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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계획은 '중산리 버스정류장 → 칼바위(1.5km) → 로터리 대피소(2.1km) → 천왕봉(2km) → 제석봉 → 장터목(1.7km) → 연하봉 → 촛대봉(3.4km) → 세석평전(0.5km) → 영신봉 → 칠선봉 → 덕평봉 → 벽소령 대피소(1박/예매)(6.3km) → 형제봉 → 삼각고지(2.9km) → 연하천 대피소(0.7km) → 토끼봉(2.9km) → 화개재(1.2km) → 삼도봉(0.8km) → 반야봉 삼거리(2km) → 반야봉(0.8km) → 노루목(1km) → 피아골 삼거리(2km) → 피아골 대피소(2km) → 남매 폭포 → 삼흥소→ 통일소 → 표고막터(3km) → 직전 마을(1km)' 구간을 1일 차 17.5km, 2일 차 20.31km, 총 37.8km를 종주할 예정이었다. 다만, 상황을 봐서 반야봉에서 달궁 쪽으로 하산하거나 화개재에서 뱀사골을 거쳐 반선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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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높이: 1,915m
위치: 전남 구례군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된 지리산은 한국 8경의 하나이고 5대 명산 중 하나로, 웅장하고 경치가 뛰어나다. 그 범위가 3도 5개 군 15개 면에 걸쳐 있으며 4백 84㎢ (1억3천만 평)으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남한 제2의 고봉 천왕봉(1,915m), 노고단(1,507m)으로 이어지는 1백 리 능선에 주 능선에 만도 반야봉(1,751m), 토끼봉 등 고산 준봉이 10여 개나 있으며,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있다. 정상에서 남원, 진주, 곡성, 구례, 함양 고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 능선을 중심으로 해서 각각 남북으로 큰 강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나는 낙동강지류인 남강의 상류로서 함양 산청을 거쳐 흐르고 또 하나는 멀리 마이산과 봉황산으로부터 흘러온 섬진강이다.
이들 강으로 흘러드는 개천인 화개천, 연곡천, 동천, 경호강, 덕천강 등 10여 개의 하천이 있으며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치로 "지리산 12동천"을 이루고 있다.
청학, 화개, 덕산, 악양, 마천, 백무, 칠선동과 피아골, 밤밭골, 들돋골, 뱀사골, 연곡골의 12동천은 수 없는 아름답고 검푸른 담과 소, 비폭을 간직한 채 지리산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이들은 또한 숱한 정담과 애환까지 안은 채 또 다른 골을 이루고 있는데 73개의 골, 혹은 99개의 골이라 할 정도의 무궁무진한 골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 비경 중 10경은 노고 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 낙조, 벽소령 명월, 세석 철쭉, 불일 폭포, 연하 선경, 천왕 일출, 칠선 계곡, 섬진 청류로 비경을 이룬다.
지리산은 사계절 산행지로 봄이면 세석 및 바래봉의 철쭉, 화개장에서 쌍계사까지의 터널을 이루는 벚꽃, 여름이면 싱그러운 신록, 폭포, 계곡, 가을이면 피아골 계곡 3km에 이르는 단풍과 만복대 등산길의 억새, 겨울의 설경 등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인기 명산[1위]
3도 5개 군에 걸쳐 있는 광활한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은 산세가 수려한 명산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품속처럼 푸근한 산이라 한다. 사계절 두루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 한국의 산하 연간 접속 횟수가 28만으로 2위인 설악산 13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7~8월 여름휴가를 이용한 여름 산행지로 가장 인기 있다. 여름의 시원하고 수려한 계곡과 산에서 2박 3일이 소요되는 지리산 종주 산행이 보편화하면서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찾는다. 또한 지리산은 피아골과 뱀사골의 단풍이 아름다운 단풍 명산으로 10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 단풍산행으로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 - 한국의 산하
11월 초 남은 2019년 산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그 시점까지 다녀온 산을 확인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총 52회 산행 중 설악산은 11회 다녀왔고, 그중 2번은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다. 반면, 지리산은 6월에 왕시루봉[산행기]을 다녀온 게 다였다. 2018년에는 설악산 7회, 지리산 5회였다[2018년 산행 정리]. 그중 두 번 천왕봉에 올랐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연례행사처럼 된 지리산 천왕봉 등정을 2019년에는 아직이다. 그렇다면, 갔다 와야지! 이미 시기적으로 늦었지만, 그나마 가장 좋은 날은 작년과 같은 2019년 마지막 토요일인데, 마침 올해 마지막 토요일이 4번째 토요일이라 등산방 정기산행 일과 겹쳐 그 한 주전인 삼 주차 토요일에 1박 2일 지리산 종주를 하기로 했다.
매번 비슷한 산행만 하면 지겨울 수 있으니, 이번 산행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코스로 지리산을 종주해 볼까도 생각 중이다. 소위 얘기하는 무박 산행으로 금요일 남부터미널에서 심야버스로 중산리로 가 3시경부터 산행을 시작해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장터목, 세석평전을 거쳐 벽소령에서 1박! 벽소령에서 지리 10경 중 하나인 벽소 명월을 감상할 생각이다. 문제는 그날이 그믐 즈음이라는 거지만. 그리고 다음 날인 일요일 벽소령을 떠나 반야봉을 거쳐 피아골로 하산해 귀경할 생각이다. 이게 원안이고 상황에 따라 반야에서 달궁 쪽으로 또는 화개재에서 뱀사골을 따라 반선으로 하산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중산리에서 피아골까지의 구간에 지리 10경 중 주 능선을 따라 천왕 일출, 연하 선경, 세석 철쭉, 벽소 명월, 반야 낙조, 피아 단풍, 섬진 청류 순으로 7개를 감상할 기회가 있다. 그중 몇 가지는 그곳에 간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계절이 맞아떨어져야 감상이 가능하다. 해서 지리 10경을 다 구경한 산꾼이 드물다. 어쨌든 이번 산행에서 이중 천왕 일출과 연하 선경, 벽소 명월, 섬진 청류 4개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더 크게 기대하고 있는 건 눈꽃과 심설이다. 그러려면 눈이 좀 내려줘야 하는데 일기예보는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단독 산행에 2박 2일 산행이나 다름없어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총 6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첫날 아침은 다른 산행과 같이 로터리 대피소에서 누룽지를 끓여 먹고, 점심은 세석 대피소에서 라면으로, 저녁은 다음날 산행을 위해 숙소인 벽소령 대피소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예정이다. 2일 차 아침은 미역국으로 해장하고 점심으로 뭘 먹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저녁은 구례나 남원에서! 고로 배낭에는 만약에 대비한 옷가지와 비상식, 그리고 5끼의 식량을 가져간다. 물론 대피소에서 구할 수 있는 거는 대피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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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술자리 유혹을 뿌리치고 집에서 간단하게 반주 한잔 후 조니 워커는 술병에 빨갱이 500mL는 물통에 담는 걸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22시 20분 집을 나서 23시 20분에 중산리 출발지인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다. 참고로 남부터미널발 중산리행 버스는 매주 금, 토 23시 30분 딱 두 대가 있다. 이미 중산리행 버스 앞에는 등산객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런데 버스 좌석 판매 현황은 총 28석의 좌석 중 6자리 빈 22석을 채웠다. 예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최소 2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인데, 이날은 의외로 6자리나 비었다. 무리한 무박 산행이 많이 줄어든 거 같기도 하고, 등산 인구가 준다는 말이 맞는 거 같기도. 그런데 설악산 주요 대피소는 예약을 시작하자마자 토요일 예약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대피소는 다 여유가 있었던 걸 봐서는 원거리 산행을 기피하는 성향도 한몫하는 거 같다.
