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대사제가 사도들을 27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사도들에게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제2독서 묵시 5,11-14
나 요한은 11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복음 요한 21,1-19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음식을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훌륭한 조리도구일까요? 아닙니다. 음식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더욱 더 신나게 음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음식 맛도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현재 식복사 없이 스스로 식사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에 안식년을 보내면서 식복사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를 찾아준 신부님이나 다른 지인들도 이 정도면 웬만한 주부 정도는 된다고 하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기에 더욱 더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식사 준비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 준비하기 귀찮다고 밖에 나가서 간단한 식사로 한 끼를 때울 때가 많아졌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바쁜 것도 있지만 생각해보니 제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안식년 때에는 신부님들이나 지인들이 많이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을 해 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나가서 식사하지 않고 제 숙소에서 요리를 해서 직접 먹었지요. 음식 만드는 것이 너무나도 재미있었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강화에 살다보니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확 줄었습니다. 또한 음식을 잘 만들지 않다보니 누가 찾아와도 집에서 요리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잘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즉, 함께 해줄 사람이 있어야 행복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호수로 갑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그들은 심한 허탈감과 좌절감을 느꼈지요. 그리고 관심 자체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그냥 세상의 흐름에 맡기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대화를 했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관심이 주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따르고서 수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말씀해주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들과 3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아무런 물고기도 잡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무의미한 시간만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서 함께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의 것들을 얻을 수가 있으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음식 잘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기적이란 없다고 믿고 사는 것과 어디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 나는 후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알버트 아인슈타인).
티베리아스 호수의 어부.
주님께서는 누구를 좋아하실까요?
어떤 어머니에게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두 아들이 있어요. 큰아들은 장남답게 착하고 의젓해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 혼자서 척척 하지요. 그에 반해서 작은아들은 얼마나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지 몰라요. 산만하고 또 이기적이어서 혼자는 잘 하려고 하지 않고 저를 늘 불러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큰아들보다 작은아들에게 더 정이 가요. 매번 작은아들과 함께 해서 그럴까요?”
분명히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큰아들이 작은아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입장에서는 작은아들에게 정이 더 간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떤 일이든 도와달라고 청하는 작은아들과 늘 함께 했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주님께서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착하게 살고 혼자서 척척 알아서 하는 우리를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과 함께 하려는 우리를 더 좋아하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원하실 것입니다. 비록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웃으면서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아.”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첫댓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착하게 살고 혼자서 척척 알아서 하는 우리를 주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과 함께 하려는 우리를 더 좋아하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면서 기도하는 우리를 원하실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체험을 토대로
얻어들은 것만으로
고집하는 고정관념, 선입견
이 모든 장애와의 결별.
낯선자로 저를 객관화 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거듭날 수 있으려나.
그물을 배의 다른 편으로 던져라 하신
부활하신 주님 말씀 안에서
참 자유를 향할까.
언덕이라서 좋지요.
팔벼개 푸른 하늘
마음 편한 높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