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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나다나엘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이것이
CCCC
입니다
20130710
민립O군사관학교 ; 총학 ; 총합학회, 총합학원 ; 총합교육(CCCC ; CICA) 운동본부
우리 서로 소통 합시다 ! 소통 = 만남 ! 소통은 곧 이어 만남입니다. 당신과 나의 만남은 소통이요 소통은 바로 유통이요 유통은 역시 영통이며 영통은 1통,일통,통일로 이어집니다. 소통은 시간과 함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소통은 중통 중통은 고통으로 계속 이어지고요, 고통은 전통, 대통, 원통으로 이어지는바, 바로 나이를 먹고, 시간속에 인간 ! 당신과 나사이 공간을 차지합니다. ......................
1년365일 오늘의 역사<말씀>교육학회 ; CCCC ; OXCA + CICA + UNIC ; (한국소통+일기쓰기+성경쓰기)운동본부
여러분 ! CCCC C-man은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알며 실천궁행을 솔선수범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어떤 사이며 관계는 어찌됩니까? ................ 소통은 바로 관계를 낳습니다. 소통은 대화와 상담 그리고 토론이 있어야 합니다. 소통은 건강하고 행복의 길로 통합니다. 이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함은 하늘나라(=천국)로도 소통 <직통>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마태복음3:2)을 아십니까? .............. |
민립O군사관학교(국민총합학원;총학) 설립추진본부(전화017-727-3863)
우리 !
소통합시다 !
대화상담토론하면 !
통일 하나가 됩니다.
동서남북
대한민국
국제연합......
온세상이......
하나평화
가됩니다
..........................CCCC........................
건강생명사랑봉사생활
전화상담
자아초월정신치유생활
<한국나다나엘선양회>
C C C C
<암으로부터살아남는법>
Cancer Cancel Counsel Center
Corea Canon Christ Church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한국성경예수장로교회
평택인사상담장로교회
<<민립O군사관학교>>
1년365일오늘의역사<말씀>출판사
창설(대표) 김 평 탁 목사
CCCC C-man<무료상담전화> 017-727-3863
031(692)-3650
경기도평택시통복동 161-3
오늘, 여기서, 지금, 곧, 바로, 나,
내<U&I>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하고도 긴급한 일은 무엇인가 ?
당신은 건강하신지요 ?
영 - 혼 - 육 - 정신이 강건하셔야 합니다.
암 ! 암은 모든 각 개인의 건강 종말 직전입니다.
"암으로부터 살아남는법"
지금은 암정복시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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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1) : <국가원수사랑상담†자아초월정신치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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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2) : 성경일기를 60년동안 써오면서 !
사랑하는 국내외 동포 가족 여러분 !
내 평생 74살 !
2011년은 인생 대전환의 해가 됐어요.
암으로부터 살아남는법 !
세상은 암정복시대가 됐지만 하나님의 창세이래 천하 우주 만물 세계 국제사회는 글로발 기후변화 시대가 되지않았습니까 ?
언제 어디서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부름을 받을진 모릅니다만 그 순간까지 내 여생 암예방 치유 치유 사역에 자아 초월을 적용하겠다는 필생의 다짐을 피력한 것이라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평택 소통 김평탁 입니다.
7월 10일
오늘의 말씀
① 레16:29[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7월 곧 그 달 10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하고 아무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② 레23:26-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7월 10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③ 레25:9[7월 10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④ 민29:7[7월 10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오늘의 역사
① 제물포 조약(1882) : 구한말 임오 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한 제물포 조약이 일본의 강요로 1882년 오늘 맺어졌다.
임오 군란 때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10여명이 사상되자, 우리 나라의 침략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이를 기화로 군함 4척과 수송선 3척에 1개 대대의 병력을 싣고 제물포에 상륙, 당시 우리 나라 정부를 위협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배상금 50만 원과 일본 군대의 주둔 권리를 얻었다.
② 한국휴전회담 본회의 개막(1951) : 1950.6.25 공산군이 남침한 이래 그들의 춘계공세가 실패로 끝나고 전선은 38°선 이북으로 옮겨졌다.
이에 당황한 소련은 유엔 대표 말리크를 통하여 38°선상의 정전을 제의해 왔으며 유엔군 리지웨이 장군은 말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51.7.8일 개성에서 예비 회담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10일 이날 유엔군 수석대표 조이 제독과 공산측이 수석대표 남일(南日)이 참석한 가운데 정전 회담 본회의가 개성에서 개막되었다.
군사분계선을 위시하여 허다한 난제(難題)에 부딪친 회담은 9월 6일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무려 2년 1개월이 지난 53년 7월 27일 현 전선을 정전선으로 하는 휴전 협정에 조인하게 된다.
⇨7월 27일.
③ 진해항의 선거(dock) 준공(1956) : ⇨6월 9일.
④ 좌우합작위원회 설치(1946) : 7월 10일 좌우합작을 위해 우익의 김규식과 좌익의 여운형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좌우합작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5월 8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무기휴회에 들어가고 좌우익단체의 반목이 심해지자 좌우합작위원회의 설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위원회는 1946년 7월 22일 제1차 예비회의를 열었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열되었다.
1946년 10월 7일에는 좌우합작위원회의 이름으로 된 7개 원칙과 7개 요구사항을 J. R. 하지에게 전달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신탁통치문제와 토지문제 등에 대한 좌우익간의 심한 의견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좌우합작운동에는 온건한 좌파와 공산주의자들을 분리시키려는 미군정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⑤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 공포(1919)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외 업무연락을 위한 지하 비밀행정조직.
1919년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를 공포하면서 실시되었다.
이 법령에는 연통부를 두되 도에는 감독부, 군에는 총감부, 면에는 사감부(司監府)를 설치하였다.
