역에 제대로 된 군현조차 없었다.
겨우 군사기지로 유성군 1개소에 인구 3천 남짓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를 근거로
광활한 요서 지역을 전부 수와 당의 영토로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요서 지역은 역대로 고구려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다.
왕 명 |
년 대 |
고구려의 활동 상황 |
모본왕 |
49년 |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
태조대왕 |
55년 |
요서에 10성을 쌓음 ? |
태조대왕 |
121년 |
후한 습격, 후한의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등의 군대가 동원된 것으로 볼 때 전쟁 무대는 요서 일대로 추정 |
미천왕 |
313년 |
모용선비의 책성 공격 (요서의 중심인 대릉하 주변) |
광개토대왕 |
395년 |
거란 정벌, 부산(負山), 부산(富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름. 의무려산맥을 넘어 요서 북부로 진격한 것 ? |
광개토대왕 |
402년 |
후연의 숙군성(대릉하 주변) 공격 |
광개토대왕 |
404년 |
후연의 연군(북경 일대 또는 대릉하 주변) 공격 |
광개토대왕 |
406년 |
후연의 군대가 3천리나 쫓겨 다님 (요서지역에서 전쟁 ?) |
광개토대왕? |
408년 이전 |
유주자사 진이 북경 일대 지배 ? (덕흥리 고분) |
장수왕 |
436년 |
북연의 수도 화룡(조양지방)에 진격, 북연 접수, 북위군과 대치 |
장수왕 |
479년 |
유연과 함께 지두우 분할 (대흥안령 산맥, 요서 북부) |
문자명왕 |
502년 |
북위의 변방을 습격 (북경 일대) |
안장왕 |
520년대 |
유성(조양)을 공격하여 평주사마 한상을 잡아 옴 |
평원왕 |
560년대 |
돌궐을 격파, 거란 지배력 강화 |
평원왕 |
578년 경 |
북주군과 배산에서 맞서 싸움 (요서 일대 ?) |
영양왕 |
598년 |
수의 영주 선제 공격, 요서와 발해만에서 수나라 해군 격파 |
보장왕 |
644년 |
영주 공격, 요하 서쪽 무려라에서 적과 대치 |
보장왕 |
658년 |
적봉진 전투(적봉 지역), 두방루의 3만 군대 당군과 전투 |
보장왕 |
659년 |
토호진수(서납목륜하)에서 고구려군 당나라 신문릉 군대 습격 |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에게 요하는 내지 하천이지, 국경 하천이 아니었으며,
고구려군은 수시로 요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의 요서
지역에서의 활동은 두드러진다.
사서 명 |
내 용 |
후한서, 삼국지, 양서 |
사방 2천리 |
위서, 주서 |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
북사 |
위나라 때에 비해 3배,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
수서 |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 |
구당서 |
동서 3,100리, 남북 2천리 |
신당서 |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합 |
통전 |
수나라 시기에 이르러 점점 커져 동서 6천리 |
역대 사서에 기록된 고구려의 영토를 잠시 정리해보자.
고구려의 영토는 후기로 갈수록 넓어졌다. 특히 동서 6천리는 약 2,400km로 발해의
사방 5천리보다 더 크다는 표현이다. 북위는 고구려를 작은 술동이를 담을 거대한
술동이에 비유한 바 있다. 고구려가 북방의 강자 돌궐을 격파하고, 세계제국인 수와
당을 거듭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영토도 확대되었고 국력도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위서』<봉의전>에 따르면 봉의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거란이 고구려의 호위
하에 북위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간 일을 항의하였다고 한다.
문자명왕은 이 요구에 응하여 거란이 노략해간 재물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낸 바가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북위는 고구려가 거란족의 상당수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거란의
종주국(宗主國)인 고구려에 항의사절을 보낸 것이다.
기존의 국사교과서 등은 동서 2천리, 남북 1천리라는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통전의 기록을 적극 해석해서 고구려의 영역을 그린다면, 거란의 거주지도 포함해서
지금의 요서 북부 적봉시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까지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거란족의 경우 전체가 다 고구려에 지배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돌궐, 일부는 수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었으므로, 이 지역은 영토보다는 강도가 약한 고구려 세력권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4. 고구려 영토 지도 어떻게 이해할까.