23시 25분에 배낭을 짐칸에 넣고 버스에 탄 후 잠을 청했다. 중간중간 차가 정차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무시하고 잠을 잤다. 그리고 버스가 주차하는 기분에 눈을 뜨고 밖을 보니 중산리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 시각이 3시 1분이었다. 중산리 버스 정류장과 산행이 시작되는 중산리 야영장까지는 대략 500여 미터 거리가 있어 아스팔트를 따라 갈림길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 길목에 있는 탐방 안내소에는 버스 한 대가 차단막이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에 '경상남도 환경교육원'행 셔틀은 아닐 테고 어떤 버스인지 전면으로 돌아가 보니 "대간 23차"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백두대간 참 편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내가 볼일을 보고 나올 때까지 그 버스는 계속 차단목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산행 시작 시각이 4시부터라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갈림길을 향해 갔다.
차편으로 '경상남도 환경교육원'까지 가면 로터리 산장까지 아주 쉽게 갈 수 있다. 국립공원이 만들어 배포하고 있는 '지리산 - 안내도'의 난이도에 따르면, 갈림길에서 칼바위까지 1.3km는 보통, 칼바위에서 로타리 대피소까지의 2.1km는 어려움, 교육원에서 로타리 대피소까지의 2.8km는 보통이라고 되어있다. 해서 많은 법계사 불자를 비롯한 등산객이 교육원까지의 셔틀을 이용하는 듯했다. 그 셔틀에 대해 궁금해서 찾아보니, 예상을 깨고 교육원에서 운영하는 게 아니라 법계사에서 불자 용으로 사서 운영하는 거였다. 불자 용을 등산객이 이용하는 거! 법계사 셔틀이야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협조를 받아 운영하는 거고[불교신문 ], 산악회 버스가 교육원까지 갈 수 있나? 어떤 안내 산악회도 "교육원"에서 지리산행을 시작하는 걸 못 봤는데?!
산행기를 쓰며 법계사 셔틀에 대해 알아보다가 당시 산행 중 품었던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칼바위를 지나 망바위를 향해 가는데 밑에서 뛰어 올라오는 등산객 서너 명에 놀랐었다. 나와 같이 버스를 타고 온 등산객은 아니고, 가벼워 보이는 배낭 뒤에 달린 리본을 보니 "대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럼 그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일 텐데 왜 이리로 올라오는지 궁금했었다. 당시에는 대간 종주를 제대로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보니 4시까지 공원 직원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버스 통과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해 그때부터 산행을 시작했다면 모든 정황이 들어맞는다! 뛰어 올라온 이유는 천왕 일출을 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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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42분에 야영장 갈림길에 도착해 본격적인 천왕봉 일출을 보기 위한 산행이자, 2019년 처음이자 마지막 지리산 종주 산행을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 방향은 20세기에는 백무동에서 오르던, 추성리에서 오르던 천왕봉에서 노고단을 향해 갔고, 21세기에는 노고단에서 시작해 천왕봉으로 갔다. 물론 21세기 종주 때는 성삼재까지 차량을 이용했고. 중산리에서 시작해 천왕봉에 올라 노고단을 향하는 종주는 20세기와 21세기 통틀어 처음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피아골로 하산하지 않고 처음으로 달궁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꾼들만 안다는 이끼 계곡과 묘향암이 반야봉 건너 중봉 뒤편에 있는 거로 알고 있었다. 고로 주 능선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해서 금요일 집을 떠나며, 피아골로 하산하는 원안을 버리고, 비법정이지만, 묘향암을 지나 이끼 계곡으로 하산해 달궁에서 귀경할 계획이었다. 물론 이끼 폭포도 보고!
그믐이 가까워 칠흑 같은 암흑 속에 랜턴에 의지해 로타리 대피소를 향해 걷기 시작해 4시 11분에 칼바위를 통과했다. 매번 중산리 산행은 새벽에 시작해 어둠 속에서 칼바위를 그냥 지나쳐 지도를 보며 산행을 복기할 때마다 내가 칼바위 코스를 갔던 게 맞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칼바위를 확인했다. 그리고 매번 정확한 코스로 갔지만, 어두워 확인을 못 했었다. 결과적으로 단독 산행이라 그런지 이번 산행은 여유가 있어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많은 걸 보거나 확인한 산행이었다. 4시 52분에 망 바위에 도착해 이번 코스에서 두 번째로 힘들다는 로타리 대피소까지의 1km 산행을 시작했다. 첫 번째는 로타리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의 2km 구간! 그런데 망 바위를 지나자 차고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해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5시 23분에 로타리 대피소에 도착했으니, 1km 구간에 31분이 걸렸다. 시속 2km가 조금 안 되는 속도다. 어려운 구간치고는 빠른가? 지리산에는 물이 풍부해 겨울에 따듯한 차를 제외하고는 따로 물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고로 아침으로 누룽지를 끓여 먹으려면 물이 필요해 대피소 20여 미터 위에 있는 식수 장으로 바로 갔다. 그런데 그동안 가물었고, 날이 추워 물의 흔적은, 얇은 얼음만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식수는 법계사 내의 식수 장에서 받아 가라는 안내판이 서있었다. 해서 내 생애 처음으로 일주문을 지나 법계사 경내로 들어갔다. 다른 때는 일주문 앞을 지나 천왕봉으로 바로 올라갔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시간에 쫓겼고, 경내에 들어간다 해도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수가 법계사 꼭대기에 있다. 물을 얻으러 위로 오를수록 대피소에 들러 배낭을 벗어 두지 않고 온 걸 후회했다. 5시 30분에 법계사 식수에 도착했으니 대략 7분 정도 등산했다. 물병에 식수를 담은 후 대피소로 돌아가서 실내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취사장은 바람을 막아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실내에 있는 대피소 취사장의 문제가 앉을 수 없다는 거다. 서서 조리하고 먹어야 하는 시스템이라 많이 불편해 날씨가 좋지 않거나 춥지 않으면 실내 취사장을 이용하지 않는데, 차가운 바람이 불어 밖에는 1초도 서 있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배낭에서 디팩 두 개를 꺼내 버너와 가스를 연결 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먼저 소시지를 구워다. 그리고 누룽지를 끓인 후 조니 워커를 반주로 아침을 먹었다.
