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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īn bù ]
码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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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步
拼音jīn bù
注音ㄐ一ㄣ ㄅㄨˋ
词语解释津步[ jīn bù ]
⒈ 码头。
引证解释
⒈ 码头。
引宋 洪迈 《夷坚丁志·符助教》:“满城相传, 符助教 被鬼取去。及还,至镇岸,临欲登,黄衣已立津步上,举所执藤棒点其背。”
清 王夫之 《读四书大全说·论语·卫灵公篇十八》:“诸儒冗説纷纷,如雾行舟,不知津步,汰之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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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임도(趙任道) 1585년(선조 18)~1664년(현종 5)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59 봄, 昌原에 있는 眉叟 許穆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다.
許穆 1595 1682 陽川 文父, 和父, 熙和 眉叟, 台嶺老人 文正
裵尙龍 1574 1655 星州 子章 藤庵, 崇禎處士
〈開津期會錄〉은 裵尙龍 등과 함께 高陽의 開津에서 만나 山水를 유람한 글인데, 끝에는 許穆의 跋語가 첨부되어 있다.
간송별집 제1권 / 록(錄)○서(序)○설(說)○기(記) / 개진기회록〔開津期會錄〕
도동서원의 재실로 자리를 옮겨 쉬었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다.
다음 날 새벽에 김 찰방(金察訪)이 찾아 왔는데, 나이는 73세로 수염과 눈썹은 하얗고, 풍채는 청수하고 어깨와 등은 꼿꼿하고 걸음걸이는 가볍고 강건하여 굳세고 씩씩한 사람도 거의 미칠 수가 없었다. 이분은 문경공(文敬公)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서원의 옆에 산다.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제현들을 위해 술을 다섯 순배 돌렸는데 등암은 취해 누웠으니, 아마도 술은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아림(娥林)의 진사 서홍거(徐鴻擧)가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서 작별하였다.
澗松先生別集卷之一 / [序○説○錄○記] / 開津期會錄
昭陽協洽之歲姑洗之月十有七日。余與藤庵裵丈會于高陽之開津步。踐宿約也。蓋去年冬。余省墓於一善。歷宿藤庵草廬。主人力疾追別於檜淵書院。解携之朝。不能爲情。握手歎曰。君垂耳順。我迫從心。寄跡人間。能復幾何。何以則更圖簪盍於就木之前乎。余曰。老境遠涉誠難矣。無已則有一焉。開山渡口在道東下流。有松林沙水之勝。此去彼來。道里均焉。欲謀會。盍於此相要。藤庵曰諾。遂定日還棲數閱月。許煕和遁庵公傳致裵丈書。其大要開津會屈指遣日云。余於是日。理裝啓行。行具則匹馬雙僮。一壺五笥也。曾與李參奉,韓察訪,趙景閔諸賢約與同行。而三友皆被魔障。獨有曹生碩護行。午前。藤庵先到待之。隔江相望。從而來者裵秀才元明,孟明,金秀才玉汝,鄭秀才景覆。二裵一金。藤庵之子姪及外甥。而鄭卽文穆先生之孫也。迎笑沙頭。喜氣可掬。藤庵先酌一罇。慰我遠來。各一杯而止。俄而雲陰四合。小雨點滴。僉曰。津頭斗屋僅得容膝。而天又欲雨。無乃造物戲我勝會耶。移席道東齋室而休憩焉。是夜雨下。翌日曉。金察訪來見。年七十三。鬚眉皓白。骨相淸癯。肩背竦直。步履輕健。彊壯者殆莫能及。乃文敬公奉祀孫而居在院側者也。余於食前。爲諸賢行酒五巡。藤庵醉臥。蓋杯酌非所長也。
娥林進士,徐君鴻擧適過去。暫敍而別。本邑士友來會者。郭主簿子固,郭參奉德懋,郭上舍子厚。子厚方爲山長云。此外諸年少聞而至者亦十許。初意欲散於今日。而雨未快晴。且被主人援止。察訪與院長相繼設酌。打話終晷。厥明。用時服謁廟庭。步出江滸。與諸友別。我與裵丈一行乘舟直下。抵開津初會之所。乃各分路。金察訪有惜別之淸。登舟回棹。郭子固以墻醪一壺亂酌舟上。藤庵又命子姪盡其餘杯。余亦心緖脈脈。勉循其意。隨量而飮。不覺微醺。客散江頭。回首茫然。獨與子固踽踽而歸。共宿其家。遲明乃還。蓋年前期會之說。出於偶然而畢竟踐約。無輕諾失信之悔。有久要不忘之美。求之衰世。亦不易得。藤庵。寒岡鄭先生晩年高弟也。其宏材偉器。足以有爲於世。而不幸盛年。抱王裒之痛。廢擧杜門終其身。識者惜之。公嘗執經岡門。聞心學之要。講禮之目。先生愛重之。余雖獲拜先生於少年之日。頹惰庸拙。終不得侍函丈。而先生已下世矣。以歆慕嚮往之勤。而見當時及門之士。能不傾心愛悅以求聞其緖言乎。況藤庵之於先生。非只見伊川面者也。修先生文稿。立先生祠廟。凡所以發揮先生事業者。無所不用其極。每遇公。如在先生之側。公許忘年之交。茲又踐遂成約於經歲之久。白髮蒼顏。相與婆娑偃息於寂寞之濱。雖古人千里命駕。蔑以過矣。臨別。藤庵屬余作文以記事。又於夏四月。馳書勉之。吾雖不文。其敢不承。以孤勤厚之望乎。抑又有一說焉。吾儕年皆六七旬。路隔二百里。會合之難。此後益甚。若必以相追逐同笑語爲親厚也。則論交之道。顧不淺淺乎哉。古之人有曠百世而相感者焉。有隔千里而神交者焉。是在心期與氣槩交孚之如何耳。曺子建有詩曰。恩愛苟不虧。在遠分日親。何必同衾裯。然後展慇懃。盍以此相勖焉。月日。龍華山人趙任道。書于臥雲軒。
