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60/180108]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
‘전라인 열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라고 동문 탐방 인터뷰를 우리 홈피에 24회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2011년 7월 7회차 인터뷰어가 최근 ‘1987’ 영화로 화제가 된 장준환 감독이었습니다. 마침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 고교-대학 같은 과 띠동갑 직속 후배여서 각별한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더구나 부인이 그 유명한 배우 ‘문소리’라니, 흥미까지 더했었지요. 개봉 열흘도 안돼 300만명을 돌파하고, 경찰들이 단체관람을 했다고 하더니 이번 주말에는 대통령님까지 보셨다합니다. 우리의 아픈 민주화투쟁 기록, 아시죠? 1987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 남영동 대공분실 물고문 현장. 세상 어디에나 시대를 불문하고 의인(義人)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정의는 불의를, 진실은 거짓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몰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으나 곧 볼 것이지만, 1천만명이 넘게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중앙일보 1월 8일자 23면에 장준환 감독 인터뷰 기사가 실렸군요.
지난 토요일, 포항에서 친구 자녀 혼사 때문에 올라온 친구를 모처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직장(포항제철)에 취직한 이래 30년이 넘게 그곳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살 수밖에 없겠지요. 이 친구가 저를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우천, 영화의 힘이 크긴 크더라. ‘택시운전사’를 거의 다 보았는지, 이제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 간첩들이 일으킨 데모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어졌어야. 나 살면서 힘들었다. 사방팔방을 둘러봐도 깡보수, 아무리 친한 친구들도 말도 안되는 ‘이념’ ‘지역감정’에는 안되더라. 정치 속앓이 많이 허면서 살았다. 환장허것더라” 아무렴. 그랬겠지요. 짐작만 해도 그 친구가 안되어 보인 적이 많았습니다. 여러 번의 대통령 선거, 그쪽은 정말 요지부동이었지요. 이제는 정말 조금 달라진 것이 보이지요. ‘영화의 힘’ ‘문화의 힘’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그래서 이명박근혜정권에서 1만명에 가까운 문화계인사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겠지요. 또 한 친구는 계모임 친구 10여명과 토요일 조조프로로 ‘1987’을 보았다며 자신이 블로그에 쓴 멘트를 보여주더군요. ‘박종철 열사의 주검을 덮은 태극기, 이것이 진짜 태극기’라구요. 어디 박종철 열사 뿐이겠습니까? 군사독재 30년(한 세대입니다) 동안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을 딛고 어렵게 싹을 틔운 민주주의가 결코 좌초되면 안되겠기에, 우리 국민은 지난해 촛불을 들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세력이 민주화를 그토록 조직적으로 막았는지, 원인을 규명하여 실체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적폐(積弊)’와도 유사어(類似語)이겠지요. 이해, 용서, 포용은 그 다음 문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의 자랑스런 후배가 영화 데뷔 14년만에 야심차게 만든 ‘1987’을 보고 여기저기서 ‘잘 만들었더라’는 말이 들리니 기분이 너무 좋더군요. 국내 흥행에 실패했다는 1탄 ‘지구를 지켜라!’ 단 한 편으로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신예, 그는 과작(寡作)도 너무 과작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를...’ 팬카페가 있다는 말을 최근에도 듣고 놀랐습니다. 제2탄 ‘화이’도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아주 우수한 작품이라는 영화평을 보았습니다. 저야 영화에 문외한이니 두 편 모두 본 적도 없고, 뭐라 할 형편은 못되지만요. 하여, 필모그래피(filmography)라고 하나요? 2011년 당시 장준환 감독을 만난 후 적은 졸문을 부기(付記)합니다. 문소리씨는 예쁜 공주를 낳았고, 그 아빠는 ‘딸바보’가 되었다는 후문도 들었습니다. 화제의 제3탄 ‘1987’을 계기로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우뚝 선 감독이 되기를 희원(希願)합니다.
[전라인열전 7]‘지구를 지켜라’ 영화감독 장준환동문(18회)
‘박하사탕’ ‘오아시스’ 등에서 열연하던 배우 문소리(38)씨를 아시는가요? 최근 언론에 과감하게 환상적(?)인 D라인을 공개해 화제가 됐었다. 출산예정일은 7월말. 그의 부군과 함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태교(胎敎)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문소리님이 아닌 그의 남편, 장준환 영화감독이다. 그는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연출․각본, 신하균 백윤식 황정민 출연)로 모스크바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일약 우리나라 신진 영화감독 스터디엄에 올랐다. 비록 흥행에는 철저히 실패했지만(6만여명이 관람했다던가) 말이다. 하지만 그는 모스크바영화제 하면 악몽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고. 시상식장에서 영예의 트로피를 잃어버린 것. 가방 속의 여권까지 분실하여 자칫 국내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생이자 절친인 봉준호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대박난 해였다. 그러나 ‘흙 속의 진주’는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것인가. 다음해에 모스크바영화제 심사위원이 되었는가하면, 브뤼셀 판타스틱영화제 금까마귀상, 36회 오늘의 젊은예술가상을 받았다. ‘모텔 선인장’ 조연출, ‘유령’ 시나리오, 단편 ‘2001 이매진’ ‘털’ 연출,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 ‘카멜리아’ 등의 작품이 있다.
