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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에 자리잡은 것이 2000년,
어느 새 20년차에 접어들었다.
나름 전국 이곳 저곳 많이도 다녔다.
이리저리 나드는 귀갓길,
북동방향 멀리 통신탑이 우뚝 솟은
완만한 삼각형 모양 산이 보인다.
고양시에서 가장 높은 산,
고봉산이다.
한 번 올라봐야지, 싶었는데
아마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완만한 경사에
뒷동산처럼 만만해 보여 항상 뒷전이었다.
지난 번 고양누리길, 행주누리길을 돌며
다음 번에는 한 번 찾아볼 결심을 했다.
고양누리길은 '우리명산 클린경진대회’에서
2014년 지자체 부문 우수상, 2015년 장려상, 2016년 최우수상,
2017년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등산·트레킹문화 개선 경진대회’으로 명칭을 변경한
2018년 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지자체 최초 5회 연속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건전한 등산·트레킹문화를 정착하고자
산림청이 주최하고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이 주관하는 행사다.
특히 고양누리길 구간 중 고봉누리길은
2015년 '제1회 아름다운 숲길 인증제' 평가에서
소백산 자락길, 지리산 둘레길 등과 함께
전국 10대 아름다운 숲길에 선정되기도 했다.
스마트폰 지도앱에서 고봉누리길을 검색하면
분홍색으로 표시된 구간, 6.72킬로미터다.
하지만 고양누리길을 소개하는 안내자료를 보면
고봉산 둘레를 돌고 황룡산을 내려서
고봉산 삼거리까지 돌아오는 코스가 추가되어있다.
그런데도 안내도에는
코스 총거리가 6.72킬로미터로 소개하고 있다.
언뜻 보아도 오류가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안곡초등학교 정류장에 하차한다.
자전거, 휠체어 등이 지날수 있도록
길게 늘어뜨린 완만한 육교를 건너
학교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학교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안곡습지공원을 이르기 전,
오른쪽으로 야산을 오르는 길이 보인다.
지도는 안곡습지를 따라 오르도록 안내하는데
야산으로 방향을 잡고 올라선다.
소개울공원이다.
언덕 너머 하늘마을 6단지 아파트가 있다.
언덕에 올라 팔각정 쉼터를 지나고
능선을 따라 가는
곳곳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소개울공원이 끝나는 곳,
고봉산을 가로지르는 도로 위 생태통로를 건너
본격적으로 고봉산 산행을 시작한다.
고양누리길 표지,
파란색과 노란색 리본이 길가 나무에 매달려있다.
삼국시대, 이 곳 일산은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일산의 중심에 있는 고봉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요새 겸 요충지로
고구려가 늘 이곳을 점령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한주라는 아름다운 미녀가 살고 있었는데,
백제를 정탐하기 위해 잠입한
고구려 흥안태자와 우연히 만나게되어 사랑에 빠진다.
깊어진 두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임무를 마친 고구려 태자는
후일을 기약하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고구려로 돌아온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바로 고구려의 22대 안장왕이다.
백제 땅에 남겨진 한주는 그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고을 태수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며 거절한다.
상대가 누구냐는 태수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자,
적의 첩자와 내통한 것이 틀림없다며 한주를 옥에 가둔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안장왕은
을밀장군에게 용감한 병사 20명과 함께 한주를 구하여
성공하면 높은 산에서 봉화를 올리라고 명한다.
백제에 잠입한 을밀 일행은
태수가 생일을 맞아 큰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기습하여
백제 태수를 죽이고 한주를 구출하고
산 정상에 올라 봉화를 올린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국경에서 기다리던 안장왕은
한주와 재회하여 도성으로 돌아가 혼례를 올린다. (고양문화원)
<[출처] 고양시 고봉산과 한씨 미녀 이야기>
이 전설에서 봉화를 올렸던 산이라 하여
고봉산 지명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멀리에서 보던 것처럼 높지않은 산은
완만하게 이어져 편안하다.
일산 아파트 대단지에 둘러쌓인 산이라
평일이지만 오가는 이들이 많다.