附許煕和跋語
十六年春。穆居海上。藤庵丈人寄書數百里。約與龍華趙德勇丈共爲江上之期。穆相別二十年。得書甚喜。又樂江山之遊。卽復書許諾。及期。穆病不偕。而趙丈果與藤庵翁泛舟開山渡口。相樂數日而歸。八月。穆乘舟訪趙丈於龍華山中。趙丈出三月開津期會錄示之。穿深松出沙岸。泛春江擧觴相屬。相與懽甚。冒雨上金山。因共留書院。閱先師遺籍。講說禮義。於是士大夫諸生學子相從而至者又十餘人。其姓名字俱記之詳矣。穆私竊歎老先生旣沒。門生弟子親炙其訓者。於今世無幾。而唯裵,趙二丈又皆老白。穆流落南陬近十年。愈孤陋且多病。不得從二丈得聞餘論。良爲可惜。又不但辜負佳期。心追春渚之勝而已。因書所感。以爲開津期會錄跋。崇禎十六年仲秋下澣。陽川許穆煕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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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별집 제1권 / 개진기회록〔開津期會錄〕
계미년(1643, 인조21) 3월 17일 나는 배등암(裵藤庵) 어른과 고양(高陽)의 개진보(開津步)에서 만나기로 한 오래된 약속을 지켰다. 대개 작년 겨울 내가 일선(一善)에 성묘를 하고 등암의 집에 들러 묵었는데, 주인이 병을 무릅쓰고 회연서원(檜淵書院)까지 쫓아와 작별하였다. 이별하는 날에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손을 잡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나의 나이는 일흔이 다 되어 가는데, 인간 세상에 자취를 남기는 게 앞으로 얼마나 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죽기 전에 다시 빨리 만나기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노년에 먼 길을 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만 두지 않는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개산포(開山浦)는 도동서원(道東書院) 하류에 있고, 소나무 숲과 백사장 가의 물이 빼어납니다. 이곳에서 가고 저곳에서 오면 거리가 같으니, 만남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어찌 이곳에서 만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등암이 “좋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날짜를 정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몇 달이 지나 허희화(許煕和) 둔암공(遁庵公)이 배 어른의 편지를 전해주었는데, 그 큰 요지는 개진에서의 모임을 손꼽으며 날을 보내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날 행장을 꾸려 출발하였는데, 행구(行具)는 말 한 필과 노복 두 명, 술 한 병과 밥그릇 다섯 개였다. 일찍이 이 참봉(李參奉), 한 찰방(韓察訪), 조경민(趙景閔) 등 제현이 동행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세 벗이 모두 마장(魔障)이 끼여 조석(曺碩)만이 홀로 수행하였다. 오전에 등암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따라 온 자는 수재 배원명(裵元明)과 배맹명(裵孟明), 수재 김옥여(金玉汝), 수재 정경복(鄭景覆)이었는데, 배원명, 배맹명, 김옥여는 등암의 아들과 조카 및 생질이고, 정경복은 문목(文穆) 선생의 손자이다. 백사장 가에서 웃으며 맞이하였는데, 기쁜 기색이 그지없었다. 등암이 먼저 술 한 잔을 따라 멀리서 온 나를 위로하고 각자 한 잔을 마시고 멈췄는데, 잠시 후에 먹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모두 말하기를 “나룻가에 겨우 무릎을 용납할 만한 작은 집이 있지만, 하늘에서 또 비가 오려고 하니 조물주가 우리의 좋은 모임을 희롱하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도동서원의 재실로 자리를 옮겨 쉬었다. 이날 밤에 비가 내렸다.
