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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윌버의 ‘무경계(無境界)’에 관한 동영상 소개
잘 알려져 있는 켄 윌버의 ‘무경계’에 관한 동영상입니다.
그동안 자유채널 영상을 통해 알게 된 조망을 가지고 무경계를 들어보면 이해가 쉽죠,
무경계란 단일의식의 다른 표현방식이란 생각이 들면서, 이미 하나인 의식을 확장해야한다고
표현하는 취지는 알면서도, 이미 하나 인 것을 하도 각각으로 보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전환해 보려는 취지에서 ‘의식 확장’을 해야한다 고 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기독교 전통에 익숙하신 분들은 대극(對極)이 선악과이고, 무경계를 하나님이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꺼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경계’란 자유채널의 표현으로는 임시의 편의상 가상적 주객 설정이고, 개인화 3중 필터에
관한 언급이고 또한 1식~7식에 대한 켄 윌버 스타일 표현이고,
무경계는 전체의 장이라는 표현을 써서 켄윌버는 표현했네요.
가끔 '합일'이나 '통일'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이미 하나인 것을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 부분들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런 점들이 눈에 뜨이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유체널에서 보다 선명하게 배워왔기 때문에 발견되는 현상이며,
만일 자유채널 만나기 전의 상태로 ‘무경계’에 관한 내용을 접했다면,
아무런 생각없이 당연히 합일이나 통일은 적절한 표현이라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런 류의 정신세계 관련 내용을 접해도 그 내용 표현이 화려한 문체라하여
그대로 다 옳다가 아니고, 어떤 점은 이런 표현이 되면 좀 더 적절했을 텐데 하는 바램과
아쉬움을 갖고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개는 단일의식 까지 터치하지는 못하고 그 조금 전에서 애매하게 결론을 맺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일의식에 대한 명쾌한 앎이 없었다면 그런 내용들을 접할 때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끝 부분에서 와서는 손에 잘 안잡히네 하는 아쉬움을 가졌을 꺼라 돌이켜 생각해 보면서,
자유체널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새삼 느끼고 감사하게 됩니다.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무경계가 되면 남는 실체는 단일의식 반야지혜 뿐이다 싶습니다.
무경계라고만 표현하고 강조할 뿐 그 이상의 의식에 대한 조금 더 세밀하고 선명한
가리킴이 없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원성에 대해 간과하기 쉬운 것들을 나름의 표현으로 재치있게 접근하고 있어
한번쯤 봐두는 일도 좋다싶어 동영상 링크와 대본을 아래에 첨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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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터칭소울
1) 영상제목: 무엇이 나를 만드는가? 모든 [대극(對極)]을 초월하는 높은 의식에서의 깨달음! 무경계
2) 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dPJXdKRMci0
3) 대본
00:00:01
1. 불꽃 구름 안에서 생명의 의식의 자각
갑자기 나는 화염 빛 구름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았다.
한순간 저 거대한 도시 어딘가에서 엄청난 대화재가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나는 그 불이 내 안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았다.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적 광명과 더불어 엄청난 기쁨과 한의가 밀려왔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우주가 죽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현존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내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의식이 되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불사의 존재임을 알았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모두의 선을 위해 함께 협력하고 있고 모든 세계의 근본 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며 긴 안목에서 볼 때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 우주의 질서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았다.
00:01:10
2.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경계를 설정해 보아야
안녕하세요 터칭 소울 디나입니다.
누군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실 것 같으신가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고 대답할 때 여러분 머릿속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본 적 있으실까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거나 말하려고 할 때 반드시 어떤 작업을 선행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려고 할 때 또는 뭔가에 대한 느낌을 가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 없이 마음속으로 일종의 선을 긋게 됩니다.
정신적인 경계를 긋는 작업이 선행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선에서 안쪽에 있는 것은 나라고 느끼고 그 선 밖에 있는 것을
나 아닌 것으로 정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선을 긋고 계신가요?
켄 윌버는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사상가입니다.
