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이번 주 들어 늘 쾌청합니다. 바람은 가을 바람, 햇살은 따뜻하되 덥지 않게 불어 논에 가득 심어진 벼가 낟알이 노르스름해지려는 찰나입니다.
가을 들어갈 무렵, 햇살 아래 무르익는 벼처럼 아이들 마음이 자라나길 바랍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를 닮아 나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 나보다 낮은 이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도서관에 아이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정빈이, 유종이가 왔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왔다 싶었는데 들어보니 요즘 하고 있는 방과후 교실을 도망왔답니다.
"방과후 교실 때문에 학교 가기가 싫어요"
유종이는 도서관에 오면 컴퓨터를 곧장 켜고 영화를 다운받아 보곤 합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많이 봤답니다. 영화에 대해 해박합니다.
"영화보는 것도 좋지. 그런데, 동생이나 친구들하고 바깥에서 노는 건 어떠니?"
"동생들은 수준이 안 맞아요. 저녁에 동네 형들하고 야구하는 건 수준이 그나마 맞는데, 애들하고 놀면 재미없어요."
사람과 어울려 노는 재미보다 컴퓨터로 혼자 노는 것에 익숙할까 물어본 것인데
이미 동네 형들과 잘 어울려 놀고 있다하니 할 말이 딱히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종이의 인격과 유종이 또래관계를 생각하면 마음에 앙금이 남습니다. 마땅함과 거리있어 보입니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이 많이 하는 말 중에 그냥 듣고 지나가기 어려운 말들이 있습니다.
"선생님, 게임해도 되요?" "선생님, 영화봐도 되요?" "선생님, 간식 뭐에요?" "선생님, 간식 언제 먹어요?"
도서관 컴퓨터로 게임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에 "미안하다, 도서관 컴퓨터로 게임은 안 했으면 한단다. 게임보다 친구, 동생들과 어울려 놀면 어떻겠니?" 라고 하면 대개 알아듣습니다.
반면, 영화는 거절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같이 보기도 하고, 좋은 영화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선 아이들이 즐겨 보는 영상이 무언가 봤더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갑자기 놀래키거나 마냥 웃기거나, 무서운 영상들입니다.
유익하고 선한 것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이 또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영화 좋아하는 유종이에게 물어봅니다.
"도서관에서 빔프로젝트와 스피커 갖춘 이유가 매일같이 영화보는 것과 거리가 멀고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놀기보다 영화만 보게 되니 차라리 앞으로 1주일에 영화 보는 날을 정하면 어떻겠니?"
"그렇게 해요. 1주일에 2번 봐요."
당장 정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영화 볼 적에 유종이가 형으로서 동생들과 친구들 보기 좋은 유익한 영화, 좋은 영화를 추천해주길 부탁했습니다.
간식을 해줄만한 요리실력도 안 되거니와 간식을 매번 해줄 엄두도 안 납니다.
그러나 시골에 일하느라 바쁜 부모, 조부모와 자라는 아이는 집에 가면 무얼 먹기 마땅치 않은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래서 간식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무턱대고 공짜로 먹이는 것에 길들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저녁에 도서관 강좌 들으러 들리신 옆에 있는 면인 안내면 임병용 이장님이 그러십니다.
"자기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줘도, 고맙습니다 하고 먹는게 당연한데 내가 가끔 동네 아이들 있는 사랑방(모던스쿨이란 곳에서 올해 운영하는)에 아이스크림을 사갖고 가면 고맙습니다 하기는 커녕, 자기거 챙겨서 먹기 바빠.
도서관도 마찬가지지? 간식 먹는 거, 해주는 게 그저 당연한거처럼 그러지?
학교도 보면 공짜 아니면 부담스러워해. 무얼 해가서 해보자 그러면 공짜냐고 묻고 그래.
도시도 이런지는 잘 몰라도 시골은 무조건 공짜, 공짜 하니까 요즘엔 이게 영 아니다 싶어."
물론 안남 아이들은 간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는데 익숙합니다. 특히 고학년 여자아이들은 만들어서 동생들 챙겨먹이고 뒷정리하는 것도 잘 합니다.
그래도, 간식 먹으러 도서관에 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재료든, 식재료를 살 돈이든 안남에 사는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동네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아이들 생각에 후원하고 갖다주셔서 있는 것인데 감사하는 마음과 표현도 없이 당연히 공짜로 먹는 것인양 챙겨먹으려 드니 보는 가슴이 서늘합니다.
사람이 지닐 염치, 자존심, 예의를 잊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오늘도 몇몇 아이들과 의논했지만, 당분간 아이들 간식, 게임, 영화에 급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게임 못하게 한들 면사무소, 집에 가면 얼마든 할 수 있고 영화도 다른 곳에서 보려면 볼 수 있잖아요. 간식도 몰래 먹든지, 사먹으면 그만이니 도서관에서 "안돼"하는 것이 무기력해보입니다.
아이들 보기에도 우스울테지요.
그래서 앞으로 간식, 게임, 영화로 머리 아파하기보다 일대일 정담(정다운 이야기 나누기, 개별상담)을 하려고 합니다. 아이들과 진지하게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귀하게 대접받는 경험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아이 한 명 한 명과 깊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잘 하고 좋아하는 것, 아이들 주위의 좋은 사람, 친근한 사람, 좋은 어른을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조금만 도우면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
왜 안아주면서 인사하자 하는지, 도서관에서 영화보거나 게임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간식을 먹되 재료나 마련할 돈을 보태준 분들께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 의논하고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일대일 정담을 할 장소를 어떻게 꾸밀지 의논했습니다.
● 다락방을 어떻게 하면 선생님과 이야기하기 좋게 꾸밀 수 있을까?
● 선생님 도와 다락방 꾸밀 사람 찾아요.
하고 싶은 아이들부터 신청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다은이, 지애가 신청했습니다.
도서관 선생님과 일대일 정담(정다운 이야기 나누기), 신청 받아요. ? 학년 : ? 이름 : ? 하고 싶은 날짜 :
내일은 다락방을 꾸며볼까 합니다. 다락방 꾸미는 것도 아이들과 '함께 하자' 제안하려 합니다. |
출처: 살림 일꾼 원문보기 글쓴이: 이주상
첫댓글 분기마다 1회씩 아동 개별면담을 실시합니다. 이번 분기에는 아이들의 관계에 집중할까 해요. 아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 맺고 싶은 관계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래요. 오빠 기록이 또 하나를 깨웁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