잠깐 드러난 공터 너머
우뚝솟은 철탑이
멀리보이던 고고함과는 사뭇 다르다.
'평화의 쉼터'로 명명된 쉼터다.
한국전쟁 중 유엔사령부에서는
임진강 인근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봉일천(켄자스선)전투다.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한 안내문이
동족상잔의 어두운 역사를 되짚게 한다.
전과처럼 기록한 피아간 피해가
더욱 가슴에 아프게 다가온다.
재난 통신 중계시설이 있다.
능선 아래 포장도로가 보인다.
군사시설과 영천사를 연결하는 길이다.
해발 208미터 정상 턱밑이다.
고봉산 정상은
현재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군부대로 올라가는 길에서
영천사 방향 돌축대 위, 흙속에 묻힌
그리 크지않은 바위가 튀어나와 있다.
이무기돌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제대로 된 각도가 아니라 구분하기 어렵지만
언뜻 보이는 모습이 뱀 대가리 형상이다.
고봉산을 수호하는 여러 바위 중
남서쪽을 지키는 바위라고 전해온다.
하늘로 승천하지못한 이무기는
천 년의 공덕을 쌓아야 용이 된다고 한다.
군부대입구 갈림길에서
고봉누리길 안내도를 따라 둘레길을 돌기로 한다.
영천사방향으로 길을 잡아 간다.
곧 포장도로가 끝나고
흙길이 이어진다.
고봉산에서 이름을 가진 바위 중
붙임바위와 틈새바위다.
급하게 경사진 바위 표면에
작은 돌들이 붙여놓은 듯 아슬하게 매달려있다.
이런 작은 돌을 공양돌이라 한다.
바위가 갈라진 듯 틈이 있다.
그 틈새로 역시 작은 공양돌들이
크고 작은 기원을 담고 붙어있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잡은 영천사다.
입구에 바가지 놓인 약수가 있다.
왼쪽 두꺼비 입에 연결된 파이프로
물이 흘러 고인다.
영천사 앞 뜰에서 조망하는
일산 도심 광경이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사찰 차량을 주차한 것으로 보이는
천막 차고가 있다.
그 곳에서부터 길이 좁아지지만
소로는 아니다.
계곡으로 내려가던 길이
소나무 가득한 능선으로 오른다.
왼쪽 황룡산 방향으로 가면
지도에 안내된 짧은 코스가 될터이다.
하지만 안내도에 소개된 구간을 따라
고봉산둘레길을 걸을 작정이다.
곧 마주치는 철조망 출입문 지나
완만한 산길을 올라간다.
코스가 조금 벗어나더라도
'장사바위'를 찾아갈 요량이다.
운동기구가 여럿 놓인 공터에 도착한다.
장사바위에 다다른 듯 한데
안내문을 찾을수 없어 운동중인 분에게 여쭈어보니
맞은 편 바위 몇 개 놓인 곳을 가르킨다.
전설에 따르면,
심학산과 고봉산에 각각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고봉산 장사는 몸집이 거대하고 성격이 불같은 반면
심학산 장사는 체구도 작고 심약했다 한다.
그래서 고봉산 장사는
심학산 장사를 놀리고 무시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세월을 보냈다.
심학산 장사가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고봉산 바위들을 심학산으로 옮겨 오기 시작했는데
그 바위들을 모아 둔 곳이 지금의 돌곶이 마을이라 한다.
그 후에도 고봉산 장사가 변함없이 자신을 놀리자
심학산 장사는 바위를 던져 고봉산 장사를 쓰러뜨렸고,
이 때 고봉산 정산이 움푹 파였다 한다.
<출처 :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1219886>
장사바위에 올라
운동기구가 있는 공터를 내려다 본다.
공터에 내려와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정표에 '수연약수터'가 보인다.
거리 표시가 없어 멀지않은 곳이겠거니,
방향을 잡고 간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더 이상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되돌아갈까 망설이는데
앞서 걷는 이를 따라잡아 물어보니
만경사 맞은 편 길로 내려가야 한단다.