당일 일출 시각이 7시 35분이고 천왕봉까지 남은 거리 2km, 올라야 하는 해발은 465m! 그럼 로타리 대피소에서 최소 6시에는 출발해야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지리 10경 중 1경으로 꼽히는 천왕 일출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해 로타리 대피소를 출발한 시각은 6시 12분경이다. 그리고 6시 45분에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미 랜턴은 휴게소 도착하기 전에 꺼서 배낭에 넣었다. 휴게소를 지나쳐 조금 더 지나가자 아래로 마을이 보이고 저 멀리 남해에서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천왕봉까지 800m가 남은 개선문에 7시 1분에 도착했다. 그 800m를 30분 안에 가야 한다. 그런데 몇 번 다녀봐서 익히 알지만, 쉽지 않은 코스다.
7시 22분 천왕봉에 오르는 마지막 휴게소에 도착했다. 나에 앞서가던 등산객은 그 자리에 짐을 풀고 일출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기상 상태로 봐선 오늘 일출은 틀렸다는 게 내 판단이다. 해서 천왕이든 어디든 일출을 볼 수 없다면, 굳이 서둘러 올라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 중 하나가 아직 일출 시각 이전임에도 천왕봉에서 많은 등산객이 중산리 쪽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해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여유롭게 올라갔다. 무엇보다 새로 산 배낭이 몸에 맞지 않아서인지 배낭이 주는 무게가 부담스러웠다. 해서 천왕샘을 지나 천왕봉을 오르는 마지막 데크에서는 5계단 오르고 한번 쉬며 올라야 했다. 사실 빨리 올라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아침은 먹었고, 점심은 세석에서 먹을 예정이라, 12시까지 도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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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올라 일출 시각이 한참 지난 7시 43분에 천왕봉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많은 등산객이 하산했음에도 천왕봉에는 20여 명의 등산객이 인증을 찍고 있었다. 달리 지리산 상봉 천왕봉이 아니다. 천왕에 도착하기 전까지 바람도 강하지 않고 춥지도 않아 천왕봉이 웬일로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천왕봉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등산객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듣고 현실을 파악했다. 대화의 핵심은 정상은 강한 바람에 지옥인데, 바로 밑은 바람도 없고 따뜻한 게 천국이라는 거였다. 역시 예상대로 천왕봉은 배신하지 않았다.
추위에 대비해 모자를 눌러 써 귀를 보호하며 바위를 기어올라 정상에 올랐다. 역시 남한 최고의 영산 지리산 상봉답게 서 있기도 힘들게 강한 바람이 불었다. 모자를 눌러 쓰지 않았다면 설악산의 귀때기청봉과 같은 귀때기천왕봉이라 불러도 좋을, 귀가 떨어져 나갈 듯했다. 뭐 매번 겨울 지리산에서 느끼는 거지만! 오래 버티며 주변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일출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상이 나빠 조망이 좋지 않았고, 강한 바람에 기온도 낮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가져간 삼각대를 펴봐야 바람에 넘어질 거 같았고, 더 큰 문제는 삼각대를 설치하는 동안 동사할 거 같았다. 해서 정상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동행의 사진을 찍어 주던 등산객에게 부탁해 인증을 찍었다.
아무리 추워도 그냥 갈 수는 없어 제석봉, 저 멀리 반야봉과 주 능선 반대편의 산세도 사진으로 남기고 7시 55분에 천왕봉을 떠나 제석봉으로 향했다. 그런데 올라왔던 동남향의 중산리 쪽과는 다르게 북서향인 반대편 주 능선 쪽은 쌓인 눈이 보이고, 길은 얼어 아이젠 없이 가기가 힘들었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지옥과 천국이라고 얘기했던 등산객이 아이젠을 착용하고 있어 뭔 오버인가 생각했었는데, 당연한 거였다. 8시 7분에 통천문을 통과해 이정표 있는 쪽으로 내려가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철봉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가야 했다. 사실 천왕봉에서는 이 구간이 가장 위험하다.
8시 29분에 제석봉에 도착했고, 8시 43분에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배낭의 정비가 필요하고 따뜻한 물 한잔하기 위해 실내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취사장에는 중산리 쪽에서 올라왔거나, 일출을 보기 위해 천왕봉을 다녀온 예닐곱 명의 등산객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배낭에 든 짐을 꺼내 다시 정리하고 보온병에 넣어 온 뜨거운 우렁차로 몸을 녹였다. 9시경 장터목을 떠나 세석을 향해 갔다. 거리상으로는 3.4km, 세석 대피소에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먹기로 했으니, 시간 낭비를 없애려면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게 중요하다. 평소 내 점심시간이 11시 30분이니 2시간 30분 동안 3.4km를 가면 된다. 내게는 불가능한 도전이지만! 사실 세석이 아니면 점심을 먹을 만한 곳도 없다. 등산로 상에서 취사하는 건 불법이고, 불법이 아니라고 해도 이 추위에 바람 막을 곳 하나 없는 곳에 뭘 끓여 먹는다는 것도 미친 짓이고.
9시 27분 지리 10경 중 하나인 연하 선경의 연하봉에 도착했다. 세석까지 남은 거리는 2.6km 너무 빠르다! 장터목에서 세석까지는 마지막 촛대봉 오를 때를 빼면 힘들게 느껴지는 구간이 없다. 공원에서 만든 안내도에는 난이도를 "보통"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지도에는 2시간 거리로 기록되어 있다. 해서 저 멀리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사량도도 구경하고 금산도 찾아보며 천천히 세석을 향해 갔다. 그리고 10시 28분에 이 코스에서 가장 힘든 촛대봉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촛대봉을 지나가는 길! 급한 것도 없고 해서 배낭을 벗어 바위 위에 올려두고 카메라만 들고 촛대봉으로 갔다.