주요사무는 정부에서 공포하는 법령과 공문의 전포(傳布), 전쟁시 군인 ․군속의 모집 및 군수품의 징발 수송, 구국금(救國金) 100원 이상을 갹출할 구국재정단원의 모집, 공채발행시 발매업무, 통신에 관한 것 등이다.
실시의 일차적 목적은 임시정부의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에 대응하는 비밀행정조직을 갖추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뒤 조직체계는 개정되어 각급 행정조직의 책임자로 서울에는 총판(總辦), 각 도에는 독판(督辦), 부와 군에는 부장(府長)과 군장(郡長), 면에는 면감(面監)을 두도록 했으나,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으로 전국적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고, 면단위 조직은 사실상 어려웠다.
평안 ․함경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연통제도 1921년 일본경찰에 그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더 이상 실시되지 못하였다.
⑥ 대한여자애국단 발기(1919) : ''대한여자애국단''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창립은 1919년 8월 2일 중가주 디뉴버에서 각 지역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
⑦ 한국-일본-홍콩간 해저 광케이블 개통(1990) : 해저광케이블 통신시대가 시작됐다.
이날 홍콩 일본으로 이어지는 H-J-K 해저 광케이블이 착공 2년 5개월여만에 시험가동을 거쳐 정식서비스에 들어갔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은 물론 미국과도 광통신을 통해 보다 고품질로 전화 데이터 영상서비스를 주고 받게 되었으며 국제통신이 위성통신과 함께 이원화됐다
⑧ 능의선(능곡-의정부) 개통식(1961) : 1961년 오늘, 경의선의 능곡(陵谷)과 경원선의 의정부를 연결하는 '능의선'이 개통됐다.
개통식에 주민들이 나와 태극기를 들고 환호했다.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참석해 침목을 다지고 능의선 처녀 운행을 축하했다.
능의선은 급증하는 서울 인구와 주택을 분산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다.
⑨ 독재의 제물,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 사형선고(1974) : 국제법의학자협회가 한국 대법원이 한 사건을 판결한 날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규정했다.
75년 4월8일의 일이었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연루자 8명은 이 날 대법원의 상고 기각 판결이 내려진 지 1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학생들의 시위와 민중의 의지를 극한 수단을 써서라도 막으려는 군사정권의 조작극이었다.
박정권은 1971년 10월15일 위수령을 내리고 1972년 10월에는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11월27일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을 탄생시켰다.
이에 맞서 야당과 재야민주세력은 개천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전면적 도전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박정희 군사정권은 개헌 청원 주동자는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2호를 발표하여 대처하였다.
이리하여 유신의 칼바람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 서민에 이르는 모든 국민들에게 휘몰아쳤다.
이런 암흑적 분위기 속에서 73년 8월 김대중씨 강제납치 사건을 계기로 그해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4.19 기념탑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물을 낭독한 뒤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유신 하에서의 공개시위의 포문을 연다.
이것을 계기로 11월에 들면서 전국의 각 대학이 일제히 유신철폐 시위를 궐기하여 나서게 된다.
그러나 계속적인 검거와 탄압으로 구속만을 늘리게되면서 좀더 조직적이고 대중적 투쟁이 요구된다.
그러면서 겨울방학동안 74년도를 준비하면서 전국단위의 조직을 준비하게 된다.
⑩ 남이(南怡) 장군묘 : 조선 세조 때의 무신 남이의 묘.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2단으로 쌓인 석축대 위에 있다.
사성(莎城)에 둘러싸인 봉분을 중심으로 바로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있는 간소한 묘이다.
⇨10월 24일.
⑪ 이이선생묘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율곡 이이(1536∼1584)의 무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봉분 전면에 상석이 있고 그 오른쪽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서 있고 기단(基壇) 아래에 문인석이 있다.
이이는 조선 중기의 철학자이자 경세가(經世家)·사상가로 대사간·대사헌, 대제학·병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10만양병(十萬養兵)을 주장하고 대동법(大同法) 등 사회개혁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⑫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1993)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993년 오늘 1박2일 일정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이다.
두 정상은 간소한 차림으로 정상회담을 열고 북핵 문제를 비롯한 공동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청와대와 백악관을 잇는 24시간 직통전화를 개통하기로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⑬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재선 (1990)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오늘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서기장직에 재선됐다.
고르바초프는 이날 선거에서 찬성 3천4백11표, 반대 천백16표를 획득했다.
그는 당최고지도자로 재선임됨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반을 굳혔다.
고르바초프는 이후 옐친 등 급진개혁파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이듬해 1991년 12월 말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⑭ 노리에가 징역 40년 선고(1992) : 80년대 초 파나마 군부를 장악해 대통령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러 온 마누엘 노리에가!
1992년 오늘 미국 마이애미 연방지방법원으로부터 마약밀매 등의 죄로 징역 40년형을 선고받는다.
사실상 종신형이다.
노리에가는 미국의 첩보 내용을 공산권에 팔아 넘긴 정황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미움을 샀다.
그 결과 1989년 12월 미국 군대가 파나마에 침공하고 이듬해 1월 노리에가를 미국으로 압송해 재판에 회부했다.
⑮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1938) : 13세기 고딕 양식의 대표작인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
1938년 오늘, 20여 년에 걸친 보수작업이 끝나 웅대하고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크게 훼손된 것을 종전 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모여 복원했다.
⑯ 진화론 가르친 교사 존 스콥스 재판(1925) : 진화론을 가르치면 위법인 때가 있었다.
지금부터 70여년전(1925) 미국 데이턴시의 한 법정에서 [원숭이 재판]이라는 것이 열리고 있었다.
스코프(John T.Scopes) 라는 고등학교 교사가, 테네시주의 법에 가르침이 금지된 진화론을 가르쳤다고 기소되었던 것이다.
