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청화 큰스님
0905 대동문화 [한송주의 산사에서 띄우는 엽서]
절에서는 꽃도 새도 절을 잘 한답니다
절에서는 절을 잘 해야 합니다.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절하는 곳이라는 뜻에서라지요.
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간절한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절에서는 그저 간절할 절 자 한 자면 다 된다는 말도 있답니다.
절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추어 엎드린 자세입니다. 하심(下心)의 절정이지요.
낮추고 비워서 겸허해진 마음으로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을 담아 누군가를 섬기고 우러르는 행위가 곧 절일 것입니다.
절에서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를 우러러 절을 올립니다. 부처님과 경전과 스님이 불교의 세 가지 보배입니다. 삼보전에는 세 번 절을 올리는 게 기본예절입니다. 부처님에게도 세 번, 부처님 말씀이 쓰인 곳에도 세 번, 스님에게도 세 번 절을 올리지요.
절집에 가면 제일 먼저 법당에 가서 부처님을 뵙고 삼배를 올려야 합니다. 그러고 난 뒤 다른 일을 보는 게 순서이지요. 스님을 뵐 때도 반드시 세 번 큰 절을 올리며 밖에서 지나칠 때는 합장을 하고 공손하게 머리 숙여 반배(半拜)를 합니다. 그밖에 부처님을 모시는 신장이나 조형물, 스님들의 탑비 등을 대할 때도 그 앞에 멈춰 합장 반배를 합니다.
그런데, 절에 가서 스님을 뵙고 큰 절을 올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불자들도 부처님께는 여법하게 삼배를 올리면서도 스님들께 예배하는 데는 저어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다 함은 삼보에 귀의(歸依)하는 것을 말합니다. 삼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존재에 귀의했으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불법을 배우고 전파하는 스님을 따른다는 뜻이기 때문이지요.
불교의례에는 반드시 이 삼귀의가 우선적으로 행해집니다. 삼배를 하며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의 구절을 외우는데 그 뜻은 부처님은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므로 돌아가 의지하며, 불법은 영리를 떠난 청정한 법이므로 돌아가 의지하며 스님은 뭇사람 가운데 가장 존귀하니 돌아가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진대 불자 된 이가 스님께 예경하기를 꺼려한다면 이는 단단히 잘못된 일이지요.
필자도 한 때 스님께 예경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겼던 적이 있답니다.
10여년전 일이네요. 지금은 사바에 안 계신 청화큰스님을 옥과 성륜사로 뵈러 갔었어요. 그때 함께 길동무한 이가 저더러 큰스님에게 꼭 삼배를 하라고 권면하더군요. 저는 계도 받지 않은 무늬불자인데 무슨 삼배씩이나 할까보냐는 생각에 한 자리만 하리라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절 두 자린디 생판인 남에게 무슨 절을 석자리씩이나 한다요?” 하고 무식하게 튕겼지요.
다행히 청화스님은 절 한 자리를 양존한 뒤 그만하면 됐다고 해 큰 결례는 면하고 넘어갔습니다. 첫 인사에서 시작해 그날 면담 내내 보여주신 노스님의 하심행은 지금까지 가슴에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스님은 제가 무례하게도 턱 밑에 다가 앉아 “얼굴이 좋으시네요” 하고 문안을 여쭈자, “맨날 놀고 묵응께요”하고 스스럼 없이 대꾸해 승속의 벽을 단번에 허물어 주는 무애함도 드러내시던 기억이 납니다.
스님이 무지한 중생에게 경책 삼아 나타내는 노여움을 흔히 법노(法怒)라 표현합니다만 청화스님은 그런 법노의 흔적조차 없이 되레 재미있다는 듯 싱글싱글 웃어가며 철없는 귀염둥이를 보는 이웃집 할아버지 마냥 살갑고 정겹게 대해주시더군요. 아하, 도인이란 이런 국량이 있으니 도인 소리를 듣는 모양이구나, 하고 느꼈는데 그 영향인지 다음에 뵜을 때는 옆에서 시키지 않아도 절로 크게 고개가 조아려 집디다.