다음 날 새벽에 김 찰방(金察訪)이 찾아 왔는데, 나이는 73세로 수염과 눈썹은 하얗고, 풍채는 청수하고 어깨와 등은 꼿꼿하고 걸음걸이는 가볍고 강건하여 굳세고 씩씩한 사람도 거의 미칠 수가 없었다. 이분은 문경공(文敬公)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서원의 옆에 산다.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제현들을 위해 술을 다섯 순배 돌렸는데 등암은 취해 누웠으니, 아마도 술은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아림(娥林)의 진사 서홍거(徐鴻擧)가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서 작별하였다. 본 고을의 사우로 와서 모인 자는 주부(主簿) 곽자고(郭子固), 참봉 곽덕무(郭德懋), 상사 곽자후(郭子厚)였는데, 곽자후는 막 산장(山長)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 외에 여러 젊은이들이 듣고서 이른 자가 또한 10명쯤 되었다. 처음에는 오늘 헤어지고자 생각하였으나 내리던 비가 빨리 개지 않고, 또 주인의 제지를 받았으며, 김 찰방이 원장과 함께 계속 술자리를 마련하여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하루해가 저물었다.
다음 날 시복(時服)을 착용하고서 사당을 참배하고, 강가로 걸어 나와 여러 벗들과 작별하였다. 나는 배 어른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곧장 내려와 개진(開津)의 처음 만났던 곳에 이르러 각각 헤어졌다. 김 찰방은 석별의 정을 지닌 채 배를 타고 뱃길을 돌렸다. 곽자고가 장료(墻醪) 한 병으로 배 위에서 술잔을 마구 돌렸는데, 등암이 또 자질(子姪)에게 명하여 나머지 술잔을 다 마시도록 명하였고, 나도 마음속 정을 머금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뜻에 힘써 따라 주량에 맞게 마셨는데, 나도 모르게 약간 취했다. 객이 강가에서 흩어진 뒤 머리를 돌려보니 아무 생각 없이 멍해졌다. 혼자 곽자고와 함께 외로이 돌아와 그의 집에서 함께 자고 새벽에 돌아왔다.
