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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꽃
실크로드(Silk Road)를 일명 비단길이라고 일컫는데 이 실크로드는 주로 중앙아시아 일원에 點點이 박혀있는 여러 오아시스(oasis)를 연결하여 이루어진 길임으로 일명 ‘오아시스 路’라고도 한다. 이 실크로드란 고대 중국과 서역 각국 간에 비단을 비롯한 여러 물자를 교역하는 무역을 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로 이어진 교통로를 일컫는 말이다. 그 길 1부를 山水會員 6명과 서울 市友會 강정웅 회원 등 7명이 8박 9일간 답사한 일이 있어 그때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하였다가 [한맥문학]을 애독하시는 江湖의 諸賢들 앞에 2022년 연말까지 4회에 걸쳐 내놓을 예정이다.
2011년 4월 25일(월)
꽃피는 4월! 그 좋은 계절인데 어떻게 방콕 하여 방안 퉁소 노릇만 하고 있을 수 만은 없지 않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동경의 대상으로 가슴에 품어왔던 실크로드의 꽃인 돈황의 명사산과 막고굴 일원을 탐방하려던 꿈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설레는 마음으로 큰 기대를 안고 이 道程에 올랐다.
인천공항 국제선 A 계산대 앞에서 우리 會員 일행을 만나 OZ 335편인 아시아나항공으로 북경에 도착하니 이곳이 북경 제3공항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 올림픽 행사를 대비해서 공항을 신축하였는지 국제공항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어 놓았다. 이곳에서 공항 셔틀버스로 20여 분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제2공항이라고 한다. 중국은 우리보다 1시간이 빠르고 날씨도 우리보다 5~6도나 높은 24도의 날씨가 되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흐른다. 이곳에서 우리가 무슨 큰 죄인인 양 너무 심한 몸수색을 당한 끝에 겨우 CZ 6910 중국 국내선인 남방항공에 탑승하여 밤 11시30분에 우루무치乌鲁木齐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곳 신강성은 중국 서북쪽에 있는 省인데 면적이 165.000km2로9.596.960km2인 중국 국토의 1/6을 차지하는 큰 성이라 한다. 신강성은 기원전 13세기 전후부터 내륙과 왕래를 시작하여 1500년 동안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서역의 상품교류가 활발했던 통로이었다. 유목민들이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 도시국가를 세운 뒤 위구르족 한족 카자흐족 회족 그리고 키르기스족 몽골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실크로드는 황하 문명과 인도 문명 그리고 희랍 문명을 연결하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신강 지역은 7,000km의 교통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실크로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하이로부터 3.200km 거리에 있는 우루무치는 옛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말이라고 하는데 신강성의 省都로 인구는 2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신강 위구르 민족자치구인데 13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곳이다. 우루무치는 교통의 요충지요, 옛날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동서내륙 횡단철도의 허브 도시이며 국내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라고 한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발 900여m의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평균 기온이 6.4도, 연중 강우량이 18m/m 박게 오지 않아서 매우 건조하고 척박한 곳이다. 그래도 목화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곳은 위구르족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려고 저항하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공항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미려화 호텔에 짐을 내려놓았다. 이곳은 생각보다 깨끗한 호텔이다. 26층이나 되는 호텔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니 우루무치는 큰 건물들이 즐비한 아주 큰 문명 도시처럼 보였다.
2011년 4월 26일(화)
天山 天池
우리는 우루무치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07; 00에 일어나서 호텔 내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전용 버스로 130km 거리에 있는 天山 天池를 향했다.
우리나라 한라산의 높이와 맞먹는 해발 1,960m나 된다는 천지를 향해 가는 길가의 황량한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는 땅의 곳곳에 해바라기 꽃이 군락을 이루어 피고 있다. 해바라기 씨로 기름을 짜서 먹는다고 하는데 그 노란 빛이 척박한 구릉과 척박한 산과 어우러져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길가에는 한족과 위구르족이 이용하는 식당과 가개가 길의 좌우에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위구르족의 전용 식당에서는 담배와 돼지고기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은 밤 10시 이후에는 남자 4명이 모여서 택시 타려고 손을 들면 운전기사가 이를 거절하여야 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한 곳이라고 한다.
淸朝 말에 영국이 아편을 팔아 부를 축적하려는 것을 林則徐 장군이 아편을 싣고 온 영국 상선에 불을 지르는 등 거세게 저항을 하자 영국인들이 이곳으로 아편 운반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여 한때 이곳에 아편이 번졌었다고 한다.
천산 천지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많은 나무들이 파란색을 짙게 나타내기 시작한다. 유수 나무가 많다고 하는데 그 잎사귀가 꼭 올리브 나뭇잎처럼 희뿌옇다. 유수 나무 사이로 작은 냇물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물살이 세어진다.
우리는 차를 타고 구절양장의 구불구불한 길로 스릴을 맛보며 천산 천지를 오르니 눈 녹은 물이 고여 만든 천지가 아침 세수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큰 기대를 안고 가서 만난 천지는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다. 실제로 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가 없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천산(텐산)도 우리에게 어서 오라는 인사를 한다. 5,000m가 넘는 설산의 장엄함과 호수가 어우러진 현장이다. 소나무 등의 침엽수림, 그리고 그 그림자가 담겨있는 맑은 천지와 어우러진 장관에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같이 여행한 일행 중 한 분이 캐나다의 밴프 풍경과 닮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고 보니 밴프에 가 보고 싶어 했던 필자의 열망이 조금은 대리 충족된 듯하다. 척박한 사막 지역에서 의외로 만난 경관으로 카메라가 바빠졌다. 무언가를 더 많이 거두려는 욕심이다.
천산 천지는 중국에서 이곳만 사막 안에 만년설이 있어 알프스 연봉이 연상되며 삼나무 숲과 호수가 그림처럼 떠 있는 경관이 너무나 수려하다. 호수는 아직도 얼어붙어서 마음을 열지 아니했고 여객선은 한쪽에 모여 벌벌 떨며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제1 높은 5.445m의 보거다 봉이 이들을 안타까이 굽어보며 위로하고 있었다. 천산 천지는 화산폭발로 생긴 분화구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호수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호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고산 빙적호冰碛湖이란다.
우루무치에서 동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이 호수는 면적이 약 4.9km2이고 평균 수심은 40m인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105m이라 한다. 호수는 반달형이며 뒤편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보거다봉博格达峰이 뒷배를 봐주고 있었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이듬해 5월이 지나야 풀린다고 하는데 우리가 찾은 것은 4월 말경인데도 꽁꽁 얼어 입이 붙어서 말도 못 하는 벙어리 흉내만 내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개발이 진행되어 각종 관광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주목받는 곳이라 한다.