20대 초반부터 인간의식에 대한 책을 집필했고 여러 저서들을 통해서
동서양의 신비사상, 심리학과 철학 등을 총망라하여 인간의식의 발달과 진화에 대한
통합이론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물음의 본질은 당신은 어디의 경계를 설정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본질과 깨달음에 대한 가장 절묘한 통찰, 무경계.
이 책에서 저자 켄 윌버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된다.
전반적인 경계선이 그어진 후에 나오는 답은 과학적, 신학적, 경제적으로 대단히
복잡할 수도 있고, 무척 단순하거나 모호할 수도 있다.
어쨌든 가능한 모든 답은 처음에 그은 그 경계선에 달려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다가 일종의 정신적인 선이나 경계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경계의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을 나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느낀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있다.
00:04:00
3.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있지 않은 이유
당신이 키가 큰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은 크고 작음 사이에 정신적인 선을 긋고
자신을 큰 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나는 이것이지 저것은 아니다 라고 느낀다.
그래서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한다면 단지 그 선 안쪽에 있는 것을
묘사하면서 답한다.
정체성의 위기란 그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피부 경계선의 안쪽에 있는 것을 모두 나이며 그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내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단 피부를 '나'와 '나 아님'의 경계로 인식한 후에 그 '나'라는 유기체 내부에
좀 더 의미 있는 또 다른 경계를 긋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이 몸이라고 느끼는가 아니면 몸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 또는 다른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몸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몸은 '나'라기보다 '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의 것은 정의상 '나'와 '나 아님'의 경계선 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라는 유기체 속에서도 특정 부분을 좀 더 친밀하게 느끼면서
강하게 그것과 동일시한다.
진정한 나로 느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흔히 마음, 정신, 에고, 성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생물학적으로는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 에고와 육신을 서로 떼어놓거나
근본적으로 갈라놓을 어떤 근거도 없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어떤 분리가 마치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있다.
마음과 몸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히 출생 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묘한 것이다.
그러나 성장 과정을 통해서 나와 나아님의 경계가 그어지고 그것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차 자신의 몸에 대하여 모순된 감정을 품게 된다.
00:06:28
4. 대립적인 용어와 대극으로 이루어진 세상
몸을 경계선 안에 포함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이질적인 영역으로 외면하는 것이 좋을까?
어디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 좋은 것일까?
왜 대극이 생겨났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왜 가치 있게 여겨낸 모든 것이 한 쌍의 대극 중 어느 한 쪽인 것일까?
왜 모든 결정은 대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왜 모든 욕망은 대극에 기초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공간과 방향이 대극(對極)으로 이루어짐을 주목해보라.
위, 아래, 안과 밖,높음과 낮음, 길고 짧음, 남과 북, 크고 작음, 여기와 저기, 꼭대기와 밑바닥, 왼쪽과 오른쪽,
또한 당신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과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한 쌍의 대극(對極) 중 한 극이라는 사실에 주목해보라.
선과 악, 삶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 천사와 악마, 자유와 속박, 뿐만 아니라
사회적, 미적 가치관도 성공과 실패,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지성과 어리석음과 같이
언제나 대립적인 용어로 진술된다.
가장 추상적인 것조차도 그 기저에는 대극(對極)이 있다.
논리학은 진실과 허위의 관점을 두고 있으며 인식논은 외관 대 실제,
존재론은 존재 대 비존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마치 거대한 대극(對極)의 집합체인 것처럼 보인다.
00:08:20
5. 자연은 단순하지만 현명
이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운 정도로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대극의 세계에 대하여 자연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연은 진실한 개구리와 거짓 개구리를 키우지 않을 뿐더러
도덕적인 나무와 부도덕한 나무, 오름 바다와 잘못된 바다와 같은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윤리적인 산과 비윤리적인 산 같은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대자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절대적으로 사과하지 않는다..
자연은 옳음과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한다.