작년에 모임을 갖기로 약속한 말이 우연한 가운데서 나왔으나 끝내 약속을 지켜, 가벼이 승낙하여 신의를 저버린 후회가 없고, 오래된 약속을 잊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으니, 세도가 쇠한 세상에서 이런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등암은 한강 정 선생의 만년의 고제이다. 그의 큰 재목과 뛰어난 국량은 세상에서 큰일을 하기에 충분하였으나, 불행히도 장년(壯年)이 되어 왕부(王裒)의 아픔을 품고서 과거 공부를 폐하고 두문불출하며 일생을 마치려고 하니, 그를 아는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공은 일찍이 한강 문하에서 배웠는데, 심학(心學)의 요체와 예를 강론하는 조목을 듣고서 선생이 애지중지하였다. 내가 비록 어린 시절에 정 선생을 뵈었지만 나태하고 용졸하여 끝내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였고,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흠모하여 좇아가려는 정성으로 당시 한강의 문하에서 배운 선비를 만나면 마음을 기울여 기쁜 표정으로 그 도통의 실마리를 듣고자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등암은 선생에 대하여 단지 스승의 얼굴만 뵌 분이 아니다. 선생의 문고를 편찬하고 선생의 사당을 세웠으며, 무릇 선생의 사업을 드러내는 일에는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매번 공을 만날 때마다 선생의 곁에 있는 것 같았다. 공은 나에게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고, 또 해를 넘긴 오래된 약속을 지켜 이루었고, 흰머리 노쇠한 얼굴로 적막한 물가에서 함께 한가로이 유유자적하였으니, 비록 옛사람이 먼 곳을 찾아간 일이 있지만 이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별할 적에 등암이 나에게 글을 지어 이번 일을 기록하기를 부탁하였고, 또 여름 4월에 편지를 보내어 면려하였다. 내가 비록 글을 잘 짓지는 못하나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아 근후한 소망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우리들은 나이가 모두 6, 70세이고, 길도 200리 떨어져 있어 만나는 어려움이 이 이후로는 더욱 힘들 것이다. 만약 반드시 서로 어울려 따라다니며 담소를 함께 하는 것으로 친밀하고 정이 두터워진다고 한다면, 사귐을 논하는 도가 얕지 않겠는가. 옛사람은 백세 뒤에도 서로 감응한 것이 있고,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정신적 교유가 있었으니, 이는 마음이 기약과 기개가 서로 미더운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조자건(曹子建)의 시에 “은혜와 사랑이 진실로 어긋나지 않으면, 멀리 있어도 매일 친함을 나눌 수 있네. 어찌 반드시 함께 생활을 하여, 그런 뒤 은근한 정분을 펼치겠는가?〔恩愛苟不虧在遠分日親何必同衾裯然後展慇懃〕”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 시로써 서로 면려하지 않겠는가.
모월 모일 용화산인(龍華山人) 조임도가 와운헌(臥雲軒)에서 쓰다.
허희화(許煕和)의 발문을 붙임
숭정(崇禎) 16년(1643, 인조21) 봄 나는 바닷가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등암(藤庵) 어른이 몇백 리 떨어진 곳에 편지를 부쳐 용화산(龍華山)에 사는 조덕용(趙德勇) 어른과 함께 강가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등암 어른과 서로 헤어진 지 20년이나 된지라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고, 또 산수 유람을 좋아하여 곧바로 답장을 하여 허락하였다. 기약한 날에 이르러 나는 병으로 함께 하지 못하였으나, 조덕용 어른은 약속한 대로 등암옹과 함께 개산(開山) 포구에서 배를 띄워 며칠을 즐기다가 돌아왔다.
8월에 내가 배를 타고 용화산에 있는 조씨 어른을 방문하니, 조 어른이 3월에 개진에서 만난 기록을 내어 보여주었는데, 깊은 소나무 숲을 뚫고 모래 언덕으로 나와 봄 강에 배를 띄워 술잔을 들고 서로 권하며 함께 매우 즐거워하였고, 비를 무릅쓰고 김산(金山)으로 올라가 도동서원에 함께 머물며 선사(先師)가 남긴 서적을 보고 예의(禮義)를 강설하였다. 이때 사대부, 제생, 학생들이 따라와 이른 자가 10여 명인데, 그 성명과 자(字)를 모두 기록한 것이 상세하였다.
나는 노선생(老先生)께서 이미 세상을 떠난 뒤, 문생(門生)과 제자들 중 그 가르침을 몸소 받은 자가 지금 몇 명 되지 않고, 배 어른과 조 어른만이 생존해 있는데 또 모두 늙고 백발이 된 것을 혼자 몰래 탄식하였다. 나는 남쪽 구석에서 타향살이 한 지 10년이 다 되어 더욱 고루해지고 병이 많아 두 어른을 좇아 식견이 넓은 말씀을 얻어 들을 수 없었으니, 참으로 애석할 만하다. 또 단지 아름다운 기약을 저버리고 마음으로만 봄날 물가의 빼어난 유람을 그리워 할 뿐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느낀 바를 적어 《개진기회록(開津期會錄)》의 발문으로 삼는다.
숭정(崇禎) 16년(1643, 인조21) 8월 하순 양천(陽川) 허목 희화(許穆煕和)가 발문을 쓰다.
