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가능성을 찾는 동역자가 되라
마가복음 2:1~5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첫째 날, 계속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기도를 계속하라] = 기도 중에 머무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를 굳게 계속하라, 기도는 그리스도의 수중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능하신 능력이 됩니다.
셋째 날, 믿음의 가능성을 찾는 동역자가 되라.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절망이라는 이름의 독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망과 공포는 썩은 새끼줄을 독사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낙심과 좌절은 열릴 문도 막힌 담으로 보게 합니다.
문이 닫혔으면 또 다른 문을 찾고 나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희망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하며 구하고 찾으면 소망이 됩니다.
소망은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미래라는 소망을 현재의 삶으로 가져와 누리게 하는 통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중풍 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신앙 공동체의 형제로서 함께 믿음의 가능성을 찾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는 낙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보려고 모든 노력을 다해 보는 사람입니다.
백약이 무효했지만, 아직 절망은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계속 가능한 일이 있을 것이라 소망과 믿음을 갖고 찾아보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가 드디어 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1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가버나움] = 나훔(위로) =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가능성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서 고침을 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가버나움 집에 계신다는 소식(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중풍 병자에게는 가능성을 찾는 믿음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마음,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분별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 불가능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가느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면 살길이 있고, 치유와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는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나의 믿음과 합한 사람, 늘 옆에서 함께 믿음의 가능성을 찾으며 기도해 주던 네 명의 친구들, 기도의 동역자, 신앙의 동역자들입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합심하고 협력하면 믿음의 가능성이 더 커집니다.
1) 살길(소망)이 보입니다.
2) 문제 해결의 방법이 생깁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세상의 수학은 1+1=2이지만, 합력하면 1+1+@(믿음) = 역사, 능력, 회복의 기적이 됩니다.
어떤 일을 혼자 일하면 10시간 걸리지만, 둘이 하면 5시간이 아닌 2~3시간이면 끝낼 수도 있습니다.
중풍 병자는 마침내 두 번째 불가능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는 세 번째 불가능에 막혀버려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2절a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여기 말씀을 보면 [없게 되었다]라고 하지 않고, [없게 되었는데]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 이득 앞에서는 절대 양보하기 싫어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개인주의, 이기주의, 배타주의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사탄의 욕심.
그런데 여기 이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등에 대해 듣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이라 한 치 양보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지키려고 더욱 힘썼을 것입니다.
4절a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합니다.
안팎으로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곳에는 중풍 병자를 위해 비워둔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단념할 수는 없기에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찾는 이에게는 찾아질 것이요]라는 말씀대로 그들의 눈에 길이 보였고 찾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찾는 믿음의 가능성이 보이는 길을 그들 눈앞에 열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할 수 없는데 평강하도록 환경을 연출하시는 성령님의 숨 샬롬의 역사입니다.
[찾는 자] = 자리 배급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설 자리를 만들어내는 자를 뜻합니다.
4절b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가능성을 찾는 지혜와 믿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신앙을 보여주는 탁월한 순간입니다.
이것이 홍해처럼 없던 길을 만들어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막힌 담도 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그들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별명을 붙인다면 [믿음의 가능성(소망)을 찾는 불굴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시는 그 믿음의 가능성의 빛을 잃지 않고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빛을 보고 잘 따라가다가도 동방의 박사들처럼 세상의 방법과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눈길을 돌리다가 그 빛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 빛을 잃어버리면 소동이 일어나고 예기하지 못한 불상사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고 하나님이 비춰 주시는 그 빛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집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보고 계셨습니다. (출 3:7~8)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믿음의 가능성을 찾는 믿음과 신앙을 지켜보셨습니다.
그 후에 그들의 소원하는 것을 미리 준비하신 여호와이레의 은혜를 응답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와 치유의 은혜입니다.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가능성의 기적, 죄 사함의 은혜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으로 나타내 보이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설 땅이 어디냐? 내 자리가 어디냐?]라고 모두 아우성을 칩니다.
우리는 내가 설 땅을 만들기 위해 구하는 이, 찾는 이, 두드리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돕고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로 들어가 엎드리는 인내(휘포모네)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와 기도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가능성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소망의 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위기 앞에, 문제 앞에, 불가능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저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믿음의 눈을 뜨고 계속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읍시다.
믿음의 가능성을 찾아 절망을 정복하고 승리하는 복된 동역자가 되는 가정과 삶의 현장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에 약속된 복록을 심령과 가정과 삶의 현장 가운데 풍성, 풍성하게 누리며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