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관광가이드 지난 회에서 소개한 전면핵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풍자한 영화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연출자 스탠리 큐브릭이 시사했듯이, 불완전한 인간들의 집합인 국가정부들이 핵무기의 실질적인 제어 역량의 항구적으로 갖고 있는가에 대한 대중의 불안한 심리는 과학소설에서는 이제는 고전이 된 하인라인의 단편소설 <폭발이 일어난다 Blowups Happen, 1940>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원자로가 시카고 대학 운동장 지하에 시험적으로 설치된 때가 1942년 12월이고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미국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착수한 때가 같은 해 9월임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은 현실의 움직임보다 2년 남짓 앞서 그 운용상의 어려움과 자칫 잘못되었을 경우 초래될 참사의 엄청난 규모와 파급범위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히 선구적인 안목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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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12월 세계최초로 시험 가동된 핵반응로. 미국 시카고 대학에 설치되어 저명한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가 유대계 과학자 레오 질라드(Leó Szilárd)와 함께 핵분열 연쇄반응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 핵반응로는 이후 원자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초석이 되었다. ⓒyovisto blog | <폭발이 일어난다>는 과학자들 간에 그리고 과학자와 기업가들 간에 벌이는 논쟁 형식을 빌려 우리가 원자로를 늘 안정적으로 운영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 쉽게 전달한다. 2011년 3월 쓰나미의 여파로 일본의 후쿠시마 발전소가 침수되면서 전원 및 냉각 시스템이 파손되는 바람에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된 사건은 최근의 예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체르노빌 사고와 미국의 쓰리마일 사고는 살상용 폭탄이 아닌 전력발전용 원자로조차 불시 폭발로 인한 대참사와 방사성 누출로 인한 피폭의 위험성을 안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 바 있다. 하인라인의 이 단편에서는 기업논리로만 접근하려는 원자력회사의 이사진에게 한 과학자가 이렇게 일갈한다.
“당신들 중 누구도 핵물리학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 문제에 관해 의견을 개진할 자격이 없습니다.” --- 렌츠박사가 이사진에게, <폭발이 일어난다>, 국내번역판, 324쪽
그러나 오늘날 원자력의 이용은 산업동력용이건 군사용이건 간에 과학자들의 손을 훌쩍 넘어서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목적이 과학적 안전성을 앞서기 일쑤다 보니 2013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원전비리가 발각되어 사회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1) 만일 우리나라가 원자폭탄 보유국인 상황에서 유사한 비리가 터졌다고 가정해보자. 좋든 싫든 간에 전쟁억제를 위한 최후방지책으로 일부 국가들이 선택하는 이 방법의 운용 및 관리에 허점이 생겨 이웃국가들의 비웃음을 사거나 심지어 오발사고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누가 그 뒷감당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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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4월 발생한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고 현장 인근의 관공서 건물로, 사고 당시가 아니라 그로부터 27년 지난 후의 모습이다. 방사능 탓인지 여전히 대부분의 지역이 방치되어 있다. ⓒDFA Pictures | 스탠리 큐브릭이 미국인이지만 모국의 국방성과 군부의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것은 이토록 중대한 전략무기의 통제를 특정세력에게만 믿고 맡기기에는 예기치 못한 위급상황에서 너무나 불안하니 국민 모두가 따가운 시선으로 돌아봐야 함을 환기시키려는데 그 이유가 있었다. 하인라인의 <폭발이 일어난다>도 취지는 같다고 본다. 미국 내 보수우파 작가의 대형(大兄)이라 할 하인라인조차 원자력 에너지는 과학적 엄정성에 바탕을 두고 다루지 않는다면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는 이 문명의 이기(利器)에게 등 뒤에서 칼에 찔릴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원자폭탄이나 원자력 에너지의 안전운용에서 우려는 낳는 대상은 비단 경솔하거나 흠결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유진 L. 버딕과 헨리 휠러의 동명 원작소설을 당대의 사회파 감독으로 명성이 높았던 시드니 뤼메가 각색한 영화 <안전 확보 실패 Fail-Safe, 1964> 또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못지않게 핵병기 관리의 허술함을 우려하는 내용으로 미공군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다만 여기서는 정신 나간 공군장성이 아니라 자체 결함이 있는 군수뇌부 제어컴퓨터가 폭격편대의 핵공습을 명하는 장본인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두 영화 다 미군과 소련군으로서는 이미 발진한 폭격편대를 어떻게 해도 멈출 도리가 없다는 전제 아래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두 원작 간의 저작권 분쟁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끝내 폭격기 한 대가 모스크바 상공에 다다라 수소폭탄을 투하하는 엔딩도 마찬가지다. 두 영화는 하나같이 미군이 이 가공할 폭탄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여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강하게 시사한다. 