허용된 지역까지 촛대봉에 올랐지만, 하동을 통과하는 섬진강이 보고 싶어 목책을 넘어 촛대봉 끝까지 갔다. 강한 바람에 몸이 흔들리는 가운데 주변 산세를 구경하고 섬진강과 남해도 조망한 후 사진으로 남겼다. 마지막으로 세석평전과 대피소를 찍고 10시 35분에 그 바위 봉우리를 떠나 배낭이 있는 정규 등산로로 돌아왔다. 등산로로 돌아와 배낭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보니 새 세 마리가 길에서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었다. 그놈들이 놀라 도망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배낭 있는 곳으로 가 배낭을 다시 멨다. 기념으로 새도 몇 장 찍고 점심 식당이 있는 세석으로 내려갔다.
촛대봉에서 대피소 쪽으로 내려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습지 위에 새롭게 만든 데크다. 어떻게 된 게 저 습지 데크는 해마다 공사를 하는 거 같다. 내가 본 바로는! 돈이 남아돌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리고 보니 길도 다시 정비했다. 벽소령, 백무동, 청학동 갈림길에 도착해 대피소를 향해 가는데, 등산객 3명이 대피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며 대피소에 도착한 시각이 10시 56분이다. 아침을 6시가 좀 못 된 시각에 먹기는 했지만, 점심시간으로는 좀 빠르다. 그렇다고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2 – 4
그렇다고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텅 빈 취사장에 배낭을 벗어 두고 물통을 들고 식수 장으로 갔다. 당연히 가뭄과 강추위로 정규 식수 장은 사용이 불가능했고 그 아래에 있는 임시 식수 장을 사용해야 했다. 아래 임시 식수 장을 이용하라는 안내 입간판에는 벽소령 대피소 식수가 얼어 사용이 불가능하니 대비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 사실은 이미 등산 전에 공원 홈페이지와 로타리, 장터목 대피소에서 확인한 사항이다. 물론 대피소에서 생수를 파니 필요하면 그걸 사면되기도 한다. 나야 들고 내려가야 할 쓰레기가 늘어 생수 사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만. 그리고 내 계획상으로는 벽소령에서는 마실 물 외에 조리용 물은 필요가 없었다. 저녁에 국물이 있는 걸 먹을 것도 아니고, 아침은 미역국을 끓여 먹을 생각이기는 하지만, 벽소령이 아닌 연하천에서 먹을 예정이라!
물통을 들고 터덜터덜 청학 연못이 수원이라고 생각되는 임시 식수 장으로 내려갔다. 역시 물은 잘 나오고 있었지만, 다른 때에 비해서는 수량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겨울이라고 눈도 안 오고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한 거 같다. 라면 하나 끓일 물만 있으면 되니 500mL의 물만 있으면 되지만, 혹시 몰라 700 정도의 물을 받아 취사장으로 돌아갔다. 내가 물을 받으러 다녀온 사이에 취사장에는 등산객이 늘어 7~8 명의 등산객이 끼리끼리 모여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취사장에 나 혼자밖에 없을 때 가장 으슥한 사각지대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두고 물을 뜨러 갔었기 때문에 그 자리로 돌아가 라면 끓일 준비를 했다. 물의 양이 구분되지 않아 코펠에 물을 붓다 보니 대략 600 정도를 부은 거 같다. 물이 끓는 동안 가져간 햄을 잘라, 대부분은 라면에 넣고 몇 개는 남겨 안주 삼아 물통에 들어 있던 빨갱이를 마셨다. 물론 운봉표 안주와 김치도 곁들여. 다 끓은 라면을 안주 삼아 대략 200mL 정도의 빨갱이와 입가심으로 조니 워커를 마신 후 대피소 매점에서 사 온 햇반 반 개를 라면 국물에 말아 먹는 거로 점심을 마쳤다. 아, 입가심으로 귤도 안주 삼아 하나 먹었다!
1시간 이상 세석에서 점심 먹으며 노닥거리다가 12시 14분에 세석을 떠나 오늘의 숙소인 벽소령을 향해 출발했다. 12시 31분에 낙남정맥의 기점인 영신봉에 도착했다. 낙남정맥 기점인 영신봉에서 음양수까지는 비법정 탐방로라 대부분 등산객은 세석에서 음양수까지 간 이후 능선을 타고 삼신산(삼신봉)을 거쳐 낙남정맥 종주에 나선다. 작년 여름 등산방도 단합대회를 겸해 1박 2일 천왕봉에서 삼신봉까지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13명이 산행을 했었다[산행기]. 당시만 해도 낙남정맥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어쨌든 낙남정맥의 종주 시작은 했다. 작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하며 속도를 조절하며 벽소령을 향해 갔다. 대피소 입실 시간이 16시라 일찍 도착하면 추위에 떨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런데 세석에서 벽소령까지 6.3km 별짓을 다 하고 가도 3시경이면 도착이라 고민이 많았다. 처음 산행 계획을 세울 때 연하천 대피소와 벽소령 대피소 중에 어디를 숙소로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기대하는 만큼 눈이 내려 준다면 당일에 연하천까지는 무리라는 생각에 벽소령을 택했다. 그런데 눈이 내리지 않아 속도가 줄지 않고 힘도 특별히 더 들일이 없어 시간과 체력이 남아도는 상황이 된 거다.
최대한 이것저것 둘러보면 벽소령을 향해 갔다. 그렇다고 경치가 한순간에 바뀌는 게 아니니 찍을 풍경도 다 그게 그거고, 날도 흐려 전망도 좋지 않았다. 길목에 있는 바위든 뭐든 모든 봉우리에 올라가 보기도 하며 길을 가 2시 15분에 선비샘에 도착했다. 일단 시원한 물맛을 본 이후, 물은 딱히 필요 없었지만, 만일이라는 게 있어, 800mL 정도를 물통에 담았다. 물통에 배낭에 걸고 다시 길을 가 2시 29분에 벽소령 대피소가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벽소령을 향하는 마지막 고비 덕평봉에 올랐다가 저 밑으로 보이는 도로를 향해 내려가 과거 M60 트럭이 다니던 길에 도착했다. 과거에는 여기까지 군용 트럭이 올라와 훈련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압 훈련이었을 듯.