천산 천지에는 도교의 창시자라고 하는 서왕모의 도교 사원이 절벽에 놓여 있다. 많은 사람이 그곳을 오르고 있었는데 우리는 직접 가 보지는 못했다. 좀 더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그런 유적 하나하나를 발로 밟아 보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였다.
이곳에 전해 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옛날 서왕모가 이곳에 살았는데 周나라 목 왕이 서왕모의 미모에 혹해서 찾아왔으나 서왕모가 만나주지 아니하자 억지로 쟁탈하려는 전쟁까지 일으켰는데도 승산이 없음을 안 목 왕이 물러나면서 돌에 서왕모라고 새겨 놓은데서 오늘날 서왕모란 명칭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 밑에서 호수에 올라오려면 만나는 小天地는 서왕모의 세숫대야이고 큰 천지는 서왕모의 샤워장이었다고 한다.
옛날 중국의 漢 武帝는 복숭아를 좋아해서 뒤뜰에 많은 복숭아나무를 심어놓고 봄에는 꽃을 즐기고 여름에는 그 열매를 즐겼는데 어느 해에는 때가 되어도 복숭아가 열리지 않아 동방삭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그것은 장차 서왕모가 天桃를 가지고 올 징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과연 서왕모가 잘 익은 복숭아 30개를 가져왔는데 동방 삭이 몰래 3개를 훔쳐 먹고 천년을 더 살 수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현재 이곳은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는데 운행 중이던 케블 카를 뒷전에 숨겨서 잠을 재우고 있었기에 우리는 버스로 33 굽이를 돌고 돌아서 어렵게 천지에 올라왔다.
천산 중턱의 아극서 찬청이란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가 곳곳에 유목민들의 숙소인 파오가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펼쳐져 있고 깎아지른 절벽에는 염소와 양들이 곡예를 하면서 바위를 핥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오면서 만난 小 天池의 물빛은 옥빛이었다. 그 물빛이 일 년에 네 번이나 변한다고 하는데 정말 아름다운 계곡이었다.
우루무치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생소하게 느껴지는 우루무치라는 도시이다. 우루무치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省都로 천산산맥의 북쪽 기슭 해발고도 915m의 고지에 있다. 겨울에는 무서운 추위가 찾아오며 여름에는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북부 대륙성 기후를 맞는 곳이다. 우루무치가 제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시기는 5~10월로 이때가 가장 여행하기 적합한 시기라 한다. 이곳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동서양의 교역로이자 동서양의 문화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80%가 사막인데 인구 2,000만명 중 2/3가 위구르족이라고 한다. 그 쓸모없을 것 같은 사막 지역에 지하자원이 풍부하다고 하니 부럽다. 석유와 석탄 그리고 금 매장량이 엄청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오아시스에서 목화를 많이 재배한다고 한다. 하밀과 선선은 멜론(중국명: 하미과) 주산지이고 투루판에서는 포도가 많이 난다고 하는데 뜨거운 열사의 땅에 햇빛이 당도를 높여준다고 하니 과일 맛이 많이 기대되는 곳이다.
우루무치는 중앙아시아 8개 나라를 상대하는 물류 중심지인 무역도시이기도 하다. 천산의 만년설 녹은 물로 수로를 만들어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로 카레즈라고 부르는 이 수로는 기원전부터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 3대 고대공법에는 만리장성 대운하외에 이 카레즈가 포함된다고 한다. 투루판에서 볼 수 있다는 카레즈 地下水路는 꼭 가 보아야 하겠다.
이곳 모래와 자갈로 구성된 고비사막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예산지원으로 나무를 심어서 스프링클러로 정성을 들여 가꾸고 있었다.
우리는 우루무치에 있는 신장박물관에 들렀다. 이 박물관은 5.850㎡의 면적에 역사관 민족관 초원문화관 외 3개의 테마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막에 꽃을 피웠던 실크로드는 고대 인류의 4대 문명이 융합하던 곳으로 대량의 유물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에는 신석기시대에서 明 淸 시기의 각종 청동기, 비단 직물 견직물 도구, 그림이 새겨진 벽돌 그리고 채색도안의 목관 도자기 거란족의 왕후가 쓰던 금관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살던 3,000년 전 사람의 미라와 3,800년 전의 46세 된 누란 미녀의 미라도 보존되어 있어 우리도 똑똑히 견학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우루무치 시내의 홍산 공원에 도착하니 처녀가 시집가는 날 등창이 난다더니 때를 맞춘 듯 마침 대불사에서 소방훈련을 하고 있었기에 대불사 관람은 생략했다. 紅山 공원은 서쪽 단애의 암벽이 붉은빛을 띤다고 홍산이라고 했다는데 4,069㎢의 넓이에 70여 종 3만 그루의 나무가 있어 한참 멋진 봄의 향연을 연출하고 있었다. 길가에는 중국의 영웅 임측서의 동상이 있고 1788년에 홍산 정상에 세운 보탑에 오르면 老紳士의 흰머리 같은 천산이 보이고 우루무치 시내가 한눈에 잘 보인다. 이곳에서는 2억7,000만 년 전의 물고기인 대구의 화석을 비롯하여 많은 물고기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당시에는 바다이었던 곳이 지금은 사막이 되었나 보다.
우리는 우루무치역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21; 30 출발하는 밤 열차를 타고 돈황으로 향했다.
2022 한맥문학 7월호에 게재
4.27(수)
우리는 우루무치역에서 침대차를 타고 돈황의 이웃인 유원역까지 간다고 해서 많은 기대로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기차를 타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객실 하나에 2층 침대가 2개씩 4인 1실인 객실은 생각보다 좁고 깨끗하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였다. 영화에서 보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대한 환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무한한 대륙을 달리는 열차라서 마음속으로 많은 기대를 하였으나 실망이 컸다. 그러나 몸이 피곤하니 중국인 남자고 가이드고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요람에 누워있는 듯 잠이 솔솔 쏟아진다. 누렇게 변색된 침구도 신경 쓰이지 않는 걸 보면 온종일 더위에 시달리면서 여행한 것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침대차에서 꿈나라로 향했다. 4인 1실의 상하로 된 침대열차에서 눈을 붙이고 밤새 달리는데 주변은 모두가 황무지 일색이다. 마침내 모래와 자갈뿐인 고비사막의 정적을 가르고 달리던 열차가 머문 곳은 유원역이라는 시골 역인데 시간은 08; 00경이었다.
