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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의 쟁점과 교훈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1. 해방정국의 국제관계
1) 광복 80년 시기별 특징
| 구분 | 미소 냉전 시기 (1945~1991) | 미국 일극 패권 시기 (1991~2008) | 세계 다극화 시기 (2008~현재) |
| 국제질서 | 미소 양극체제, 냉전 제3세계 민족해방 물결 | 미 일극 지배, 신자유주의 세계화, 탈이념화 | 미-중 신냉전, 러시아-중국-남반구 부상, 탈미 촉진 |
| 한국정권 |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 |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이재명 정권 |
| 주요투쟁 |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4.3-여순 항쟁, 4.19혁명, 5월 항쟁, 6월항쟁 등 | ’97년 노동자 총파업, ’02년 효순-미선 촛불, ’08년 광우병 촛불 | ’16~‘17년 촛불 혁명, ’24~25년 빛의혁명 |
| 운동동력 | 민족해방운동, 학생·노동자 중심 민중운동 | 민주노조,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 비정규직·청년·여성·기후 등 다중 주체화 |
| 운동대상 | 미 제국주의, 군사독재, 식민지 유산, 재벌 | 신자유주의 세계화, FTA, 미군기지 재배치 | 한미예속동맹, 다국적 자본, 플랫폼독점, 신기술파쇼 |
| 역량편성 | 민족해방계+사회주의계 연대, NL-PD 이념 구도 형성 | 민주노총+시민사회단체 연대, 정당·정파 역량 강화 | 대중조직, 시민단체, 정당+ 이슈운동,지역-생활조직,온라인네트워크 |
| 핵심요구 | 자주·민주·통일,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철수 | 노동기본권, 공공성 확대, 부패 청산, 정권교체 | 주권회복, 평화실현, 불평등 해소, 기후, 젠더 |
| 조직화 | 학습조직, 유인물, 비합-반합 조직화 | 정책·토론, 대중교육 합법 공개 오프 조직 | SNS·디지털 플랫폼 교육토론 온라인 생활·문화 조직 추가 |
| 투쟁화 | 반독재투쟁, 거리시위, 총파업 등 대중 직접 행동 | 대중집회, 제도 정치 압박, 정권교체 운동 | 촛불, 야광봉, 문화-정치 결합, 온라인 캠페인, 생활투쟁 |
| 정치화 | 자주민중정권, 비합 전위조직-연합전선 | 진보정당, 의회 진출, 운동과 정치의 결합 | 연합정권->자주민주정권, 정당+대중조직·시민사회단체+연대연합체 |
2) 광복 당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① 미국의 구상
- 루스벨트는 전후 세계질서 구상을 준비하면서 한국 등 식민지에 신탁통치를 적용하려 했다.
- 명분은 ‘민주주의 훈육 후 독립’이었으나 실제로는 미국식 정치·경제 체제(친미국가) 건설이 목적이었다.
-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했으나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이라는 표현은 신탁통치 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 루스벨트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과 유엔 참여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 등 태평양 지역에서 일정한 소련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 그는 40년간의 신탁통치를 구상했으며, 국제연합을 신탁통치 운영 기구로 삼고자 했다.
② 소련의 구상
- 소련은 동유럽에서 즉각적인 독립 보장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친소 공산정권을 세워 완충지대(위성국가)를 구축했다.
- 테헤란 회담에서는 마지못해 한국 신탁통치에 동의했으나, 얄타회담에서 동유럽 지배권을 확보했다.
- 독일에 맞서 2,700만 명 희생을 치른 소련은 동유럽 점령 정당성을 주장했고,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보장받았다.
③ 미·소의 타협과 갈등
- 얄타협정은 “점령지 기득권 존중”을 합의하며, 신탁통치를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협의로 결정하기로 했다.
- 이는 곧 냉전의 씨앗이 되었으며,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장기 신탁통치를, 소련은 동유럽에서 즉각 공산화를 추진하였다.
④ 트루먼의 등장과 분할
- 1945년 4월 루스벨트 사망 후 트루먼은 소련을 견제하는 노선을 취했다.
- 포츠담회담에서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려 했고, 일본의 조기 항복을 위해 원자폭탄을 사용하였다.
- 소련은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 후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했고, 미국은 8월 10일 38선 분할 점령을 제안하였다.
2. 냉전의 시작과 민족 분열
1) 좌익의 신탁통치 혼선과 미국의 반공 반탁 공작
① 미국의 신탁통치 방침 유지
- 일본 항복 이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조선 신탁통치를 공식 입장으로 유지했다.
- 1945년 10월 20일, 빈센트 미 국무부 극동국장은 “조선은 자치 준비가 안 됐으니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 《매일신보》 보도로 조선인들은 처음으로 공식 신탁통치안을 인지했고, 곧바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② 국내 여론과 반탁운동의 전개
- 10월 25일 《매일신보》를 시작으로 좌우익 모두가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 건국동맹, 공산당, 한국민주당, 임시정부 등 광범위한 세력이 처음에는 모두 반탁에 동참했다.
- 신탁통치는 “민족 모욕과 기만”으로 규정되었고, 각종 단체가 ‘반탁 국민총동원위원회’ 등을 결성했다.
③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16.~25)
- 미국·소련·영국 외무장관은 조선 임시정부 수립 후 5년간 신탁통치를 합의했다.
- 그러나 “소련이 신탁을 먼저 제안했다”거나 “박헌영이 소련 단독 신탁을 주장했다”는 의도적 오보가 확산되며 반탁·반소 여론이 급등했다.
-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과 미군정·VOA가 여론 조작에 가담했다.
④ 언론 통제와 왜곡 보도
- 미군정은 국내 언론을 통제하고 ‘합동통신’을 통해 보도를 관리했다.
- 신문들은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은 신탁 주장”이라는 프레임을 퍼뜨려 반소운동으로 확장시켰다.
- 《동아일보》는 반탁 캠페인을 주도하며 우익 정치세력과 연계했다.
⑤ 좌익의 입장 변화
- 공산당과 인민공화국은 초기에 반탁 성명을 냈으나, 박헌영이 평양에서 소련 측 설명을 듣고 돌아온 뒤 찬탁으로 입장을 전환했다.
- 좌익은 신탁통치를 “남북 통일국가 건설을 위한 고육책”으로 받아들였으나, 이미 여론은 반탁 일변도로 기울어 좌익 지지도가 약화됐다.
⑥ 반탁=반소·반공, 찬탁=친소·용공 구도
- 여론 프레임이 고착되면서 우익 세력이 급격히 성장했고 좌익은 위축되었다.
- 소련은 북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위성국가 건설을 준비했고, 남에서는 미군정이 반공 단독정부를 지향했다.
⑦ 결과
- 미소 협력 속 신탁통치는 실행되지 못했고, 남북은 각기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걷게 되었다.
- 이는 해방 직후부터 남북 분단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냉전의 시작과 미소 공동위 파국
① 냉전의 발단
- 그리스 내전(1944~)에서 우익·좌익 간 무력충돌 → 영국·소련의 대리전 성격.
- 미국, 1947년 트루먼 독트린(그리스·터키 지원) 발표 → 대소 봉쇄정책 전환.
- 마샬 플랜(1947), 나토(1949), 베를린 봉쇄(1948~49) 등으로 미·소 대립 격화.
② 한반도에 미친 영향
- 해방 직후 남한 좌익은 미군정과 협력했으나, ‘근택인쇄소 사건’ 등으로 탄압.
-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사건 → 좌우 충돌, 수백 명 사망·수천 명 체포.
- 38선은 사실상 봉쇄, 남북 분단 심화.
③ 미소 공동위원회 협상
- 1945.12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및 임시정부 수립 합의.
- 1차 회담(1946.3): 임정 협상 참여 단체 범위(찬탁 vs 반탁) 놓고 대립 → 공동성명 5호로 절충했으나 무산.
- 2차 회담(1947.5~10): 미국은 모든 단체 협상 주장, 소련은 반탁·친일·유령단체 배제 주장 → 최종 결렬.
④ 결과
- 미소 간 협력은 냉전 속에 파국,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감.
- 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직접적 계기.
3. 진보세력의 혼선과 좌우합작운동
1) 박헌영 세력의 편향
① 합법주의 전술의 한계
-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 인식 속에 미군정과 협력, 합법 전술을 중시했다.
- 박헌영은 “미군정과 협력, 폭력 불허”를 표명하며 정치회의·좌우합작 기구에 참여했으나, 군정의 좌익 탄압이 본격화되자 합법주의의 제약이 드러났다.
② 정판사 사건과 탄압 국면
-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좌익 언론·출판·노조가 대거 탄압당했다.
- 무기징역·장기징역 판결 등 강경 처벌로 좌익의 합법 전술은 구조적 열세를 드러냈다.
③ 급진화된 대응: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 9월 총파업: 전평 주도로 철도·통신·전기·광산·섬유 등 전국 확산, 누계 17만 명 이상 참가. 그러나 진압으로 대규모 피해(해직·부상·체포·사망 발생).
- 파업 시기는 박헌영이 합당 정치 주도권 확보를 위해 앞당겼다는 기록이 있어 조급성이 강화됨.
- 10월 대구항쟁: 경찰 발포로 민중봉기 확산(대구, 경북, 부산, 광주 등). 그러나 미군정·경찰·우익 합동 진압으로 실패.
- 지도부는 대중 자발성에 끌려가며 통일된 정치지도·출구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다.
④ 남로당 창당과 패권적 결집
- 1946년 11월, 공산당·신민당(남)·인민당 일부가 합당해 남조선노동당 출범.
- 박헌영 라인은 합당 주도권을 장악하며 반대파를 ‘반당분자’로 규정.
- 총파업도 합당 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흔적.
- 그 결과 합당은 좌우합작·통일전선 전략과 충돌, 이후 내분과 대중조직 약화로 이어졌다.
2) 여운형 세력의 인공 수립과 좌우합작운동
① 미·소 양군의 성격 차이
- 남한 주둔 미군은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규정하고, 반항 시 사형까지 가능하다고 포고(포고 제2호).
- 북한 주둔 소련군은 스스로를 해방군으로 칭하며, 반일 민주 세력과 협력해 민주주의 정부 창조를 지원하겠다고 약속(치쓰챠꼬브 포고).
② 해방 직후 정국
- 일본 패망 직후 독립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임시정부(김구), 건국동맹(여운형), 인민공화국 등이 병존.
- 총독부는 여운형과 협력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인정 →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출범.