군용으로 무식하게 바위 봉우리를 깎아 만든 도로가 대략 1km 정도 뻗어 있다. 물론 현재는 도로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한 쪽이 잘린 바위 봉우리가 수시로 바위 조각을 떨어트려 지리산 주 능선 위에서 제일 위험한 곳이다. 해서 곳곳에 방송과 경고문으로 빨리 통과하라고 재촉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길 자체는 도심의 산책로 수준이라 쉽게 통과할 수 있다. 우측으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바위 조각을 구경하며 길을 가 3시 14분에 오늘의 숙소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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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춥고 입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고, 주변에 인적이라고는 나와 같이 도착한 2명이 다였다. 그 2명은 취사장 쪽으로 갔고 나는 일단 대피소 건물로 들어가 개겨보기로 했다. 현관으로 들어가 접수대로 가자 직원 한 명이 빤히 쳐다보기에 같이 쳐다봐줬다. 대략 한 30초 동안 접수대 창을 사이에 두고 눈싸움을 했나? 그러자, 직원이 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로비? 대청? 에서 입실 시간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등산화를 벗어 신발장에 넣고 안으로 들어가자 나보다 앞서 도착한 십여 명의 등산객이 바닥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물론 난방하지는 않았지만, 건물 밖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입실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팀장인 듯한 직원이 나와 날도 춥고 하니, 입실 시간을 당기겠다고 했다. 해서 취사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등산객도 다 불러 화재에 대비한 대피 훈련 후 각자 신분증을 제출하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담요를 빌려야 해 세 장을 달라고 했더니, 인당 두 장만 가능하다고. 다른 대피소는 아닌데?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이 침낭과 매트를 가지고 다니는 거에 놀랐다. 위생상의 이유 때문인 거 같은데.
모포 두 장을 가지고 배정된 자리로 가서 보니, 방 제일 끝 제일 좋은 자리였다. 혼자 왔고, 나이도 있어서 대접해주는 거 같았다. 벽소령 대피소는 내 기억이 맞는다면 1974년 처음 지리산 2박 3일 산행 시 2일 차 저녁을 보냈던 곳이다. 당시에는 대피소가 아니라 산장이었다. 당시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지만, 얼마 전에 리모델링한다고 잠시 문을 닫았었는데, 그 결과 다른 대피소와 비교해 봐도 많이 좋아졌다. 2층 구조는 다른 곳과 같았는데, 자리가 서로 다닥다닥 붙은 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둬 그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서로 부딪힐 일 없고 빈 곳은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2층도 아래에서 올라오는 계단 때문에 동일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당연히 한 사람이 잘 수 있는 자리가 없어졌다. 아래층이 18자리니, 대략 8명 2층이니까 16명이 더 잘 수 있는 자리를 없애고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대기하던 로비와는 달리 숙소는 열기로 얼굴이 후끈거렸다. 차가운 산행을 3시부터 15시까지 했으니, 12시간을 찬 바람을 맞고 다닌 후 뜨거운 방에 들어와서 그런지 온몸이 더워지며 피로가 몰려왔다. 어차피 저녁은 5시 이후에 먹을 예정이고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전자기기는 모두 충전 시킨 후, 자리를 펴고 누워 잠을 청했다. 대략 1시간 정도 낮잠을 잔 후인 5시 10분경 일어나, 디팩 두 개와 과일 봉투를 들고 취사장으로 갔다. 당연히 빨갱이가 든 물통은 손에 들고 위스키가 든 술병은 보이지 않게 뒷주머니에 넣고.
취사장에 들어가서야 의자를 가져오지 않을 걸 후회했다. 그리고 CCTV가 취사장 내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밥도 감시 받으며 먹는 세상이다. 해서 밖에서 자리 잡고 앉아 먹을까 하는 생각에 나가서 외부의 취사장을 살펴봤으나, 이 추위에 밖에서 뭘 먹는다는 건 미친 짓이란 결론을 내리고 다시 실내 취사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CCTV의 위치를 파악한 후 그 사각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물통에 든 빨갱이를 잔에 부어 홀짝홀짝하는 건 누가 봐도 뭘 하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라 고민하다가, 밥을 다 먹고 한 번에 마셔버리기로 했다. 마치 식사 후 물을 마시듯! 삼겹살을 구워 세석에서 다 먹지 않고 가져온 햇반 반 개와 먹는데 알코올로 목을 축이지 않으니 넘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밥을 먹고 1/5 정도는 남긴 다음 잔에 따른 빨갱이 200mL를 물을 마시듯 들이켰다. 목이 타고 속이 타 뭔가 안주가 있어야 할 거 같아 사과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100mL도 사과 안주로 마셔 버렸다. 입가심으로 위스키를 잔에 따랐는데, 빨갱이와 달리 향기가 강해 바로 마셔야 했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는 모든 흔적을 말끔히 치우고 벽소 명월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지리 10경중 하나인 벽소 명월을 볼 수 있을까 아주 작은 기대도 있었지만, 별도 보이지 않는 날씨라 그나마 초승달도 보이지 않았다. 해서 다 포기하고 숙소로 바로 갔다. 동절기 대피소 취침 시간이 20시고 내가 숙소로 돌아간 시간이 7시 10분경이라 침상에 누워 패드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차량으로 이동 시 사용하기 위해 가져온 패드가 대피소에서도 쓸모가 있었다. 8시 소등과 함께 다 취침 모드로 돌입해 나도 겉옷을 다 벗고 속옷 차림으로 담요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간혹 더워서 뒤척이기는 했지만,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3시경 시끄러워서 잠이 깼는데, 피곤한 등산객의 코 고는 소리, 벌써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는 등산객의 짐 싸는 소리 등으로 잠자기가 쉽지 않았다. 비몽사몽 시달리다가 4시경 일단 출발할 등산객은 다 갔는지 코 고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음이 없어 알람을 5시 30분에 맞추고 다시 잠을 청해 벽소령 취침 시간 중 가장 꿀 같은 잠을 자고 알람에 기상했다. 아, 알람이 다른 게 아니라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 워치라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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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30분에 알람을 맞춘 이유는 아침을 연하천 대피소에서 먹기로 했고, 대피소 매점이 7시 30분에 열어 그 시각에 맞추기 위함이다. 옷을 차려입고 아침 행사를 마친 후 다시 배낭을 싸 들고 숙소를 나올 때 침상에서 자는 등산객은 5명에 불과했다. 그사이에 다 떠났거나 취사장에서 아침을 먹고 있다는 얘기다. 뭐 그래 봐야 벽소령 대피소에서 잔 등산객이 총 3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5시 54분 벽소령에서 3.6km 떨어진 연하천을 향해 어둠을 뚫고 출발했다. 당연히 아침은 연하천 도착해서 먹기로 하고. 대피소에서 햇반을 사서 미역국과 같이 해장할 생각이다.
