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화기
난 한문은 잘 모르지만, 대충 정을 단련하여 기로 변화시킨다고 해석하면 되는 것 같은데, 아니면 정을 기로 만든다고 하면 되는지, 그도 아니면 정으로 기를 만든다고 할까요? 정을 이용해서 기로 한다고 하든지, 연은 단련인가, 수련인가, 아니면 연마인가, 한문이란 게 해석 나름이고 해석자의 깨우침만큼 해석을 하니 이렇고 저렇습니다. 이런 직역적인 해석보다 정의 의미와 기의 의미, 연의 의미와 화의 의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 의미들의 맥락들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단히 복잡하고 분량도 많아지겠죠. 차이나인들이 수련적 지배가 있을 당시 이런저런 이름을 짓고 단계마다의 뜻도 정한 것이 많은데 그들의 수련체계가 우리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 수련하는 그들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 그리고 시대가 흐른 지금은 얼마나 같거나 다른지, 그들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내가 전부 설명하지는 못하겠고 이런 것에 관심 있는 사람이 할 일 일것입니다.
여기서 정은 무엇을 말함인가요? 정력, 수명, 생명처럼 근원적 생명현상을 말하는지 그리고 기는 또 무엇을 말함인지 에너지나 우리가 자천에서 느끼는 그 느낌들이 기인지, 단전을 말하는 것인지, 신장에 있는 것을 말함인가요? 다음은 연기화신, 연신환허, 연허합도 이렇게 순서가 있는데 참 어렵고 한문이라 더 그럴듯하게 깊고 심오한 무엇이 있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정리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들의 궁구로 된 것입니다. 그 의미도 대단히 심오하고 그러면서도 간단하여 이 정리가 나온 후로 이것만한 것이 다시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튼 일반적 해석은 차이나의 수련서를 번역하고 또는 그러한 것을 연구하는 서적들이 있으니 그런 곳에서 보고 여기서는 다른 것을 말해 보겠습니다.
난 기는 단전형성이 되면 그것이 기라고 봅니다. 차이나의 책에선 임독이 타통되어 주천을 하면서 서서히 정을 기로 변화시켜 간다고 합니다. 재밌는 건 이렇게 정이 기로 화하여 연정화기가 완성되면 정액을 누출 안 시키는 마음장상이 된다고 하더군요. 좀 웃깁니다. 정이란 일반사람의 경락에 흐르는 것으로, 이것은 생각이나 마음과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고 각 장부원리로 이것이 정입니다. 감정과 마음, 생각, 운명과 장부의 힘들, 즉 신체의 총화가 어울려 흐르는 것입니다.
자천에서는 의지를 중요시 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의지를 쓰지 않은 것은, 즉 의도성이 없는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의도에도 자신이 나누기 따라선 직접의도와 간접의도가 있고 이것을 도라고 하는데 내 세계, 내 장을 형성하는 것이 자천입니다. 그래서 내가 단련한 것만 기라고 합니다. 즉, 몸의 총화에서 내 의도가 깃들이면 기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내 의지가 정과 합쳐진 것이 단전이고 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나 수련의 기와는 다른 것이죠.
그래서 난 단전부터 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기가 되면 정의 하위체계에서 기의 상위체계로 상승하여 육체적, 물질적 영향에서 그만큼 멀어지게 된 것으로 기로 병을 고치고 상해를 가하고 물리적 효과를 얻으려는 것은 기를 의지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지 기가 사물에 가까워서가 아닙니다. 정에 비하면 멀고 신에 비하면 가까울 뿐입니다. 또 연정화기가 체인이나 함양을 말하는 것이기도 해서 신체를 마음의 변화에 맞추어 바꾸고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기운으로 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생활체계나 나 자신의 질적인 의미변화를 꾀하는 것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정이 기가 된다는 것이 신체가, 신체가 아닌 다른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겠죠. 이러한 의식의 신체화하는 것을 잘못하면 이후의 자천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차이나 수련서에서 설명은 단순히 주천만을 말하지만 그 주천이 이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공부의 진전은 더딜 것입니다. 연기화신에서 신으로 변하면 더 이상 사물과는 관계가 간접적일 뿐 직접적 연관성은 약합니다. 그래서 정신으로 사물을 움직인다는 것은 범주오류입니다. 그렇게 사용하고 적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으로 할 일은 그것이 아니라 따로 있으며 신의 입장에선 모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이 현실과 연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방식의 신에 대한 이해법이 있어야 논의할 수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 기가 신이 된다는 연기화신은 기는 굳은 의지가 있다고 보면 신은 분별의 의식이 있는 것 같아서 신이 되면 기는 스스로 살아 움직이며 나이면서 내가 아닙니다. 이 경지를 먼저 하고 신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을 전령이라고 난 말하고 좀 더 광범위한 활동영역을 가지지만 차이나에선 아마 진종자나 소약이라고 하는데 신체 안의 경맥만을 움직입니다. 이것을 상단전과 연관시키면서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중맥 즉, 몸을 중앙으로 관통하는 길이 열리면서 두정을 뚫고 나가면 이때부터는 기가 내 의지를 벗어나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이 되는데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입니다. 인도는 쿤달리니를 각성한다고 합니다. 이때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로들을 스스로 운행하며 하늘과 땅과 몸과 타인 그 어떤 것과도 합일하는 듯이 감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내 의식 외에 많은 의식이 있으며 이제는 내가 또 다른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말이 이상해 접신이나 빙의 아니면 정신질환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요즘 이런 것에 관심 갖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천에서 이런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귀신 따위를 상대하려고 자천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 수련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짓입니다. 삶이 무료해서인가? 자극을 원하는가? 현실도피이기도 하고 나태하고 목적성도 의지도 없고 꿈도 없는 사람들이 안타깝습니다.