뉴욕의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은 진화론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한 의도로, 당시 테네시 주에서 발행되고 있던 한 신문에 ''''도움을 줄 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그 신문을 본 진화론자 조지(George Rappleyea)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이며, 미식축구 코치였던 친구 스코프를 설득하여 미국시민자유연합에 다음과 같이 신청서를 냈다.
" Rhea conuty 고등학교 과학 교사 스코프는 진화론 교육과 관련되어 체포될 것이며 책임을 질 것이다."
그래서 스코프는 원하던 대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시카고의 WGN방송에 의해 재판 상황이 미국 전역에 방송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윌리엄 브라이언이라는 사람이 검사, 대로우라는 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다. 방청객들은 대부분 검사의 편이었다.
대로우 변호사의 변론이다.
"검사, 당신은 노아의 방주에 타지 못한 생물은 전멸했다고 믿습니까?"
검사의 답변.
"물고기 외에는 전멸했다고 믿습니다."
변호사의 재질문.
"그렇다면, 뱀이 이브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기게되었다고 성경에 나와있는데 저주를 받기 전에는 어떻게 이동했는지 아시는지?
만약 뱀이 꼬리로 서서 걸어다녔다고 한다면?" 성경도 진화를 가르친다는 이야기다.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검사는 판사에게 이렇게 외친다.
"재판장님 ! 변호인은 지금 테네시주의 법정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12일간에 걸친 [원숭이 재판]은 피고인 교사에게 100달러의 벌금을 물게함으로써 끝났다.
피고에게 유죄 판결과 함께 벌금형이 주어졌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진화론측의 승리였다.
원숭이 재판은 미국시민자유연합의 의도대로 미국 국민들에게 진화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었고, 이후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진화론 교육에 대한 법적 투쟁을 야기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재판은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재판을 본따서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졌다.
당시 유명한 영화배우들이 참여했던 영화 는 피고와 변호사를 아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피고와 변호사는, 학문적 진리를 위해 위선적인 종교와 맞서 싸우는 용감한 인물로 그려졌다.
반면에 검사는 아주 야비하고 비논리적인 인물로 나온다.
Baltimore Sun을 비롯한 언론 매체들은 전적으로 진화론을 지지하는 기사를 썼다.
따라서 사람들은 원숭이 재판에 대해 읽을 때 마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글들을 읽게 되었다.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존 스코프가 사람과 원숭이가 같은 조상의 후예라고 가르친 것이 73년전 테네시법하에서는 유죄였으나 30년전 미국 대법원은 스코프 판결을 뒤엎고, 어떠한 주에서도 진화론 교육을 금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이론은 더욱 궤변적인 창조론자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일부 주립 및 지역 교육위원회의 경우 과학교육에서 진화론을 배제하고 있고 많은 생물교사들은 스스로 진화론을 거부하고 있다.
켄터키주의 루이스빌대학 생물학 교수이자, 미국생물교사협회(NABT, National Association of Biology Teachers)에서 발행하는 잡지 <미국생물교사(The American Biology Teacher)>의 편집인이기도 한 랜디 무어 박사는 "진화론-창조론 논쟁은 스코프가 시험대에 올랐던 당시만큼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1998년 미국 캔사스주는 유치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수 없게 됐다.
캔사스주 교육위원회는 11일 과학적 원리로서의 진화론을 폐기시킴으로써 미국의 과학 교육에 끊임없이 도전해 온 보수파 기독교계에 커다란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10인 교육위원회는 학계의 잇따른 진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생물 학은 물론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기본 원리로 인정되고 있는 진화론 을 과학 교과과정에서 제외시키자는 새로운 지침을 6대4로 채택했다.
새 지침은 그러나 단일 종(種)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세 진화'는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이로써 새로운 종(種)의 출현에 대해 영장류가 인류로 진화했다는 식으로 설명했던 영국 과학자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적어도 캔사스주 에서는 자취를 감추게 됐다.
⑰ 비시 프랑스 수립(1940) :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7월 10일 프랑스에 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 프랑스가 수립되었다.
비시 프랑스의 핵심인물이었던 피에르 라발은 휴전조약 비준을 위해 프랑스 비시에 의회를 소집한 후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권한을 부여하도록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페탱은 괴뢰정부에서 완전한 입법적․행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비시 프랑스가 점점 독일 정책의 도구로 전락해 나가는 동안, 프랑스의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노동령을 피해 시골과 구릉지대로 피신하면서 프랑스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힘과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결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샤를 드골의 임시정부가 프랑스 본토로 들어오고 1944년 9월 파리가 해방되자, 페탱의 비시 프랑스는 붕괴되었다.
비시 프랑스의 주요 인물 중 라발은 1945년 사형에 처해졌고, 페탱은 사형판결 뒤 독방감금형으로 감형되어 1951년 감옥에서 죽었다.
⑱ 파리지하철 개통(1900) : 7월14일, 파리 만국 박람회가 열렸다.
개선문을 거쳐 콩 코드 광장, 루브르를 지나는 10㎞ 길이의 파리 메트로(지하철)가 개통된 것은 바로 이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기차가 땅 속으로 다닌다 !
''메트로 타보기''는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는 ''이 동''이라기 보다는 ''놀라움의 체험''이었다.
대중들의 놀라움은 그러나 ''땅속으로 가는 기차''에 그치지 않았 다.
지하철 입구와 승강장,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화려하고 웅장하 게 장식하고 있는 ''전혀 새로운 건축 양식, 전혀 새로운 디자인''에 있었다.
지하철 입구 표시판에 새겨진 구불구불한 글씨체와 개구리 눈알 처럼 튀어나온 가로등, 햇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 지붕. 사람들은 베르사이유 궁전 루브르 박물관 등과는 또다른 아름다운 곡선과 색채, 회화적 디자인을 아침 저녁으로 이용하는 지하철 입구에서 마주하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1900년 7월 19일 런던, 뉴욕, 시카고, 부다페스트, 글래스고, 그리고 빈 에 이어 시작된 파리 지하철의 역사는 올해로서 100년을 맞는다.
