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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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시계
이영숙
동물계에는 있고 식물계에는 없는 게 있다
인간도 동물이므로 물론 인간계에도 있다
너는 어느 쪽이니 물으면
뒤로 숨는 벽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묻는 것도 아닌데
자꾸 무례해져서
내가 동물인 것도 잊고
조간신문에서 오려낸 시 한 편을 벽에 또 눌러 붙이는 밤
스카치테이프에 낡은 벽지를 뜯길 때
모욕당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벽도 아랑곳없이
고장 한번 없이
어떻게 맨정신으로 일년삼백육십오일을
대단타, 이런 세기에 이런 말은 모욕인데
스카치테이프에 낡은 살점을 뜯기는 말인데
아랑곳없이
OX형 문제처럼
벽시계는 저벅저벅
살래, 죽을래,
지치지도 않고
올해 태풍에도 이재민이 된 새들의 통계는 잡힌 바 없는데
기류가 흐른다 기체가 흔들리면
손잡이 없는 벽이라도 꽉 잡아야 하는데
밤은 직육면체
직육면체가 아니라면 세계는 쌓아지지 못했을 것이고
동물의 왕은 있어도 식물의 왕은 없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오고야 마는
왕처럼 인공 장기를 갈아치우던
벽시계가 멎었다 그럴 줄 몰랐겠지만
전통에 따라 무심하게 유리로, 나무로, 바늘로 해체되는 동안
벽은 모처럼 식물의 잠에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