그렇게 앞으로 진행하니
포장도로를 만난다.
정상 못미친 군부대로 이어지는 도로다.
아래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니
머지않아 여염집 같은 건물이 나타난다.
'만경사', 사찰이다.
조선중기 문인으로
고양팔현의 한사람인 모당 홍이상이
학문을 닦고 조상을 모시던 원당이었다.
만경사 맞은편 산허리를 도는 갈림길로
바로 앞에 바닥에 놓인 이정표가
'수연약수터'방향을 가르키고 있다.
그 숲길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올라오고있다.
산악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곳인지
별 다른 표시가 없다.
마치 길을 지우려는 듯,
발길에 바스러진 마른 나뭇잎은 흙빛을 닮아간다.
어쩌면 흙 자체가
고우리만치 미세하게 부스러진 낙엽이 아닐까?
약 이삼백 미터 갔을까,
목재 피크닉 테이블이 놓인 공터에 닿는다.
지붕을 인 약수터가 자리잡고 있다.
'수연약수터'다.
바가지는 걸려있지만
검사결과는 역시 '음용부적합'이다.
약수터를 지난 갈림길에서
잠시 갈등한다.
길게 걷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으니
고봉산둘레길을 따라 한바퀴 돌기로 한다.
'견달산누리길'을 따라
'진밭'을 찾아간다.
앞쪽으로 넓은 개활지가 보인다.
산 반대쪽 신도시와는 달리
여늬 산골마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 넓은 밭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밭을 따라 진행하면 견달산누리길이고
좌측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고봉누리길이다.
완만한 길이 편안하게 이어진다.
늦은 가을속으로 완전히 잠겨든 느낌이다.
안내도를 조금 벗어나더라도
장사바위, 만경사 위 포장도로로 나서
둘레길을 온전히 돌 예정을 한다.
전설 속 장사들이
공깃돌처럼 던지며 놀던 바위일까?
묵직한 바위들이 곳곳에 모여있다.
가파른 길을 올라서
장사바위에 다시 도착한다.
수연약수터를 찾아가던 길,
포장도로로 나서서
정상부로 가는 오른쪽으로 향한다.
다시 갈림길에서
위 포장도로와 아래 영천사 길 사이
허리에 난 길로 올라선다.
조금 진행하다보니
정상부 허리를 돌아 장사바위 있던 곳 가는 길로 짐작되어
다시 내려와 영천사 방향으로 간다.
영천사를 지난 언덕 위 갈림길,
이번에는 왼쪽 황룡산 방향을 찾아간다.
헬기장을 지나고
완만하게 숲길이 이어진다.
목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비록 전망은 없지만
고봉정, 팔각정자가 나타난다.
산길에 설치된 목제기둥 로프를 따라
내리막길 끝에 다다르면
마을로 내려선다.
도로 너머 나즈막한 황룡산이
좌우로 길게 뻗어나간다.
고봉로가 지나는 대로변,
탄현, 즉 숯고개라고도 하는 개미고개다.
횡단보도를 지난 고개마루에
산길이 보인다.
안내도를 보면
초입에서 왼쪽, 평평한 숲길을 따라가야한다.
금정굴을 지도로 검색하니
왼쪽방향이기도 하여
나침반 기능을 활용해 방향을 가늠해 본다.
다시 갈림길,
금정굴로 향하는 곳으로는 길이 없다.
다시 돌아와야 하는 코스라
그대로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역시 낮은 산,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올라 능선
갈림길에 닿는다.
전방으로 보이는 길이
초입, 계단을 따라 올랐다면 걸었을 길이다.
오른쪽으로 방금 올라온 길이다.
능선을 따라 걷는다.
집을 나서며 수평으로 눈길이 닿던 곳이
희뿌옇던 모습과 달리
곧게 올려 본 높은 하늘은 고운 파랑이다.
일산 외곽으르 떨어진 곳 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을 거의 만날수 없다.
군부대 시설로 보이는 철조망이 둘러져있다.
철조망 바깥을 따라
한참 길이 이어간다.