⑲ 소비에트 헌법 제정(1918) : 11월 7일 제2차 소비에트 의회가 개최되었을 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의 지지를 받은 볼셰 비키는 이미 정권을 잡았고, 의 회는 기정사실에 직면하여 인민위원회의 소비에트 평의회 집권을 인준하였다.
다시 레닌의 아이디어가 승리하였다. 러시아는 1당 이 지배하고, 다른 좌익정당들과 권 력을 나누지 않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공산당 독재를 수립하였다. 바로 1 개월 후에 선출된 의회가 소집되었을때 다수당인 사회주의 혁명당은 400석을 차지한데비해서 볼셰비키 의석수는 168석에 불과하 였다.
그러나 적군이 전등 물 그리고 난방을 단절한 가운데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새로운 혁명정부는, 쉽게 조각나 버릴 것이라고 서방국가들은 기대하였지만, 농지 국유화, 노동자 에 의한 공장운영권 이전 등 몇가지 포고령을 내렸다.
그러나 파업을 금지했고, 노동조합의 금지, 은행의 국유화, 그리고 식량과 기타 기본상품의 사매매(私賣買) 억제등의 조처를 취했다. 그후 1918년 3월에 독일과 불리한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7월 10일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 하고, 다른 정당을 금지하며 신문과 기타 통신을 엄히 통제하는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을 공포하였다.
기대하였던 다른 나라의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또는 전쟁이 끝나자 살아 남지 못했다.
그러나 1919년 3월에 설립된 3차인터내 셔널은 공산주의 사상의 해외 전파를 위한 적절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⑳ 그린피스의 핵실험감시선 '무지개 전사'호,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서 폭발(1985) : 프랑스 정보기관 DGSE(대외치안총국)의 계획적인 폭발로 폭파된 그린피스의 핵실험감시선 '무지개 전사호'.
1985년 7월 10일 오후 11시50분경 뉴질랜드의 오클랜드항에 정박중이던 국제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 소속 핵실험감시선 '무지개 전사'호가 기뢰 폭발로 침몰, 1명이 사망했다.
감시선은 무로아 환초에서 프랑스 핵실험 중단을 호소하기 위해 활동중이었다.
뉴질랜드정부와 프랑스정부 조사에 의해 이 사건은 프랑스 정보기관 DGSE(대외치안총국)의 계획적인 폭발로 밝혀졌다.
미테랑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수사초기에는 고위당국자가 이를 저지하려 한 은폐공작이 발각돼 프랑스 국방장관과 DGSE 최고책임자가 해임되기도 했다.
11월말 체포된 2명의 DGSE 공작원에게는 10년 금고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이듬해 7월, 뉴질랜드 수상은 배상금으로 7백만달러를 받고 범인 2명을 프랑스에 인도해 양국 국민을 경악케 했다.
*** 佛정부 그린피스선박 폭파공작(1985) : 끈질기게 핵실험을 방해하는 그린피스. 프랑스엔 눈엣가시였다.
1985년 그들이 남태평양 모루로아 섬의 프랑스 핵실험장을 아예 봉쇄하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폴리네시아인들은 독립을 위해 그들과 연합 시위를 벌일 태세였다.
프랑스로선 참기 어려웠다.
공작이 필요했다.
프랑스는 그린피스의 주력 무지개 전사(레인보 워리어)호가 기항할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그린피스 지부에 정보원을 심어 뒀다.
7월 7일 무지개 전사호가 오클랜드 항에 들어왔다.
무지개 전사호는 여기서 수십 척의 선단을 이끌고 모루로아로 갈 예정이었다.
프랑스 요원 10여 명도 오클랜드에 와 있었다.
10일 오후 8시 30분. 한 요원이 무지개 전사호로 헤엄쳐 갔다.
그는 기관실 외벽과 스크루 근처에 폭탄을 장치하고 1분 간격으로 터지도록 조정했다.
배는 못 쓰게 만들되 사람은 해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오후 11시 38분 기관실 쪽에서 폭탄이 터졌고, 배가 전복되려 하자 선장은 대원들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명령했다.
사진작가 페르난두 페레이라는 카메라를 꺼내 오려고 선실로 내달렸다.
그때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배는 페레이라를 태운 채 가라앉았다.
뉴질랜드 사상 첫 테러였다.
경찰은 기민하게 대처했으며 시민의 제보가 잇따랐다.
보트클럽 경비원은 잠수복 차림의 수상쩍은 남자가 탄 자동차 번호를 알려 왔다.
경찰은 렌터카임을 확인하고 차를 반납하려던 부부를 체포했다. 프랑스 대외안전총국(DGSE) 요원인 그들은 부부로 가장한 채 위조 스위스 여권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부인했으나 르몽드는 9월 17일 DGSE 책임자 피에르 라코스트 장군과 샤를 에르뉘 국방장관이 관련돼 있다고 밝혔다. 이틀 뒤 라코스트는 해임됐고, 에르뉘는 사임했다.
22일 로랑 파비우스 총리는 프랑스의 소행이라고 털어놨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범죄요,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20년 만인 지난해 7월 10일에는 미테랑이 미친 짓을 승인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빗발치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그린피스는 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환경단체로서 우뚝 서게 됐다.
못 쓰게 된 무지개 전사호는 1987년 12월 마타우리 만 깊은 바다에서 물고기들의 안식처가 됐다.
1989년 7월 10일엔 어선을 개조한 새로운 무지개 전사호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진수됐다.
새 무지개 전사호는 무지개는 침몰되지 않는다며 핵실험 반대 전투에 복귀했고, 프랑스는 1996년 모루로아 핵실험장을 폐쇄했다. 무지개 전사들의 승리였다.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2006)
㉑ ‘노래하는 수녀’ 데케 녹음(1961) : “도미니크, 니크, 니크 성인은 정말 소박하게 살다 갔다네
용병으로, 청빈하게 노래 부르며 모든 길로, 모든 곳으로/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을 한다네….”