우리는 유원역에서 하차하여 근처에 있는 공중화장실에 거려다가 깜짝놀랐다. 들어가는 길 10여 m 전방에서부터 대변이 발에 밟힌다. 정작 화장실의 소변 보는 곳에 갔더니 시멘트로 길게 만든 소변 누는 곳에 중국인들이 엉덩이를 까고 앉아서 큰 것을 보고 있었다. 이 광경만 목격해도 중국인들의 위생관념이 전연 없는 후진국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유원 시내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승차하였는데 비포장도로에서 풍기는 먼지가 원폭투하 현장처럼 대단한데 그 속을 누비고 한 30분간 민방위 훈련을 하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도 역시 길은 사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둔황은 감숙성에 속하는데 중국 23성 중 감숙 사천 귀주성이 낙후되었다고 한다. 서북 7개 성의 70%가 사막인데 겨우 15% 정도를 개발하여 활용 중이라고 한다.
감숙성은 감주와 숙주를 합한 지명으로 454.000㎢의 넓이에 그래도 2,6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88%가 사막지대라고 한다. 이곳의 3가지 기상특징으로 일조시간이 길고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며 연간 강우량이 39m/m로 아주 건조하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주 산품인 포도와 살구는 당연히 당도는 높을 것이다.
돈황 敦煌
우리는 마침내 돈황에 도착했다. 돈황은 서역으로 나가는 출발점이다. 남쪽 곤륜산맥을 따라가는 서역남로와 북쪽의 톈산산맥을 남북으로 돌아가는 찬산남로와 천산북로가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지 돈황에서 만나게 되어있다고 한다.
이 돈황은 중국 감숙성 서부에 있는 도시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酒泉 地區에 속하는 현청 소재지이며 감숙甘肅-신강新疆 사막 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전통적인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서양에서 중국 통치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 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 가는 교역 도시이다. 당시 돈황은 동서 무역의 대상들이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번영하였고 중원의 전란을 피한 요충지이었다. 唐代인 645년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오던 중 머물렀으며 이후 8세기 반에 걸쳐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황금시대가 있었다.
돈황의 역사는 기원전 111년 한 무제가 흉노족을 정복하고 하서 4군의 하나로 돈황군을 두고 역내에는 漢人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설정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돈황은 탑리목 분지의 북과 남을 지나는 북로와 남로의 거점으로서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었다. 이 실크로드를 통해서 후한 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본토에 전해졌으며 동진 시대에는 유명한 막고굴이 만들어졌다.
돈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춥다.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은 25.7℃이고, 가장 추운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15.2℃이다. 연중 강수량은 36.8㎜ 정도로 매우 건조한 편이기 때문에 돈황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을 때는 5, 9, 10월이다. 이곳은 한족 페르시아족 튀르크족 인도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국제도시가 되었으며 5호 16국 시대에 西梁이 이곳에 수도를 정한 일도 있다. 366년 전진의 승려 낙준樂尊에 의하여 조성된 석굴사원은 그 뒤 북량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티베트 元代까지 작업이 1.000년 동안 계속 이어져 왔다.
하루는 길을 잃고 헤매던 장건 일행이 지쳐서 사막 위에 쓰러져 있는데 누군가가 “야 물이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에 가서 보니 바로 이 돈황이라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돈황이란 말은 “사막 속에 빛나는 도시.”라는 말 그대로 고비사막의 오아시스로서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 되어 동서 교역 문화교류 등 중국의 서역 진출의 요점이 되는 교역 도시가 되었다. 특히 당나라 때인 7~8세기에 돈황 문화의 꽃이 피고 돈황 예술을 창출하여 유네스코가 지정한 막고굴의 천불동을 비롯하여 사주성 백마탑 옥문관 월아천 등 볼거리와 유적이 많은 곳이 되었다. 이곳은 한때 독립하여 금산국이라고 했으나 11세기 때 西夏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 쇠퇴하여 淸나라 말에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이 막고굴을 찾았을 때는 주변은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도사와 일부 라마승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돈황 국제대주점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점심 식사를 마쳤다. 돈황 중심거리에 비파를 켜는 불상이 세워져 있으며 호텔 내의 거실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불상이 세워져 있는 불교 도시로서 불교 신봉자가 90%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돈황의 인구는 18만 명인데 한족이 90%를 차지하고 10%를 14개 소수민족이 채우고 있다고 한다. 돈황을 상징하는 飛天은 호텔 앞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등장한다는 이들은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돈황의 長城은 기원전 121년 한 무제가 적을 막으려고 갈대와 모래 황토를 섞어서 만든 100km나 되는 성으로 성벽 일부와 봉화대 터가 남아 있다. 돈황은 1612년에 서량의 수도였던 사주 고성이라고도 하는데 강희제 때에 홍수로 성이 무너지고 청나라 옹정제 때부터 현재의 모습대로 黨河가 시내의 중심부로 흐르고 있다.
양관 고성 陽關古城
양관은 한나라의 국경이며 관문이었다. 이문을 나서면 다른 나라 즉 서역 땅이어서 두 문물이 교류되었던 현장이다. 양관은 누란과 호탄을 거쳐 카스에 이르는 서역 남로의 시발점이었다.
우리는 먼저 돈황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진 陽關古城으로 향했다. 큰 기대를 안고 가서 보니 첫째로 황량한 느낌이었다. 요즈음 우리나라 대대로 농사짓던 전통마을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두 어디로인가 다 떠나고 세를 살던 쥐들이 주인 노릇을 하는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망가진 봉화대가 王 노릇을 하고 있었다.
장 건이 한 무제의 명으로 2차례 서역으로 출정을 하여 오손 우전 월씨 대원 강거 등 여러 나라를 돌아 서역의 길을 뚫었다는 곳이다. 양관 고성은 오랜 모래바람의 침해를 받아 지금은 사구 위에 성벽의 밑 흔적만이 보일 뿐이다. 이제는 붉은색 모래 산 위에 양관의 눈과 귀의 역할을 했던 봉화대만 남아있다. 봉화대의 높이는 4.7m, 길이는 8m이다.
옛날부터 큰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병기와 도기 또는 화폐 등의 현물이 발견되어 골중사지骨重砂地라 불렸다. 양관 근처에는 南湖와 포도길이 있어 독특하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면서 이곳 민속 문화를 탐방할 수도 있다.