[주-D001] 배등암(裵藤庵) : 배상룡(裵尙龍, 1574~1655)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저술로 《등암집(藤庵集)》이 있다.[주-D002] 고양(高陽) : 현 경상북도 고령군의 옛 이름이다.[주-D003] 일선(一善) :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옛 이름이다.[주-D004] 회연서원(檜淵書院) : 현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서원으로, 1622년(광해군14)에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정구(鄭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주-D005] 빨리 만나기 : 원문의 ‘잠합(簪盍)’은 《주역》 〈예괘(豫卦) 구사(九四)〉에 “붕(朋)이 합잠(盍簪)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합은 합친다는 뜻이고 잠은 빠르다는 뜻으로 모든 벗이 동시에 빨리 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주-D006] 개산포(開山浦) : 현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 있던 낙동강변의 나루이다.[주-D007] 도동서원(道東書院) : 현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서원으로, 1605년(선조38)에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주-D008] 허희화(許煕和) : 허목(許穆, 1595~1682)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희화ㆍ문보(文父)ㆍ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ㆍ대령노인(臺嶺老人)ㆍ둔암(遁庵),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정구(鄭逑)에게 배웠다. 저술로 《동사(東事)》, 《경설(經說)》, 《기언(記言)》, 《경례유찬(經禮類纂)》,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등이 있다.[주-D009] 이 참봉(李參奉) : 이도보(李道輔, 1587~1651)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익지(益之), 호는 익암(益庵)이다. 이후경(李厚慶)의 맏아들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제릉(齊陵)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저술로 《익암집》이 있다.[주-D010] 한 찰방(韓察訪) : 한몽삼(韓夢參, 1589~1662)으로, 초명은 몽인(夢寅)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변, 호는 조은(釣隱)ㆍ적암은인(適巖隱人)이며 함안 출신이다. 박제인(朴齊仁)ㆍ정구(鄭逑)ㆍ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군5)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639년(인조17) 학행으로 천거되어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저술로 《조은집》이 있다.[주-D011] 조경민(趙景閔) : 조영문(趙英汶, 1588~1653)으로,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경민, 호는 장암(場巖)이다. 조응경(趙應卿)의 증손이며, 장현광의 문인이다.[주-D012] 마장(魔障) : 몸을 닦거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으로, 범어(梵語)인 mara의 음역(音譯)이다.[주-D013] 배맹명(裵孟明) : 배세안(裵世安)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맹명이다. 배상호(裵尙虎)의 아들이다.[주-D014] 김옥여(金玉汝) : 김시영(金是瑩)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옥여, 호는 영모암(永慕菴)이다. 