벨기에 도미니크회 피셰르몽 수녀원에 한 수녀가 있었다.
이름은 자닌 데케(1933∼1985).
자닌 수녀는 1959년 브뤼셀의 한 음악 상점에서 가진 돈을 모두 주고 기타 하나를 구입해 수녀원에 들어갔다.
수녀원에서 자닌은 티 없이 맑은 영혼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동료들은 그걸 아주 좋아했다.
이 노래들은 음반으로 제작됐다.
녹음은 1961년 7월 10일 브뤼셀에 있는 필립스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기술진은 자닌의 순결하면서 강렬한 흡인력을 가진 노래를 듣고 매료됐다고 한다.
‘노래하는 수녀’ 음반은 1963년 12월 7일부터 4주 동안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이 음반은 최근 국내(아울로스 뮤직)에서도 발매됐다.
앨범에는 이름 대신 ‘미소 짓는 수녀(Soeur Sourire)’로만 적혀 있었지만 화제의 주인공을 불러오려는 세속의 손길은 수녀원까지 뻗쳤다.
자닌 수녀는 서둘러 콘서트를 열어야 했고 1964년에는 인기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했다.
1965년에는 데비 레이놀즈가 주연하는 영화 ‘노래하는 수녀’도 만들어졌다.
인기가 높아질수록 점점 예측지 못한 길로 접어들게 됐다.
1965년 자닌 수녀는 다시 신앙생활에만 몰두했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은 감출 수 없었다.
결국 수녀원을 떠나 콘서트를 열었고, 수익금을 수녀원으로 보냈다.
자닌이 원했던 것은 단지 노래였을 뿐 명성도, 돈도 아니었다. 1967년 발매된 두 번째 앨범 ‘나는 천국에서는 스타가 아니에요’는 자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1985년 4월 자닌은 52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였던 아니 페셰와 함께. 자닌과 아니는 자폐증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는데, 1980년대부터 벨기에 정부로부터 세금문제로 엄청난 압박을 받아왔다.
번 돈을 거의 수도원에 보냈던 자닌은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을 인정할 수 없었다.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노래만 하고 싶었던 순수한 영혼이 돈에 연루돼 어처구니없이 스러진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간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자닌과 아니의 유서)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07)
㉒ 크세노폰(Xenophon) & 경제학 :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기원전 401년 여름날. 페르시아 내전에 동원된 그리스 용병부대에 혹서를 잊게 할 공포가 밀려 들어왔다.
자신들을 고용한 페르시아 왕자가 살해됐기 때문이다.
외국인 반역자로 몰려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될 상황에서 크세노폰(당시 30세ㆍXenophon)이 나타나 목청을 높였다.
‘똘똘 뭉쳐 아테네로 돌아가자.’
고국에서 2,400여㎞나 떨어진 페르시아 한복판.
그리스 만인대는 동상과 영양실조,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20개 이상의 이민족과 싸워가며 고향을 떠난 지 1년8개월 만에 대부분 살아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부유한 시민의 자제이자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였던 지식인 크세노폰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대탈출을 기록한 그의 저서 ‘아나바시스(소아시아 원정기)’는 훗날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에 길잡이로 쓰였다.
‘동양에 대한 서구의 군사적 우위’가 이때부터 굳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1999년 7월10일 영국 리버풀대학에서는 크세노폰이 이끈 만인대 2,4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아테네를 저주하며 떠난 그는 스파르타에 머물며 ‘향연’을 비롯해 수렵과 기마술까지 아우르는 숱한 저술을 남겼다.
아테네의 민주정보다 스타르타식 전체주의를 선호해 오늘날 네오콘의 조상격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그가 남긴 저술 가운데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이코노미코스(Oikonomikos)’.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와 관습이나 법을 의미하는 ‘nomos’의 합성어인 오이코노미코스는 가정사보다 효율적인 농업경영과 분업을 주내용으로 담았다.
‘경제학(economics)’라는 단어도 오이코노미코스에서 나왔다.
크세노폰을 최초의 경제학자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다.
㉓ 美‘원숭이 재판’(1925) : 미국 테네시 주의 데이턴에 5000여 명이 몰렸다.
주민 1800명의 작은 마을이 갑자기 시끌시끌했다.
상인들은 인파 속에서 성경, 장난감 원숭이, 핫도그, 레모네이드를 팔았다.
목사들은 침팬지 모습의 전시물 사이를 돌아다니며 설교에 열중했다.
레아 카운티 법정의 ‘원숭이 재판’은 엄숙하기보다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1925년 7월 10일이었다.
피고인은 존 토머스 스콥스. 25세의 고교 과학 교사였는데 테네시 주의 버틀러 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해 3월에 통과된 이 법은 인간이 신의 피조물임을 부인하거나 동물로부터 진화했다는 어떤 이론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스콥스는 법의 문제점을 알리려고 학교에서 일부러 진화론을 가르쳤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그를 도왔다.
약자 변론으로 유명한 클래런스 대로가 변호를 맡았다.
검사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민주당 대선후보로 세 번이나 출마한 경력을 가진 거물이 나서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판의 하나가 열리게 됐다.
존 라울스턴 판사는 다음 날부터 재판을 법원 잔디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방청석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오자 건물 바닥이 무너질까 봐 내린 결정이었다.
브라이언은 “유럽의 원숭이가 우리의 조상이냐”고 주장했고, 대로는 “이브가 진짜로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느냐”고 맞섰다.
진화론에 대한 전문가의 과학적 설명을 변호인이 증거로 제시했지만 판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콥스에 대한 재판이지, 법 자체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대로는 7월 21일 마지막 진술을 하면서 유죄 평결을 요청했다.
항소를 한 뒤에 문제를 계속 부각하려는 의도였다.