양관 고성은 천산남로의 관문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던 오아시스였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오랫동안 모래바람의 침식으로 성은 무너지고 밑바닥에 성터 일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봉화대에서 바라보면 주변 수 십리가 탁 트여 옛날부터 “양관 귀목”이라 불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이번 실크로드 여행의 최북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멀리까지 왔다. 여느 관광지 못지않게 근사한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양관 내에는 박물관이 있는데 한 나라 때의 동검과 무기를 비롯하여 실크로드와 불교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마당에는 한나라 武帝시절에 황제의 명을 받들고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張騫의 동상이 있다. "나를 따르라!"라고 호기 있게 외치는 듯한 자세의 상이다..
이곳에는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친구 元二를 서쪽 멀리 임지로 떠나보내면서 지은 시구가 전하고 있다.
送 元二使安西(송 원이사안서)
渭城朝雨浥輕塵(위성조우읍경진) 위성의 아침 비가 먼지를 적시니
客舍青青柳色新(객사청청류색신) 객사의 푸릇푸릇한 버들이 새롭다.
勸君更進一杯酒(권군경진일배주) 그대에게 한 잔 술 다시 권하노니
西出陽關無故人(서출양관무고인) 서쪽 양관 나가면 친구가 없음이라.
이곳 서쪽의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는 오아시스가 있고 양안에는 말 없는 조용한 마을인 漢朝의 큰 무덤군이 있다.
옥문관이 서역북로를 잇는 곳이라면 이곳은 고대 육로교통의 목덜미로 실크로드의 남쪽 관문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백마탑 白馬塔
우리는 돈황시내에서 2km 거리에 있는 돈황 고성 남쪽에 있는 백마탑으로 향했다.
이 탑은 돈황의 남동쪽에 있는 탑으로 위치는 돈황이 사주沙州라고 불릴 때 지어진 사주고성沙州故城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높이는 12m 9층으로 유백색을 띠고 있어 하얀 탑신이 인상적이다. 후진後秦때의 고승 구마라십鳩摩羅什의 애마인 백마가 병사하자 말을 땅에 묻고 그곳에 탑을 세운 것이다.
구마라습(344~413)은 인도의 승려로 여러 곳을 편력하며 가르침을 받다 구자국에서 주로 대승교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후 [成實論]등 경전 번역에 힘썼으며 三論中觀을 확립하여 三論宗의 祖師로 불리기도 한다.
이 탑은 내부는 기둥을 세웠고 외부는 흙과 석회로 발랐다. 아래층은 8각형이고 2~4층은 층첩 형이나 8층과 6층은 복 탑형 구조이고 7층은 상륜형인데 명나라 때에 라마교가 들어와서 상층을 라마교 양식으로 보수했다고 하니 이제는 짬뽕 탑이라 할 수 있다. 이 탑은 384년 5호 16국 때 부견이 여광을 보내 고승에게 부탁하였기에 구마라집이라는 스님이 인도에 가서 백마에 경전을 싣고 장안으로 가던 중 이곳에 오자 9살인 백마가 죽자 애마를 애석하게 기리고 이를 기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법화경과 아미타경을 한역으로 번역하여 불교를 동쪽으로 전하던 현장법사와 같은 반열인 고승인 구마라십이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도 나의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했다는데 실제로 그리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4월 28일(목)
명사산 鳴沙山
우는 모래라는 의미의 鳴砂는 언덕의 모래들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일몰 장관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언덕의 면적이 800㎡에 이르는 대규모 언덕인데 돈황시내에서 불과 1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둘의 사이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현장이다.
명사산은 돈황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는 산으로 단오날에는 근처 사람들이 모두 이 산에 올라가 액을 막기 위해 모래를 타고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져 마치 벼락 치는 소리같이 들렸다고도 한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저녁에 노을을 맞으면서 관광하는 명사산과 월아천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렷다.
명사산은 높이가 1.715m 동서 40km 남북 20km나 되는 고운 모래가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래 산으로 모래와 돌이 퇴적되어 형성된 산이다. 명사산이라는 말은 갠 날에 모래 소리가 관 현악기의 소리같이 들리거나 수만 필의 병마가 두들겨 치는 북과 징 소리같이 들리고 바람이 불면 떡살 가루보다도 더 고운 모래 움직이는 소리가 교향악이 되고 어느 때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어느 때는 슬픈 음악으로 나온다는 모래 산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天下一景이라고 한다.
우리가 문안으로 입장을 하니 낙타를 타고 명사산 방향으로 가는 일행 수십 명이 장관을 이루며 행렬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래 방지용 신발 덧신을 신고 전동차로 명사산 밑에까지 가서 급경사인 모래언덕을 걸어 200m쯤 힘들게 올라가 바라보니 월아천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연속으로 이어진 모래언덕이 방년 18세 처녀의 엉덩이처럼 보드랍고 예뻐 하나의 그림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모레 썰매를 타려고 출발했다. 썰매 타는 맛은 스릴이 있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 모두가 어린이가 되어 고성을 지르고 손을 흔드는 등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되었다. 현지인들이 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잽싸게 DVD 현품을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
월아천 月牙泉
이 월아천은 명사산의 동쪽에 자리 잡은 명불허전의 오아시스이다..
이 아름다운 호수는 모래에 파묻힌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신선이 산다하여 샘가 옆에 도교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월아천은 남북 100m 동서 폭 25m 깊이 5m인 천하 신비의 名泉이다. 이 샘은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로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는 신비의 샘물이다. 이 샘은 명사산 안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로서 이곳은 모래 산에 둘러싸인 채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잠시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신비한 샘터다. 초승달 모양의 샘과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사막 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는 예쁜 샘터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오래전 돈황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어여쁜 선녀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이 샘을 이루었다고 한다.
겨울에는 물이 얼어붙어 사막의 또 다른 볼거리가 된다고 한다. 아침 8시에서 일몰 시각까지 자유롭게 둘러 볼 수 있고 이곳에서 보는 일몰도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월아천의 발원지는 돈황 남쪽에 있는 곤륜산의 눈 녹은 물이 당하라는 하천으로 흐르다가 이곳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산은 호수로 인하여 더욱더 아름답고 호수는 산으로 인하여 더욱더 유명하여 산과 호수가 서로 어울리어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월아천 옆에 월천각이라는 누각을 지어 금상첨화의 경지를 연출하고 있다. 송나라 때까지 이곳 돈황지역에서 번창하던 종교는 불교와 도교인데 막고굴은 돈황 불교의 성지이며 월아천은 도교의 성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크로드의 빛-3
막고굴 莫高窟
우리는 돈황역 인근의 철도 빈관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에 조금 쉬다가 막고굴로 향했다. 막고굴 앞에는 예전에 큰 하천이 돈황 시내를 관통하여 흘렀다고 한다.