- 인공은 전국 145개 지부를 두고, 이승만·여운형·김구·김규식·김원봉 등이 참여한 중앙인민위원회 조직.
- 그러나 9월 8일 미군정은 인공을 불법화하고 탄압 → 인공 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으로 재편.
③ 좌우익 분열과 조직 결집
- 좌익: 1946년 2월 민전 결성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 등 + 전평·전농·청년·부녀 조직). 공동의장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백남운.
- 우익: 2월 비상국민회의 출범 → 미군정 지원으로 민주의원 전환.
- 좌익은 지하화, 우익은 제도권 장악이라는 구조가 형성됨.
④ 좌우합작운동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3~5) 무산 이후, 김규식·여운형이 좌우합작위원회 결성.
-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 합의(토지 무상분배, 친일파 청산, 통일임시정부 추진 등).
- 그러나 조선공산당·한민당 반대, 이승만 소극, 미군정의 좌익 탄압으로 무산 →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 해체.
⑤ 북과 남의 분기
- 북한: 1946년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정식 출범.
- 남한: 미군정이 좌익 배제한 입법의원 창설(1946.10).
- 이후 남북은 별도 정부 수립 경로로 분리됨.
⑥ 여운형의 활동과 최후
- 해방 후 건국동맹·건준·인공 주도 → 좌우합작 추진.
- 그러나 미군정과 좌우 양쪽에서 모두 압박을 받음.
- 1947년 7월 19일, 테러단체 백의사 관련 인물 한지근에게 암살당함.
- 사망 당시 미군정 입법의원 참여를 검토 중이어서 좌우 모두의 비판을 받음.
4.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과 김구의 통일정부 염원
1) 맥아더의 반공 노선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
① 이승만과 임시정부 활동
-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위임통치 청원 → 임정 내부 반발, 1925년 탄핵.
- 1930~40년대 임정 내에서 외교 활동 지속, 1941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
- 루스벨트 부인 등 미국 정치·군사 네트워크 구축, 반공·반소 노선 강화.
- 1942년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 한국어판 개국 주도, 대외적으로 영향력 확대.
② 해방 직후 귀국과 미군정 관계
- 국무부 반대로 귀국이 지연되자, 맥아더와 국방부 인맥을 통해 귀국 허가 획득.
- 1945년 10월 귀국, 맥아더·하지 사령관 지원을 받음.
- 임시정부보다 약 2개월 먼저 귀국하여 명망을 과시.
- 미군정은 이승만을 활용해 우익 강화·좌익 견제 구상.
③ 건국운동과 단독정부 구상
-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했으나 좌익 탈퇴로 우익 조직화.
-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반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직(회원 100만 이상).
- 1946년 남조선 단독정부 구상을 공식화, 좌우합작 반대.
- 1947년부터 미국·유엔 무대에서 단정론 국제 확산.
- 1947년 3월 국민의회 주석으로 추대, 임시정부 법통을 유지했으나 실질적 힘은 미약.
④ 반공 노선과 미국 의존
-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지지, 남한만의 과도정부 수립을 요구.
- 반탁운동을 전개했지만, 여론조사(1947.7.3, 조선일보)에 따르면 반탁 시위가 독립에 도움이 된다는 응답은 26%(651명), 도움이 안 된다는 응답은 69%(1,736명)로 우세.
- 이승만·한민당은 임시정부 법통을 내세웠지만, 미소공동위원회는 오히려 그들을 협상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임.
2)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와 미군정의 포섭 기도
① 한민당 결성과 인공 거부
- 송진우·김성수 등은 조선인민공화국을 거부하고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
-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 인공 주석직 취임 거절.
② 임정 법통 부인과 광복군 활동 좌절
- 미 국무부와 연합군, OSS는 임시정부를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음.
- 광복군·OSS의 ‘독수리작전’과 여의도 진입 작전 모두 실패.
- 1945년 11월 김구·김규식 등 임정 요인 15명, 개인 자격으로 귀국.
③ 미군정의 단독 통치 선언
- 1945년 10월 10일 미군정, “남조선에선 미군정만 합법” 발표.
- 인공 불법 규정, 지도부 체포 경고.
④ 신탁통치 논란과 비상국민회의 출범
- 1946년 1월 신탁통치 찬반으로 좌우 분열.
- 김구 임정은 신탁 반대 입장, 2월 1일 비상국민회의 확대.
- 이승만·김구가 의장, 임시헌장 논의와 38선 철폐 결의.
- 2월 14일, 미군정 협력으로 ‘민주의원’으로 개편.
⑤ 민주의원의 한계와 좌우 대립
- 민주의원은 이승만(단정론)과 김규식(좌우합작론)의 대립으로 기능 상실.
- 미군정은 온건좌파까지 포섭하려 좌우합작 기반 입법기구 모색.
⑥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설치 (1946.12)
- 군정법령 118호에 따라 관선 45·민선 45 구성.
- 좌익은 선거 거부·사임, 우익 중심으로 운영.
- 의장 김규식, 주요 법령: 서울대 설립령, 반민특별법, 사찰령 폐지, 공창제 폐지, 미곡수집령 등.
- 그러나 토지개혁법은 불통과 → 농지문제 해결 지연.
5. 단선-단독정부 수립 저지 투쟁
1) 김구, 김규식 등 지도자들의 북행과 남북합작 노력
① 유엔 결의와 남북 총선 논란
- 1947.11.14 유엔총회: 미국 안(정부 수립 → 외군 철수) 통과(찬성 43, 반대 0, 기권 6).
- 1948.2.26 유엔 소총회: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 결의 → 5.10 남한 단독 총선 확정.
- 김구·김규식은 반발, 총선 불참. 이승만·한민당은 환영.
- 5.10 총선 결과: 무소속 103, 독촉 50(계열 포함), 한민당 22, 기타 소수정당. → 제헌국회 출범, 대통령제 헌법 제정, 7.20 이승만 대통령 선출.
② 북한 정세와 김일성 부상
- 소련군 진주 후 각 도 인민위원회 조직, 1945.9 ‘북조선5도인민위원회’ 결성.
- 1945.10 평양 집회에서 김일성 부상, 1946.2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 토지개혁·산업 국유화.
- 반탁 조만식 축출(1946.1) 후 김일성 중심으로 권력 재편.
- 1948.9 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③ 김구·김규식의 남북합작 노력
- 1948.2 민족자주연맹 결성 → 소련군 대표부 통해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회담 제안.
- 북, 3.25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명의로 남북 연석회의 제안.
- 1948.4.19 김구, 4.22 김규식 입북 → 4.26~30 남북연석회의·남북지도자협의회 개최.
- 4.30 공동성명: △외군 즉시 철수 △남북협의회 통한 임시정부 수립 △총선거 통한 입법기관 구성 △남한 단독선거 반대.
- 그러나 현실적 힘 부족, 분단 저지 실패.
④ 북의 대응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 1948.8 북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출(남은 간접선거).
- 남조선노동당·인민공화당·근로인민당 등 좌파·중도 정당 참여.
-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남측 360명 선출, 북과 합쳐 최고인민회의 구성.
⑤ 남북 단독정부 수립과 이후
- 1948.8 남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월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 분단 고착.
- 김구·김규식은 ‘통일독립촉진회’ 결성(1948.7.21), UN에 남북 단독정부 해체·총선 통한 통일 촉구.
- 김구는 1949.6.26 암살, 김규식은 한국전쟁 후 북행, 병사.
