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되돌아 보니 시문학의 맛에 길들여진 58년 세월이(1961~2018)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손소운(孫素雲) (1937~)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 가운데 문학에 열중했던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니 결코 짧지 않은 58여 년이 된다. 참으로 감회가 깊다. 4.19세대인 20대 초반, 숨찬 젊음을 문학이 좋아 당시 '白紙文學同人會 백지 문학동인회(1960년도 발족)' 동인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발표했던 창경궁, 덕수궁 돌담길 가두 시화벽전은 당시 문단과 화단에서 대단한 관심과 주목을 받았으며 서울 유일의 예술작품 전시관이던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1년에 한 번씩 7년 연속 시화전을 열었고 문학의 밤도 열어 시낭송회도 개최하면서 문학도로 문학탐구에 정진하다가 아무래도 생계일이 더 급하다는 생각에 1967년 방송계에 입문하면서 최연소 방송작가로 기독교 중앙방송 어린이시간에 어린이극장 시리즈 방송극을 집필 연출도 해 보고, 그 후로도 TV 방송이 없던 라디오방송 시절 어느 방송사에 전속으로 얽매이지 않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면서 연속방송극과 다큐멘터리 작품을 구성 집필하고 연출하면서 방송작품의 나레이션을 시낭송 형태로 시도하여 연출했던 실험도 해 보고 1969년도에는 러시아 중국 몽골어로 선교방송되던 극동방송에서 최초로 한국어 편성 방송이 시작되던 때, 최초의 세계명작 입체 방송극 작가 및 연출자로 선정되어 세계명작 작품을 한국어로 편극하여 방송했던 추억이 아슴아슴 떠오른다. 이제와서 새삼 뒤돌아 보니 내 젊음과 뜨거운 열정을 아낌없이 쏟았던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회억 된다. 우리나라 방송 초기의 내 작품들은 공중파로 모두 날려 보냈기에 지금은 보존된 자료들이 없어 무척 아쉬운 일로 남는다. 그러나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방송계의 제작분야의 세분화된 작업이 전문화로 쳬계가 잡히면서 우리나라 방송의 품질과 품격은 전문화되어 발전을 해 오고 있어 이 또한 초기에 활동했던 사람으로서 감회가 깊다, 유수와 같은 세월은 가고 그래도 내가 했던 몇몇 작품은 기록으로 남아있어 추억이 새롭다. 그 가운데는 특히 MBC-TV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대관령 1,2부작. EBS-TV '하나뿐인 지구 가운데 8부작, MBC-TV '우리는 뽀뽀뽀 친구' 50부작, 동아방송 단막극 '호반에서 대화', CBS-R 어린이극장, KBS-R 방학 일기, 공민영 방송 합동 제작 '자유의 구름다리' 프로그램에서 단막 방송극 '탈출'. FBS-R 부활절 특집극 '부활', 입체 연속방송극 '세계명작시리즈' 같은 작품은 지금까지 80년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보람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또한 한국성서대학교를 설립한 강태국 박사의 영상일대기 (한국성서대학교와 강태국박사), 전 호서대학병원장 김풍식 박사의 수상록, 반도체 클린룸 전문 기업 신성이엔지의 사사(社史)와 국내 최초의 건축설비 자동제어시스템 기술 사전 (대학교재), 등 11권의 저서와 국민은행, 주택은행 외환은행 대한항공 한국중공업 광양제철 대림산업 주, 삼양사 제일 생명 등 사내방송 제작과 사내방송 편성제작 실무기술교육을 교육하여 사내방송 제작을 자립하게 했던 공적과 크고 작은 기업의 홍보영화 제작과 CM, CF 제작 지원 자문 실적을 남긴 점, 또한 매우 보람 있었던 추억으로 남는다. 또 하나 국내 최초의 시낭송 연구기법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여 시낭송계의 낭송기법에 기초를 마련했던 점과 시낭송대회 심사와 특강을 하며 내가 가진 지식을 공유했고 손해일 시인과 정덕희 교수의 시 낭송집 제작과 지방자치제 초기, 원주시청의 '달리는 원주 시정방송'을 제작하여 원주시 시정의 핵심 정책과 시행을 시민들에게 재고 시켰던 일 또한 보람 있었던 일로 회억 된다. 앞으로 생존할 날들이 얼마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니 참 많은 보람된 일을 한 것 같다. 제12회 대한민국 장애인문학상 우수상과 남서울신문 제1회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과 몇몇 작가의 작품에 대한 문학평론과 미술평론을 남기는 필력을 추억해 보니 이 또한 잊을 수 없는 문학의 길에서 의미 깊은 발자취로 남는다.오래 전 아주 오래 전 군 복무 시기이던 1958년도 전국 국군장병대상 문예작품공모에서 시 '표정의 의미'로 시부문 당선을 하면서 이를 계기로 나는 시문학에 의욕을 불태웠으나 지금까지 가슴이 탁 터지는 명작 시 한편 쓰지 못한 점이 무엇보다 아쉬운 사족으로 남는다.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이 턱 없이 부족한 것만 같다. 어찌 보면 불과 수년을 살 것만 같은데 남은 생애를 순리데로 겸허하게 살다가 귀천하는 날까지 좋은 책 읽고 좋은 시 습작하는 일에 문명적 행복을 한껏 누려 볼 생각이다. 최근 다양한 콘텐츠로 급속히 발전되는 인터페이스의 무한 공간 가운데 문명적 소통의 상관관계에서 활력적 소통과 정보 공유의 기반이 되고 있는 인터넷의 공간 속에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나의 졸작 작품들과 지난날 문학사에 남긴 몇몇 신문기사 자료들이 나돌고 있어 일부나마 여기 모아 본다. 오늘 나의 회고의 글을 이곳에 올리는 뜻은 오랜 시간 자문위원으로 상관관계에 있는 한국영상문학회 카페 (손소운 평론방)에 입춘을 맞으며 그동안 문반에서의 나의 족적을 남겨 본다. 이제와 이 나이에 새삼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 보니 문학(文學)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지했던 유일한 위안이었으며 시(詩)는 나를 가장 치열하게 괴롭힌 문화적 사유(思惟)였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2018년 2월 3일, 글 / 손소운 孫素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