배상룡의 생질이다. 장현광의 문인이다.[주-D015] 정경복(鄭景覆) : 정유도(鄭惟燾, 1611~1661)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복이며, 성주에 살았다. 아버지는 정장(鄭樟)이다.[주-D016] 문목(文穆) : 정구(鄭逑)의 시호이다.[주-D017] 김 찰방(金察訪) : 김대진(金大振, 1571~1644)으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이원(而遠),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1609년(광해군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창의하였다.[주-D018] 문경공(文敬公) : 김굉필(金宏弼)의 시호이다.[주-D019] 서홍거(徐鴻擧) : 서숙(徐䎘)으로, 자는 홍거이다.[주-D020] 곽덕무(郭德懋) : 곽이창(郭以昌)으로, 자는 덕무이다.[주-D021] 왕부(王裒)의 아픔 : 왕부는 진(晉)나라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억울하게 죽자, 이를 애통해한 나머지 조정에서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晉書 卷88 王裒列傳》 배상룡의 아버지 배설(裵稧, 1551~1599)은 경상우수사로 칠천해전(漆川海戰)에 참여해 전세를 관망하다 원균(元均)의 명령을 듣지 않고 12척을 이끌고 도망쳤다. 한산도로 도망한 뒤 군사 시설 및 양곡ㆍ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들을 피난시켰다. 이순신(李舜臣)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된 뒤 한때 그의 지휘를 받았는데, 1597년(선조30) 호남의 막하로 가서 싸움을 돕겠다고 핑계를 대고는 자기 군사를 버리고 밤에 도주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계문(啓聞)해서 그를 참수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전국에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종적을 찾지 못하다가, 1599년 선산에서 권율(權慄)에게 붙잡혀 한양에서 참형되었다. 《白湖全書 卷23 諸將傳》 윤휴(尹鑴)의 기록과는 달리 배상룡의 〈등암선생연보(藤庵先生年譜)〉에는 배설이 갑자기 수질(水疾)을 만나 이순신에게 휴가를 청해 병을 조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는데, 뒤에 정인홍이 권율에게 말하여 급한 때 물러났다는 것으로 조정에서 죄에 얽어 넣었다고 되어 있다.[주-D022] 옛사람이 …… 있지만 : 삼국 시대 위(魏)나라 여안(呂安)과 혜강(嵇康)이 친하게 지냈는데, 서로 상대방이 그리워질 때마다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방문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簡傲》[주-D023] 조자건(曹子建) : 조식(曹植, 192~232)으로,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건이고, 조조(曹操)의 아들이다. 저술로 《조자건집》이 있다.[주-D024] 은혜와 …… 펼치겠는가〔恩愛苟不虧在遠分日親何必同衾裯然後展慇懃〕 : 《조자건집(曹子建集)》 권5 〈증백마왕표(贈白馬王彪)〉에 나온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양기석 김현진 구경아 김익재 강현진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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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암집(藤庵集) 배상룡(裵尙龍)생년1574년(선조 7)몰년1655년(효종 6)자자장(子章)호등암(藤庵), 숭정처사(崇禎處士)본관성주(星州)특기사항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藤庵先生文集卷之六 / 附錄 / 附開津期會錄[趙任道]