2) 민족분단 저지 민중항쟁
| 사건 | 배경 | 전개 | 의의 | 한계 |
| 2.7구국투쟁(1948.2) |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남한 단독 선거 추진 - 좌익·학생·시민의 분단 반대 여론 | - 전국 노동자 총파업, 학생 동맹휴업, 상점 폐쇄 - 서울·부산·대구 등에서 수만 명 참가 | - 분단을 막기 위한 최초의 전국적 민중 행동 - 좌익뿐 아니라 학생·중간층이 합류 | - 미군정·경찰 탄압으로 곧 진압 - 통일 실현의 구체적 방도 부족 - 지도부 지하화로 지속성 약화 |
| 3.3투쟁 (1948.3) | - 2.7 투쟁 이후에도 단독선거 강행 움직임 - 학생·시민 주도의 반대 확산 | - 서울·대구·광주 등지에서 수만 명 시위 - 학생과 노동자 동맹휴업·파업 | - 단독정부 반대 투쟁이 연속적·전국적임을 입증 - 중도 민족주의 세력 합류 | - 즉각적 탄압·수백 명 구속 - 단독정부 노선을 막을 힘 부족 - 조직적 지도력 분산 |
| 4.3항쟁 (1948~54) | - 5·10 단독선거 반대 - 1947년 3.1절 발포 사건, 서북청년단 폭력으로 민중 불만 고조 | - 1948.4.3 무장대 봉기 - 산악 유격전 장기화 -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대규모 진압·학살 - 사망 2만~3만 명 | - 단독정부 반대의 가장 대규모·장기 항쟁 - 민족통일 지향과 생활 불만 결합 - 국가폭력의 기원을 드러낸 사건 | - 남로당 지도부의 조급한 무장 전술 - 압도적 군사력 앞에 고립 - 민중의 막대한 희생 |
| 여순항쟁 (1948.10) | - 제주 진압 출동 명령에 국방경비대 14연대 반발 - 동족 학살 반대 정서와 민중 불만 결합 | - 10.19 여수 봉기 → 순천 확산, 인민위 조직 - 국군·경찰 대규모 진압·보복, 민간인 1만여 명 학살 | - 군 내부에서 동족상잔 반대 봉기 발생 - 민중이 동참, 국가 정당성 문제 제기 - 국가보안법 제정 계기 | - 국군 일부 부대 중심이라 전국 확산력 한계 - 남로당 중앙의 소극적 대응, 압도적 진압 앞에 취약 |
별첨
제 정치세력의 입장
| 김성수 | 이승만 | 김구 | 여운형 | 박헌영 | |
| 경력 | ∙동아일보 사장 ∙자치론 주장 | ∙미국에 위임통치 건의(1918년)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취임(1919년) ∙위임통치 건의로 탄핵(1925년) ∙미국에서 외교운동 |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에 참여 ∙상해임시정부 주석 ∙비타협적 반일투쟁 | ∙상해임시정부 참여 ∙건국동맹 조직(1944년) | ∙제1차 조선공산당‧고려공청 책임비서(1925년) ∙경성 콤그룹 결성(1941년) |
| 정파 슬로건 | 한국민주당 ∙건준‧인공 타도 ∙미군정에 적극적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무조건 뭉치자 ∙반공 | 한국독립당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 | 조선인민당 ∙좌우합작 | 조선공산당 ∙인민적 민주주의 |
| 토지 개혁 | 유상몰수‧유상분배 | 유상몰수‧유상분배 | 국유화‧유상분배 | 무상몰수‧무상분배 | 무상몰수‧무상분배 |
| 친일파 처리 | 처단 반대 | 처단 반대 | 즉시 처단 | 즉시 처단 | 즉시 처단 |
|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 | 반대 | 반대 | 반대 | 지지 | 지지 |
| 정부수립 | 남한 단독정부수립 | 남한 단독정부수립 | 통일정부수립 |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 건설 | 인민정권 |
제 정치세력 갈등
| 세력 | 성격 | 정책/노선 | 갈등 양상 | 결과 |
| 건준 | 여운형·안재홍 주도, 좌우 합작 표방 → 점차 좌익적 성격 강화, 대중 기반(75만 명 이상 조직망) | 자치행정, 토지개혁, 친일파 청산, 치안 유지 | 미군정에 의해 불법 단체로 규정, 한민당 등 우익과 대립 | 해체, 인민공화국으로 일부 전환 |
| 한민당 | 송진우·김성수 중심, 지주·친일관료·자본가 세력, 대중 기반 약함 | 친미·반공, 사유재산 옹호, 지주 이익 대변 | 건준·좌익 배제, 미군정에 협력하여 정치적 특권 확보 | 미군정 협력세력으로 정치적 주도권 획득 |
| 인민공화국 | 여운형·박헌영 주도, 좌우합작 정부 표방, 대중 기반 강함 | 농지개혁, 노동법, 산업 국유화, 민주개혁 | 미군정이 불법정부로 부정, 임시정부 세력과 정통성 경쟁 | 행정권 미승인으로 와해, 좌익 탄압 본격화 |
| 임시정부 | 김구·김규식 중심, 1919년 정통성 계승, 해외 독립운동 세력 | 민족 정통성 강조, 반공·반탁 성향 | 인민공화국과 정통성 경쟁, 미군정은 승인 거부 | 정치적 영향력 축소, 일부는 극우와 연대 |
| 중도파 | 좌우 협력 추구, 민족주의·민주개혁 성향 | 좌우합작 7원칙(토지개혁·친일파 청산·민주개혁) | 좌익은 미군정 배격, 우익은 좌익 배제 요구 → 양측 모두 불신 | 세력 고립, 여운형 암살(1947), 김규식·안재홍 정치적 영향력 소멸 |
미군정의 사회 평정 조치
| 1945. 10.10 아놀드 미군정장관 ‘인공’ 부인 성명 1945. 12. 27 “국립경찰의 조직에 관한 건” 발표 1946. 1. 15 사설군사단체의 해산령과 국방경비대의 발족 1946. 2. 23 정당등록법 제정(특히 좌익계 정당들을 겨냥) 1946. 3 29 행정기구의 확대개혁(기존 국을 부로 개칭) 1946. 4. 23 인민보‧자유신문‧현대일보 등 폐간 처분 1946. 5. 15 ‘정판사위조지폐사건’ 발표 1946. 9. 18 해방일보 정간 명령, 박헌영‧이강국‧이주하 등 공산당 간부 체포령 1947. 8. 11~14 민정 중앙위, 인민공화당 중앙위, 전평 중앙위 사무실 폐쇄 및 좌익계열 1,000여 명 검거 1948. 5. 8 미군당국 5‧10선거에 대비하여 전국에 특별경계령 |
남조선과도정부 주요 행정관료의 교육배경
| 이름 | 직책 | 교육 배경 |
| 안재홍 | 민정장관 | 일본 와세다대 정경과 졸 |
| 김용무 | 대법원장 | 일본 중앙대 법학부 졸 |
| 김병로 | 사법부장 | 일본 일본대 졸 |
| 유억겸 | 문교부장 | 일본 동경대 법대 졸 |
| 윤호병 | 재무부장 | 일본 동경상고 졸 |
| 길원봉 | 체신부장 | 일본 경도대 법대 졸 |
| 이용설 | 보건후생부장 | 세브란스 의전 졸, 경성제대 박사 |
| 최경열 | 토목부장 | 일본 경도대 법대 졸 |
| 이철원 | 공보부장 | 미국 콜럼비아대 박사 |
| 이훈구 | 농무부장 | 미국 위스콘신대 박사 |
| 이대위 | 노동부장 | 미국 예일대, 콜럼비아대 졸 |
| 지용은 | 식량행정처장 | 미국 노스웨스턴대 졸 |
| 유동열 | 통위부장 | 일본 육사 졸 |
| 이종학 | 사무처장 | 미국 호놀룰루 상업전문 졸 |
| 정일형 | 인사행정처장 | 미국 뉴욕대 박사 |
| 구자옥 | 경기도 지사 | 한성외국어교 졸, 미‧일 수학 |
| 박건원 | 강원도 지사 | 경성제대 의학부 졸 |
| 윤하영 | 충북도 지사 | 미국 프린스턴대 졸 |
| 박종만 | 충남도 지사 | 미국 보스턴대 졸 |
| 최희송 | 경부도 지사 | 미국 매사추세츠 전문 졸 |
| 김철수 | 경남도 지사 | 일본 게이오대 이제과 졸 |
| 정일사 | 전북도 지사 | 미국 육군 의대 수학 |
| 서민호 | 전남도 지사 | 일본 와세다대, 미국 콜럼비아대 졸 |
| 유해진 | 제주도 지사 | 일본 중앙대 법학부 졸 |
| 조병옥 | 경무부장 | 미국 콜럼비아대 수학 |
출처: 한국근현대사 인명록 6, 여강출판사, 1987; 류상영,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과정과 성격」, 한국사 17, 한길사.
경무부와 수도관구 경찰청 주요 간부의 경력(1946년)
| 성명 | 일제 때 주요 경력 | 미군정기 주요 경력 | 기타 사항 |
| 조병옥 | 미 콜럼비아대 수학 | 초대 경무부장 | 한민당 총무, 내무부장관 |
| 최경진 | 평남 보안과장 | 초대 경무부차장 | 총독부 경무국 훈련고장 |
| 조주영 | 동경검찰청검사 | 경무부 총무국장 | 체신부장관, 민의원 |
| 한종건 | 평북 재무부장 | 경무부 공안국장 | 일제고등시험합격, 변호사 |
| 최능진 | 숭실전문 체육강사 | 경부무 수사국장 | 평남건준 치안부장, 반친일세력 |
| 김정호 | 일본군 육군소좌 | 경무부 교육국장 | 육군준장, 민의원 |
| 장택상 | 영국 에딘버러대 수학 | 수도관구경찰청장 | 한민당 발기인, 외무부장관 |
| 이익흥 | 평북 박천 경찰서장 | 수도청 부청장 | 일본 구주대학 졸, 치안본부장 |
| 노덕술 | 평남 보안과장 | 수도청 수사과장 | 장택상 추천, 헌병중령 이직 |
| 최운하 | 종로서 고등계주임 | 수도청 사찰과장 | 반민특위습격 주역, 시경 사찰과장 |
| 김도원 | 여주서 사법주임 | 수도청 총무과장 | |
| 윤명운 | 종로서 경부 | 수도청 보안과장 | 제4대 서울시경국장 |
| 김형진 | 종로서 보안주임 | 종로 경찰서장 | 제2대 용산 경찰서장 |
| 이구범 | 경기경찰 부경부보 | 동대문 경찰서장 | 8‧15직후 개성경찰서장, 이후 월남 |
| 장기상 | 일제 경찰 | 서대문 경찰서장 | 제10대 종로 경찰서장 |
| 윤기병 | 경기경찰 경부보 | 동대문 경찰서장 | 제6대 서울시경국장 |
| 문학주 | 일제 경찰 | 성동 경찰서장 | 제5대 용산 경찰서장 |
| 박주식 | 일제 경찰 | 용산 경찰서장 | 제4대 동대문 경찰서장 |
| 강신창 | 일제 경찰 | 마포 경찰서장 | 제6대 동대문 경찰서장 |
| 윤우경 | 황해 송화경찰서장 | 영등포 경찰서장 | 헌병중령 이직, 치안본부장 |
| 변종현 | 일제 경찰 | 창덕궁 경찰서장 | 제7대 서울시경국장 |
출처: 한국근현대사 인명록 6, 여강출판사, 1987; 류상영,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 과정과 성격」, 한국사 17, 한길사.
국방경비대 주요 간부의 경력(1946~48년)
| 이름 | 주요 직책 | 출신 배경(계급) | 기타 사항 |
| 이응준 | 미군정 국방사령부 고문 | 일본육사 26기(대좌) | 군사영어학교(군영) 출신, 초대 육군참모총장 |
| 유동열 | 미군정 초대 통위부장 | 일본육사 15기→ 광복군(정위) | 광복군 출신, 정부 출범 후 해임 |
| 김상겸 | 통위부 초대 총참모장 | 폴란드군으로 신고 (경력 불분명: 대령) | 제5여단장시 여순반란사건 이후 예편 |
| 정일권 | 통위부 2대 총참모장 | 봉천군관학교 5기→ 일본육사 55기(대위) | 군영 출신,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 |
| 원용덕 | 국방경비대 초대 총사령관 | 만주군관학교 군의(중령) | 군영 출신, 미군정 국방사령부고문, 헌병사령관 |
| 이형근 | 국방경비대 2대 총사령관 | 일본육사 56기(대위) | 군영 출신, 육사교장, 육군참모총장 |
| 송호성 | 국방경비대 3대 총사령관 | 중국 중앙군(대좌), 광복군(참위) | 광복군 지대장, 육사교장 |
| 채병덕 | 국방경비대 1연대 1대대장 | 일본육사 49기(소좌) | 군영 출신, 제2대 육군참모총장 |
| 손원일 | 해안경비대 초대 총사령관 | 중국해군부 상해해안 경비선 근무 |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
| 김정열 | 항공부대 초대 근무대장 | 일본육사 54기(대위), 전투기 중대장 | 초대 공군참모총장, 국무총리 |
출처: 한국근현대사 인명록6, 여강출판사, 1987; 류상영, 「미군정 국가기구의 창설과정과 성격」, 한국사 17, 한길사.