배심원단은 8분간 검토한 뒤 유죄평결을 내렸다.
벌금으로 100달러를 내도록 했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보수적 색채가 강한 테네시 주의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테네시 주 대법원은 2년 뒤 이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68년 비슷한 내용의 아칸소 법이 수정헌법 1조(언론자유 규정)를 위반했다며 위헌결정을 내렸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2008)
㉔ 미국 통신위성 텔스타 우주중계(1962) : 미․소 양국간의 불을 뿜는 우주경쟁은 어디까지나 전략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소련의 군사적 일변도경향에 비해 미국은 기상․통신․과학․관측 등 우주 탐험 과학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미국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과학탐험에 집중하여 1962.3.7에는 태양관측위성을, 5월 3일에는 인공위성에 의한 텔레비젼사진 전송에 성공하였고, 7월 10일에는 미국 민간 전화전신주식회사에서 설계․건조된 텔스타 통신 위성을 발사함으로써 최초로 텔레비젼의 중계시험에 성공하였다.
****세계 최초 통신위성 텔스타 발사(1962) : 미국은 7월 10일 첫 통신위성 텔스타 발사에 성공하여 7월 23일 통신위성을 통한 TV중계를 하였다.
텔스타위성(Telstar衛星)은 미국 최초의 실용 통신위성으로 AT&T사(社)가 세계의 위성통신망을 실현하기 위해 지상 1,000~5,000km, 적도에 45°의 기울기를 가지는 궤도 위에 1962년 7월 10일 발사하였다.
텔스타 1호는 미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텔레비전 중계를 처음으로 실현하였을 뿐 아니라, 텔스타 1호를 이용하여 다중전화․사진전송․고속도 데이터전송․컴퓨터 제어․기상도 전송 등도 시도하였으나, 4개월 후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고장이 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후 개량형 텔스타 2호가 1963년 5월 7일 발사되었다.
현재의 통신위성은 이런 종류의 이동형이 아닌 정지형이며, AT&T사(社)도 그후 통신위성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㉕ 기타 오늘의 역사
1592 이충무공, 안골포해전 승첩
1781(조선 정조 5) <국조보감> 편찬 착수
1890 와이오밍주, 미합중국에 44번째로 가입
1894 일본, 서울-인천 전선가설공사 시작
1907 마산노동야학 설립(한국 최초의 노동야학)
1924 시대일보 자진 휴간
1924 누르미, 제8회 파리올림픽대회 1,500m와 5,000m 경주에서 세계신기록
1927 별 창간.조선천주교회 경성교구 청년연합회에서 발행한 월간 지
1930 예수그리스도 행슐 발행.기독교문헌.저자 퍼브스,클라크,오천 영.이경혁 공역.발행처 조선예수교서회.
1931 노르웨이, 그린랜드 합병 선언
1936 인천에 소년형무소 설치됨
1937 사회주의 운동가 한위건 작고
1938 「하워드 휴즈」, 91시간만에 세계일주비행 신기록 수립
1940 프랑스, 제3공화정 폐지
1943 연합군, 시칠리아 섬 상륙작전 개시
1946 해방후 최초의 전문-대학입시 실시
1950 기독교민주동맹 창립.6.25사변 북괴군 남침때에 서울에서 발 생한 일종의 기독교 반역도당의 명칭이다.
1952 신익희 국회의장 피선 부의장에 조봉암,윤치영
1953 소련 부수상 겸 내상 베리야 추방 권력투쟁으로 실각
1953 한국휴전회담 재개. (7.27 조인)
1954 미국평화식량계획의 기초가 되는 미국공법 480호 의회 통과
1955 제1회 세계 어머니대회 선언(스위스 로잔)
1956 야당, 국회서 특혜융자를 폭로
1958 캄보디아, 시아누크 내각 성립
1962 김현철 내각수반 취임
1965 고려대생 10명 오대산 중턱서 조난사
1965 알제리 혁명지도자 부메디엔 새정부 수상에 취임
1967 UN안보리, 콩고의 외인용병 금지 결의안 가결
1967 제7대 국회 개원 이효상 국회의장 피선
1967 유엔 안보이사회, 콩고의 외인용병 금지결의안 가결
1967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최초 참가
1967 한국주택금고 발족(주택은행 전신)
1969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창설
1973 바하마,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4 남북적십자사, 1차 실무회담(판문점)
1974 비상보통군법회의, 인혁당 피고인 21명 선고공판, 7명 사 형선고
1975 이스라엘, 시나이의 2개 유전을 이집트에 반환
1975 한국성결교회연맹 창설.성결교회협의체.기독교대한성결교회.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교회, 예수교대산성결교회(혁신)등 참여 하여 조직.
1977 한국, 제23회 국제기능올림픽서 종합우승
1985 국제환경보호단체(그린피스) 감시선, 뉴질랜드의 오클랜드항 서 폭발
1990 한국-일본-홍콩간 해저 광케이블 개통
1990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재선
1991 유고의 슬로베니아 공화국에서 폭력 난동 발생
1991 보리스 옐친, 러시아 최초의 자유선거로 대통령에 당선 취임
1992 마누엘 노리에가 전파나마독재자, 마약밀매혐의로 40년형 선 고
1993 김영삼 대통령-클린턴 미 대통령, 청와대에서 정상회담
1994 레오니트 쿠츠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선임
1995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 가택연금 해제
2001 가수 탤런트 등 유명 연예인, MBC 출연 거부 선언
2003 미국 항공우주국(NASA), 태양보다 수십억년2000 전에 생긴 130억살 행성 발견
오늘의 인물
① 배용순(裵用順 ;1908 - 1988.7.10) : 윤봉길의사의 미망인.
81세로 타계.
‘의사의 아내'로 상해의거후 열부 56년.
윤의사보다 1세 연상.
16세에 결혼(1922년).