강원도 태백의 외딴 산골마을에 사는 청년 병구(신하균)는 지구가 곧 위험에 처할 거라고 믿으며,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이 모두 지구를 정복하려는 외계인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개기월식까지 안드로메다 왕자를 만나지 못하면 지구에 엄청난 재앙이 몰려올 것이고 생각한 병구는 외계인의 지구 파괴 음모를 밝히기 위해 외계인으로 확신되는 유제화학의 사장 강만식(백윤식)을 납치한다. 사회악을 대변하는 강만식은 비정한 기업가이자 철면피한 인물인데, 병구는 그를 납치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고문을 가한다. 한국영화 최초로 외계인을 소재로 삼은 영화로, 우주적인 주제로 한국영화의 소재를 넓혔다는 평을 받았다. 장감독은 단편영화 《2001 이매진》(1995)에서도 기발하고 코믹한 상황 아래 사회로부터 자신을 존레논의 환생이라고 생각하는 한 인물이 부조리한 사회에 외치는 울분을 잘 그려내고 있다.
<지구를 지켜라!>는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국내외 언론과 평론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았는데, 국내외 영화제에서 받은 상만 국내 15개, 국외 5개에 이른다. 대표적인 수상으로는 제40회 대종상 남우조연상(백윤식)·신인감독상·음향기술상, 제25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감독상, 코닥 신인감독상,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작품상·남우주연상(백윤식)·관객상, 아르헨티나독립영화제 여우주연상(황정민)·촬영상,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대상 등이 있다.
그가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하여 전라중학교와 전라고등학교(18회)를 졸업한 우리 동문일 줄이랴 누가 알았겠는가. 더구나 필자하고는 성균관대 영어영문학과 동문(76학번 vs 89학번, 띠동갑)으로 만남의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다음 만남부터는 무조건 ‘00아’ 반말로 편하게 대해도 거시기하지 않을 사이, 우리나라는 학연․지연 빼놓으면 시체란 말이 언제나 지나치지 않다. 소설가 김연수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다녔다.
자유인의 삶을 희구하며 노총각을 고수하던 그가 2004년 정재일의 뮤직비디오 ‘눈물꽃’을 연출하면서 여주인공 문소리님에게 희한하게도(?) 은근한 이성(異姓)의 필이 꽂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저 가끔 술친구로만 지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부터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그는 2005년 크리스마스에 사랑을 고백했고 연애 1년만인 200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결혼식을 올려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예술인의 결합은 어떤 걸작품을 남길 것인가. 그들은 그 ‘첫 작품’으로 이제 곧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엄마와 아빠가 된다. 얼마나 기쁘면 둘 다 제작중이던 작품들을 모두 중단했을까. 아마도 엄마를 닮은 딸일 것이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불혹을 훌쩍 넘은 나이에 낳는 첫둥이이자 늦둥이이니 왜 아니겠는가. 헌칠한 키와 서글서글한 말투, 털털한 옷매무새, 넙죽넙죽 받는 소줏잔 사이에서 그와 나눈 몇 마디는 전라인(全羅人)의 영원한 DNA를 확인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먼저 인문계고교를 졸업하고 영화감독이 될 생각을 했을까가 궁금했다. 중학교때부터 그림공부를 제대로 해 화가가 되려고 했다. 미술부에서 활동했다. 고교때에는 이과였으나 재수하여 대학에 입학하면서 문과(영문학)로 전공을 바꿨다. 어릴 적부터 상상력과 창의력을 동원해 혼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아마도 종합예술인 영화감독은 그때부터 싹수가 있었던 듯하다. 가정적인 사유로 국방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4학년때 영화동아리 ‘영상촌’에 기적적(?)으로 가입, 취미를 특기로 하려고 몸부림쳤다. 졸업하고도 1년여 재수 끝에 들어간 게 ‘한국영화아카데미’(11기), 본격적으로 영화공부에 나섰다. 이윽고 취미는 특기가 되고, 특기는 평생직업이 되었다. 그곳에서 봉준호를 만났다. 영화감독의 길이 적성에 딱 들어맞는 것을 발견하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Go go 행진을 계속, 오늘의 그가 있다.
일은 일단 재밌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얼마든지 몇 날 며칠밤을 새서 해도 질리지 않는 법.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방식’을 고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세계시장 진출의 길도 많이 넓어진 셈이다. 실력만 있다면 그라고 ‘임권택감독’이 못되란 법이 있는가. 그는 오늘도 갈고 닦는다. 쫓아오는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도 첨단 제작기술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수입은 들쭉날쭉, 가장(家長) 체면이 말이 아닐 때가 많아도 제 멋에 산다는 게 어디인가. 뮤직 비디오를 간간이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좋아하는 해외 감독은 우디 알렌.
송천동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캐치프레이즈 ‘전라인이여, 조국을 품고 세계를 보라’가 인상깊게 떠오른다는 장감독. 불규칙한 작업시간 등으로 고교시절 친구들을 자주 만나 대포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면서도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역시 모교의 캐치프레이즈 ‘조국을 품고 세계를 보라’라고 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스티븐 스필버그같은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거듭나기를 축원한다. 한국영화의 창창한 미래를 그의 메가폰에 맡겨보자. 또한 고대하던 아기의 탄생과 아기엄마의 건강한 순산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