해방정국의 북한 사정
| - 1945년 10월 10일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당 열성자대회’ 개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1월 23~24일 2차 회의에서 김일성 「4대 당면 과업에 대하여」보고, “토지․노동․산업 등에서 민주개혁을 하고, 이를 통해 혁명의 근거지를 이북에 창설해야 하며 민족 반역자를 숙청하되 민족통일전선의 기치 하에 전 민족이 단합해야 한다” - 10월 14일 김일성장군 평양시민 환영대회, 40여만 명 참가 해방 후 최대 군중집회 - 1945년 10월 20일경 김일성, 조만식 만나 “선생님, 공산당도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을 지지하는 대중을 결집시켜 좋은 정당을 조직하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소련의 희망입니다. 선생님이 정당을 조직하면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신의주 사건으로 공산당과 민족주의 세력의 협조관계 균열 발생, 모스크바 3상 회담 결정(임시 한국민주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 개최, 미영소중 4개국 공동관리 최고 5년 기한 신탁통치 실시, 미소 양군 사령관 대표로 회의 소집), 조만식 강력 반대, 1946년 3월 1일 평양역 앞 3 ․ 1절 기념식장 김일성 암살미수 사건으로 좌우동거체제 붕괴 - 1945년 9월 말까지 대부분 지역 인민위 등 자치조직 결성, 10월 8~10일 북조선 5도 인민위 대표자대회, 11월 19일 북조선 5도 행정국, 1946년 2월 8일 임시인민위원회 구성 - 1946년 3월 20개조 정강 발표 : 일제 잔재 청산/소작제 폐지-토지개혁/8시간 노동제-최저임금제 확립/사회보험제도 확립/의무교육-무상치료제/민족문화 발전/선거에 의한 인민위 구성/인민재판기관 설치/조세제도 확립/상공업 장려 등 정권문제, 경제문제 제시 - 1946년 2월 23일 평양학원 개원식, 1948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식 - 1946년 3월 4일 북조선공산당 5차 확대집행위, 토지법령 10개항 결정서 채택, 5일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및 '토지개혁법령에 대한 세칙’ 발표. 북조선 토지개혁의 효과 : 농민발전에 질곡으로 되어있던 토지의 봉건적 소유관계 청산, 빈농과 고농 가운데 많은 당원 흡수, 농촌의 당 기초 세웠고, 당의 성분 바꾸어 당 확대, 공고화, 노동계급과 농민의 동맹 강화, 조선공업이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식료와 원료 보장 - 노동자 및 사무원에 대한 법령(1946. 6. 24),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1946. 7. 30), 산업 ․ 교통 ․ 운수 ․ 체신 ․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 (1946. 8. 10), 그러나 개인 소유 공장과 제조소, 기업소, 탄광, 창고, 회사, 상업기관 등은 특별한 경우에만 몰수. 소자산가와 민족자본가들까지 건국에 참여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견지, 개혁저항 약화 이유-친일파 철저 배제, 우익 민족주의자 정치적 영향력 단계적 축소 배제, 남한 도피 -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 합당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 1946년 10월 1일 김일성대학 창립 |
| - 1946년 12월~1948년 초 건국사상총동원 “과거의 썩은 생활을 고치자”, “쌀 한 알, 실 한 오라기라도 절약해 조국 건설에 바치자”, “무식은 파멸이다” 등 구호, 이런 과정에서 ‘애국미 헌납운동’ 시작 - 1947년 2월 22일 인민위 수립 : 1946년 11월 3일 도시군인민위, 1947년 2월 24~25일 리(동)인민위, 3월 5일 면인민위 선거 실시, 1947년 2월 21~22일 제1차 북조선인민회의 개최-노동자 52명(22%), 농민 62명(26%), 사무원 56명(24%), 인텔리 36명(15%), 기업주 7명(3%), 상업가 10명(4%), 수공업자 4명(2%), 종교인 10명(4%), 이 중 여성 34명(15 북조선인%).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 수립 결정, 인민경제 부흥발전계획 채택 - 1946~47년 1~2차 미소공동위 결렬 : 1947년 3월 12일 의회연설을 통해 트루만 독트린, 소련과 더 이상 협력관계가 불가능 선언, 소련의 팽창정책에 맞서 ‘대소 봉쇄정책’ 선언, 7월 미소공동위 결렬 -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소련 주장 ‘미소 양군 철수안’ 부결, 미국 주장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선거’ 결의, 유엔한국임시위원단 1948년 1월 17일 입국 - 북노당, 미소철군-남북총선거 주장 : 1947년 11월 16~17일 열린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 ‘유엔 감시하 총선’에 대한 대응책으로 4개 항 결정, 임시통일헌법 제정 공포, 유엔 감시하 총선거 유엔 결의 반대, 미소 양군 철수 후 남북 총선거 주장, 남북의 통일세력 조직화” 등 - 1948년 4월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북측 북로당 60명, 민주당 40명 등 15개 정당단체 대표 300명과, 남쪽 남로당 39명, 사회민주당 7명 등 31개 정당단체 대표 245명 참석. 그 후 새로운 대표들 도착 총56개 정당 ․ 사회단체 대표 695명 참가 - 1948년 8월 25일 대의원선거, 9월 1차 최고인민회의, 9월 9일 공화국 수립 :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수상(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노동당 당수, 부수상 박헌영(외상), 홍명희, 김책(산업상), 국가계획위 위원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통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허성택, 보건상 리병남, 도시경영상 리용, 무임소장 리극노 - 1948년 8월 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 구성, 이때부터 상부 통합, 1949년 6월 30일 조선노동당으로 통합.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박헌영, 허가이(제1비서), 이승엽(제2비서), 김삼룡(제3비서), 정치위원 김일성 ․ 박헌영 ․ 김책 ․ 박일우 ․ 허가이 ․ 이승엽 ․ 김삼룡 ․ 김두봉 ․ 허헌(뒤에 박정애) - 1949년 6월 26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과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통합,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남북한의 70여 개 정당, 사회단체들 참가 |
해방정국의 쟁점과 교훈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1. 해방정국의 국제관계
1) 광복 80년 시기별 특징
| 구분 | 미소 냉전 시기 (1945~1991) | 미국 일극 패권 시기 (1991~2008) | 세계 다극화 시기 (2008~현재) |
| 국제질서 | 미소 양극체제, 냉전 제3세계 민족해방 물결 | 미 일극 지배, 신자유주의 세계화, 탈이념화 | 미-중 신냉전, 러시아-중국-남반구 부상, 탈미 촉진 |
| 한국정권 |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 |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 |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이재명 정권 |
| 주요투쟁 |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4.3-여순 항쟁, 4.19혁명, 5월 항쟁, 6월항쟁 등 | ’97년 노동자 총파업, ’02년 효순-미선 촛불, ’08년 광우병 촛불 | ’16~‘17년 촛불 혁명, ’24~25년 빛의혁명 |
| 운동동력 | 민족해방운동, 학생·노동자 중심 민중운동 | 민주노조, 시민사회단체, 진보정당 | 비정규직·청년·여성·기후 등 다중 주체화 |
| 운동대상 | 미 제국주의, 군사독재, 식민지 유산, 재벌 | 신자유주의 세계화, FTA, 미군기지 재배치 | 한미예속동맹, 다국적 자본, 플랫폼독점, 신기술파쇼 |
| 역량편성 | 민족해방계+사회주의계 연대, NL-PD 이념 구도 형성 | 민주노총+시민사회단체 연대, 정당·정파 역량 강화 | 대중조직, 시민단체, 정당+ 이슈운동,지역-생활조직,온라인네트워크 |
| 핵심요구 | 자주·민주·통일,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철수 | 노동기본권, 공공성 확대, 부패 청산, 정권교체 | 주권회복, 평화실현, 불평등 해소, 기후, 젠더 |
| 조직화 | 학습조직, 유인물, 비합-반합 조직화 | 정책·토론, 대중교육 합법 공개 오프 조직 | SNS·디지털 플랫폼 교육토론 온라인 생활·문화 조직 추가 |
| 투쟁화 | 반독재투쟁, 거리시위, 총파업 등 대중 직접 행동 | 대중집회, 제도 정치 압박, 정권교체 운동 | 촛불, 야광봉, 문화-정치 결합, 온라인 캠페인, 생활투쟁 |
| 정치화 | 자주민중정권, 비합 전위조직-연합전선 | 진보정당, 의회 진출, 운동과 정치의 결합 | 연합정권->자주민주정권, 정당+대중조직·시민사회단체+연대연합체 |
2) 광복 당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고, 루스벨트는 전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전후 처리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영국과 중국의 동의를 얻은 뒤 스탈린을 설득할 계획이었다.
당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은 “당장 민주주의를 실시할 능력이 없는 민족에 대해 민주주의 훈육 과정을 거친 뒤 선거를 통해 미국식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겉으로는 민족자결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보장하는 미국식 체제를 구축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네이션빌딩 구상은 훗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이 추진한 친미 국가 창출 정책에서도 반복되었다.
반면 소련은 루스벨트가 동의한 얄타회담 결과에 따라 동유럽에서 즉각적인 독립국가 수립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그 실질은 친소 공산주의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소련을 방어하는 위성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의 고문 오언 래티모어(Owen Lattimore)를 통해 1942년 12월 24일 장제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소련과 협의를 통해 조선 등 식민지에 신탁통치를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1943년 3월 27일 백악관을 방문한 영국 외상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에게 “한국의 국제 신탁을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3~4개국에 위임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1943년 2월 소련 주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20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항복한 뒤, 소련군은 동유럽으로 진격하였다. 미국은 같은 해 하반기 들어 연합국 정상들과 잇따라 만나 전후 처리에 대한 국제 협상을 구체화하였다.
루스벨트는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처칠과 장제스를 만나 일본 문제를 논의했다. 처칠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의 기득권 보장을 조건으로 한국 신탁통치안에 동의했고,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연합국 내 위상을 유지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소극적으로 동의하였다.
이들은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과 대만, 필리핀 등 일본의 식민지를 승전국의 식민지로 환원하지 않고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 독립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여기서 ‘적절한 과정’이란 이미 영국과 중국이 동의한 신탁통치를, 아직 동의하지 않은 스탈린의 입장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비행기를 타야 참석할 수 있는 카이로 회담에는 불참했다.
이후 루스벨트는 11월 28일 테헤란에서 처칠, 스탈린과 만나 제2전선 개설 문제와 함께 한국 신탁통치안을 공식 제안했다. 그는 또한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과 국제연합 창설 참여를 요구하였다.