물론 우리가 대극(對極)이라고 부르는 속성들 중 일부는 대자연 속에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큰 개구리와 작은 개구리,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익은 오렌지와 덜 익은 오렌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차이는 그들 자신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연 세계에서도 당연히 삶과 죽음이 있다.
하지만 그건 역시 인간 세계에서와 같은 끔찍한 면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늙은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해서 공포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숲으로 들어가서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죽음을 맞을 뿐이다.
병든 울새는 버드나무 가지에 편안하게 앉아 그러다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땅에 떨어진다.
자연계에도 고통과 쾌락은 있지만 그런 것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개는 아프면 낑낑거리지만 아프지 않으면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
개는 미래의 고통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과거의 고통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대자연이 생각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막 깨닫기 시작했다.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어쩔 수 없이 고통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에 대한 강박관념은 더욱더 강해진다.
성공을 추구하면 할수록 실패를 더욱더 걱정할 수밖에 없다.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에 대한 상실이 두려워진다.
00:11:12
6. 부정과 긍정, 대립의 문제 및 진보와 욕구 불만에 대한 고찰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 대부분은 경계로부터 비롯된 경계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울인 노력은 대극 중 어느 하나를
근절시키려는 틀에 박힌 시도였다.
악을 전멸시키려고 애쓰는 것으로 선과 악의 문제를 다루었다.
죽음을 상징적 불멸성 아래로 은폐하는 것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철학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있을 때 둘 중 하나를 내던지거나 다른 것에
환원시키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이후에 경계에 의해 만들어진
그 대극을 조작하려고 하는데 있다.
우리는 그 경계 자체는 결코 우문시하지 않는 것 같다.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굳게 믿고서 대극이란 영원히 격리 된, 화해할 수 없는,
분리된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이 둘은 결코 만나지 않는다.
신과 악마, 삶과 죽음, 성과 악, 사랑과 증후, 자기와 타인
우리는 이것들이 밤과 낮만큼이나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 쌍의 대극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원치 않은 한쪽을
근절시킬 때라야 비로소 삶을 완벽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고 상상한다.
물론 고통과 악, 죽음과 고뇌, 질병을 정복할 수 있는 삶이라면
실제로 그런 곳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국일 것이다.
이처럼 천국은 모든 대극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한 쌍의 대립 중 좋은 쪽만을 전부 모아놓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에 지옥은 고통과 고뇌, 불안과 질병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쪽을 모아놓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처럼 대립하는 것을 분리시켜 놓고 긍정적인 반쪽에만 집착하고 달려드는 목표를 세운다.
결국 진보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긍정적인 것을 향해서 다가가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 문명은 사실상 욕구 불만을 제도화시켜 놓았다.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긍정이란 부정의 기초에서만 규정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진보라는 모험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욕구 불만은 훨씬 더 극심해진다.
00:14:26
7. 대극(對極)의 연결성과 상호의존성
이 모든 곤경의 뿌리는 대극을 화해에 불가능한 것으로 서로 철저하게 분리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사고 파는 것과 같은 단순한 대극조차 서로 분리된 두 개의 다른 사건으로 본다.
물론 사는 행위와 파는 행위에는 어떤 점에선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살 때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무언가를 팔고 있다.
즉 사는 행위와 파는 행위는 단지 한 사건의 양극 즉 단일한 거래 행위에서 양 끝에 지나지 않는다.
거래의 양쪽 끝이 다르긴 하지만 그들은 단일한 사건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대극(對極)은 안목적인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극의 차이점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그 양극은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서로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 밖이 없는 안, 아래가 없는 위, 패배 없는 승리,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와 아니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과 악은 그 거리가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나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전제로 성립하며
길고 짧음은 상대를 드러내 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대며 앞면과 뒷면은 서로 따라다닌다.
고로 선의 짝인 악 없는 선 만을 말하는 것은 우주의 위대한 원리를 모르는 것이다.
무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땅의 존재 없이 하늘의 존재를 말하거나 양이 없는 음의 원리를 말하기도 하나
그런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말을 되풀이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거나 무례한이 틀림없으리라.