6시가 넘었음에도 랜턴 없이는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고로 주변을 둘러봐야 보이는 것도 없고, 앞만 보고 묵묵히 걸어야 했다. 그나마 우로 음정 마을의 불빛이 보이는 정도. 앞이나 뒤나 어디에서도 불빛이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서 이 구간에서 움직이는 건 내가 유일한 거 같았다. 한눈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묵묵히 앞만 보고 가다가 길이 꺾이는 부분에 도착했는데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바라보는 곳만 비추는 헤드랜턴 덕에 보고 싶은 곳만 보이는 상황. 길을 찾지 못해 잠깐 당황하다가 머리를 들어 나뭇가지를 살펴봤다. 혹시 리본이 있을까 해서 그런데 전혀 없었다. 다른 곳이라면 수십 개는 달려있을 만한 장소에. 그래서 생각해보니 이번 산행에서 리본을 못 봤다. 공원에서 다 철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길을 찾아 연하천을 향해 갔다.
7시가 지나자 주변이 밝아오며 랜턴 없이도 산행이 가능해졌다. 밝아오는 길을 따라 연하천을 향해 가 7시 17분에 음정 마을 갈림길인 삼각고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삼각고지를 지나 10여 분 가니 나무에 매달린 붉은 리본이 보였다. 아니, 저건 왜 철거를 안 했지 생각하며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공원에서 이정표를 대신해 단 거였다. 괜찮은 방법이다. 중구난방의 산악회 리본은 없애고 대신 길이 혼란스러운 곳은 이정표를 설치하고 이정표 설치가 어려운 지역은 공원에서 리본을 다는 거. 리본을 달기만 한 게 아니라 이정표처럼 나무에 감은 것도 있었다.
7시 31분 절묘하게 시간을 맞춰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벽소령에서 연하천까지 오며 아침 식사 메뉴를 바꿨다. 햇반과 미역국에서 금요일 산행 준비를 위해 편의점에서 산 닭죽으로, 산행 시 한 끼 식사로 충분한지 궁금해 비상용으로 샀던 거다. 그걸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고로 대피소 매점 오픈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 세 끼를 다 서서 먹었더니 2일 차 아침마저 서서 먹기 싫어 좀 추웠지만, 외부 취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코펠에 연하천 물을 받고, 닭죽을 넣은 다음, 버너에 불을 붙였다. 끓는 물에 10분간 중탕하라고 했으니, 그동안 연하천 대피소 주변을 돌아다니며 뭐가 바뀌었는지 구경했다.
와중에 내 눈에 띈 지도! 그 지도에 의하면 중봉에서 달궁으로 가는 6.5km의 길이 있었다. 이미 그 길은 지난 밤 숙소였던 벽소령 대피소에 설치된 지도로 확인했었다. 산행 중 하산 코스로 70% 이상 묘향암에서 이끼 계곡으로 하산해 달궁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연하천에서 그 지도를 보고 나서는 100%로 굳혔다. 다만 길의 상태를 알 수 없어 비상시 쓰려고 배낭에 넣고 다니는 군용 칼을 꺼내 허리에 찼다. 그러는 와중에 중탕한지 10분이 지나 버너의 불을 끄고 코펠에서 닭죽을 꺼내 아침을 먹었다. 맛도 좋고 간편해 산에 들고 다니기에는 괜찮았다.
닭죽으로 아침을 먹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다음 8시 14분경 연하천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반야봉을 향해 갔다. 연하천에서 반야봉 정상까지의 5.9km는 주 능선 종주 코스 중 가장 힘든 구간이다. 공원 기준 난이도 "어려움!" 목표는 12시 이전에 반야봉 정상에 도착하고 반야봉에서 달궁까지가 6.7km 정도 되니 달궁에 15시까지 도착하는 거다. 그리고 백무 출발 4시 동서울행 버스를 타는 게 최종 목표! 점점 가까워지는 반야봉을 향해 가며 힐끗 뒤를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뾰족한 산과 정상이 헐벗은 봉우리가 보였다. 깜짝 놀라 저 봉우리가 뭘까 궁금해하며 길을 가 토끼봉 정상 직전에서 뒤를 돌아보고서야 그게 뭔지 알았다. 천왕봉과 촛대봉이었다. 평소 노고단에서 천왕봉 쪽으로 종주하다 이번에 거꾸로 하다 보니 보이는 게 완전히 달라 모든 게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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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닭"죽"으로 아침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파서 가기가 힘들었다. 죽답게 아침을 먹은 지 불과 2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배가 고파왔다. "죽" 종류는 산에서 식사용으로는 비추다! 이대로는 더 못 갈 상황이라 토끼봉 정상 바위에 앉아 과일과 핫바를 꺼내 배를 채웠다. 간단히 위스키도 한잔하며 사과 하나와 귤 두 개를 먹었다. 그리고 토끼봉 정상 헬기장에서 앞으로 보이는 왕시루봉과 반야봉, 중봉, 노고단을 감상하고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백운산을 사진으로 찍었다. 토끼봉을 떠나 화개재로 내려가는데 전면 중봉 8부 능선 즈음에 노랗게 빛나는 물건에 호기심이 일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노란 걸 처음 본 게 작년이다. 그전에도 이 길로 다녔지만, 작년에 처음 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뭔지 확인하기 위해 카메라의 줌을 이용해 당겨서 보니 지붕이었다. 저 위치에 있을 건물이라고는 암자밖에 없는데, 내가 아는 암자는 없었다. 그리고 저렇게 화려하게 장식한 암자라면 유명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처음 봤으니 작년에 지어진 암자라 생각하고 화개재로 내려갔다.
10시 14분에 화개재에 도착했다. 화개재에서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종주 코스 중 가장 긴 데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200m였나? 1,316m의 화개재에서 1,499m의 삼도봉까지 800m를 32분이 걸려서 올라갔다. 삼도봉에서는 각도 앞이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각각 인증을 찍었다. 그리고 목책으로 금줄을 치고 출입금지라 표시된 곳으로 가 그쪽 능선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뒤편의 천왕봉과 주 능선을 찍기 위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찾다가 진정한 삼도봉 정상에 올랐다. 수없이 이 길로 다니고 사진을 찍었지만, 삼도봉 정상에 오른 건 처음이다. 혼자 여유롭게 다닌 결과다!
삼도봉을 떠나 11시 11분에 노루목, 반야봉 갈림길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갈림길 직전에서 출입금지 팻말이 서 있는 길을 발견했다. 이 길에서 처음 본 거 같은데? 어쨌든 토끼봉에서 화개재로 내려오며 봤던 그 암자로 가는 길로 보였다. 내 예상이 맞아 들어간다. 노란 지붕도 작년에 처음 봤고, 그리고 암자로 가는 길로 보이는 이 길도 이번에 처음 봤으니, 작년에 새로 지은 암자가 맞다! 11시 27분에 평소 같으면 배낭을 두고 반야봉으로 올라가는 노루목, 반야봉 갈림길에 도착했다. 배낭을 두고 올라가는 이유는 다시 이리 내려와야 하므로, 이미 주인 없는 배낭 2개가 주변에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다시 이 길로 내려올 일이 없어 배낭을 지고 계속 올라갔다.