제2 전선과 관련해 스탈린은 독일군 주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프랑스 북부 상륙작전을 주장했으나, 처칠은 그리스와 터키 등 영국에 중요한 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지중해 상륙작전을 선호했다. 그러나 2,7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치르며 독일군을 격파한 소련의 압박이 강해, 결국 프랑스 북부 상륙작전이 결정되었다. 동시에 소련은 독일 항복 이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즉각적인 독립을 보장받은 반면, 루스벨트의 일본 식민지 신탁통치 제안에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합의문에 신탁통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은 여전히 카이로 선언을 ‘즉시 독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1944년 1월 12일 태평양 전쟁위원회 회의에서 “스탈린이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통치 필요성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동유럽을 제압하고 베를린으로 진군하자, 처칠은 중부유럽에서의 소련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루스벨트에게 “미군이 먼저 독일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쟁을 우선시한 루스벨트는 미군 피해를 줄이려 서부전선에서 시간을 끄는 전략을 택했고, 결국 독일 항복 이후 미·소 공동점령이 불가피해졌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도 루스벨트의 최대 목표는 소련의 대일참전과 유엔 참여였다. 이에 동의한 스탈린에게 루스벨트는 만주, 한국, 일본 일부에 대한 영향력을 양보하였다. 그는 “이러한 양보는 일본 본토에서 단독 전쟁을 치를 경우 예상되는 미군 백만 명의 희생에 비하면 경제적이다”라고 판단했다.
루스벨트는 영국의 제국주의 복원을 경계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동독과 동유럽 지배를 확보했고, 독일은 연합군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소련은 향후 독일 재침공을 막기 위해 폴란드 등 완충국가를 공산화하였고, 영국은 프랑스를 강화하며 남유럽에서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다.
얄타회담에서 미·영·소는 이미 점령한 지역의 기득권을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소련은 즉각 위성국가 건설을, 미국은 필리핀·조선 등 태평양 점령지에서 40년 신탁통치 후 독립을 추진하는 방침을 세웠다. 특히 루스벨트는 국제연합의 첫 과제로 미·소 공동 신탁통치를 구상하였다.
얄타협정문에는 “향후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5개국이 신탁통치 지역을 상호 협의해 결정한다”고 명시되었으며, 이는 곧 미·소 냉전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사망하고, 소련에 비판적이었던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히틀러 몰락 이후 스탈린의 몰락을 희망한 트루먼의 등장으로, 7~8월 포츠담회담에서 미·소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루스벨트의 합의를 형식적으로 논의하면서도 실제로는 소련 팽창을 견제하려 했다. 이탈리아 등 과거 점령지 신탁통치 논의는 진전이 없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루스벨트는 본래 일본도 독일처럼 공동 점령을 구상했으나, 소련의 참전이 늦어 미국의 단독 점령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루먼은 마지못해 소련의 만주·한반도 진출을 인정하고, 38선 분할 점령을 제안하였다. 그는 태평양과 일본 본토를 미국의 영향권으로 유지하려 했다.
트루먼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 소련의 극동 지분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포츠담회담 중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 성공 사실을 스탈린에게 알리며 압박했으나, 이미 정보를 입수한 스탈린은 개의치 않고 자체 개발에 속도를 냈다.
결국 트루먼은 소련 참전 전에 일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소련은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했다. 이어 8월 10일 밤, 워싱턴의 국무부·전쟁부·해군부 합동 3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는 찰스 본 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의 제안에 따라 38도선 분할을 결정하였다(정용욱, 2003: 48-62).
2. 냉전의 시작과 민족 분열
1) 좌익의 신탁통치 혼선과 미국의 반공 반탁 공작
얄타회담에서 논의된 신탁통치에 조선을 포함할지에 대한 공식 합의 없이 일본은 항복했다. 소련이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공식 입장으로 유지했다. 1945년 10월 20일, 존 카트 빈센트 미 국무부 극동국장은 외교정책협의회에서 “조선은 자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국내 신문 《매일신보》는 10월 21일자와 23일자에 이를 보도했고, 특히 23일자에는 미국의 소리(VOA) 산하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해 빈센트 국장의 발언이 전해졌다고 알렸다. 이 보도로 조선인들에게 신탁통치 대상이 된 사실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10월 25일자 《매일신보》는 “탁치 실시는 조선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는 항의성 기사를 실었다. 중도계열 안재홍과 조선공산당 김삼룡도 “탁치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만들어 조선인민의 힘을 과시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와 송진우·김성수의 한국민주당도 반탁을 결의했다.
1945년 10월 26일,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 등 좌우익 모두가 참여한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카이로 회담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기대했는데, 신탁통치를 언급하는 것은 조선민족을 모욕하고 기만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 회의에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 정태식은 “아직 신탁관리가 사실인지 확실치 않으나 반대성명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김형선 등 3명이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실행위원으로 지명됐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소련, 영국 외무부 장관들은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이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5년 동안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소련이 먼저 신탁통치를 제안했다.”와 “박헌영이 소련 단독 신탁통치와 통일조선의 소련 가입을 주장했다.”는 두 건의 오보가 발생했다. 이는 의도적 언론공작으로 추정되며, 반탁·반공·반소 여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미군정, 미국 국무부, 미국의 소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연루됐다.
모스크바 3상 회의 직후인 12월 27일, 석간신문들은 미국 번스 국무장관이 정부로부터 받은 훈령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번스는 모스크바 회의 직전에 “소련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며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미국 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이 내용은 미군 태평양사령부 발행 ‘성조지’에 보도됐고, 미군정이 운영하던 ‘합동통신’이 이를 전재하면서 국내 신문이 인용 보도했다.
당시 미군정은 언론을 통제했으며, 합동통신은 미군정이 운영했다. 1945년 9월 설립된 국제통신은 11월 1일 미군정에 의해 운영진이 강제로 해직당했고, A. 글래스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12월에는 국제통신과 연합통신이 합병되어 전국 신문사·방송국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합동통신사가 발족했다.
《동아일보》는 합동통신의 보도를 근거로 1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고 실었다. 《조선일보》는 “조선의 자주독립은 어디로, 독립·신탁론 대립”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후 반탁운동은 반소운동으로 확대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김성수가 영향력 아래 이끌던 한국민주당과 연계되어 있었다.
12월 28일자 《동아일보》는 1면 전체를 ‘탁치’ 반대 여론으로 채웠다. 김구 측 임시정부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고, 이승만도 반탁운동에 나섰다. 김구는 통일정부를, 이승만은 반공 단독정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12월 29일, 미군정은 외상회의 결정문을 발표했다. 결정문에 따르면, 미소가 한국에 임시정부 형태의 자문기구를 구성하고,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시행하되, 미소 공동회의가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신탁 내용을 확정하도록 했다. 이후 좌익은 김구·이승만과의 반탁운동 주도권 경쟁을 이어갔다.
12월 30일,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인민공화국 서울시·경기도 인민위원회 등 23개 좌익단체는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신탁통치 철폐와 국민대표대회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12월 31일,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좌우합작 단일정부 구성을 제안했으나, 임시정부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공문을 반송했다.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은 1946년 1월 1일, ‘탁치문제의 해결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으로’라는 제목으로 신탁통치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박헌영은 평양으로 이동하여 소련군 북조선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과 김일성으로부터 모스크바 3상 회의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후 1월 2일, 서울로 귀환한 박헌영은 중앙위원회의 찬성을 받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좌익은 구체적 미소 합의를 알지 못한 상황에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시작했지만, 이후 소련의 설명을 듣고 신탁통치를 남북 통일국가 건설의 고육책으로 인식하며 찬성으로 입장을 전환했다.
미 군정이 조장한 반소·반탁 언론 보도에 대해 소련이 항의하자, 미국 국무부 극동 과장 빈센트는 1월 16일 “조선 임시정부가 남북을 통일적으로 통치하고 치안을 유지할 능력을 보여 줄 때에는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를 “소련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고 왜곡 보도하며 반탁·반공·반소 여론을 확대했다.
1946년 1월 5일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신탁통치와 소련 연방 가입 관련 질문에 조심스럽게 답변했으나, 외신 기자 존스턴은 이를 왜곡해 기록했다. 미 군정 통제 하의 국내 언론은 박헌영의 반론을 비중 있게 보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좌익이 신탁통치에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당시 남한에서는 “반탁은 반소·반공, 찬탁은 친소·용공”이라는 구도가 형성됐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좌익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으나, 반탁운동으로 우익이 급성장하고 좌익은 위축됐다. 소련은 이북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친소 위성국가 수립을 준비하며, 남북 신탁통치에는 소극적 태도를 유지했다.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마지못해 이행한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 협력 의사가 없었고, 미소는 각각 남북에서 자신들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을 선호하게 되었다. 결국 남한에서는 조선공산당을, 북한에서는 조만식을 대표로 한 우익 세력을 제거한 후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2) 냉전의 시작과 미소 공동위의 파국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당시 미국과 소련은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 협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부터 시작된 미소 냉전은 한반도에서 협력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미소 냉전의 시작은 좌우 내전을 겪은 그리스에서 비롯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군이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철군하면서 영국군의 군정이 시작됐다.
1944년 12월 3일 영국이 지원하는 우익 망명정부가 귀국해 반독투쟁을 벌이던 좌익에게 무장해제를 강요했다. 이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그리스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은 무장해제를 거부했고, 우익정부가 무력진압에 나서면서 좌우 내전이 발생했다. 그리스를 점령한 영국은 우익정부가 좌익에게 밀리자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지원했다. 그리스에서 영국과 소련의 대리전은 좌우익의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스탈린과 루스벨트, 처칠은 1943년 테헤란 회담을 통해 향후 각자가 점령한 지역을 각자의 방식으로 처리하고 상대방은 이를 용인하기로 구두 합의했다. 이에 소련은 즉시 독립, 미국은 신탁통치의 방향을 정했다.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자신이 점령한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을 이미 공산화했다.
소련이 동독을 점령하자, 서유럽은 소련과 좌익의 서진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특히 영국은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했다. 미국 역시 동독을 점령한 소련이 서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자신이 점령한 서유럽에 친미정권을 수립하고, 1947년 마샬플랜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했으며 1948년 나토 추진을 통해 집단동맹체제를 구축했다.
주미 미국대사관에 파견된 조지 F. 케넌은 1946년 2월, 소련과 전면전보다는 소련을 봉쇄하고 압박해 소련 체제 전환을 유도해야 한다는 장문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1946년 6월 중국 국민당은 항일전쟁 중 공산당과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지만 실패하고 공산당을 공격했다.