고구려 영토의 변천과 지도상에 영토를 표시하는 데 있어 몇 개의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지도는 고구려의 모습을 2차원의 도면에 표현해 내는 것이다. 단순히 고구려의 면적
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토가 넓다고
해서 국가가 위대하다거나, 자랑스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캐나다가 넓은 땅을 가졌지만, 1/50에 불과한 잉글랜드 보다 그 땅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적다. 면적이 넓다고 해서 제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흔히 민족주의 사학에서 고구려를 넓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몽골 초원의 1억 평 보다는 경주 일대의 백만 평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고구려에게 있어서 요하에서 한강에 이르는 비옥한 농경지는 국가의 핵심지로 당시까지
개간이 안 된 넓은 삼강평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한 가치를 지닌다.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별 특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맹목적으로 크게만 지도를 그리는 것만큼이나, 민족의 영광만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고구려를 보는 것이 못 마땅하다고 해서 고구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
하여 고구려의 내지만을 영토로 지도에 표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고구려가 제국이었던 만큼, 제국의 중심지대와 주변지대가 있다.
제국의 주변지대는 흔히 세력권, 영향권, 변방 등으로 말하기도 하며,
현대 중국식 표현을 빌리면 변강(邊疆)에 해당한다.
현재 중국의 역사 지도를 그릴 때에 중원의 정통왕조의 영역에 변강의 나라들을 포함
시키는 것처럼, 고구려도 내지와 그의 세력이 미친 범주에 대해서 함께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고구려는 제국을 운영한 나라답게,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여 새로운 고구려
문명을 창출해냈다. 멀리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까지 왕래하고, 세계제국인 수와
당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맞서 싸워 이긴 고구려인의 힘은 그들 스스로가 가진 제국의
경영자라는 자부심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고구려의 주변지대를 영토에 그리지 않는다면, 고구려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할
수가 없으며, 고구려인의 활동 무대도 잘못 오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지도는 학생들에게 중국이 현재의 영토만큼 넓은 영토를 고대로부터 갖고
있었다는 인식을 주입시켜준다. 그것은 그들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가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는 만들어진 논리를 증빙하기 위해 만들어진 왜곡된 지도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비난하기에 앞서서 우리의 지도 표현도 개선해야 할 것이다.
고대 국가들에게는 오늘날처럼 명확히 측량을 해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영토라고
하는 국경선이 없었다. 막연하게 이 지역까지 영토이고, 어디를 지나면 타국이란
개념이 전부였다. 즉 국가와 국가 사이에 완충지대가 매우 넓었다. 고구려에게 요서
지역, 대흥안령 일대가 대표적인 완충지대였다.
완충지대는 선이 아닌 면으로 지도에 표현되어야 한다. 특히 완충지대를 중국의 것이
라고 단정 짓는 기존의 지도는 분명 고쳐야 한다.
고구려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명확한 구분, 고구려의 주변지대를 어떻게 영토 지도에
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개인의 저서에서는 다양하게
표시된다고 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없었던 것은 반드시 개선
되어야 한다. 교과서에서부터 고구려의 천하, 또는 고구려의 중심부와 주변부 등의
제목 하에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친 지역을 지도로 표시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개인의 저서에서는 표현하기가 다소 힘들지만, 사회과부도나 국사교과서에는 반드시
지도를 지형도를 배경으로 그리는 것이 옳다. 그래야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고
어느 지역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 예를 들어 왜 삼국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노력했는지 -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를 통해서 역사를 읽는 것은 단지 어떤 나라가 얼마나 큰 영토를 가졌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가 어떤 지역을 언제 어떻게 차지함으로써 이후 어떤 역사적
변천을 겪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어떠한 자연환경에
놓여있는 국가이기에 어떠한 역사적 행동을 했는가를 이해할 단서가 지도에 포함되어
야만 한다.
지금까지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도는 얼마나 넓은가에 관심이 모아져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고구려의 역사 전개의 이해를 돕는 지도,
즉 그들이 어떠한 자연조건을 가진 지역에서 활동했으므로, 어떠한 역사상을 만들었
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지도가 그려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