00:17:09
8. 대극(對極)이 통일된 상태와 실재의 관점 | 현대 물리학
현대 물리학을 살펴보면 그곳에서도 대극이 통합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한 관찰자에겐 정지된 것으로 보이는 대상이 동시에 다른 관찰자에겐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각각은 둘 다이다.
우리가 주체와 개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고파는 행위처럼 그저 단일한 과정에 접근해가는
두 가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대상이 공간 속에 놓여 있다거나
아니면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시공간적 사건만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실제란 오직 대극이 합일된 상태로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란 대극의 일치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궁극적인 실제는 대극이 통일된 상태이다.
대극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전적으로 분리되고 화해 불가능한 반대 극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본래 하나이자 동일한 실제의 상보적 측면들인 것이다.
모든 궁극적 요소들은 본질적으로 진동한다.
우리가 흔히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 주체와 객체와 같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실제로는 단일한 진동, 단일한 파도에 해당한다.
하나의 파도는 그 자체로 단일한 사건이지만 최고점과 최저점이라는 대극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실제는 어느 한쪽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그 둘의 통일에서만 발견된다는 말이다.
우주의 개개의 요소들은 근저의 에너지 또는 현상이 진동하는 양상,
즉 밀물과 썰물인 것이다.
00:19:16
9. 빛과 어두움 간 대비에서 알아보는 대상 지각의 원리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어두운 배경으로 부각된 밝은 형상이다.
깜깜한 밤중에 하늘을 보고 밝게 빛나는 별을 지각할 때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
내 눈이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히 별이 아니라
시야 전체 또는 밝은 별과 어두운 배경이라는 전체장이다.
밝은 별과 어두운 배경 사이의 대비가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절대로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지와 관련시키지 않고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다.
안락함 없이는 수고로움을, 단순함 없이는 복잡성을, 혐오감 없이는 매력을 지각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주 편안하고 즐겁다고 느끼더라도 불편함과 고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쾌락과 고통이 번갈아 교체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통 없이는 결코 쾌락을 인식할 수 없다.
쾌락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상호 대비와 교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쪽을 좋아하고 다른 쪽은 몹시 싫어하더라도
그들을 떼어놓고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쓸데없는 짓이다..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려는 것은
자각이라는 파도 자체를 제거하려는 노력과 같다.
세계를 그저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인 것이 되는지를 이제나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악이 없는 선 따위에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고 있는 꼴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넌센스인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 주체와 객체, 삶과 죽음 같은 모든 대극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궁극의 실재는 대극이 합일된 상태이다.
이러한 말은 실제로는 궁극의 실제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라는 뜻이다.
그 어디에도 경계가 없다.
자연 속의 선들은 겉으론 나누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내적으론 양극을 합친다.
00:22:15
10. 볼록한 면과 오목한 면은 동시에 존재하며, 대극(對極)은 서로를 묶는다
예를 들어서 오목면을 나타내는 선을 그어보자.
하지만 동일한 선이 볼록면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길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도가의 현자 노자가 모든 대극은 상호적으로 동시에 발생한다 라고 말한
의미와 같다.
오목한 면과 볼록한 면은 동시에 존재한다.
오목한 면이 없이는 볼록한 면이 있을 수 없다.
그 선이 볼록면과 오목면을 분리해낸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여기에는 오직 한 개의 선 밖에 없다.
그 선은 전적으로 둘 다를 공유하고 있다.
그 선은 오목면과 볼록면을 구분 지키는 커녕, 오목면의 외선은 동시에 볼록면에 내선이 된다.
어느 한 쪽은 다른 쪽 없이 절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오목한 면만 그리고 싶다고 해도 그 한 개의 선이 또한 볼록면도 동시에 그리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대극은 언제나 치밀하게 서로를 포용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발견한 모든 선은 단지 대극을 구분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없는 일체로서 둘을 함께 묶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선은 경계가 아니다.