올라가다가 반야봉 직전 우로 전망대로 좋아 보이는 바위가 보여 그 바위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무엇보다 삼도봉의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와 좋았다. 내가 아까 삼도봉에서 봤던 목책으로 출입을 금지했던 능선이 뻗어 나가는 모습이 잘 보였다. 그 우측 능선은 왕시루봉능선, 그 사이 계곡은 피아골! 그 능선을 계속 따라가면 직전마을과 연곡사에 닿는다. 그럼 가야지. 내년 가을 단풍철에 도전하기 위해 구글링을 해보니 내가 본 능선이 그 유명한 불무장등이다. 지리산도 가야 할 곳이 많다. 내년 2020년에는 지리산에 집중해야 할 듯!
불무장등 구경 후 다시 반야봉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데크에 놀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조잡하고 가파른 철제 계단으로 올라가던 암벽에 지그재그로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연히 철제 계단은 철거했고. 참 공사 좋아하는 국립공원이다. 이게 자연 보호에 어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고 그 계단으로 올라 정상을 향해 계속 치고 올라갔다. 반야봉은 이 계단에서부터 정상까지가 가장 힘든 코스로 포기가 속출하는 코스다. 내 목표보다 7분가량 늦은 12시 7분에 반야봉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노년의 두 등산객이 서로 인증을 찍어 주고 있었다. 나도 인증을 찍은 후 그들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며 주변 산세를 다시 한번 조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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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사람이 없고 한 사람의 등산객이 있지만, 목책 뒤에서 밥을 먹고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재빨리 목책을 우회해 중봉을 향해 갔다. 그런데 그 길은 관목으로 가득 차 있어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든 20여 미터의 관목 숲을 기다시피 통과하니 헬기장이 나타났다. 아니 이런 곳에 헬기장이?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대로였다. 한두 명이 다닌 길이 아니다! 길을 따라 계속 가 12시 27분 무덤으로 보이는 게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봉에 도착했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지만, 등산객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지금까지는 잘 보이지 않던 지리산의 중봉이 천왕봉과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정상을 돌아 조금 더 가니 거의 비슷한 높이에 헬기장이 있고 단을 쌓아 만든 무덤이 나타났다. "연안김씨지묘" 어떤 사연이 있는 묘인지 확인하기 위해 비문을 읽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연안김씨지묘만 간신히 읽고 나머지는 희미해서 읽을 수 없었다.
그 연안김씨묘가 있는 정상 헬기장을 기준으로 갈림길이 있다. 정면으로 가면 그 암자로 내려가는 길이고, 좌로 가면 달궁으로 향한다. 그때만 해도 이끼 계곡과 묘향암이 달궁 쪽에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좌로 방향을 잡아갔다. 이름 모를 암자는 다음에 한번 가보기로 하고. 결과적으로 얘기하자면, 그 이름 모를 암자가 묘향암이고 그 밑에 문제의 이끼 계곡이 있다. 고로 이끼 계곡은 뱀사골 지류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냐면, 이끼 계곡이라고 믿고 내려가는 계곡에서 아무리 가도 암자가 나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산행 종료 후 구글링을 통해 확인했다. 내가 방향을 잡은 곳은 봉산골이다. 그리고 난 그 봉산골이 이끼 계곡이라고 믿었다.
12시 31분에 중봉 묘지를 떠나 봉산골을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길은 과거 정규 등산로라 길의 흔적은 뚜렷했지만, 지속적으로 정비하지 않아 위험한 곳이 가끔 있었고,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 곳도 많았다. 그리고 해발 1,700m에서 바로 내리꽂는 산행이라 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정규 등산로답게 위치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벽소령에서 그 설치 현황을 보고 최소한 길을 잃을 염려는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이 코스를 택했다. 중간중간 서 있는 위치표지판과 산악회의 리본을 길잡이로 묘향암과 이끼 계곡을 향해 목표 시간 15시까지 달궁에 도착하기 위해 달렸다. 15시까지를 목표로 한 이유 중 하나는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렇게 달려 1시 23분에 봉산골, 하점골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정표가 있어 갈림길이라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바위 봉우리를 향하는 길과 우회하는 거처럼 보이는 길, 두 개의 길이 보였다. 달려오느라 지쳐 정상을 넘기 싫어 우회로로 보이는 길로 갔다. 당연히 두 길은 만날 거로 생각했는데, 한참 간 후 지도를 확인하니 그 갈림길 지점에서 나뉘었다. 이후 산행이 끝나고 복기하며 확인한 바에 의하면 갈림길 봉우리가 '투구봉'이고 그쪽으로 가야 그나마 과거의 정규 등산로고, 내가 간 쪽은 등산로가 없는 그야말로 숨겨진 계곡이었다. 아는 산꾼만 드물게 다닌다는!
어쨌든 길이 있든 없든 들어왔으니 돌아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고, 계속 길 같은 걸 따라가다 보니 또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것도 산행 후 복기 과정에서 알게 된 거지만, 하점 좌골과 우골로 나뉘는 갈림길이다. 좌골은 바로 내려가고 우골은 봉을 하나 넘어가는 코스다. 당시에 나는 밑으로 보이는 계곡이 당연히 이끼 계곡이라 믿었기 때문에 미련 없이 계곡으로 들어갔다. 눈은 없었지만, 눈보다 더 무서운 낙엽이 세 겹 정도 깔린 급경사의 계곡 길을 내려가다 당연하게 미끄러져 계곡으로 떨어질 뻔했다. 해서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복장부터 배낭까지 모든 걸 재 점검했다.