1947년 2월, 그리스의 우익정부를 지원하던 영국이 재정적 어려움을 이유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이에 3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군사 원조를 제공하고 소련과 공산주의 확산을 막겠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후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차단하는 봉쇄정책으로 전환했다.
2차 대전 말기, 베를린은 소련이 점령한 동독 내에서 육지로 고립된 섬과 같은 상태였다. 1948년 3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서독 지역을 통합하고 새로운 서독 마르크화를 도입하면서, 서베를린 지역도 하나로 통합됐다. 이에 소련은 동베를린이 서베를린과 경제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우려해 1948년 6월 24일부터 1949년 5월 12일까지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육상 접근로를 봉쇄했다. 미국은 210만 톤 규모의 대규모 항공수송으로 대응하며, 미소 간 최초의 직접적 군사적 대치가 발생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반도에서도 좌우익 대립이 본격화됐다. 박헌영 등 남한 좌익들은 해방 직후부터 남한을 점령한 미국 대사관 및 미군정과 협상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일제 패망 당시, 사설인쇄소인 근택인쇄소까지 동원해 조선은행 지폐를 남발했는데, 조선공산당은 기관지 《해방일보》 인쇄를 위해 일본인 소유의 근택빌딩을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입주했다. 그러나 근택인쇄소에 근무하던 김창선이 지폐 원판을 몰래 보관했고,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지폐 위조 시도에 실패한 후 김창선이 원판을 이승만 측에 팔려다 발각되면서 사건이 조작됐다. 이 사건으로 박헌영 최측근인 이관술이 체포되고, 조선공산당 당사는 압수수색과 퇴거를 당했다.
조선공산당은 미 군정 탄압에 맞서 1946년 9월 총파업으로 대응했으며, 10월 1일 대구 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까지 개입했지만 충돌은 인근 지역으로 확산돼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 이러한 좌우 충돌과 남북 긴장으로 38도선은 1946년 하반기 이후 미소 양측에 의해 사실상 봉쇄됐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의 협력을 청산하고 대소 봉쇄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미소 공동 신탁통치보다 좌익 배제를 통한 반공국가 수립에 기울었다. 이는 이승만 등 남한 단독정부를 희망하던 우익과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배경이 됐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는 미소공동위에서 논의됐다. 1946년 1월 예비회담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논의에 앞서 38도선 철폐를 주장했으나, 소련은 정치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북에서 흉작이 발생하여 쌀을 북송해 달라는 소련의 요구를 미국이 남한의 식량 부족을 이유로 거절하자, 소련 역시 전력 남송을 거부하며 회담이 중단됐다.
1차 회담은 1946년 3월 열렸으나, 미소는 반탁단체를 임시정부 협상 대상에 포함시킬지를 놓고 대립했다. 협상 끝에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정치단체들은 임시정부 구성 협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공동성명 5호를 발표하며, 서명 단체를 협상 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공동성명 5호에는 신탁통치라는 표현 대신 신탁통치 내용을 포함한 “3상회의 3절”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일부 반탁단체가 여전히 서명을 주저하자, 미국은 이를 찬탁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회유했다. 결국 반탁 주도세력인 이승만과 김구가 마지못해 서명했다. 그러나 소련은 “반탁 주도세력이 여전히 공개적으로 반탁 입장을 유지하면서 신탁 협의에 참여하려 한다.”며 반발했고, 회담은 중단됐다.
트루먼 독트린 발표 2개월 후인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2차 회담이 열렸다. 미국은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협의를 청원하는 모든 단체를 협상 대상으로 정하자고 제안했지만, 소련은 민족반역자, 유령단체, 반탁단체를 제외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결국 10월 회담이 결렬됐고, 미소의 제안에 따라 유엔에서 임시정부 구성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3. 진보세력의 혼선과 좌우합작운동
1) 박헌영 세력의 편향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라는 인식 아래, 미 군정과 협력 아래 합작·합법 전술을 중시하는 흐름이 강했다. 박헌영은 인터뷰에서 “미 군정과 가능한 범위에서 협력하겠다”, “폭력은 불허한다”는 취지의 태도를 여러 차례 표명했다. 실제로 그는 미 군정이 만든 ‘조선정치회의’ 참가 의사를 밝히고, 건국준비·좌우합작 성격의 연합체(정치회의·독립촉성중앙협의회 등)에 참여하며 합법적 기반을 모색했다. 이는 “대중조직 건설을 중핵으로 삼되 미 군정과 우의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온건·합법 기조는 미 군정의 좌익 언론·노조·정당 탄압이 본격화하자 곧 제약을 드러냈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 언론·출판 기반에 대한 일괄 타격이 가해졌다. 군정은 정기간행물 허가제(군정법령 제88호)로 전환하며 좌익 매체들을 대거 정간·폐쇄했고, 정판사 사건을 매개로 공산계 세력에 대한 사법·경찰적 압박을 급격히 높였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피고 다수에게 무기징역·장기징역이 선고되었고(예: 무기 4명, 징역 15년 3명 등), 법정은 강경한 ‘치안 질서’ 논리를 천명했다. 이때 좌익 진영은 ‘조작·과잉수사’ 프레임으로 대응했으나, 제도권 언론·사법·경찰을 장악한 군정 체제 아래 방어에 실패했다. 합법주의 전술이 구조적으로 열세였다는 사실이 노정된 대목이다.
정판사 사건 이후, 탄압 국면을 돌파하려는 좌익의 대응은 급진화되었다. 핵심은 ①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의 9월 총파업, ②대구에서 촉발되어 남부 전역으로 확산된 10월 인민항쟁이었다. 두 사건은 광범한 대중 참여를 이끌었지만, 준비·전술·정치적 목표 설정에서 ‘조급성’과 ‘대중 자발성에 대한 사후 추종’이 교차하며 좌경적 편향의 전형을 보였다.
1946년 9월 23일 철도노동자 파업을 발단으로 파업은 통신·전기·광산·섬유 등으로 급속히 번졌다.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에 따르면 철도노동자 약 4만 명이 파업했고, 부산 7천 명·전주 1,700명 등 지역별 확산이 뒤따랐다. 전평 자체 집계(전국노동운동연감 재인용)에 따르면 1946년 한 해 누계 17만3,400명 참가·파업 472건으로 정리된다. 서울 금속노조의 경우 파업 진압 과정에서 해직 224명·부상 197명·피체 495명·사망 6명이라는 구체 피해가 기록된다. 이러한 수치는 대중동원의 폭과 함께, 지도부의 전술·교섭·방어체계가 국가폭력 앞에서 취약했음을 동시에 드러낸다. 더구나 사료에 따르면 박헌영은 당대회(3당합당) 일정을 앞둔 상황에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기라’고 지시해 정치전술상 목적(합당 주도권)과 경제투쟁의 결합이 뒤섞였다. 이는 파업을 전략적 고지로 끌어올리기보다, 지도부 정치 일정에 종속시키며 조급성을 키운 결정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임금·식량 문제 등을 둘러싼 경찰의 발포가 빌미가 되어 시위가 대규모 충돌로 번졌다(당일 사망 2·부상 160 집계). 항쟁은 경북 전역·부산·마산·광주 등 남부 각지로 확산되며 지역별 ‘민중 봉기’ 양상을 띠었지만, 미군정·경찰·우익단체의 합동 진압과 계엄적 조치로 급속히 제압되었다. 좌익 지도부는 급격히 확산되는 자발적 항쟁에 대해 통일된 정치지도·교섭·질서유지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봉기 이후의 정치적 출구(정권구성·치안통제·식량배급 재편 등)를 설계하지 못한 채 조직의 상실을 크게 겪었다.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창당은 공산당·신민당(남)·인민당 일부의 ‘3당 합당’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 라인은 합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당내 이견을 ‘대회파’ ‘반당분자’로 규정하고 강경한 조치를 촉구했다. 9월 총파업을 합당 저지 세력 견제용으로 앞당겼다는 기록까지 남아, 합당이 원칙적 정치노선의 통일이라기보다 ‘패권적 결집’으로 흐르며, 여운형계 등 비공산 좌익을 포섭하는 좌우합작·통일전선 전략과 충돌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합당 직후에도 노선·조직 운영을 둘러싼 내분이 이어지면서, 대중조직(전평·청년·농민 조직)의 자율성과 합법·비합법 활동의 배분 원칙이 느슨해졌다. 이는 이후의 대규모 검거·와해 국면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2) 여운형 세력의 인공 수립과 좌우합작운동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스스로 점령군이라고 규정했으나, 북에 주둔한 소련군은 해방군이라고 자칭했다.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에 따르면 점령 목적은 일본의 항복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보호이며, 제2호에 따르면 점령군에 반항할 경우 군율회의에서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매일신보》, 1945.9.7.).
반면 1945년 8월 25일 「치쓰챠꼬브 대장의 포고(I)」에 따르면 조선은 독립을 찾은 자유국이며, 소련군이 조선에 온 목적은 조선 인민의 해방과 독립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고문은 붉은군대가 조선 내 모든 반일적 민주주의적 당과 단체와 광범위하게 협력해 민주주의적 정부를 창조하도록 조선인민을 보조할 것임을 밝혔다. 특히 동유럽에서 실현된 인민 해방과 독립이 조선에서도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며, 군사재판 등에 의한 형벌 언급 없이 조선인민이 붉은군대에 적극 협조할 것을 촉구했다(『조선중앙년감』 1950년판, 조선중앙통신사, 19~21쪽).
일본 항복 직전, 독립정부 수립은 김구의 임시정부, 여운형의 건국동맹, 조선인민공화국에 의해 추진됐다. 일본 항복 이후에는 북에 주둔한 소련군과 김일성, 남에 주둔한 미국과 이승만도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미군은 모든 조선의 독립·자치 기구를 부정했지만, 소련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지원했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고, 8월 6일과 9일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했다. 소련은 8월 8일 선전포고와 함께 일본을 공격했고, 일본은 8월 10일 포츠담선언을 수용하며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여운형은 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해지자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좌우익을 규합해 독립 준비를 위한 건국동맹을 중앙과 지역에서 조직했다. 1945년 8월 12일,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 소식을 접한 여운형은 송진우, 안재홍, 조만식, 박헌영, 허헌 등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익 일부는 조선총독부가 연합군에 정권을 인도하기 전까지 공식 건국 논의가 어렵고 임시정부를 합의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했다.