군'부대사격장이 위치한 위험지역으로
경고를 무시하고 접근하여 발생하는 피해는
부대에서 책임질 수 없다'는 경고판이 무시무시하다.
경고문 지나
곧 찰조망을 벗어난다.
신축공사가 진행중이라 그런지
경계를 둘러 차양막으로 막아놓았다.
황룡산 정상부가 올려다 보인다.
포진지 콘크리트로 보이는
군부대 시설물이 어렴풋이 보인다.
공사장 차양 가림막 찢어진 틈으로
건너다 보이는 운정방향 도심 풍경이다.
해발 134.5미터,
황룡산 정상 턱밑이다.
봉우리는 밟을 수 없다.
군부대가 주둔중이라
철조망이 가로 막고있다.
고양누리길 스탬프통 보이는 곳을
이정표 삼아 기념촬영을 한다.
옛날 황룡산이 바라다 보이는 성석동 두테비 마을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의해 매년 피해를 보았다.
이무기가 유독 이 마을의 사람들을 괴롭힌 것은
황룡산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려는 순간,
두테비 마을 사람의 부정한 모습이 목격되어
용으로 승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이무기는 두테비 마을 사람들을 해쳤다.
이무기가 나타날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부근을 지나던 한 장수가
이무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큰 두꺼비이니
마을 사람이 모두 힘을 합쳐 황룡산이 바라다 보이는 산 꼭대기에
이무기를 물리칠 두꺼비를 만들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바위를 만드니
과연 이 두꺼비를 무서워한 이무기는 나타나지 못하고
그 후론 해꼬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철조망 아래로 돌아
공중화장실이 있는 공터에 올라서지만
역시 정상은 철조망에 막힌다.
번식력 강한 외래유해식물 박멸을 위해
안내문을 매달아 놓았다.
여름철, 파란잎을 달고있는 사진이다.
사진으로도 구분하기 쉽지않을 듯 한데
줄기마져 시들어 버린 이즈음이야
더 말해 뭣할까?
고봉산과 황룡산에 참나무가 많아
숯을 만들어 파는 가구들이 있어
숯고개, 즉 탄현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한다.
산행내내 갈색으로 말라버린 참나무 잎이
바닥에 뒤덮였다.
도심에서 멀지않은 곳, 나즈막한 산이지만
오롯한 자연을 느끼며 산길을, 숲길을 걷는다.
잠시 만나는 시멘트 도로,
정상부 군부대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간 중간 갈림길이 나온다.
꽤 넓은 갈림길, 잠시 들어가 보면
양지녘, 시원한 조망, 넓직한 부지에 조성된 음택이 자리잡고있다.
고봉산 철탑이 건너보인다.
산을 뚫고 나온 조형물이
이리저리 세상을 기웃거린다.
말라버린 계곡도
온통 낙엽에 덮였다.
이 곳 갈림길도
한 쪽은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무덤 가는 길이다.
앞에 교각이 보인다.
폭이 수십센티미터, 농수로다.
농업용수를 끌어드리기 위해 설치한,
아직도 사용하는 것 일까, 궁금해진다.
상감천마을 뒷편으로 내려서며
산행은 마무리 된다.
물이 맑고 달아 '감천'이라고 한다.
마을 뒷편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 충신으로 몽고군을 물리친 박서와
조선 태종조 충신 박순,
숙종, 영조조 문신 조상경을 제향하는
'용강서원'이다.
조선조 3대 임금 태종 이방원,
옥좌에 오른지 3년이 지났지만 아버지 이성계는
함흥에서 꼼짝도 않는다.
수차fP 보낸 차사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에 근심은 깊어만 가는데
선뜻 나서는 신하가 없다.
그 날도 한숨과 걱정으로 한탄만 하는데
신하 한 명이 나서며 차사를 자청한다.
그의 요청은 새끼 딸린 암소와
별배를 따르지 않게 해달라는 것.
길손으로 변복한 신하는 용흥강에 이르러
새끼를 강가 말뚝에 묶어두고
사공을 불러 어미소를 타고 강을 건넌다.