막고굴이란 더 이상의 큰 굴은 없다. 더 높은 굴은 더는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쓰러져 있는 낙준 스님의 눈에 황금빛이 들어와 그곳을 찾아가서 파기 시작했다는 굴이 막고굴이라고 한다. 실크로드에 있는 돈황석굴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허브의 위치로 수많은 유적이 살아 숨 쉬는 거대 백과사전이오. 도서관과도 같은 곳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의 3대 석굴은 운강석굴, 우리가 가 본 일이 있는 낙양 근처에 있는 용문석굴, 돈황석굴인데 그 중 돈황석굴은 벽화가 가장 유명하다. 대동의 운강석굴은 사방 10m가 넘고 높이도 15m로 규모가 크지만, 돈황의 석굴은 거의 모든 굴이 아담한 편이다. 하지만 돈황석굴의 벽화는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한데 특히 당나라 때의 벽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돈황 석굴이란 돈황 남쪽 25㎞ 되는 곳에 있는데 鳴沙山의 동쪽 절벽에서 남북으로 1.8㎞에 걸쳐 파놓은 석굴의 무리를 말한다. 이 굴들은 한 시대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4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수많은 승려와 석공 화가와 일반인들이 만든 것이다. 인도의 아잔타 석굴은 총 30개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석굴의 수가 1천 개 이상이라 천불동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492굴로 여기서 나온 벽화만도 2천여 점에 달한다. 총면적은 4.500㎡로 한마디로 사막 가운데서 보는 천연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 막고굴이 처음 조각되기 시작한 것은 동진東晋 때인 366년으로 이후 元나라 때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많은 양의 막고굴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 붕괴와 인간들의 무지한 파괴 때문에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492개의 동굴만이 남아있다. 492개의 굴을 시대별로 보면 隨나라 이전의 굴이 120개 隨나라 대 140개 唐 대 111개 吳 대 7개 宋 元대 35개로 되어있다.
굴마다 들어서 있는 소상들은 표정과 자세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벽에 그려진 벽화는 보는 이의 눈을 찬란한 불교미술의 화려함으로 고정시킨다. 그중에서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제17굴은 송나라 때까지의 경전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고 제45굴의 七尊像은 당나라 불교미술의 걸작품일 뿐만 아니라 돈황 막고굴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제427굴의 조각과 천불은 수나라 때의 것이고 제285굴에 그려진 비천은 위 진 시대의 걸작품이다. 또한 막고굴에서는 신라의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어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벽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 신화가 많고 후기에는 후한 시대에 전해진 불교가 중국 고대의 신불사상과 결부된 것이 많은 편이다. 또 인도의 쿠샨 카니슈카 왕조시대에 서역으로 전해진 불교예술의 영향이 강하고 주제는 석가가 전생에 선을 권하는 소위 본생 담이 많다.
당나라 때는 서역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이곳은 동서 문화의 교류 또는 동서무역의 중계지로 번영했다. 돈황석굴은 왕모래가 진흙 등과 섞여 이루어진 역암이어서 불상을 조각할 수도 없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그림을 그렸고 강바닥에서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했다. 19km 길이의 절벽에 492개의 굴이 남아 있고 채색된 소상이 2,400점, 벽화가 4,500㎡가 남아 있는데 중국 불교의 정수를 담은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적인 보고이다. 벽화예술의 화랑이라는 막고굴에는 32가지 불경 변상이 있다. 돈황 벽화 중 불상은 3천여 좌가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풍부한 예술의 멋과 맛을 보여주고 있으며 2,400여 개의 채소彩塑(채색된 소상)는 면상이 다정한 대불, 미소를 짓는 보살, 웅장한 금강, 살아 있는 여성의 모습, 눈과 입가의 표정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부처도 있다. 35.5m의 미륵 대불은 71m의 낙산 대불, 55m의 아프가니스탄 대불과 함께 세계 3대 불의 하나인데 695년 당나라 측천무후 때 그와 비슷한 상으로 조각했다고 한다. 1961년 미처 날 뛴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에도 다행히 파괴를 면했다. 당나라 현종 때 사암인 이곳에 대불을 조각하면서 상부에서 시작하여 밑으로 내려오면서 조각을 했는데 29년이 소요되었다 한다. 158굴의 금박을 한 16m의 와불은 부처가 BC 496년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때 72인의 제자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와불은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당나라 때의 뛰어난 작품이며 천장에는 千佛像이 그려져 있고 1500년 전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도 남아있다. 다음에 들른 곳은 송나라 때의 큰 동굴이다.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있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천불상 그림도 있으며 천장에는 네 귀퉁이에 사천왕상의 그림도 있다. 다음 45굴은 당나라 중기 성당盛唐 때인 1200년 전에 진흙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으로 外表가 아름답고 마음과 체형의 조화가 잘 되어 돈황 조각 예술의 으뜸으로 친다. 감실 안에 늘어선 7존상의 부처 중 좌우에 있는 아난과 가섭 옆에 있는 불상은 눈썹은 초승달 같고 입술은 붉고 풍만한 몸매 등 당시 미인으로 치는 양귀비의 모습인 듯하다. 굴 초입에 각국의 사신도가 있는데 신라의 왕자도 참여한 그림이 남아있다. 이 굴에는 조우관을 쓴 신라의 사신이 40명의 활동하는 모습이 벽화로 남아있다고 한다. 중국 여권에 나와 있는 것은 96굴인데 9층 전각 뒤에 초대형 불상이 앉아있어 막고굴의 간판급 굴이라 할 수 있다. 259호굴은 1600년 전 위 진 남북조시대에 조성한 굴인데 감실 내에 석가모니와 다보불상을 모시고 있다. 협시불은 간다라 양식이 아닌 힌두교 양식이 도입되었다. 옆 벽면에는 가부좌하는 선정불은 북위 시대에 조각했는데 동방의 모나리자라고 칭한다. 1908년 프랑스의 페리라는 자가 굴마다 번호를 매기고 도굴을 일삼았다. 다음은 도서관 굴이라고도 하는 17굴에 들렸다. 이 굴은 1300년 전 초당 시대에 조성한 불상과 벽화가 보존된 굴이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계시고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불이 남아 있었는데 한쪽의 부처를 미국인이 훔쳐서 하버드대학 포드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862년 당나라 때 서역에서 외국인이 침범한다고 굴을 파서 불경 불화 등을 숨기고 이를 900(1002년~1900년)년간 흙으로 막았는데 이를 장경동이라 한다. 광희 연간에 왕원록이라는 관리가 쌓인 토사를 치우다가 막은 흙문이 무너져서 타임캡슐인 5만4천 권의 고문서와 불화를 비롯하여 각종 유물을 발견하였다. 처음엔 이를 보전하려 애썼으나 유물의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한 중국 관리들의 무식과 무능으로 결국 잘못된 길을 가고 말았다. 이곳에서 나온 전적은 한문으로 적힌 불교 문서가 대부분이었으나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인도계 언어) 위구르어(터키계 언어) 소그드어(이란계 언어) 등 다양한 문서도 있었다. 이외에 다른 종교문서도 있었고 천문학 관련 문서도 있었다.