조선총독부는 패망 후 치안과 일본인 귀환 문제를 조선인과 협의하고자 8월 15일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를 내세워 여운형과 회담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경제범 즉시 석방, 3개월 식량 확보, 정치운동과 치안대 구성 보장을 조건으로 요청을 받아들였다. 여운형은 15일 당일 건국치안대를 발족하고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다. 당시 전국 건준 지부는 145개에 달했다.
건준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건준을 해소하고 모든 근로 인민 대중을 대변한다는 기치 아래 조선인민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9월 8일, 제1차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하고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을 포함한 중앙인민위원회 부서를 14일 발표했다.
9월 12일 서울을 시작으로 도 7개, 시 13개, 군 131개에 인민위원회가 발족했다. 여운형은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중앙인민위원회 확대를 위해 11월 20일 다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에 총선을 제안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며 인공 및 인민위원회 인사를 체포·탄압했다. 1946년 1월,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며 임시정부의 대한국군준비대와 좌익의 조선국군준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인공이 해체된 이후, 인공 인사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집결했다.
임시정부 주도의 비상정치회의는 1946년 1월 7일 이후 좌우익으로 분열됐다. 좌익은 1월 19일 민주주의민족전선 발기인 대회를 열고, 2월 19일 미군정 지역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가 결집하여 민전을 결성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으로 구성됐다.
우익은 임시정부 중심의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키고, 미군정은 14일 이를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전환했다. 이에 대응해 좌익은 민전 본 조직을 서둘러 출범시켰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된 후, 미군정은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 대립을 해소하고자 좌우합작을 시도했다. 7월 25일, 미군정 제안을 받아 김규식과 여운형 주도로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조선정판사 사건 이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고, 좌익이 총파업으로 대응하며 좌우합작에서 이탈했다.
1946년 10월 7일 합의된 ‘좌우합작 7원칙’ 주요 내용은 통일 임시정부 추진,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토지 무상분배 및 중요 산업 국유화, 친일파 청산, 좌우 진영 테러 중단, 입법기구 구성, 표현·투표의 자유 보장 등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은 이 원칙에 반대했다. 미군정의 민주의원과 김구는 찬성했으나, 이승만은 소극적이었다. 미군정은 지지 의사를 밝히고 10월 12일 좌우합작 참여자들을 포함한 남조선 입법의원 창설을 결정했으나, 여운형 등 좌익은 이를 거부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사실상 불법화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요 참여자들은 탄압을 피해 월북하거나 체포되며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좌익 배제 입법의원이 구성되자, 미군정은 좌우합작을 중단했다. 북의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지역별 선거를 거쳐 각급 인민위원회를 공식 구성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등 수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및 소련군 민정장관 로마넨코와 인민위원회, 신탁통치, 좌우합작, 토지개혁 등을 논의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운형은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며 12월 민전 의장에서 사퇴하고 남조선노동당을 탈당했다. 사회노동당 창당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1947년 5월 미소공위 재개 조짐에 따라 근로인민당을 조직했다.
여운형은 해방 직후 총 10차례 암살 시도를 당했으며, 1947년 7월 19일 임시정부 계열 테러단체 백의사와 관련된 한지근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미군정의 입법의원과 협력을 모색하고 있어 우익뿐 아니라 좌익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트루먼의 대소봉쇄정책 선언 직후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됐지만 10월 합의 없이 종료되면서 한국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동력을 상실한 좌우합작위원회는 1947년 12월 6일 해체됐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후 남북협상을 이어갔으나 결국 실패했고, 북에 정권이 수립된 이후 1949년 9월 평양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했다.
4.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과 김구의 통일정부 염원
1) 맥아더의 반공 노선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
이승만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다.”며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청원했다. 1920년 12월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왔으나 위임통치 문제 논의를 거부했고, 대통령이 상해에 부재할 때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는 안도 거부한 뒤 1921년 5월 미국으로 떠났다.
임시의정원은 1923년 4월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하고, 1924년 9월 국무총리 이동녕에게 대통령 직무 대리를 명령했다. 이에 반발한 이승만은 미국 동포들에게 임정에 독립자금을 보내지 말라고 선동했다. 의정원은 1924년 12월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고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며 민심을 분산시켰다.”고 탄핵 사유를 밝혔다. 1925년 3월 18일, 의정원은 압도적 찬성으로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했다.
1932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탄원할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1934년 외무위원장에 선임되어 1936년 7월 개인 사정으로 사직할 때까지 활동했다.
이승만은 1941년 6월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대미 교섭 전권을 행사했다. 그는 미국무부 극동국장에게 임시정부의 항일 활동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무부, 백악관, 국방부와 접촉하며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과도 만나는 등 임시정부 항일투쟁을 미국 국방부 및 정보기관과 상의하며 인맥을 쌓았다.
1942년 6월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 방송망을 통해 매일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8월 29일, 그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 개국했다. 미군정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샌프란시스코 방송도 미국의 소리 방송의 일부였다. 이승만은 반공 노선을 견지하며,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한국을 점령하려 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러한 활동은 소련이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기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해방 직후 귀국을 시도했으나, 미소 협력 악영향을 우려한 미국 국무부가 비자를 발급하지 않자, 이승만은 국방부 인맥을 동원해 맥아더 태평양사령관의 허가를 받았다. 맥아더는 반공·반소 입장에 동의하여 이승만을 지원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2일 맥아더 사령관과 하지 미군정사령관을 면담한 뒤 전용기를 타고 10월 16일 귀국했다. 김구보다 약 2개월 먼저 귀국한 셈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승만의 명망을 활용해 남한에서 열세인 우익을 강화하고 좌익을 견제하는 ‘한국인민행정위원회(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e)’ 계획을 수립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후원과 자신의 명망을 바탕으로 좌우익 통합을 시도했다.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등에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구성을 제안했고, 자신의 미국 및 맥아더 지지를 과시했다. 좌우익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의 명망을 인정했기에 10월 23일 200여 명이 참석하여 협의회가 발족했다. 그러나 친일파 참가 문제와 이승만의 반공·반소 발언으로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이 탈퇴하며 협의회는 한 달 만에 우익 조직으로 전환됐다. 이어 귀국한 임시정부는 독자적인 건국 준비를 진행하며 이승만의 입지가 좁아졌다.
이승만은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며 다시 세력을 규합했다.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1946년 3월경 회원 수가 100만 명 이상에 달했다. 신익희 임시정부 내무부장은 임시정부 뜻과 달리 정치공작대를 국민회에 결합시켰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화했다. 한국민주당 역시 “남한만의 총선을 통해 단독정부를 구성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달성하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46년 7월 미군정 요청으로 시작된 여운형·김규식의 좌우합작을 반대하며 남한 단정론을 설파했다. 가을부터 미군정의 좌익 탄압과 총파업으로 좌우합작이 중단되자, 그의 단정론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47년 2월부터 4월까지 일본, 미국, 유엔에서 남한 단정론을 확산시키며, 남북통일정부 수립 전까지 남조선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등 6가지를 미국 국무부에 제안했다.
1947년 2월, 민족통일총본부·독립촉성국민회·비상국민회의가 통합해 국민의회를 발족시켰다. 3월, 국민의회는 임시정부 법통을 승인하고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선출했으며, 미군정에 임시정부 권능 인정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승만은 주석직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며 1948년 정부수립 시까지 임시정부 주석으로 남았다.
이승만은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하며, 트루먼에게 서한을 보내 미소 합의에 의한 좌우 통일정부 수립을 중단하고, 남한에서 즉각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해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할 방파제를 구축할 것을 요청했다.
미군정과 여운형, 김규식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참여하지 않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 법통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에서 수만 명이 반탁 시위에 참여했으나,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지하고 좌익을 탄압하기 전까지 여론은 여전히 미소공동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47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서울에서 2,4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반탁 시위가 독립의 길이라는 의견은 651명, 독립의 길이 아니라는 의견은 1,736명이었다. 특히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 구성 협상대상에서 제외할 단체로 한민당 1,227명, 한독당 922명, 독촉국민회 309명, 남로당 174명이 주로 거론됐다.
2) 임시정부의 비상 국민회의와 미 군정의 포섭
송진우, 김성수, 장택상 등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을 거부하고 1945년 9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환영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 1,000여 명의 이름으로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서를 발표했고, 9월 16일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승만은 10월 23일 정당 대표들을 망라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하고, 11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취임을 거절했다.
미국 국무부장관 직무대행은 1945년 6월 8일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선거로 구성된 바 없고 조선에서 행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므로 국민 대표 또는 통치당국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발표했다(1945년 6월 28일, 프랑스 외무부 아메리카국 공문 제212호).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주중미군,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함을 김구에게 통보했으며, 이는 미군정의 공식 입장으로 확립됐다.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6명은 미군 제5공군 사령부와 함께 ‘독수리작전’이라는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쿤밍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일본의 항복을 예상하고 1945년 8월 14일 C-47 수송기를 타고 조선 상공에 진입했으나, 일본이 미군 항공모함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으로 돌아갔다.
1945년 8월 18일, 이범석이 이끌고 김준엽, 장준하 등이 참가한 4명의 광복군정진대와 번즈 대령이 이끄는 18명의 OSS 대원 등 22명이 C-47 수송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러나 일본 재조선군 총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중장이 참모장 이하라 소장과 19사단장 및 참모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미군의 통지가 없으니 돌아가라.”며 최후통첩을 하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결국 쿤밍 사령부 지시에 따라 이들은 여의도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을 통해 상륙했다. 10월 10일,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에 대해 “남조선에는 미군정만 존재하며, 다른 정부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정부를 참칭해서는 안 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 15명이 개인 자격으로 환영객도 없는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12월 12일, 하지 장군은 방송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의 정부 행세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인공 측 인사들을 체포할 것을 경고했다.
1945년 10월 말부터 신탁통치에 반대하던 좌익이 1946년 1월 3일부터 신탁을 지지하며 좌우익 분열이 심화됐다. 1월 4일, 김구의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유지하며 국내외 각계 대표를 소집, 비상정치회의를 개최하고 당면 비상대책을 발표했다. 김구 측은 우선 과도정권을 수립한 뒤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정부를 수립할 계획이었다.