모든 선은 두 개를 하나로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논리적인 것이든 하나의 선은 그저 나누고
구분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경계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는 실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척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선은 있지만 실질적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쪽은 바깥쪽과 공존한다는 점을 망각할 경우 선은 그저 나누기만 할 뿐
통합시키지 않는다고 상상할 경우 그 선은 경계가 되고 만다.
따라서 선을 긋는 것은 괜찮지만
그 선을 경계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실제는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00:24:54
11. 자유로운 삶을 위해 양극을 초월하고 관계성의 이해
먹고자 하는 것 없이 그저 스스로 오는 것에 만족하고, 양극을 초월하여 시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자.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 자. 그는 행위 속에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갈망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 그를 일컬어서 영원히 자유롭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어린아이처럼 되면 천국이라는 왕국에 들어가는 겁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처럼 밖을 안으로 만들어야 한다.
양극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줄 양끝을 서로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양극을 분리하고 양극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양극을 분리하도록 그의 양극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양극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줄 양끝을 서로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무줄이 끊어질 때까지 점점 더 세게 잡아당기는 일일 뿐이다.
전 세계의 모든 신비전승에서는 대극의 환상을 깨뜨려 본 사람을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극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양극의 싸움에 따르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문제와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평화를 찾기 위해서 대극의 어느 한쪽을 조작하지 않는다.
그 둘을 초월하여 넘어간다..
선악 중에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둘 다를 넘어선다는 말이다.
그들은 죽음에 대항하는 삶이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하는 자각의 중심이 된다.
대립 없음, 비이원성 이러한 관념은 힌두교와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그것들은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실제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00:27:18
12. 대립과 투쟁은 하나임을 알아야 불안은 조화로 녹아들고,
경계를 허물며 모든 것의 수용가능
대립과 투쟁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서로 투쟁하고 있는 양극 중 긍정적인 것을 취해
진보시키는 재주부리기가 아니라 모든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경계란 본래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증명해야 한다.
고통은 거짓 경계를 알아차리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고통은 오히려 해방을 안겨준다.
고통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은 병들어서가 아니라 지성적 통찰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겪어내고 마침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올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해석을 잘못하게 되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꼼짝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긋고 있는 경계를 허물고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써야 한다.
또한 여유를 갖고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좋은 면과 나쁜 면, 사랑스러운 면과 야비한 면을 막론하고
모든 다양한 잠재력을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 전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자신의 경계를 변경시켜 암암리에 서로 싸우던 대극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을 제작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대극이 실은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아마도 진보의 충동은 멈출 것이다.
약속을 지키고, 자신의 영혼을 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또한 좋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대극이 실은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아마도 진보의 충동은 멈출 것이다..
양극이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모든 불안은 조화로 녹아들고 투쟁은 춤이 된다.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양극이 실은 하나였다면 아마도 진보의 충동은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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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무경계(無境界)를 통한 깊은 통찰의 중요성
여러분은 저자의 말을 어떻게 들으셨나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생은 좋은 생각만 하면서 착하게 살면 되는 거야.
그 말에 저는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한 착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나쁘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이고, 좋은 마음으로 남을 돕는 것이 착한 것이다.
법적으로 어긋나는 일은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실 착하고 나쁜 것, 옳고 그름은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정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개인마다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내가 생각하는 착한 일은 남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휠체어를 탄 분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밀어주었는데,
휠체어를 탄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렇게 밀어주는 것은 오히려 저에게 방해가 됩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냥 저 혼자 가는 게 편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웃게 하는 것은 좋은 것, 고통은 무조건 나쁜 것,
이런 생각에 자신을 묶어두고 계시진 않으실까요?
출산의 고통 없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딘가에 선을 긋고, 이건 내가 취해야만 하는 것,
저것은 내 것이 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한쪽에만 과한 집착을 하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누군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모든 다양한 잠재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
스스로가 세운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마음의 의식을 확장해 가는 것,
그러한 작업이 바로 자신의 정신을 발달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계가 없는 삶, 무경계, 그러한 마음가짐이 여러분에게 깊은 통찰을 가져올 것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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