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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되기 원합니다
히브리서 11:39-40 2023/08/20 성령강림 후 제12주
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으로 시작할까합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렇습니다.
사랑이 제일이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사랑, 그 사랑의 실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를 말하는데, 바로 앞 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고전13:12입니다.
①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②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니까 바울이 말한 사랑이란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 또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 또한 그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사랑(아가페)이었습니다.
(‘에로스’ ‘필레오’가 아님을 주의하라)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제일먼저 언급한 덕목이 오래 참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라는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거쳐야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아는 사랑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던 것처럼,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던 것처럼,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진 시간을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 때’라는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거쳐야만 비로써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친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지금 제가 머물고 있는 자리가 바로 오래 참음의 시간이지요.
물론 간혹 가다, 그 다음에 나오는 친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기하지 않는다, 뽐내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는다.’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에게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어떤 단어를 품고 살아가느냐고 짓궂은 물음(질문)을 던진다면,
저는 숨도 쉬지 않고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소망이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사랑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 나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소망이지요.
그래서 소망이 피어오를 때 마다 찬송가 338장을 부릅니다.
1.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3.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4.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 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이 찬양은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 야곱을 소제로 만든 찬양입니다.
야곱, 그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형 에서에게 장자의 권한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새)창25:24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25:25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에돔)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털)라고 하였다.
25:26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발뒤꿈치를 잡다/속이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야곱이 선택한 것이 야망이었습니다.
야망이 있는 남자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은 자신의 야망을 다 성취합니다.
이삭의 장자가 되고, 장자에 걸맞게 아주 큰 부자가 되지요.
하지만 야곱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돈과 공허 속에 빠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자신과 씨름하기 위해 찾아 온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새)창32: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사람/천사/하나님)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32:25 그는 도저히 야곱(야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32:26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왜냐?
자신과 씨름하는 그 사람이 축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이 샐 때까지 씨름하는 어떤 사람을 붙들고 늘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새 이름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일종의 세례명이었지요.
이때부터 야곱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인생을 소망으로 품게 됩니다.
(새)창32: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32: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다, 하나님이 겨루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길!)이다."
32:29 야곱이 말하였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하면서, 그 자리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축복이 필요합니까?
그러면 동이 틀 때까지 씨름하는 소망의 시간,
그 기다림의 시간을 귀히 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소망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믿는 사람, 곧 신자(信者)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품은 이들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이렇게 설명했던 것입니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소망)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소망)의 증거니
그러니까 신자(믿는 사람)란,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라는 사람들이겠지요.
무엇을 바라는 사람일까요?
복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예를 든다면, 하나님을 아는 행복이겠지요.
또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으로 설명한자면, 하나님을 아는 사랑(아가페)이겠지요.
다시 말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
그 사랑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바로 신자,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13: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13: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친절은커녕 오래 참음에서 걸러 넘어지지요.
그래서 믿는 사람, 신자(信者)의 두 번째 정의가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새)히11:3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었다는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 하는 사람이
바로 신자,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제물을 드림으로써 그는 의인이라는 증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말하고 있습니다.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옮겨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증언을 받은 것입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1:7 믿음으로 노아는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11:11 믿음으로 사라는 11:20 믿음으로 이삭은
11:22 믿음으로 요셉은 11:24 믿음으로 모세는
11:29 믿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11:31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후, 신약으로 넘어가 올까요?
11:35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11: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11: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11: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11:39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11:40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셔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의 전통이 신자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인들의 축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지난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울의 축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정확히 6월 29일에 순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전통은 오랫동안 이 날을 두 성인의 축일로 지켜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두 인물의 축일이 같다는 사실이 묘한 울림을 줍니다.
베드로의 순교를 그린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차마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수 없어 자기를 그렇게 처형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반면 바울은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합니다.
로마 외곽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목이 세 번 튀어 올랐고, 목이 닿았던 곳마다 샘이 솟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가리켜 ‘세 개의 샘’ ‘트레 폰타네(Tre Fontane)’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바울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순교’로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소망, 부활의 소망, 새 생명의 소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그것을 증거 하는 신자, 믿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없다고 하는 것들을 소망하고, 또 그렇게 바라는 것을 믿고, 또 자신이 믿는 바를 증거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찬송가 463장을 펼쳐 가사를 묵상하겠습니다.
1.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러면 첫째 2절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2.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둘째 3절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듯 진심으로 거룩하십시오.
3.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셋째 4절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진심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십시오.
4.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