이런 자료들이 돈황석굴에 모이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것은 당시 돈황이 동서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돈황은 몽골 고비사막과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이었기에 모든 상인이 이곳을 거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을 왕래하는 상인들은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이곳 막고굴의 불상에 올렸다. 한반도 면적보다도 넓은 사막을 횡단하면서 걷는다는 것은 수많은 위험과의 싸움이었기에 절대자인 불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고 物資도 모이고 따라서 불교의 자료들도 모였다.
1907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 스타인이 장경동이 열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왕원록에게 말발굽형 銀덩이 하나를 던져주고 여러 차례 2만 권의 장서와 불화를 낙타에 싣고 가서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풋밤구리에 쥐 드나들 듯 한다더니 뒤를 이어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와서 도굴하였고 이에 뒤질세라 일본의 오타니 고이즈가 西安에서 낙타를 몰고 와서 많은 유물을 훔쳐 가 도쿄의 국립 박물관과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 그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그 뒤 미국과 러시아의 탐험대가 찾아와서 유물을 훔쳐 갔으니 얼마나 많은 귀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었는지 알만하다.
왕원록은 돈황 유물을 싼값에 외국인 고고학자들에게 팔아치우며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이는 값을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古文書와 유적들로 아시아 고대의 역사 종교 정치 예술을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한 유물들이었다. 그중에는 1908년 폴 펠리오가 사들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신라의 혜초 선사가 고대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쓴 이 책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와 문화 풍습을 기록한 유일한 서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외로 팔려나간 돈황 유적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중에서야 이를 알게 된 중국 정부는 돈황 유물을 베이징으로 모아들였지만, 그 수는 전체 유적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왕원록은 유물 팔아치우는 데 급급했고 유물을 베이징으로 모으는 임무를 맡았던 관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돈황 유적은 본래의 0.1%에 불과하다고 '서프라이즈'는 전했다. 하지만 왕원록은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도둑맞았고 결국 병들어 사망했다. 이후 왕원록은 돈황 유적을 해외로 반출한 역적으로 중국 역사에 기록되는 더 큰 비극이 있었다.
장경동의 비밀 굴에는 홍제 스님의 열반에 드는 불상을 비롯하여 사리병과 가방을 보리수에 걸어놓은 장면 그리고 행자와 시녀의 그림이 생생하다.
막고굴 앞에 있는 경전진열관에 들러 열강의 도둑들이 훔쳐 간 경전의 목차와 일부 내용을 복사 전시한 것을 보니 우리 문화재도 일제에 빼앗겼다가 사정하거나 막대한 금품을 제공하고서야 되찾아오던 현실이 생각났다.
우리는 돈황 시내로 되돌아와서 실크로드 풍정관아란 곳에서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한국에서 일부 도지사, 국회의원, 구청장 선거가 어제 있었기에 하회가 궁금하여 가지고 간 스마트 폰으로 집에 전화를 두 통화 했더니 요금 8천 원이 부과되었다.
실크로드의 꽃-4
一松 韓 吉 洙
4월 29일(금)
아침 7시 30분 돈황에서 540km 거리에 있는 하미 시로 출발했는데 중간에 목화가 많이 생산된다는 서호를 지나 유원을 거쳐 황무지사막을 지나는 동안 당국에서 길을 막고 임시도로를 만들어 놓고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차량으로 인한 모래폭풍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약한 풍경이었다. 더구나 전국의 대형차량이 이곳으로 다 몰린 듯 물류 운송도로인 이곳은 1m 앞도 안 보이는데도 목숨을 내걸고 앞지르기 옆지르기 등 난폭운전을 하고 있어서 아찔한 쇼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윽고 고속도로 입구인 성성협이라는 곳에 와서 잠깐 쉬는 틈을 이용하여 우리가 올 때 들렸던 화장실에 갔더니 역시나 지구상에서 가장 불결한 광경이 여전했다. 민도가 그렇게 낮은데 요즈음 돈 좀 모았다고 제2의 경제 대국이라고 우쭐대고 큰소리치는 중국이 가소로웠다. “짱꼴라들이여! 유원에 가서 화장실부터 정리하고 나서 큰소리치어라”라고 당부하고 싶다.
하미시哈密市
신장위구르新彊維吾爾 자치구로 들어서서도 계속되는 사막 길을 버스로 6시간을 달려가니 하미哈密라고 하는 오아시스 도시가 나온다..
하미시는 신강성 입구인데 60만 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이다. 그런데 60만 인구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漢族이고 카자흐스탄 족이 2~3만 명 정도 거주한다고 한다. 불모의 땅 사막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메뚜기 뒷다리 같은 기계로 원유를 퍼 올리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이 노다지 보호를 위하여 한족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키고 있다고 한다.
하미시는 돈황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이나 15세기경부터 이슬람화가 진행된 지역이어서 1697년 청나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도 이슬람교도들의 자치권自治權을 그대로 인정하여 회교도의 하미왕국이 존재하였던 곳이다.
그 외에 이곳은 건조하고 일조량이 많아 여기서 생산되는 각종 과일의 糖度도 높다. 특히 ‘무등산 수박’만 한 ‘하미과’라고 하는 과일은 크고 길쭉한 호박같이 생겼으나 달고 시원한데 이 ‘하미과’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청나라 건륭황제라 한다..
이곳의 특산물인 ‘하미과’와 ‘흰 돌’을 청나라 건륭황제께 진상하였을 때 황제가 흰 돌은 깎아서 밥상을 만들라고 하면서 이 달고 시원한 과일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신하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할 수 없이 “하미에서 보내온 것이니 ‘하미과’로 부르라.”라고 하여 그때부터 하미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우리는 57km 거리에 있는 빠리쿤 초원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일곱 줄로 원광나무라는 가로수를 심어서 정성껏 물을 주어 기르고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2,400m의 천산산맥이 병풍처럼 서 있고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바위 사이로 난 구절양장 같은 협곡을 약 20km 정도 달리니 앞이 탁 트인 대평원이 나온다. 이곳은 주로 카자흐스탄족이 사는데 겨울철에는 하밀시에 거주하고 여름에만 이곳으로 와서 소나 양을 길러 생활하도록 시에서 배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천산산맥에는 무진장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고 흰 돌(白石)이 채굴되는데 흰 돌로 石像을 세워놓았으며 한편에서는 천진한 양 떼가 놀고 있는데 그 옆으로 석탄을 실은 대형차량의 왕래가 빈번했다.