상왕 이성계는 한양에서 오는 차사가
용흥강을 건너기전에 사살하라는 엄명을
별장이에게 내렸던 터였으나
변복한 단신의 노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
성 앞에 이르른 신하가
"상왕마마를 모시던 별장 박순이 팔도유람 중
상왕마마를 알현코자 왔습니다"고하니
아성계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들인다.
주안상을 앞에 두고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이 어둠이 내린다.
강 건너 새끼를 두고 온 어미소가
구슬피 울부짖는다.
"어찌 밖이 저리 소란한가?',
이성계가 역정을 낸다.
"소인이 나이가 먹어 말보다는 순한 암소를 타고
팔도유람하는 사이 새끼를 낳아 같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강을 건너기에 위험하여 새끼를 두고 왔더니
어미소가 새끼를 찾느라 저런가 봅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이성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뢴다.
"미물도 새끼를 저리 그리워하는데
한양에 두고온 자손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세자저하의 상왕전하에 대한 경모로
애가 끓고 계시옵니다.
이제 그만 노여움을 거두시고
한양으로 돌아가시지요."
이성계의 눈에 눈물이 어린다.
"내 생각해 보리다.
공은 지체말고 이 곳을 떠나시오."
상황을 눈치챈 신하는
어미소도 거두지 않고 나룻터로 간다.
극도로 긴장한 탓인가?
복통을 일으킨 신하는
사공의 집에서 안정을 취하게 된다.
한편, 상왕을 모시는 별장이 아뢴다.
"상왕마마께서 한양에서 오는 차사가 용흥강을 건너려거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살하라 하셨습니다.
지금 나간 자는 한양에서 보낸 차사임이 분명하고
상왕마마의 심정을 미물에 비유하는 망언을 하였으니
그를 처단하도록 하명하시옵소서."
충정어린 별장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이성계,
"그를 죽이라,
그러나 이미 용흥강을 건넜거든
더 이상 뒤 쫓지말라."하명한다.
한편 안정을 되찾은 신하는
사공을 재촉하여 나루터로 돌아가 배에 올라타는데
뒤쫓아온 별장이 소리친다.
"멈춰라, 멈춰서 상왕마마의 명을 받으라."
죽음을 직감한 신하는
상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사배를 올리고 일어서자
별장의 장검이 신하의 목을 내리친다.
이야기속 인물이 바로 박순이다.
삼문 왼쪽에
'용강서원 중수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내부관람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삼문은 굳게 닫혀있다.
홍살문이 입구에 서있다.
서원을 관리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바로 앞에 보인다.
산을 내려선 누리길은
고봉로 이면 개천을 따라 직선으로 이어진다.
지명이 유래된 감천인듯 한데
이름처럼 맑은 물이 아니다.
옹벽 아래 긴 자투리 땅,
농부로 자랐을
누군가의 손에 가꾸고 수확한 흔적이 남아있다.
황룡산 능선을 돌아본다.
옆 다른 옹벽 자투리땅에도
살뜰하게 가꿔 수확한 흔적이 남아있다.
'권필의 묘', 안내문이 보인다.
가던 길을 벗어나
잠시 들렀다 가기로 한다.
건너편 군부대 위병초소에서 산쪽으로
비각이 보인다.
비각 안 비석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석주 권필 묘갈명'이다.
권필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다.
위쪽과 아래 두 개의 단으로 조성된 무덤 중
권필의 묘는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중기 인물이다.
송강 정철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않아
동몽교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오르지 않았단다.
묘를 두른 소나무 사이로
건너편 고봉산 정상이 조망된다.
다시 누리길로 돌아와
직선으로 뻗던 길이
산쪽으로 휘어지는 곳이다.
이어지는 길은 음식점으로 닿으며
고봉로와 만나
개미고개에 이른다.
황룡산으로 들어서며 만났던 갈림길,
계단을 올라
금정굴을 찾아간다.
굴은 천막에 막혀있고
입구 철조망 사이로
안쪽 일부가 보인다.