둘 다 일단 핵사고가 일어나면 중도에 막거나 회피할 방도가 없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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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L. 버딕과 헨리 휠러의 동명 원작소설을 시드니 뤼메 감독이 영상으로 옮긴 <안전 확보 실패 Fail-Safe, 1964>는 핵병기 관리의 허술함을 우려하되 그 원인을 인성에 문제가 있는 관리인력 대신 자체 결함이 있는 제어컴퓨터에 돌렸다. 여기서 폭격편대에게 핵공습을 명하는 장본인은 미대통령이 아니라 오작동한 군수뇌부 제어컴퓨터다. 당황한 미대통령은 백방으로 애를 써보지만 결국 폭격기 한 대가 모스크바 상공에 다다라 수소폭탄을 투하한다. ⓒColumbia Pictures | 그러나 두 작품이 위에서 언급한 공통의 명제에 도달하는 방식은 서로 정반대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폭탄뿐 아니라 군부와 정부지도자들(미국은 물론이고 소련까지 함께)을 끌어들여 풍자와 블랙유머로 정신없이 까댄다. 큐브릭의 영화에는 의사결정권자 지위에 있으나 무능력하고 옹고집만 부리는 관료들과 전쟁 미치광이들 그리고 비판을 감내하지 못하는 불같은 성미의 군부 인사들이 들끓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안전확보 실패>는 같은 메시지를 진지하고 깔끔한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선보인다. 여기서는 정부와 군종사자들이 오작동된 전략컴퓨터의 농간에 놀아난 끝에 돌연 촉발된 대재앙에 그저 넋이 나간 충직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안전확보 실패>는 핵전쟁의 발발 원인을 조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만 데이빗 브린(David Brin)의 동명 원작소설(1985년)을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가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영화 <우체부 The Postman, 1997>는 <세계, 육체 그리고 악마>처럼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인류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우체부>는 주연배우 케빈 코스트너의 낯간지러운 휴머니즘과 소영웅주의만 눈감아준다면 꽤 짜임새가 있는 작품으로, 핵전쟁으로 파괴된 문명의 시계바늘을 되돌리려는 한 사내의 헌신적인 이야기다. 1970년대 로마클럽을 위시하여 서구 지식인들은 핵전쟁이 대규모로 일어나도 문명이 과연 전처럼 재건될 수 있을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어떤 이는 핵 전면전이 미소(美蘇) 간에 일어나면 미국의 경우 일부 생존자들이 <우체부>에서처럼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군소 군락을 이루는 준(準)원시시대로 회귀하리라 예측한 반면, 다른 전문가는 불과 50년 내에 미국은 종전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미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처럼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가 전면핵전쟁으로 전국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웍을 대거 상실한다면 설사 대통령을 포함한 지도부가 살아남는다한들 국민 대다수는 그 사실을 알리 만무한 까닭에 상당기간 동안 정치사회적 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체부>에서 주인공은 가상의 대통령 이름과 정부를 지어내 사람들에게 곧 이 세상에 질서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는다. 흥미롭게도 그의 거짓말 덕분에 우편배달부 조직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그들의 리더가 된 주인공은 더 한층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절치부심하게 된다. 비록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같은 시기 북미대륙 어디에선가는 진짜로 임시 정부가 세워졌거나 세워지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의 선의의 거짓말이 진실로 돌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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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체부 The Postman, 1997>의 동명 원작소설. 데이빗 브린이 썼다. ⓒBantam Books | 중요한 것은 <우체부>의 설정 대부분이 핵전면전이 일어난다면 얼마든지 있을 법하다는 사실이다. 실제 당면할지 모르는 불행한 근미래의 세계에서 억척스레 고단한 삶을 감내하는 바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을 담은 <우체부>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공감할만한 주요전제는 무엇보다 주저앉은 문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복구가 선결과제라는 핵심을 잘 짚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째서 현실성이 있는지는 어느덧 우리에게 친숙해진 인터넷의 발명 동기를 살펴보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인터넷은 1960년대 미국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전면핵전쟁에서 자국의 군사통제력을 잃지 않으려 고안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웍이었다. 냉전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 미국 국방성이 숙고하던 과제는 어떻게 하면 핵전쟁 후에도 미국이 군사력과 국민들을 제대로 통제하여 세계3차대전을 승리하고 문명을 재건하느냐에 답하는 것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씽크탱크 가운데 하나인 랜드社(RAND Corporation) 소속 폴 바랜(Paul Baran)의 착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의 커뮤니케이션 네트웍(전화와 방송, 신문 등)은 어떻게 보호하건 간에, 일단 원폭(혹은 수폭)이 떨어지고 나면 잿더미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맹점이 있었다. 게다가 네트웍의 중앙통제소(예컨대 중앙정부)는 적 미사일의 제1타겟이 될 것이 뻔하잖은가? 따라서 1964년 처음 발표된 대안은 아예 중앙통제소가 없는 지방분권적 네트웍이었다.
