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2절
제목 : 가치에 합당한 삶
일시 : 2019년 7월 2일
1.
바울은 속도 좋다. 첫 사랑을 쏟아 부었는데, 뻔히 알면서도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요 비방인데도 홀딱 넘어가는 이들이 속출한다. 그런데도 열 받기보다는 차근차근 경위를 설명한다. 성격 좋아서가 아니다. 그건 사랑일 거다.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2.
나는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다가 ‘거울 독법’(mirror reading)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는 역추적하는 법이다. 이 텍스트에 이런 단어나 이런 언어가 있다는 것을 특정한 상황을 전제로 한다. 오늘 본문 전체의 톤은 자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해를 구한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조금 과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변명한다. 그 변명하면서도 복음을 변증하고.
그 증거는 ‘너희가 안다’는 말이다. 너덧 번 나온다. 둘 사이에 잘 아는 것을 자꾸 상기시키는 까닭은 뭘까? 라포르를 형성하려고? 그것 아니면 둘 사이에 오해가 있으니까, 그걸 교정하기 위해서 일까? 내가 보기에 둘 다이다. 서로의 친밀감을 확인하고 회복하고, 그러면서도 바울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고치기 위해서 너희가 안다는 말을 반복하는 거다.
전체적으로 서로의 공감대, 공통분모는 두 가지로 묶을 수 있겠다.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에서 크게 고생했다는 것과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역했다는 것, 이 두 가지이다. 고생한 부분은 2절이고, 3절부터는 거짓됨 없이 참된 마음으로 일했다는 것을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설명한다.
자, 그러기 위해 ‘거울 독법’을 활용해서 바울이 어떤 상황인지를 톱아보자. 1절에서는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안다는 말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 일부가 바울이 기껏 해 봤자 일군 것이 별로 없다는 투덜거림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은 많아야 4, 50명? 2, 30명? 아니면 1, 20명 정도 이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고, 로마 황제와 제국의 질서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고 떠들어대지만, 결과는 너무 초라한 거다. 요즘 말로 하면, 성공신학, 번영신학이고, 존 요더가 「예수의 정치학」 12장에서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어휘, 곧 효율성을 여기로 끌고 온다면, 예수의 십자가나 바울의 사역이 세상을 바꾸는 효율성이 그다지 없는 거다. 고작 수십 명 갖고, 이 수만의 도시, 더 나아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의 구석진 곳에서 뭘 한단 말인가, 그런 회의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근거는 바울이 당한 고난이다(2절). 고난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고, 그 고난이 무슨 쓸 데 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난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역설한다. 바로 그 증거가 예수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예수의 고난의 일부이고, 너희들도 피하고 싶어하는 고난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고난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응당 받는 것임을 웅변한다.
3.
특별히 우리는 3절의 불순한 마음, 속임수, 4절의 환심, 5절의 아첨, 탐욕 등의 단어를 주목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 없다. 이런 단어가 계속해서 튀어나오는데 눈이 저 단어로 쏠릴 수밖에 없다. 저 다양한 어휘를 한 마디로 말하면, 거짓된 것을 돈을 벌자고 가르친 것이다, 는 말로 압축할 수 있겠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복음 장사’했다는 비방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들에 따르면, 당시 교사들 또는 순회 교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갖가지 수사학과 변증학을 동원해서 교묘하게 꼬드기는 사례가 많았다 한다. 바울도 그런 사람의 하나로 치부되었을 것이고. 바울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래도록 물들어있던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 바울의 행동을 해석하게 되고, 결국 바울도 다르지 않군, 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한 두 사람, 또는 서너 명이 다른 신도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고, 점차 퍼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관한 대목을 추려서 하나로 엮어 보면 이렇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곳이 있고, 그들도 기억하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경험적인 반박도 있다. 논리적으로 자신과 바울 자신의 복음의 변호는 3절부터 시작한다. 자신은 내 잇속을 챙기려고 한 적이 없다, 그러기에 너희 마음을 사기 위해 교묘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대사요 사자이다, 그러기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충실했다, 나를 파송한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맹자」의 첫 편인 “양혜왕편”이 생각난다. 자신의 나라를 방문한 맹자에게 왕은 내게 어떤 이익을 주기 위해 왔느냐고 묻는다. 맹자는 한 성깔 하나 보다. 약간 굽힐만도 할 텐데, 이익, 곧 利 아니라 仁과 義를 말하기 위해 왔다고 답한다. 왕이 먼저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면, 그 이하의 신하들도 모두 왕을 따라 할 것이고, 그러면 모두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면 나라가 설 수 없을 것이고, 왕도 위태로워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비현실적이다 싶었지만, 이런 맹자의 정직성이 급진성으로 연결되고, 결국 세상을 뒤엎는 혁명적 사상이 되었다.
4.
그 다음, 바울의 전략은 둘 사이에 알고 있는 목회 경험을 환기시킨다. 내가 너희들에게 어떤 이익을 취하고자 하지 않은 강력한 증거는, 너희도 알다시피, 그곳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너희들로부터 사례를 받지 않으려고 내가 내 손으로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고 말한다. 자비량 사역을 했다는 말이다.
내 경험을 쓸 것(목회 전념하다가 자비량으로 지금은 이중직으로, 그리고 그것의 장단점.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고린도전서이므로 지금은 이 본문에 맞게 조금만 쓸 것. 그리고 다만, 그걸 알면서도 바울이 돈 때문에 저런다는 말에 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슬프다. 그런데도 바울은 섭섭해 하는 표정 짓지 않고 엄마 같이, 아빠 같이 설명한다는 것)
5.
그러고 보니 논리적으로 그랬겠느냐, 경험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말한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태도랄까, 자세에 관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바울이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간단하게 본문을 보충 설명할 것)
바울이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간단하게 본문을 보충 설명할 것)
그리고
저 둘의 통합된 자세로 사역하였다.(둘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설명할 것)
요지는, 8절의 한 단어로 수렴된다.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
내 간증 : 아버지 하나님으로 만난 것, 어머니 하나님으로 만난 것, 그리고 헌금 기도할 때 ‘아빠 되신 하나님, 엄마 되신 하나님’이라고 기도하는 것, 그걸 보고 강사로 오셨던 강남순교수께서 괜찮느냐는 걱정을 해 주었던 것, 우리 교인들은 좋아한다는 것 등
6.
이 모든 것의 기초는 12절이지 싶다. ‘하나님께 합당한 삶’ 말이다. 하나님의 가치에 합당한 삶이라고 고쳐 읽으면 이해가 잘 된다. 그렇게 해석하는 그 까닭은 1절의 ‘헛되지’ 않았다는 말에 상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역을 평가하는 기준을 외적인 결과물, 외부의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상응하는, 합당한 일을 했으면, 그것이야말로 성공이고 형통인 거다.
그러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 뭘까? 나의 백문일답은 ‘십자가’이다. 바울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정점인 십자가에 합당하게 어떤 이익이나 잇속을 챙기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나타난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으로, 그리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으신 예수의 십자가처럼 자신도 자기 목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돈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로 일하면서 틈틈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다.
그러면 지금 내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