비상정치회의 협상 과정에서 한국민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 등 4당 대표는 1월 7일 “신탁제도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가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반해 해결해야 한다.”는 모호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공산당 계열이 신탁을 계속 찬성하자, 임시정부는 조선공산당·인민당·독립동맹을 제외하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비상정치회의에 합류시켜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로 확대했다.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과 김구를 의장으로 추대하고, 2월 1일 임시정부 주도로 대회를 열어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기본안으로 제헌헌법을 논의하며 38도선 즉시 철폐안을 가결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협상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를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사령관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개편했다.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좌익이 1946년 1월 19일 민전 발기인 대회를 열고 2월 19일 출범하자, 우익은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창설하고, 미군정은 이를 14일 민주의원으로 개편했다. 즉 미군정과 이승만은 민전 본 조직 출범 전에 우익 단체를 입법자문기구로 전환하여 민전에 대응한 것이다. 민주의원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 김규식이 선출됐으나, 이승만이 신탁통치안 반발로 의장직을 사퇴하자 김규식이 의장직을 대리했다.
이후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민주의원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미군정은 우익 단체로 전락한 민주의원 대신 좌우합작을 통해 온건좌파까지 포함되는 입법자문기구 설치를 시도했다. 1946년 8월 24일, 군정법령 118호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령이 공포됐다. 민전 등 좌익은 이를 남한 단독정부의 수순으로 간주하고 반대했다. 김구도 임시정부 법통을 부정한다고 하여 입법의원에 부정적이었으나, 한독당 일부는 참여했다.
입법의원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임명하는 관선 의원 45명과 선거로 선출된 민선 의원 45명으로 구성됐다. 전국 선거가 진행됐으나, 좌익 거부와 간접선거, 대리투표 등으로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선거 연기와 재선거를 거쳐 1946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57명 참석으로 개원했다. 민선 의원 대부분은 우익이었고, 관선 의원 중 좌익은 사임했으며, 김규식 등 일부 중도진영이 포함됐다.
의장은 김규식, 부의장은 최동오와 윤기섭이 맡았다. 입법의원에서 심의·통과된 법률안은 군정장관 인준과 서명을 거쳐야 했기에, 정상적인 국회의 위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제헌국회 때까지 입법의원에서 통과된 주요 법령에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 관한 제102호법령」,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사찰령 폐지법령」, 「공창제도 폐지령」, 「미곡수집령」 등이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토지개혁법안은 정치세력 간 입장 차이로 통과되지 못했다.
5. 단선-단독정부 수립 저지 투쟁
1) 김구, 김규식 등 지도자들의 북행과 남북합작 노력
유엔에서 외국군 철수 후 정부를 수립하자는 소련의 안과, 정부 수립 후 외국군을 철수하자는 미국의 안이 대립했으나,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 안이 찬성 43, 반대 0, 기권 6으로 통과되었다. 소련 등은 기권했으며, 결의안에 따르면 유엔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켜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남북 총선을 실시해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90일 이내에 미소 철군을 협의해야 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9개국이 선임되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참가를 거부했다.
그러나 당시 이미 38도선이 봉쇄되어 남북은 사실상 분단 상태였다. 한국임시위원단의 남북 총선 추진을 위한 방북은 1948년 1월 소련이 거부했다. 이에 한국임시위원단 내에서도 의견이 분열됐다. 호주, 캐나다, 인도, 시리아 대표들은 전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대표들은 전체 인구의 2/3가 거주하는 남한에서만 선거를 해도 된다는 입장이었고, 프랑스는 초반에 기권 의사를 밝혔다. 결국 위원단은 소총회에 한반도 문제 처리에 대한 입장을 묻기로 결정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국임시위원단 재량으로 조선의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하는 안건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가결했다. 소련은 표결에 불참했다. 소총회 위임에 따라 한국임시위원단은 인구의 2/3가 거주하는 남한에서만 5월 10일 총선을 치르고, 북조선의 대표 1/3 의원은 추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는 중국, 엘살바도르, 인도, 필리핀이 찬성했고, 캐나다와 호주는 반대했으며, 프랑스와 시리아는 기권했다. 특히 캐나다 대표는 남한만의 선거가 통일 논의 실패를 의미하며 유엔 참여 기반을 상실한다고 반대했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결정을 환영했고, 민주통일당, 민주독립당, 조선민주당은 소총회 결의를 마지못해 수용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결정에 반발하여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고, 좌익은 총선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총선 결과, 200석 중 무소속 103석, 이승만의 독촉국민 48석, 독촉농민 2석, 한국민주당 22석, 대동청년당 9석, 조선민족청년단 6석, 기타 10석이었다. 제헌국회는 5월 31일 이승만을 초대 국회의장으로, 신익희·김동원을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6월 초,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고, 의원내각제로 합의된 초안은 6월 15일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제를 고수함에 따라 대통령제로 최종 결정됐다. 7월 17일 헌법이 공포되었고,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 간접선거로 제1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선출됐다.
한편,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8월 11일 웅기·나진·청진에 진입했다. 8월 17일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구성되었고, 소련군 요구로 8월 27일 건준과 친소파 각 16명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친소파 현준혁이 선출됐다. 소련군은 9월 초, 38도선 분할점령안에 따라 전 지역을 점령했고, 공산주의자 주도로 각 도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9월 8일 ‘북조선5도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소련군은 각 지역에 경무사령부를 설치했다.
김일성을 포함한 소속 103명의 북항일연군 교도려(88여단)은 9월 19일 원산항에 도착해 도·시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고문, 지역방위 담당으로 배치됐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이 참여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이 김일성을 소개했다. 이후 김일성은 소령으로 진급해 평양 주둔 경무사령부 부사령관 겸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후 10월 3일 소비에트 민정청을 설치했다. 10월 8~9일,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했다. 38도선 이북에도 당 본부를 설치한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대해 박헌영은 중앙당은 한 곳이어야 한다며 분국 형식으로 합의했다.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은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결성해 당수가 되었고, 김일성과 국제연합군을 이끈 최용건이 부당수가 됐다. 11월 19일에는 ‘북조선 5도행정국’이 출범했으며,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했다.
소련 군정은 1946년 1월 2일 이후 좌익이 찬탁으로 돌아서도, 조만식이 반탁을 고집하자 1월 5일 고려호텔에 사실상 연금했고, 2월 24일 최용건이 조선민주당 당수가 되었다.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무상분배, 토지개혁, 국유화 등을 단행했다. 1946년 11월 북 각 지역에서 선거를 거쳐 인민위원회가 공식 구성되었고,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8년 5월 남한 단독총선 이후 남북 총선을 거쳐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 개편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우파였으나 남한 단독총선에 반대하며, “남북정치요인회담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구와 김규식 주도로 14개 정당과 51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민족자주연맹은 1948년 2월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했다.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회 일부 인사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2월 26일 국제연합 소총회는 미국 대표 제안에 따라 “총선거는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방안을 가결했다.
북은 3월 25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결정을 통해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제안했다. 김구는 4월 19일, 김규식은 4월 22일 입북하여 남북연석회의가 4월 26일 진행됐다. 4김 회담은 4월 26일과 4월 30일, 남북지도자협의회는 4월 27일과 4월 30일 진행되었는데, 회담을 통해 남북의 지도자들은 상당한 공감대를 마련했다. 남북연석회의와 남북정치지도자 회담 결과를 종합해 4월 30일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주된 내용은 “① 외국군은 즉시 철수하고, ② 남북정당사회단체협의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③ 총선거를 통해 입법기관을 선출한 다음 헌법을 제정하고 통일정부를 세우며, ④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분단을 저지시킬 방안이 될 수는 없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구성 총선거는 북에서 직접투표, 남에서 간접투표로 진행됐다. 남한에서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대의원 1,080명을 직접 선출하고, 이들이 8월 21일 북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남을 대표하는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북 자료에 따르면, 박헌영 위원장은 “유권자 868만 1,746명 중 77.48%가 참여했고, 이승만 정부 탄압으로 957명이 검거·투옥되었다.”고 보고했다.
선출된 대의원들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모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였으며, 남조선노동당 당원 132명, 김원봉의 인민공화당 68명,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회원 66명, 근로인민당 당원 62명, 민주독립당 당원 53명, 사회민주당원 43명, 민주한독당 35명, 중도진영 신진당원 31명 등이 포함됐다.
남북 단독정부 수립 이후, 김구와 김규식은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1948년 7월 21일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고, UN에 남북 두 분단국가 해체와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암살됐고, 김규식은 한국전쟁 직후 북으로 이동해 병사했다.
2) 민족분단 저지 민중항쟁
| 사건 | 배경 | 전개 | 의의 | 한계 |
| 2.7구국투쟁(1948.2) |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남한 단독 선거 추진 - 좌익·학생·시민의 분단 반대 여론 | - 전국 노동자 총파업, 학생 동맹휴업, 상점 폐쇄 - 서울·부산·대구 등에서 수만 명 참가 | - 분단을 막기 위한 최초의 전국적 민중 행동 - 좌익뿐 아니라 학생·중간층이 합류 | - 미군정·경찰 탄압으로 곧 진압 - 통일 실현의 구체적 방도 부족 - 지도부 지하화로 지속성 약화 |
| 3.3투쟁 (1948.3) | - 2.7 투쟁 이후에도 단독선거 강행 움직임 - 학생·시민 주도의 반대 확산 | - 서울·대구·광주 등지에서 수만 명 시위 - 학생과 노동자 동맹휴업·파업 | - 단독정부 반대 투쟁이 연속적·전국적임을 입증 - 중도 민족주의 세력 합류 | - 즉각적 탄압·수백 명 구속 - 단독정부 노선을 막을 힘 부족 - 조직적 지도력 분산 |
| 4.3항쟁 (1948~54) | - 5·10 단독선거 반대 - 1947년 3.1절 발포 사건, 서북청년단 폭력으로 민중 불만 고조 | - 1948.4.3 무장대 봉기 - 산악 유격전 장기화 -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대규모 진압·학살 - 사망 2만~3만 명 | - 단독정부 반대의 가장 대규모·장기 항쟁 - 민족통일 지향과 생활 불만 결합 - 국가폭력의 기원을 드러낸 사건 | - 남로당 지도부의 조급한 무장 전술 - 압도적 군사력 앞에 고립 - 민중의 막대한 희생 |
| 여순항쟁 (1948.10) | - 제주 진압 출동 명령에 국방경비대 14연대 반발 - 동족 학살 반대 정서와 민중 불만 결합 | - 10.19 여수 봉기 → 순천 확산, 인민위 조직 - 국군·경찰 대규모 진압·보복, 민간인 1만여 명 학살 | - 군 내부에서 동족상잔 반대 봉기 발생 - 민중이 동참, 국가 정당성 문제 제기 - 국가보안법 제정 계기 | - 국군 일부 부대 중심이라 전국 확산력 한계 - 남로당 중앙의 소극적 대응, 압도적 진압 앞에 취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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