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현아….나도 너에게 할말이 있는데….”
10분쯤 그렇게 그들은 침묵틈에서, 서로의 품에서 쉬었을까.
“많이 생각하고….또 많은 용기 내어서 하는 얘기야….”
시현은 눈물에 얼룩져 번들거리는 뺨을 부벼 닦으며 몸을 추스러 일으켰다.
진지한 병화의 이야기를 진지한 자세로 들으려 함이었다.
병화는 시현의 양어깨를 꼭 부여잡고 그녀의 생기없는 눈을 깊숙히 바라보았다.
“여기서….나가야지…나랑…나가자….이 몹쓸곳에서…”
시현의 눈이 잠시 크게 흔들리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머릿속에도 알수없는 언어의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양 어지러워졌다.
시현은 최대한 눈에 촛점을 맞추려 노력하며 병화에게 되물었다.
“방금…뭐…라고 하신거에요…???”
.
.
시현은 병화의 나이에 반절밖에 되지 않고,
지금 심적으로 신적으로 많이 지치고 병들어, 누구의 손이라도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비록 가족들에게로 돌아가 다신 병화를 찾지 않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나랑…나가자구….어디로 가든, 선생님…따라오겠냐구….”
.
.
병화는 다섯살박이 예쁜딸과 가정이 있고,
지금 사회적으로나 어느면으로도 안정된 궤도에 올라 일상에 권태로운건지도 모르지만,
시현에게 갖는 감정이 단순한 동정일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럴수만…있다면요….정말이지…그럴수만 있다면요….”
.
.
.
병화에게도 별다른 뾰족한 출구는 없었다.
시현의 빚을 갚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약간의 돈. 밖에는.....
아직 그들의 금지된 출입으로 시작된 미로안에서 출구를 발견하지도 못했고,
처음 시현을 보았을 때 병화가 느꼈던 아찔한 충격은 지금도 그녀를 흠칫흠칫 놀라게 했다.
하지만, 시현의 잃어버린 슬리퍼 한짝을 같이 찾아 나서고 싶었던 그 마음만은 변함없었다.
시현이 느닷없이 병화의 입술을 훔쳤다.
그녀를 알고 처음으로 보는 날쌔고 잽싼 동작이었다.
처음이다 싶은 그녀의 자의가 깃들어 있는 행동이었고, 기쁨에 달뜬 행동이었다.
시현은 아무래도 좋았다.
병화가 매일밤 자신을 찾아와 주는것만으로도, 하루를 날수 있는 힘이 생겼다.
더럽다 더럽다 자신조차 만지길 꺼려했던 그녀의 몸 곳곳에 정수를 끼얹듯 따스한 눈길을 뿌려주는 병화가, 자신을 지옥에서 구원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아니라도 좋았다.
손을 잡은 순간만으로도 감사할줄 아는 마음-.
그것이 시현이 생각할수 있는 최고의 선물 같았다.
#
“저년 오면 새벽이나 돼야 가니까, 느들은 좀 자뒀다 내일 아침 날 밝거든 출발해라…”
두명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지개를 펴며 작은방을 향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에덴의 엄마는 잠들지 못하고 오늘 맺은 계약을 실행하느라 바쁘다.
“그래도 쓸만한 안데….쩝. 살살 데꾸 가, 괜히 흠집 내지 말구…..”
못내 아쉬운듯 입맛까지 다신 엄마는, 사내들을 방으로 들여보내며 곧 멀리 ‘시집’ 보낼 ‘딸내미’ 걱정까지 해주는 선심을 베풀었다.
.
늙은 포주의 묵직..한 뱃속에는 도무지 양심이 보이질 않았다.
그것은 얼마에 팔았을지 문득 궁금해 지게 만들만큼
그녀의 돈냄새에 찌든 손에선 악취가 났다.
시현과 병화가 애잔한 포옹으로 밤을 나며, 새로운 내일을 기다리는 동안,
아랫층에선 자비를 모르는 뱀이 흉측한 혀를 낼름대며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뱀뒤에 총을 겨누고 선 사냥꾼이 있을줄은,
독을 가득 담은 뱀도,
에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이브와 이브도,
그 누구도 몰랐다.
#
일권은 걷고 또 걸었다.
-걷다보면 길에도 끝이 있겠지….
그는 길의 끝을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끝이 존재한다면, 속념과 고통의 끝도 분명 존재할것이라고, 그렇게 억지를 부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버스도 타 보았고, 전철도 타 보았다.