어찌되었든 마음을 허로 하든 진으로, 공으로, 무로 비우든 이런 심법을 이해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묘해집니다. 그냥 시간적으로 오래하거나 단계 밟듯이 순서적으로 되거나 어떤 기이한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화신이라고 단계설명이 있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적인 설명은 미흡합니다. 성명쌍수라고 하는 성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합니다. 각성이고 깨우침에 해당하는 인문적인 소양입니다.
중맥 이상은 자천에 대한 의지나 각성을 향한 마음이 부족하면 그만큼 더딥니다. 차이나에선 금단이후부터 태식이나 바른몸을 기르는 것을 연기화신이라고 해요. 이걸 이루기 위해선 미세한 망념이나 어떠한 번뇌도 없어야 하는데 아마 공을 이해한 의식일 것인데 무조건 선정이나 삼매같은 고요함을 위주로 그들이 말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한 듯 안한 듯 합니다. 그래서 진짜 신묘함과 각성은 허를 말합니다.
다음 단계인 연신환허죠. 연신환허, 이것은 허라고 하든, 공이라고 하든, 각성을 못하면 부련 그러니까 바른몸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라고 말할 때부터 원래 기수련이 아니고 신수련으로 해야 하며 이는 심범입니다.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시키기가 어려워서 그냥 호흡이나 하라고 하든가 기나 운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를 자유롭게 놔두어야 창조성이 나오고 무엇이든 해보려고 할 텐데 억압하고 기는 이런 것이다라고 강하게 자기의 신념인 듯 집착하는 그 생각이 스스로의 자천의 진행을 막고 기가 신묘해지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몇 년, 몇 십 년을 단전만 지키고 내주천하겠다고 인생을 전부 허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차근차근 밟아가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입니다. 스승이나 선배가 없어서 책이나 주워들은 것을 기준 삼아 “이럴 것이다.” 라고 자기가 판단해서 하는 경우가 이렇습니다.
모르면 배우려 해야 하지만 이런 사람은 말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은 아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자기의 고리타분한 성격이 그렇게 더디게 하는지 모르고 그것이 옳은 것으로 아니 큰일입니다. 나도 한때 이생을 바치고 다음 생을 바치고 끝까지 가려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단전형성은 일 년에서 삼 년입니다. 그 이후에도 안 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스승을 찾던가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자천은 빠른 시일에 해야 하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자천에 소모해서도 안 되며 단기간에 빠르게 성취해야 합니다. 과거의 고답적 자천서에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고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대가 바른 마음만 확고하면 길게 잡아 수개월이면 바른몸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천이 진행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묻는다면 자천자가 자신의 자천 경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어렵습니다. 기운행의 경로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내주천 이후에 자신 있게 자기가 어디쯤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순서적으로 진행될 때는 간혹 알기도 하지만 흔들리거나 혼란을 겪어서 다르게 되었을 때는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즉, 자기가 “난 이정도 갔을 것이다” 라고 믿는 그 정도가 정말 진행되었을 때는 맞지만 그 믿음과 다를 때는 모르게 됩니다. 이런 철저한 자기 점검이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모르면 문의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홀로 헤매는 것보단 나을 거 같습니다.
냉철하고 객관적인 사물인식을 할 수 있어야 점검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저 간단히 어디쯤 갔고 얼마나 했는지를 아는 게 아닙니다. 자천은 무형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인식체계의 변화 없이 안일하게 자천점검을 하려는 것은 안 될 것입니다. 얼마나 냉정하고 선입견 없고 마음을 비우느냐가 거짓 상이나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