趙任道 | 1585 | 1664 | 咸安 | 德勇, 致遠 | 澗松 |
昭陽協洽之歲姑洗之月十有七日。余與藤庵裵丈。會于高陽之開津。步踐宿約也。蓋於去年冬。余省墓於一善。歷宿藤庵草廬。于時主人方苦落傷瘀血。坐臥起居。須人扶策。而力疾追別於檜淵書院。再做一夜同人之款。解携之朝。尤繾綣不能爲情。握手歎曰君垂耳順。我迫從心。寄迹人間。能復幾何。何以則更圖簪盍於就木之前乎。余曰老境遠涉。誠難期矣。無已則有一焉。開山渡口。在道東下流。而有松林沙水之勝。此去彼來。道里均而勞費等。若欲謀會。盍於此焉相要。藤庵曰諾。遂定日子。還棲數閱月。許和父遁庵公傳致裵丈書。滿紙眷眷。無非誠悃。而其大要則開津佳會。只隔月再彀。屈指遣日云云。辭意堅確。不可撓改。余於是益自刻厲。忘衰疾擺塵冗。理裝啓行。朝發夕至。行具則匹馬雙僮一壺五笥也。曾與李參奉 道輔,韓察訪 夢參,趙景閔諸賢。約爲同行。而三友皆被魔障。獨有曺生碩護行。是日午前。藤庵先到待之。隔江相望。望眼方寒矣。從而來者。裵秀才元明孟明,金秀才玉汝,鄭秀才景覆,二裵一金。藤庵之子姪及甥姪。而鄭卽文穆先生之孫也。迎笑沙頭。喜氣掬面矣。藤庵先酌行中一樽。慰我遠來。各廵一盃而止。余亦欲把一盃相酬。而日暮未果。俄而雲陰四合。小雨點滴。僉曰津頭斗屋。僅得容膝。而天又欲雨。無乃造物戱我勝會。敗我佳趣耶。改圖取便。移占道東國庠。咸萃一齋室而休憇焉。是夜雨下。翌日曉頭。金察訪來見。金之年七十三。鬚眉皓白。骨相淸癯。肩背竦直。步履輕健。強壯者殆莫能及。是乃文敬公奉祀孫而居在院側者也。余於食前。爲諸賢行酒五廵而罷。藤庵徑醉倒臥。蓋盃酌非其所長故也。娥林進士徐君鴻擧適爾過去。暫叙而別。本邑士友來會者郭主簿子固,郭參奉德懋,郭上舍子厚。子厚方爲山長於院中云。此外諸年少聞而至者亦十許員。不可悉記。初意欲散於今日。而雨未快晴。且被主人援而止之。察訪與院長相繼設酌。打話終晷。厥明用時服謁廟庭。步出江滸。與諸友別。我與裵丈一行。乘舟直下。抵開津初會之所。乃各分路。金察訪有惜別餘情。登舟回棹。郭子固以牆醪一壺。亂酌舟上。藤庵又命子姪盡其餘盃。余亦不堪離索之惱。心緖脉脉。勉循其意。隨量而飮。不覺微醺。客散江頭。回首茫然。獨與子固踽踽而歸。共宿其家。遲明乃還。追思
遊。良不可忘。而不忘之中有所感者存焉。年前期會之說。初出於偶然。而畢竟誠約之成。若合符節。無輕諾失信之悔。有久要不忘之美。求之衰世。亦不易得。藤庵寒岡鄭先生晩年高弟也。其宏材偉器。足以有爲於世。而不幸盛年抱王裒之痛。廢擧杜門。而終其身政不出孝友。澤不被生民。識者惜之。公嘗執經岡門。聞心學之要。講禮之目。先生愛重之。余雖獲拜先生於少年之日。頹惰慵拙。終不得侍函丈。而先生已下世矣。以欽慕景仰之勤。而見當時及門之士。則能不傾心愛悅。以求聞其緖言乎。况藤庵之於先生。非只見伊川面者比也。親炙觀感之得。出尋常萬萬。感知己之恩。殫象賢之誠。修先生文稿。立先生祠廟。凡所以發揮先生事業者。皆無所不用其極。每遇公。如在先生之側。公許忘年之交。我托道義之契。玆又踐遂誠約於經歲之久。白髮蒼顔。相與婆娑偃息於寂寞之濱。而不憚其勞苦。雖古人千里命駕。蔑以過矣。且余聞諸玉汝。今此開津之行也。纔經危症。氣未充。子弟僕妾交謁更諫。咸以爲不當出。而公毅然不動。奮然勇斷。期於必遂云。此亦流輩之所難及處。其視翻雲覆雨於瞬息俄頃之間者。一何遠哉。自非信義誠款之至。何能有此。聚散之際。得無愴黯而疚懷也哉。臨別藤庵屬余作文以記事。又於夏四月馳書勉之曰曾倩神筆畧記遊衍之迹。想文已破體。而不得相對點翫。殊可恨也。丈人之懇至此。吾雖不文。其敢不承。以孤勤厚之敎乎。抑又有一說焉。吾儕年皆六七旬。路隔二百里。會合之難。此後益甚。若必以相追逐同笑語爲親厚也。則論交之道。顧不淺淺乎哉。古之人有曠百世而相感者焉。有隔千里而神交者焉。是在心期與氣槩相近似如何耳。曹子建有詩曰恩義苟不
。在遠分日親。何必同衾裯。然後展慇懃。願以此相勖焉。月日。龍華山人趙任道德勇書于臥雲軒。
開津期會錄跋[許穆]
十六年春。穆居海上。藤庵丈人寄書數百里。約與龍華趙德勇丈。共爲江上之期。穆相別二十年。得書甚喜。又樂江上之游。卽復書許諾。及期穆病不偕。而趙丈果與藤庵翁。泛舟開山渡口。相樂數日而歸。八月穆乘舟訪趙丈於龍華山中。趙丈出三月開津期會錄示之。穿深松出沙岸泛春江。擧觴相屬。相與懽甚。冒雨上金山。因共留書院。閱先師遺籍。講說禮義。於是士大夫諸生學子相從而至者又十餘人。其姓名字俱記之詳矣。穆私竊歎老先生旣歿。門生弟子親炙其訓者。於今世無幾。而唯裵趙二丈又皆老白。穆流落南陬。近十年愈孤陋。且多病不得從二丈得聞餘論。良爲可恨。又不但辜負佳期。心追春渚之勝而已。因書所感。以爲開津期會錄跋。
崇禎十六年仲秋下澣。陽川許穆和父跋。
附眉翁書[許穆]
頃年江上之游。穆辜負厚約。追記數語。附呈趙德勇兄矣。想旣登照否。穆春前往故山。留滯累月。今始還向海寓。此行從入山路者。本欲歷拜吾丈。備叙積阻慕用之抱。而人事巧違。適値駕出。憇留空舍。賞翫庭卉。殊增悵恨奈何。此路將歷謁先生祠宇而去矣。山川依舊。滿目皆是感懷。乙酉三月日。侍生許穆再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