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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교회에 부임을 해서 못다 한 건축을 감당해야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금리가 오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확신을 주셔서 시작한 일인데, 자신을 바라보는 교인들의 표정을 보면 겁이 덜컥 났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과 위기의 순간에 자신도 역시 교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 달라고.’ 감사절기가 되면 교인들에게 2주에 걸쳐서 ‘감사의 의미’에 대하여 설교를 했답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답니다. 감사절에 하는 설교가 감사의 의미보다는 교회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헌금을 강조하는 게 아니냐는. 그래서 감사절 설교를 한 번으로 줄였답니다. 그리고 감사절 헌금이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답니다. “그래, 너 그렇게 계속 할 거니??”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 어려운 상황에 감사절 헌금은 어려운 이웃과 교인들을 위해 쓰기 시작했답니다. 감사절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 시편 62편을 묵상하며 진지하게 물으셨답니다. ‘오직’ 주 만이 구원이심을 믿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
이제 다윗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반석’이라는 것을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오직 하나님만이 ‘요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고 나니 그를 어렵게 했던 적들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변을 바라보니. . .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두르고 있는 환경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있어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데도 끊임없이 닥치는 환난과 적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을 들어보니 그렇게 힘들게 했던 적들이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3-4절.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담’은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울타리’는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 곳인데,
이 모든 것이 흔들리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상황이 그랬습니다. 자신을 보호해 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니, 마치 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합니다.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울타리가 오히려 적군의 진지가 되어 버렸으니 머물 곳이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언제까지~~’ 사실 고난의 끝이 보이면 참을 텐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 다윗은 ‘how long~~’이라고 한탄하던 때입니다.
또한 가장 힘든 상황일 것 같은데,
다윗을 올려놓고 흔드는 상황입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이야기하면서 뒤로는 저주를 말합니다. 이 모든 상황들이 자신의 눈에 들어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요, 당신의 자녀를 끝까지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사실 시편 2편 6-7절 말씀과 짝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무너진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산 ‘시온’을 세우셨습니다.
거짓으로 축복하고 저주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 알게 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이죠.
‘시온’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이요, 거룩한 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시편 62편을 묵상하며 함께 찾아볼 장소는 본문에 등장하는 ‘시온 성’입니다.
혹, 시온 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예루살렘’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아주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고대 히브리어 단어인 ‘시온’은 ‘요새’ 혹은 ‘안전한 곳’ 또는 ‘성채’라는 의미에서 유래를 찾습니다.
시온의 역사는 다윗 왕이 예루살렘의 기혼 샘이 내려다보이는 여부스의 요새를 점령했던 주전 1050년에 시작되었는데(대상 11:4-9), 다윗 왕은 그곳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곳을 ‘예루살렘’이라 불렀고, 주전 14세기에 이미 이 도시는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에서 ‘우루샬림’이라고 불렸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도시 ‘시온’은 오늘날 성전산이 있는 곳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행정 건물들과 왕궁이 있었던 오펠로 알려진 언덕입니다. 모리아 산(성전산)의 고도는 해발 740m이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바치려 했던 곳이고, 이후 주전 961년에 솔로몬 왕이 야훼를 위한 성전을 지어 봉헌했던 곳입니다. 열왕기상 8장 1절.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그 때 이후로 예루살렘의 성전산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성지순례의 목적지였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방향이 되는 ‘시온’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산 방향으로 기도를 해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애국가를 ‘하티크바’라고 하는데 ‘희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노래에는 시온의 땅과 예루살렘에 대한 갈망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640번이나 나오고 있으니, 이들에게 어느 정도 중요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기에 그곳은 우리의 영혼과 삶의 피난처가 됩니다. 시편에 유독 ‘피난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몇 주 전 우리가 함께 보았던 시편 46편에서도 ‘여호와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피난처는 우리가 지금 거하는 세상에서 잠시 물러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장소입니다.
이 ‘시온’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으니, 우리의 어머니가 되시는 분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가장 평안함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는 그 분의 품 안에서 가장 안전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흔들 때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흔들어 울렁거릴 때, 그 분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이제 다시 시편 62편 1-2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니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중에 <벤허>가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인데,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공 ‘벤허’는 귀족이었지만 로마의 반역자가 되고, 노예로 살다가 로마 장군의 양자로 신분이 바뀌는 극적인 삶을 살죠.
그런데 그의 인생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주님의 얼굴은 한 번도 보이지 않습니다. 뒷모습만 보일 뿐이죠. 고비 때마다 자신을 찾아와 만나주셨던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마침내 그는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 전차 경주는 아마 그 영화의 압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책 중에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가 있습니다. 얀시의 책은 대부분 인간들이 경험하는 재난과 사고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 위한 글들입니다. 사람들은 재난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선하신가?”
물론 미국적인 상황이지만 큰 재난이나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끔찍한 피해를 당했을 때 이렇게 질문하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온갖 종류의 일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어도 그렇게 깊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재난이 있으면 하나님을 찾는 것일까요?
아마 다윗도 가장 깊은 고난의 심연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흔히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깊은 신앙의 지경에서 할 수 있는 고백이고,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들의 영혼이 단련되었음을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영혼을 향하여 한 번 이렇게 명령해 보십시오.
“나의 영혼아 잠잠히 생각해 보아라!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무엇을 인함인지, 인생의 고비 때마다 어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는지….”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요.
오직 그만이 나의 산성이요.
오직 그만이 나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저기 시온을 바라보며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