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묵상:
오늘 본문은 무척 어려운 본문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권면한 내용을 우리가 더 이상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4절,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그러니까, 남자가 기도나 예언을 할 때는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5절,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그러니까, 여자가 기도나 예언을 할 때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기도나 예언을 한다는 말은
개인적인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 성도가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기도나 예언을 하게 되는데,
그 때 남자는 아무 것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여자는 무엇을 쓰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바울과 우리 사이에는 2천년 이라는 시간과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지금 어려운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읽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2천년 전 고린도 사회에는 어떤 문화가 있었을까?
이것을 이해하면 본문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는 이방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 공적인 제사에 참여하는 남자들은 긴 도포를(toga) 머리에 쓰고 우상에게 제물을 드렸다.
그리고 당시 이방 신전의 여자 예언자들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헝클어진 머리로 예언을 했다.
(참고로, 당시 사회에서 머리를 민 여자들은 창녀이거나 페미니스트들이었다.)
이 문화는 그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모두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니까 바울은 지금 기독교의 예배가 이방 우상의 제사와 달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보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남자가 무엇을 쓴다고 죄가 될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여자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고 죄가 될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다.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그렇게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굳이 그것을 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 자유가 교회 안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면,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초두에서 1절과 3절을 말했던 것이다.
3절,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여자가 들으면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니...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요점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라" 여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한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동등한 분이시다.
똑같은 영광과 권능과 위엄과 존귀를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성자 예수님은 스스로 성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 즉 인간이 되셔서 스스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이것이 성자 예수님의 자유였다.
그리고 그 자유로 온 인류를 구원하셨다.
남자와 여자도 동등하다. 모든 면에서 똑같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모두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역할이 달랐듯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자인데 여자의 역할을 못해서 불만이 있거나
여자인데 남자의 역할을 못해서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의 역할을 못해서 불만이 있거나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역할을 못해서 불만을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성부 하나님은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어 온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있고,
성자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서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우열이 아니라 역할을 차이를 인정하셨던 것이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성자 예수님은 스스로 그리스도가 되셔서 하나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삶을 사셨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만, 스스로 그렇게 살기로 선택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유이셨다.
바울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방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만약 바울의 행동으로 시험에 드는 자가 있으면, 그는 그러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바울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 자유보다 더 큰 자유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본받는 바울의 자세였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바울이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건 안 쓰건,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건 안 쓰건,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 자유로 인해서 실족하는 형제 자매가 생긴다면,
마땅히 그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럼 현대를 사는 우리는 왜 이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그 이유는 지금의 서구 문화는 당시 고대 문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안 쓰고에 따라 시험에 드는 형제 자매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주님,
바울이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저도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형제 자매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고,
진전한 그리스도의 자유로 형제 자매를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형상을 닮아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