한데, 스님이 일반 신도들에게 하는 예경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스님은 신도들에게 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공경을 다해 절을 해야 하듯 스님도 신도들에게 공경을 다해 절을 해야 합니다.
속가에 머문 재가불제자나 속가를 나선 출가불제자나 같은 불제자입니다. ‘일불제자一佛弟子’라는 말이 있지요. 부처님 제자는 다 같다는 뜻이라고 압니다. 재가자나 출가자는 몸이 처한 장소가 다를 뿐 부처님 자리에서 보면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속가에 있으면서도 마음으로 부처를 그리면 이미 출가한 것입니다. 이를 마음출가(心出家)라 이르지요.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둘렀어도 마음이 저자에 머물러 있으면 출가자가 아닙니다. 몸출가(身出家)만 한 무늬불자이지요.
일불제자일진대 서로 양존의 예경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승속의 차별을 두지 않고 스님과 신도가 함께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절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스님들은 아까 예를 든 청화스님처럼 신도들이 절을 올릴 때 동시에 똑같이 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스님네들은 동사섭이나 하심의 도리를 보이지 않은 채 신도들의 삼배를 합장도 하지 않은 채 너볏이 받아 자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공부가 덜 익은 젊은 스님이거나 한 소식 한 양 아상에 빠진 괴팍한 스님들이 그렇게 합니다. 스님들 은어로 이런 스님들을 ‘풋중’ ‘아만승’ ‘괴각’ 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이 풋스님들은 특히 신도들에게 말도 함부로 하기 십상입니다. 연상인 남자신도에게 여영부영 말끝을 내리는가 하면, 여신도들에게는 아예 내놓고 반말을 하는 게 예사입니다. 할머니 신도들에게도 말을 함부로 하는 걸 보고 있으면 기가 막힐 지경이어요.
물을 흐리는 일부 미꾸리스님들을 ‘승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런 스님들의 ‘행짜’는 부처님전으로 향하는 불자들의 발길을 많이 돌려 놓을 게 뻔합니다. “교회 안에 사탄 있고, 절집 안에 마구니 있다”는 속언이 떠오르는군요.
제가 의탁하고 있는 송광사의 스님들은 하나 같이 신도들에게 ‘먼저’ 절을 올리는 승보들이십니다. 빈 말로 승보종찰 송광사이겠습니까?
송광사에서는 스님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더불어 사는 대중들이 다 절을 잘하는 하심통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대중이란 스님 신도 비신도를 포함한 뭇사람 뿐 아니라 들짐승 날짐승 꽃나무 풀포기 돌멩이들까지 아우른 뭇존재를 가리키지요.
일례로 도성당에 계시는 유나스님의 뜰에는 사시사철 뭇꽃들이 어우러지고 뭇새들이 찾아와 노니는데 이 꽃새들이 유나스님에게 여법하게 절을 잘 합니다. 유서깊은 송광사 선원[修禪社]를 이끄는 유나스님은 헌헌장부의 외모와는 달리 속내는 아주 섬세해서 작은 뜰에 온갖 화초를 손수 기르고 새들을 불러 모아 모이를 주는 일을 파적으로 삼는 분입니다.
그 스님이 물을 주면 꽃들이 방긋 웃으며 절을 하고, 또 손바닥에 모이를 들고 휘파람을 불면 새들이 숲속에서 날아와 손 위에 올라가 꾸벅꾸벅 삼배를 합니다. 그래서 불자들 사이에서 스님의 도품에 대해 찬탄이 있어요.
얼마 전에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더니 스님은 씩 웃으시더니 가볍게 한 말씀 하시더군요.
“뭐, 별 게 있겠어요? 지들 먹을 거 주니까 오는 거지. 새 중에는 더러 헤픈 새도 있어요.”
하여튼, 절집에 가면 절 제대로 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