네트웍의 모든 터미널들은 다른 모든 터미널들과 동등하며, 각 터미널은 메시지를 만들고 보내고 받아들일 독자적 권한을 갖는다. 설사 네트웍 대부분이 핵공격에 날아간다 해도 요행히 손상되지 않은 일부 터미널들을 경유해 각급관청과 군부대에 명령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요 국민들이 정신적 공황에 빠지지 않도록 격려하자는 취지다.
언뜻 보아 아무렇게 늘어놓은 듯한 비능률적인 시스템이 오히려 위기상황에서는 미국이라는 방대한 영토에 산재한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견고한 끈이 되는 것이다. 넓은 영토에 퍼져 사는 수많은 이들을 통솔하는 관건은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견고함과 효율성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고대로마의 사례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전성기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소아시아까지 거대한 제국을 경영했던 로마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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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체부>에서 주인공인 우체부는 가상의 대통령 이름과 정부를 지어내 사람들에게 곧 이 세상에 질서가 다시 찾아올 것이라며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거짓말 덕분에 우편배달부 조직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고 그들의 리더가 된 주인공은 더 한층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절치부심하게 된다. ⓒWarner Bros. | 여러 가지가 거론될 수 있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제국 전역을 관통하고 이어주는 가도(街道)의 꾸준한 건설이었다. 애초에는 단시간에 목적지에 병력을 급파할 수 있어 적은 병력으로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군사적 목적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가도가 일반인들 사이에도 사용되며 물자교류를 왕성하게 하고 민간경제 진흥에 기여하는 파급효과를 낳았으니 가히 오늘날의 인터넷에 비견할 만한 발명이었다. (로마제국 당시 건설된 가도들의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보수되어 그대로 쓰이고 있다.)
다만 <우체부>는 문명사회를 되살리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채널부터 복구시켜야 한다는 착상까지는 좋았지만 그 구체적인 방안이 고전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우편배달이란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핵공습에서 파괴되지 않은 인터넷의 잔여망을 활용하는 방안이 실제로는 현실적인 대안이 되겠지만, 인터넷이 군사용과 학술용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 대상으로 본격 상업화 된 시기가 1990년대 이후임을 감안할 때 1980년대 중반에 씌어진 원작에 의지해서는 이러한 답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작은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 [아시모프의 SF잡지Isaac Asimov's SF Magazine]에 게재된 단편 두개를 합쳐 확장시킨 버전이다.)
일부 과학소설 작가들이 20세기 중반부터 이미 인터넷과 유사한 정보네트웍을 기반으로 한 근미래 세계를 묘사한 바 있지만, 정작 데이빗 브린은 1980년대에 대재앙 이후의 세계를 가상하면서 인터넷이 조만간 그토록 급속히 보급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참에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자 하는 바, 과학소설은 예언의 문학이 아니라 비전의 문학이다. 다시 말해 점장이 노릇이 아니라 이상적인 혹은 혐오스런 미래상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반추하게 해주는 것이 과학소설의 비전의 문학으로서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1) 이 사건은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부품 납품과정에서 품질기준에 미달하는 부품들이 시험 성적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수년 이상 한국수력원자력에 납품되어온 구조적 비리였다. 이 비리에는 부품 제조업체인 JS전선과 검증기관인 새한티이피 그리고 승인기관인 한국전력기술까지 모두 조직적으로 가담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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