한국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기세가 반등, 북으로 후퇴한다.
수복 후 치안을 담당했던 당시 고양경찰서장이
북한군에 부역했던 자와 가족들을 색출하며
이미 피신한 부역자 외, 가족과
개인적 원한으로 무고한 사람을 검거,
이 곳 금정굴에서 총살한 사건이다.
희생자가 최소 153명,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6명 이란다.
반공이 국시였던 시절,
억울한 죽음은 파헤칠수 없는, 숨겨야만 하는 수치였다.
이 후 세월이 흐르고 민주화가 진행되어
희생자 가족들이 지속적인 노력으로
진실화해위의 조사로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 집단학살로 규정되었다.
누리길 걷기는 마무리 되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출발하며 바로 소개울공원으로 올라서
안곡습지를 보지 못했다.
다시 안곡초등학교를 향해
아파트 단지 사이 도로를 걷는다.
지도를 보니 안곡초등학교 못미쳐
습지로 넘어가는 길이 있을듯 하다.
연세대학교 삼애캠퍼스 너머
습지가 있는 것으로 보여 들어선다.
천문대를 찾아 우측으로 접어든다.
천문대 뒤를 돌아보지만
철조망에 가로막혀 넘어갈 수 없다.
다시 돌아나와
철조망을 따라 난 길을 따라간다.
철조망 너머가 안곡습지가 분명하다.
이, 삼백미터를 따라 올라가도
철조망이 건너길 허락하지 않는다.
경우가 아닌줄은 알지만
철조망이 일부 훼손되어 빠져나갈만한 공간이 보여
몸을 숙여 지난다.
안곡습지공원 뒷편이다.
습지 윗쪽 야외 공간이다.
공원에 조성된 밭에
수확을 마친 들깻단이 놓여있다.
'사랑의 농작물' 재배지 안내문이 있다.
이 곳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불우이웃에게 전달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안곡습지로 들어선다.
일대를 아파트단지로 개발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습지였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수로 끝에 갈대가 무성하다.
습지 조성 후 갈대 무성한 묵논이었는데
지금은 논으로 복원하여
가을에 수확하여 불우이웃에 전달하였다 한다.
하지만 앞에 보이는 광경은 갈대가 무성하다.
아마도 휴식년제를 맞아
휴경하는 중이 아닐까 싶다.
논둑길이 넓직하다.
'숙살(肅殺)'의 의미,
'가을의 쌀쌀한 기운이 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임' 또는
'가을의 쌀쌀한 기운에 말라 죽다'는. . .
습지 안내도에 소개된 묘소다.
고양팔현 중 한 명으로
조선시대 학자였던 '추만 정지운의 묘'다.
잠깐 올라가볼까,
길을 찾아보지만 철조망과 문으로 막혔다.
파란 가을 하늘을 우러르는
갈대가 굽어지지않는 기상을 뽐낸다.
생각보다 넓은 부지에 조성된 습지공원이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연해아주 잘 가꾸어져있다.
다음번에는 봄이나 여름철,
모임에서 일정을 잡아 들러야겠다.
안국초등학교 담에서 시작되는
목제 조류 관찰대가 길게 뻗어있다.
철새도래철에는
인근 아이들과 학생, 관심있는 성인들에게도
유익한 볼거리를 제공하겠다.
그런데 한 쪽,
학교 철담과 맞닿아 이어지는 관찰대는
잡목들이 우거지고 좁아 이용할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학교와 협의가 된다면
최소한 학생들만이라도 활용할수 있다면 어떨까?
이동경로를 화면으로 캡춰해 보았다.
제법 긴 거리를 걸었다.
아름다운 숲길에 선정되었다는 고봉누리길,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느긋하게 걷기에 좋았다.
아마도 다른 계절의 풍미를 체험할수 있다면
기대는 조금 더 충족할수 있으리란 느낌.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우선 하얗게 눈이 내려 쌓인 날 다시 찾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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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저는 군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라는 회군 명분이 부질없는 것이였다는것을 차사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일화를 보고 재각해 봅니다.....( ).....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