탈것은 많았고, 그 ‘수단’들은 그에게 끊임없는 길을 열어 보였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들을 사느라 무척이나 피곤해보였고, 무엇에 그리 쫓기는지 걸음걸이는 하나같이 빨랐다.
전철안에서 만났던 작은 사내아이는 몇년되지 않은 생에 천근의 한이라도 얹힌듯 우렁차고, 줄기차게도 울어댔고, 곁에 앉은 여자는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느라 바닥에 핸드백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문득 일권은 수원집을 떠올렸다.
그곳엔 어머니가 있고, 그의 예쁜딸 이온이가 있다.
일권의 어미니는 분명 일권의 등과 볼을 정성껏 어루만지며 감싸안아 줄것이다.
전철안의 꼬마보다 그가 더 큰 소리로 운다해도 절대 흉을 보지 않을것이고, 이유를 다그쳐 원인이 되는 이를 혼내주겠다 맹세를 해보이기 까지 할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평생 해왔으니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권에게 필요한 ‘끝을 향한 열쇠’는, 그의 다정한 어머니에게 있는것 같진 않았다.
결국,
바삐 움직이는 인파속에서 일권은 길을 잃고 말았다.
아니, 길을 잃었단 말은 적합하지 않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없으니-.
#
수염이 덮수룩히 자란 사내의 얼굴엔 자신감이란 자취를 감춘지 오래인듯 보인다.
바람에도 한올 흐트러짐이 없을것 같았던 단정한 머리는 제멋대로 헝크러져 있고, 걸음걸이에선 리듬이란 좀처럼 찾아볼수 없이 비틀거렸다.
일권은 석양을 등에 지고 집을 향했다.
삼층에 위치한 그의 집은 근 한달이 넘는 시간동안 늘 어둠에 묻혀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유리조각들과 깨어진 살림살이들까지 흉한 시체의 꼴을 하고 드러누워 있을것이다.
라는 생각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리는데,
창밖으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 동네에는 이층 이상되는 건물들이 흔치 않았다. 그래서 유난히 삐죽이 솟은 볏잎처럼 3층에 위치한 그의 집은 돌아오는 길부터 그를 반기곤 했다.
일권은 빛을 향해,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 빛은 신기루와 같이 허공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어둠이 집어 삼켰던 건물에선, 왠지 그가 찾는 열쇠를 지녔을법한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뛰어 나왔다.
.
.
.
일권은 그 구두소리를 쫓았다.
머릿속에선 지하철에서 만났던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았고,
지나는 길에서는 하나같이 벌거벗은 여자들이 호객행위를 하느라 반복되는 주문을 외워댔다.
삼 악 성…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세가지 소리가 ‘삼희성’이라고 하였던가.
다듬이 소리, 글읽는 소리, 그리고 갓난아이의 우는 소리가 그것이라 하였던가.
일권은 그가 쫓고 있는 병화의 구두소리, 자지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창녀들의 비린내나는 콧소리가 그것의 반대인 ‘삼악성’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제발 병원으로 가는것이기를….’
병화는 출퇴근 길을 걷고 있었다.
미처 다 끝내지 못한 보고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향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일권을 위해서, 병화는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일권의 바램과는 달리, 병화의 구두소리가 멈춘곳은 ‘에덴’이었다.
#
전봇대 뒤에 서서 일권은 2년전에 끊었던 담배를 물었다.
그리곤 뒷주머니에 찔러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 2번을 눌렀다.
벌레울음소리처럼 간지러운 신호음이 서너번 울리고, 전자파를 타고 그리운 이온이의 음성이 들렸다.
“여버세여?”
“이온이야? 아빠야~”
눈물 한방울이 일권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오랫만에 피우는 담배연기가 꾀나 매웠나보다.
“아빠, 온제와? 아빠?”
“우리 이온이…아빠 많이 보고싶어?”
또 다른 눈물 한방우리 그의 뺨을 적셨다. 그는 잠시 핸드폰을 볼에서 떼어내고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어, 띠게 보고싶어. 엄마두. 엄마는 언제와, 아빠~?”
“이온아, 아빠가 이온이 많이 사랑해….알지…?”
“웅, 근데 아빠…아빠~ 엄마는 언제와~?”
일권은 잠시 고개를 돌려 에덴의 이층, 시현의 방 창문에 시선을 주었다.
시현과 병화가 함께 있을 방안에선 붉은 빛이 넘실댔다.
촘촘히 가로선 쇠창살안의 먼지가 가득끼어 불투명한 유리창너머엔
용서받지 못할 이브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있었다.
일권은,
신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아빠~~ 엄마는 온제 오녜니깐~???”
….