유복자 아들과 함께 삶.
슬하에 6녀 1남의 손자녀를 둠.
여사는 명가의 맏며느리로, 의사의 아내로, 아버지없는 아이의 어머니로 1인 3역의 삶을 모자람없이 살아오셨다.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는 그를 기려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 시행해 왔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14일 엄수.
장지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1988.7.12, 조선일보).
⇨ 4월 29일.
② 김창숙 출생(1879) : ⇨5월 10일.
③ 박태원(朴泰遠 ; 1909.12.7 ~ 1986.7.10) : ⇨12월 7일.
소설가.
필명(별칭) 몽보(夢甫) ․구보(丘甫) ․구보(仇甫) ․구보(九甫) ․박태원(泊太苑).
서울 출생.
경성제일고보,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시 《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 《신생(新生)》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 《천변풍경(川邊風景)》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표한 《우맹(愚氓)》 《골목 안》 《성탄제》 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다.
8 ․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작가의식의 전환을 꾀한 바 있고, 6 ․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李泰俊) ․안회남(安懷南)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서술된 작품 외에 단편소설 《사흘 굶은 보름달》 《애욕》 《5월의 훈풍》, 장편소설 《태평성대》 《군상(群像)》 등이 있다.
④ 한위건(韓偉健 ; 1896 ~ 1937.7.10)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낸 사회주의 운동가.
이철악(李鐵岳)․이철부(李鐵夫)․광우(光宇)라고도 불리었으며, 1896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1917년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3․1운동 사전 모의에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4월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위원이 되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에 입학한 뒤,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1912년 10월 결성)에 가입하였고, 이때 독립자금 모금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1923년 7월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국내 순회강연대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강연하였으며, 같은 해 9월 관동대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도쿄로 가서 이재민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귀국하여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 이사가 되었고,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
1926년 11월 화요회(火曜會)․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 등의 통합단체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여 정우회선언에 동참하였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에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고 간사에 선임되었으며,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대중에 기반한 공산당을 새롭게 결성'하라는 '12월 테제'(일명 조선공산당 재건 지령)에 따라 당의 재건 운동을 벌였다.
1930년 4월 고경흠(高景欽)과 김차정을 당의 재건을 위해 도쿄에 파견하였고 1930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3년 중국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 허베이성[河北省]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6년 류사오치[劉少奇]에 의해 중국공산당 허베이성위원회 서기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옌안[延安]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⑤ 프루스트(Marcel Proust ; 1871.7.10 - 1922.11.18) : 프랑스의 소설가.
「근대 심리파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청년 시대에는 사교계의 총아였으나 천식병(喘息病 ;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호흡 곤란의 병)으로 인하여 병상에서 창작에만 몰두하였다.
대표작은, 인간 의식하의 사실의 기억을 더듬어 해명하고 시적으로 표현(잠재의식의 추구)한 걸작 <잃어버린 때를 찾아서>가 있다.
⑥ 휘슬러(James Abott Mcneil Whistler ;1834.7.10 - 1903.7.17) : 미국에서 태어난 영국의 화가.
프랑스로 가 그림공부를 한 후, 마네와 친교를 맺고, 인상 주의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런던에 정주.파리의 낙선자 전람회에 <백의의 소녀>를 출품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초상>도 그의 유명한 작품이다.
⑦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 ; 1787.11.18 - 1851.7.
10) : ⇨11월 18일.
프랑스의 사진기 발명가.
파리에서 디오라마(반투명상의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리고, 이에 반사광선이나 투명광선을 써서 변화시키면서 보여주는 것)의 원화(原畵) 화가로서, 카메라 암상자(暗箱子)를 쓰던 때에, 그 화상을 기계적으로 정착시키려는 의도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1829년 같은 의도로 연구에 착수한 프랑스의 J.N.니에프스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10년의 계약을 맺어 니에프스가 발명한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를 다시 발전시켜 1837년 다게레오타입(daguerr
eotype)이라는 독자적인 사진현상 방법을 발명하였다.
이것은 식염의 포화용액에 의한 현상법이며 니에프스가 죽은 뒤에 발명된 것이었다.
이 발명으로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는 6,000프랑, 니에프스의 아들에게는 4,000프랑의 연금을 주었고, 더욱이 파리 천문대장 D.아라고를 통하여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학사원의 과학 ·미술 아카데미합동회에서 정식 발명의 승인 강연을 하게 하였다.
근대 사진술의 시조이다.
(두산백과사전)
⑧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7.10 - 1978) : 화가 조르지오 데 키리코가 그리스의 볼로스에서 태어났다.
키리코는 아테네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지만 18세에 뮌헨으로 간 뒤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활동했고, 마침내 이탈리아에 정착해 이탈리아인이 되었다. 그가 본디 이탈리아계 그리스인이었으므로, 이탈리아에 귀화한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기도 했다.
예술사에서 키리코라는 이름과 긴밀히 관련된 갈래는 형이상회화(pittura metafisica)다.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으로 가는 레일을 깔았다고 평가되는 형이상회화는 과장된 원근법, 기괴한 기하학적 형태, 음산하고 불길한 분위기 따위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했다.
이런 표현법을 추구한 키리코와 그 동료들은 형이상파로 불리며 미래파 이후의 이탈리아 화단을 한 때 주름잡았다.
이들은 자신의 조형관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발로리 플라스티치(조형 가치)라는 기관지를 펴내기도 했다.
형이상회화의 대표작으로는 키리코의 무한한 공간의 향수 우울한 토리노 거리의 우울과 신비 따위가 꼽힌다.
특히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가는 소녀를 등장시켜 이탈리아의 한 거리 풍경을 을씨년스럽고 몽환적으로 그려낸 거리의 우울과 신비는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키리코는 만년에 보수적 화풍으로 돌아가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니 그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이면서 배신자였던 셈이다.