넓은 대지 위의 황량한 산을 지나서 천산산맥 북쪽 해발 2000m의 고산지대에 있는 빠리쿤 초원은 중국 3대 名馬로 불리던 빠리쿤 마가 달리던 곳이다. 하미의 더운 여름에도 이곳은 시원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서 여름 휴양지로 인기 있는 장소라 한다. 이 빠리쿤 초원은 유목민인 카자흐족들의 자치현으로 카자흐족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파오라고 불리는 원형 돔식 천막집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회왕 능
점심 식사 후에 우리는 회왕 능으로 향했다. 하밀 성에서 서쪽으로 1km 지점에 약 13,300㎡의 땅에 淸 광서 초년에 건축된 陵園에는 회왕 7세와 두 왕비 그리고 회왕 8세와 왕비 그 외에 왕족 등 40여 기의 묘가 있다. 남자의 관은 복숭아 모양으로 장식하여 지하 2m 지점에 진열했고 여자들의 관은 녹색으로 장식했는데 작은 관은 아이들의 것이라 한다. 5세 왕과 몽골족 장군의 묘는 노천에 있었고 식량을 수탈했다는 이유로 일어난 농민봉기로 왕궁은 불타고 6세 왕의 묘지는 파헤쳐졌다가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 예배당은 회왕 1세 강희제 때 동서 60m 남북 38m 면적 2,280㎡의 건물로 신축하였는데 안쪽에는 경문이 쓰여 있고 천장에도 채색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5천 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올릴 수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1931년 하밀사건 때 능묘가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는지 대낮인데도 분위기는 으스스했다.
이 능은 17세기부터 약 200여 년간 하미 지역을 통치했던 회족의 왕들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실 가족묘라 하는데 회왕능은 위구르족 언어로 ‘황금의 대지’라는 뜻이라 한다. 사방에 담장이 세워져 있으며 입구는 큰 길가에 있다. 왕족이 이슬람을 믿는 회족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양식의 관과 건물 사원이 즐비하다. 안에는 역대 왕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왕의 집무실을 꾸며 두었으며 회족 왕의 옷을 입고 기념촬영을 할 수도 있다. 이곳 왕릉들은 이슬람식 건물 안에 있으며 건물밖에는 귀족들의 무덤도 있다. 왕릉이 있는 건물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그 외에 회교 사원 건물이 있고 하미왕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도 있는데 2백여 년 전의 王城을 그대로 재건한다는 하미회왕부哈密回王府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4월 30일(토)
아침 9시 선선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한 무제가 장 건에게 실크로드를 개발토록 하는데 장 건이 이곳에 살고 있던 월 씨족 돌궐족을 물리치고 역사적인 일을 이루어냈다는 곳이다.
선선鄯善
선선은 원래 누란 국이었으나 한나라에 복속되어 선선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선선은 석유개발로 각광을 받는 인구 20만 명 정도 되는 작은 오아시스이나 포도 농사를 많이 하는데 이들이 거주하는 집보다도 더 훌륭한 포도 건조시설을 많이 지어 놓았으며 가로수마다 급수 파이프를 설치하여 주기적으로 물을 주어 기르고 있었다.
사막 열차를 타고 고운 모래 산을 한 바퀴 돈 뒤에 영화 세트장과 모래 조각 작품을 둘러보고 내려와서 옵션으로 사막 차를 타고 급경사인 산봉우리를 넘어갔다가 되돌아오는 스릴을 즐기는 일행도 있었다.
이곳에서 점심을 들고 투루판을 향하는데 석유 시추기가 맹렬한 왕복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중국은 90% 양질의 석유를 생산하여 정제시설까지 갖추었는데도 자원을 절약하려고 40%만 사용하고 60%는 수입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는 16시에 선선을 출발하여 포도의 도시 해발이 낮은 도시 투루판으로 향했다.
투루판 吐魯番
트르판은 신강위그르 자치구의 한 현으로 천불동 교하성 고창고성 등의 명소가 있는 곳으로 국가급 풍경명승지이다.
우리는 먼저 배제 클릭 천불동으로 향했다. 천불동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화염산은 투루판 분지 중앙에 가로놓여있는데 총 길이는 100km 남북 5~8km, 해발 500m 정도의 산이다. 중생대의 쥐라기, 백악기와 제3기의 붉은 모래와 자갈 그리고 이암泥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山勢가 웅장하고 힘이 있으며 신비한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붉은 광채를 뿜어 낸다.
이 화염산은 <서유기>에도 등장하는 산인데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가려는데 불이 붙은 화염산이 가로막아 도저히 갈 수가 없자 손오공이 나한녀의 파초 부채를 빌려 불을 꺼 뿔이 달린 우마왕을 이기고 지나갔다는 곳이다.
화염산과 베제클리크 천불동까지는 차로 15~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필자는 차 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밖울 바라보았는데 화염산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화염산과는 달리 천불동은 관광객들이 거의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아래에는 무토우 계곡이 흐르고 있었고 위에는 화염산의 거대한 산맥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옆을 봐도 너무나 멋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무토우 계곡은 우리가 보았던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만들어진 계곡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천산의 거대함에 또 한 번 놀랐다.
원명은 베제클리크(Bezeklik)천불동이며 '백자극리'라는 말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곳은 투루판시에서 45km 떨어진 화염산 중간의 목두구(무르투크)라는 강 계곡 서쪽 낭떠러지에 조성된 불교 석굴사원이다. 83개의 석굴이 있고 현재 57개가 남아있으며 벽화만 40여 개가 있는데 총면적은 1.200㎡에 이르고 있어 투루판에 현존하는 석굴 중 제일 크고 벽화의 내용도 가장 풍부하다고 한다.