“이온아, 이제 엄마는 안가. 절대로.”
#
< 희망의 시간에서
절망의 시간으로.
그리고 그 절망의 시간에서
피가 맺는 죽음의 시간까지는
단 한 발자국밖에 되지 않는다.>
-세이페르트 <프라하의 봄>-
“검사, 심문 시작하세요.”
………..
“피고, 피고는 지난 2001년 8월 2X일 새벽 3시 30분경, 서울 XXX에 위치한 ‘에덴’이란 윤락업소에 간적이 있죠?”
“…네.”
“피고는 휘발유 4갤론을 건물 내부 구석구석에 뿌리고 방화를 저지른후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피고는 범행전에도 수차례에 걸쳐 그 윤락업소를 드나든 적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화재건물의 구조에도 조금은 익숙하겠군요…?”
“……”
“화재건물에는 정확히 두개의 출입구가 있고, 그중의 하나는 철저히 봉쇄되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비상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층에서 일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는 이중 자물쇠로 잠기는 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피고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까?”
“……”
“뿐만아니라 건물안 4개의 방문은 새벽 3시 이후론 모두 밖에서 자물쇠로 잠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
“피고는 소주병과 휘발유를 이용해 만든 화염병 세개를 건물안으로 던지고, 화기에 놀라 뛰어나온 두명의 남자및 업주 ‘이#선’씨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사망케 했습니다.
그리고 준비한 2갤론 휘발유 두통을 이용해 건물전체에 화기성 물질인 휘발유를 방사한후 고의적으로 출구로 통하는 철창에 자물쇠를 채움으로써,
이층에서 미처 불길과 유독가스를 피할수 없었던, 신원이 확인된 ‘33살 권병화’씨를 비롯한 4명의 윤락여성들을 살해했습니다. 인정합니까?”
“……..”
“피고, 사실입니까?”
“……네…..”
“화재속에서 사망한 ‘권병화’씨는, 피고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렇죠, 피고?”
“……..”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
.
.
타고 남은 재처럼 창백한 죄수복 속 한남자의 어깨가 불규칙하게 떨리며, 법정안은 곧 그의 흐느낌 소리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후 몇차례의 심문이 계속되도록,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
“피고, 최종 발언하시오.”
재판은 막바지에 다달아, 일권의 한마디를 남겨놓고 모두들 숨을 죽였다.
“피고”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현장에 계셨던 경찰관 여러분들, 그리고 사건을 담당하신 검사님.
이층 첫번째 방에 갇혔던 여인, 제……부인과, 그리고 다른 한 소녀……
서로 꼭 끌어안은채 질식사 했다 들었습니다.
만약, 만의 하나라도 그들의 시신이 크게 상하지 않았었다면, 그렇다면…..
그들의 표정이….어떻던가요…..
행복해…보이던가요…..?”
.
.
일권은 짤막한 질문을 끝으로 특수방화및 살인죄에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가 떨어진 후에도 법정은 예의 침묵을 잃지 않은채 그의 퇴장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단, 어린 여자아이를 옆에 앉힌 한 노여인만이 절규할뿐.
두명의 간수에게 이끌린채 법정을 빠져나가는 사내는 마지막 한걸음이 문컥에 닿을때까지도
뼛속의 혈관마저 텅 비어 버린듯 공허한 표정으로 ‘그렇던가요….’ ‘그래 보이던가요…?’라는 질문만 반복했다.
그는 그것이 진심으로 궁금한듯 보였다.
어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병화를 가장 행복하게 할 선물을 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이 되어 선악과를 탐한 이브를 벌하려 했던 일권은, 결과적으로
영원히 미로를 헤메었을지 모르는 두 이브를 에덴으로부터 탈출시켜주었다.
불의영리의 낙원으로부터-.
.
.
.
.
.
여름이 가고 있었다.
태양을 태우고, 나뭇잎을 태우고, 욕망을 태우고………그리고…….사랑을 태워버린
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
2000년 여름, 군산의 어느 작은 매춘업소, 철장속에서 아스라진 20살 젊은 넋을 위하여.
2001년 현재, 세상을 촘촘히 둘러싼 속박과 이목속에서 소진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첫댓글 잘읽었습니다...가슴이아프네요....
질보구가요...씁쓸하네요^^
이소설도 참 제마음에 와닿네요 ......슬프네요 .....
흠...... 잘읽었습니다.
우울해지는 거네요... 왠지모를 저 남자의 짜증남.
아... 또 해피엔딩은 아니네요...........ㅠㅠ슬퍼요...
잘 읽었습니다...
슬프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