키리코는 문필가이기도 했다. 형이상회화의 몽환적 세계를 연상시키는 소설 에브도메로스와 자전 에세이 내 생애의 추억이 대표적 저술로 꼽힌다.
형이상파로 같이 활동하기도 한 그의 동생 알베르토 사비뇨(본명 안드레아 데 키리코 사비뇨: 1891-1952)도 회화, 문학, 음악을 넘나들며 활동한 재사였다(고종석, 2004).
⑨ 피사로 출생 (1830) : ⇨11월 13일.
⑩ 갈레(Johann Gottfried Galle ; 1812.6.9 ~ 1910.7.10) : 독일의 천문학자.
비텐베르크 근교에서 출생.
1830년 베를린대학에서 수학과 이학(理學)을 공부하였다.
1835년 베를린대학에 천문대가 설치되자 천문대장 엥케의 조수가 되었으며, 6년간 지름 23cm의 망원경으로 천체관측에 종사하였다. 1838년 토성의 제3고리를 발견하였고, 1839~1840년 3개의 혜성을 발견하였다.
1846년 9월 23일 파리천문대의 르베리에로부터 미지(未知)의 행성 탐사의뢰를 받고, 그날 밤 추정위치 부근에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행성인 해왕성을 발견하였다.
1851년부터 46년 간 브레슬라우천문대 대장으로 있으면서, 1873년 소행성(小行星) 플로라의 지심시차(地心視差)를 측정하고, 태양시차(太陽視差)를 8.82″±0.06″으로 결정하였다.
이 밖에도 유성(流星)과 혜성(彗星)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⑪ 칼뱅(John Calvin ; 1509.7.10 - 1564.5.27) : 프랑스 출신의 스위스 종교 개혁가.
신학자.
루터의 뒤를 이어 가톨릭에 반대하고 1536년 제네바에 망명하여 종교개혁을 수행하였으며, 일반시민의 풍습, 생활까지도 개혁하여 유럽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성경을 교리의 최고 권위로 인정하고, 섭리․예정론을 주장했다.
저서는 <기독교 강요>가 대표적이다.
****칼뱅은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가이다.
오를레앙․파리 등지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고, 필리프 멜란히톤․테오도르 베즈 등 프로테스탄트 인문주의자들과 어울리면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1536년 <기독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출간하면서 개신교의 대변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 해 가을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중 제네바에서 기욤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의 종교개혁 운동을 돕게 되었다.
시 평의회의 압력으로 한동안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망명자들의 교회를 담당하기도 했으나, 1541년 제네바 시민들의 호소로 다시 돌아가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우선 교회법령집 초안을 만들었는데,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제네바 교회 헌법으로 채택된 이 법령집은 개혁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그는 성경을 강해하고 목사단을 이끌고 장로회의를 주재하는 등 교회제도가 제대로 운영되도록 다각적인 활동을 벌였다.
또한 신학적 적대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칼뱅주의 신학을 확고히 했고, 1559년에는 신학교육을 위한 아카데미(제네바대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이후 그는 유럽 전역의 신교 전파에 힘썼으며,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제네바는 개신교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⑫ 기타 오늘의 인물⑬⑭⑮
0138 제14대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 사망 (제15대 황제 안토 니누스 피우스 즉위).
1086 크누트 사망.순교자 수호성자이며,1080년부터 덴마크의 왕,덴 마크의 에스트리드손 국왕 스베인 2세의 아들.
1517 콜리니 출생.샤티옹의 추기경이었으며 가스파르 드 콜리니의 형.1560년 피우스 4세는 그를 프랑스의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함.
1595 드렐랑쿠르 출생.프랑스 개혁교회 목사.다작의 저술가였는데, 그의 작품들 가운데 두편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 다.40판을 발행함.
1793 하이어 출생.루터교 선교사.미네소타에 최초의 루터교 대회를 결성하는데 기여함.동시대인들은 그를 애칭으로 [교부]하이 어로 불렀다.
1840 그릴 출생.독일 프로테스탄트 신자.1888년 이후에는 튀빙겐 에서 구약성서해석학 교수로 지냈다.그는 여러권의 책을 썼 다.
1875 흑인 교육가 메리 멕쿨레오드 베수네 출생
1884 독일의 이집트학 학자 리챠드 레프시우스 사망
1901 이정심 출생.장로교 목사.독립운동가,순교자,본명 이소절.중이
되었다 목사가 됨.
1905 극작가 박진 출생
1913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발레 지방 사상최고기온 56.7도 기록
1914 코트릴 출생.구세군 사관.한국 구세군 제13대 사령관.한국명 고득렬 1972년 12월 12일 제13대 한국구세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내한.
1915 소설가 솔 밸로 출생
1920 TV뉴스 앵커 데이비드 브링클리 출생
1926 성격배우 프레드 귄 출생
1943 미국의 천문학자 슐레징거 사망 - 사진술을 처음 사용하여 항성위치도의 제작과 별의 시차를 측정
1946 여배우 수 라이온 출생
1947 민요가수 아를로 귀스리 출생
오늘의 샘터
① 토마스 만의 <어느 사기꾼의 고백> : “ 우리가 그 일에 대해서 타협을 한 것은 7월 10일 밤이었다.
그 뒤의 타협을 위해 시간을 만들기란 24일 이전에는 무리였다.”
*「예술가는 정신적인 의미에서 사기꾼이라든가 범죄좌와 같이 신 용할 수 없는 인간이다.」
라고 토마스 만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주인공은 호감이 가는 청년이다.
⇨8월 12일.
② 칼빈의 말 : “하나님(神) 지식과 인간 지식은 둘로 갈라서 생각할 수 없다.
즉 자기 존재가 신의 존재에 종속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는 인간이 참된 자기의 모습을 알아 낼 수 없다.”
③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다.
그곳에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과 알아서 도움이 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르친다." - 장 칼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