길을 가다 보니 언제부터인지 너덜을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깨달은 순간 이끼가 잔뜩 낀 너덜 지대였다. 당연히 길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어쨌든 이끼 낀 너덜을 보자 아, 이끼 계곡이구나! 제대로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열심히 구경하며 내려가면 된다! 그런데 간혹 나무에 매달려 있는 리본은, 오지를 다니면 늘 그렇듯이 그곳이 길이라는 게 아니라 내가 이리로 갔다는 표시에 불과하다. 고로 리본도 일반적인 등산로와는 달리 한 곳에 집중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분산되어 달려있다. 뭔 말이냐, 리본을 믿고 그게 길이라고 생각하면 낭패 본다는 거다. 이끼 낀 너덜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 기다란 넝쿨마저 발목이나 배낭을 잡고 매달려 더 위험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연하천에서 준비한 칼을 꺼내 넝쿨을 자르며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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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이리저리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며 내려가 2시 1분에 얼어붙은 폭포를 발견했다. 그 폭포를 보자마자 이끼 폭포라고 외쳤다. 제대로 왔다는 징표였다! 폭포 위에는 산악회에서 단 리본도 있었다. 그 폭포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200여 미터 내려가자 또 폭포가 나타났다. 어느 게 이끼 폭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길조차 없는 비법정 코스에 이정표나 소개 글이 있을 리 만무하고. 내가 보기엔 위의 폭포가 이끼 폭포라 보이지만, 하류 지역에 더 대단한 폭포가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판단할 상황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뛰어다니며 내려가던 중 계곡 옆 나무에 검정 케이블 같은 게 보여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류가 가까워질수록 당연히 있어야 할 묘향암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고 있었다. 만약 그게 케이블이면 묘향암이든 뭐든 상류에 있는 걸 지나쳤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케이블이 아니라 고로수액을 채취하기 위한 작은 구경의 파이프였다. 케이블이 아닌 게 다행이었고, 다른 의미에서 고로쇠 채취용 파이프라는 건 더 다행이었다. 어쨌든 마을 주민이 다니는 구간이고 인간의 세상이 멀지 않다는 거라! 사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많이 지쳐 있었다. 당장 모든 걸 벗어 던지고 알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인간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나는 순간 해야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탁족을 뒤로 미루고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가다 3시 정각에 거의 임도 수준의 길과 만났다. 사실 어느 순간 지쳐 지게 작대기를 만들어 그것에 의지해 내려왔다. 웃기는 게 배낭에 등산용 스틱이 있음에도 급조한 지게 작대기가 더 좋았다. 나는 현대 과학이 만든 등산용 스틱보다는 급조해 만들어진 지게 작대기가 좋다. 길다운 길을 만난 순간 지게 작대기는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무에 기대어 세워두고 탁족 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 내려갔다. 그리고 3시 15분경 좋은 장소를 발견해 자리를 잡고 앉아 탁족 했다. 물론 물에 발을 담근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얼어 죽는 줄 알았다. 탁족 후 다시 복장을 갖추고 길을 가는데 양쪽 발바닥에서 엄청난 열이 났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탁족의 효과라 생각하며 갈 길을 갔다. 그리고 3시 37분에 달궁 야영장에 도착하는 거로 2박 2일의 지리산 종주 산행을 마쳤다.
4
노고단에서 시작한 계곡이 마천 임천강을 지나 진주 남강으로 흐르는 달궁 계곡을 건너 내가 목표한 시간보다 40분 가까이 더 걸려 달궁에 도착했다. 인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계곡을 내려오며 시간 목표를 달성하기는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었다. 4시 차가 아니면 5시 차를 타면 된다. 야영장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상류 쪽으로 식당가가 보여 그쪽으로 올라갔다.
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먹을 만한 걸 주문하려고 메뉴를 보니 다 2인 이상이라 혼자 온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중에 대·중으로 구분된 더덕구이가 있어 이걸 대·중이 아니라 혼자 먹을 수 있는 양만 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알바하는 친구가 주방에 물어보고 난 후 가능하다고 해 더덕구이와 산삼주를 주문했다. 물론 주문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해서 달궁에서 남원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있는 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알바하는 친구가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묻더니 서울이라고 하니 그럼 동서울인데 못 간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일치한다. 다만 그 친구는 부언으로 자주 시간이 바뀌니 버스 회사에 전화해 확인해 보라고 했다. 확인이나 마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그 친구에게 5시 차를 탈 수 있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산삼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백무동에서 5시에 출발하는 버스면 인월에서는 5시 30분경 출발한다. 고로 달궁에서 출발해 인월에 5시 30분 이전에 도착하면 된다. 교통 앱에 의하면 달궁에서 인월까지 20분이 안 걸리니 5시에 출발하면 백무동발 동서울행 5시 차를 탈 수 있다. 식당에 도착한 시각이 3시 50분경이니, 최소 한 시간은 점심을 겸한 하산 주를 마실 수 있다. 산삼주를 다 마시고 이슬이를 더 주문해 마셨다. 그리고 더덕구이에 따라 나온 된장찌개가 좋아 결과적으로 술을 더 마셨다. 그리고 4시 50분경 이미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인월로 향했다.
5시 18분 인월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이슬이와 안줏거리를 사 들고 백무동에서 출발해 동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그 과정에서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건 산행기에 쓸 얘기는 아니고. 동서울에 도착해 도저히 버스나 지하철을 탈 상태가 아니라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거로 남부 터미널에서 시작해 동서울 터미널에서 마친 2박 2일 지리산 종주 산행을 마쳤다.
결국 '중산리 버스정류장 → 칼바위 → 로터리 대피소 → 천왕샘 →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 → 연하봉 → 촛대봉 → 세석평전 → 영신봉 → 칠선봉 → 선비샘 → 덕평봉 → 벽소령 대피소(1박) → 형제봉 → 삼각고지 → 연하천 대피소 → 명선봉 → 토끼봉 → 화개재 → 삼도봉 → 반야봉 삼거리 → 반야봉 → 중봉 → 향로봉골 → 하점골(광산골) → 만수천 → 달궁 야영장'의 35.74km(트랭글 기준), 36시간 43분의 2박 2일 지리산 종주 산행을 했다. 이동 18시간 49분, 휴식 17시간 54분! 휴식 중 로터리 대피소에서 51분, 세석 대피소에서 1시간 19분, 벽소령 대피소에서 14시간 40분을 보냈다.
최초의 단독 지리산 종주 산행으로 여유가 있어 그동안 보지 못한 많은 걸 보고 발견한 산행이다. 덕분에 원거리 산행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단독 산행으로!
이번 산행에서 종석대, 불무장대, 이끼 계곡의 위치와 코스를 정확히 파악했다. 성제봉, 칠선계곡을 포함 2020년 중 다 탐험할 계획이다.
역시 지리산은 배신하지 않는다. 2019년 설악의 해였다면, 2020년은 지리의 해다!
첫댓글 달궁-중봉 길이 고로쇠 수액 채취하는 길이래.. 내 친구가 예전에 혼자 낙향하여 남원에 살때 이른봄에 수액채취 관 설치하러 그곳을 많이 오르내렸다고 하더라. 그나저나...2020년은 지리산으로 좀 쏘다녀볼까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계곡이나 능선쪽으로
@雲峰 거야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