배제 클릭 천불동은 투루판시 동북쪽 화염산의 북쪽 개울가에 남북조시대 후기인 6세기부터 굴을 파서 부처님을 모셨는데 선이나 색채가 화려하고 인물 조형이 풍만해서 서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예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굴 내에는 고대 위구르어 한문 파라마문 반초문 등 문자가 남아있어 서방문화와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배제 클릭 천불동은 남북조시대 후기인 6세기에 시작되어 고창 회골국의 전성기인 9~11세기에 대부분 만들어진 고창국 불교예술의 진수가 되었다. 12세기 이후 고창 회골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천불동은 버려졌는데 20세기 들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위에는 돌을 깎아서 만든 동굴이 있고 아래에는 왕국 건축물의 흔적이 있으며 더 아래에는 물이 흐르는 천불동의 모습은 장엄하다. 인공적으로 만든 건축물과 예술의 흔적이지만 지금은 대자연 속에 너무나도 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신라의 혜초 스님도 이 굴에 머물다 갔다고 한다.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에 밀려서 개천가로 가서 56개의 굴을 파서 낙타털을 섞은 진흙을 벽에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200년 전에 독일인이 도굴해 가면서 나머지는 진흙으로 처발라서 훼손시켰다. 33굴은 고선지 장군이 26개의 성을 정벌한 흔적이 남아있다. 청나라 때 일본인 고탄이란 자가 와서 도굴해 갔는데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에도 도굴품이 몇 점 남아있다. 1950년대 중국 정부에서 이 굴의 중요성을 알고 경비원을 배치했으나 독일인이 경비원에게 쌀 2말을 주고 몽땅 도굴해 갔으며 39굴의 정면에 있던 부처님은 이슬람 신도가 파괴했다고 한다.
약탈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안타까웠지만, 만대에 이어질 우리 인류의 문화유산임으로 앞으로는 더 이상의 훼손이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절벽을 깎아서 만든 동굴들이지만 자연에 녹아든 것만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천불동계곡을 투루판을 여행하려면 꼭 들러보아야 할 곳 1순위로 추천하고 싶다.
고창고성
高昌은 옛 위구르의 수도이다. 어수선한 고려 말에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인 가짜 王氏라고 이들을 죽이고 공양왕을 내세운 9명의 공신이 있다. 이때의 공신으로 이성계 정도전 조준 심덕부 지용기 석성린 박위 외에 설장수偰長壽라는 사람이 포함되는데 이 자가 위구르 사람이다. 이 사람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에 귀화한 인물로 이 자는 통역관을 기르는 사역원에서 중국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을 가르친 사람인데 공신이 되었다.
고창고성은 투루판시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화염산 자락에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서한의 둔전 부대가 이곳에 고창 벽을 설립한 이후 이곳은 고창군 고창왕국 서주 등으로 변경됐는데 원나라 칭기즈칸이 침입해서 성을 파괴할 때까지 1.300여 년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성은 2천 년 전에 210만㎡의 면적으로 외 성벽 두께 12m 높이 11.5m 성 둘레 5.5km의 흙으로 쌓은 성벽인데 망루와 옹성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었고 서쪽에는 2개의 문이 북쪽에는 1개의 문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3개의 관문이 있다. 궁성 터는 장방형으로 북쪽에 위치해 여러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데 4층 높이의 궁전 터 임을 알려주고 있다. 성내에는 예배굴도 있는데 벽화가 보존돼 있으며 마니교 벽화 경전 조소 등 당대의 유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다. 또한, 성내에는 시장 사원 거주지 등이 있고 서남쪽에는 사원 유적지로 사원 문 광장 및 불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2만여 명의 동서 상인들이 이곳에 모여 물자교환을 하고 문화를 교류한 장소로써 당나라 진관 2년(628년) 인도에 가던 현장법사가 너무나 덥고 지쳐서 쓰러진 곳 2㎢에 고창 국왕이 대불사를 지어 바치며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는 것을 만류하였더니 현장법사가 거절의 뜻으로 식음을 전폐하자 인도를 갔다가 이곳으로 돌아오는 거로 약속하고 1개월 동안 설법을 하다가 구문태의 도움으로 한 사람의 제자와 양관까지 가서 쉰 뒤에 안전하게 인도를 다녀왔다.
당 태종이 구문태가 실크로드 교역로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한다는 말을 듣고 조치하려는 걸 미리 알고 구문태는 심장마비로 죽고 그의 아들이 장군이 되었기에 삼장법사는 이곳에 들르지 아니하고 귀경했다.
아스타나 고분군
아스타나 고분은 투루판시 동남쪽 40km 지점에 있는데 국가 주요문물 보호지역이다. 묘역은 동서 5km 남북 2km로 넓이 10㎢다. 이 고분은 3~8C 때 조성되었는데 고창국의 서민 상인 귀족들의 묘지로 미라가 나왔는데 도굴된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지하 박물관이자 자료관이라 할 수 있다. 진 남북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고창지역의 역사를 나타내는 동시에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고묘군의 고분형식과 매장물품에 따라 3기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1기는 진에서 부터 16국 시기 (3~6세기) 나무 관을 주로 사용하고 부장품은 소면 회도기 그릇 위주이며 2기는 국 씨 고창군대(6세기 초 ~7세기 중엽)로 경사진 묘도가 길어졌고 부장품은 채색 회도기가 주로 나왔다. 3기는 당 서주시기(7~8세기 중엽)인데 묘실이 크고 하늘이 보이도록 구멍을 뚫었고 부장품은 도용이 많고 지석과 진귀한 문물도 출토되고 있다.
5월 1일(일)
교하고성
우리는 9시 30분에 투루판시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교하고성으로 향했다. 서안에서 북위까지의 왕국은 모두 수도를 이곳에 세웠는데 450년 고창으로 병합되었다. 국 씨가 나라를 다스릴 때 교하군이라 했고 당 정관 때 교하 현이 되었다가 8C 말에는 토번이 점령하고 원 나라 때 많은 침입이 있었으나 잘 버티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칭기즈칸에게 항복하면서 투루판에 병합되고 성은 망가져 폐기되었다.
원고 시대에 홍수 때문에 형성된 하곡으로 남북 간의 거리는 1,700m이며 동서 최대 길이는 300m로 강물이 성 주위를 휘돌아 흐르니 교하라고 했다. 성 주변을 감싼 강물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300여m의 깎아지른 절벽은 천연요새를 이뤄 절벽 위의 성이라 고도한다. 이 성은 교역을 하거나 문화 교류를 한 성이 아니고 전투를 위한 방어용 성인데 2천여 명의 군이 거주한 서주도호부 터다. 성내의 건축면적은 36만㎡ 정도이고 남북으로 300m, 너비 80m의 통로를 중심으로 전체 유적지가 3개 구역으로 나뉜다. 통로 남쪽과 동쪽에는 성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다. 통로 북쪽은 규모가 큰 사원이 있던 곳인데 101기의 탑들이 장관을 이룬다. 중앙에는 대불탑이 있으나 조각상은 보이지 아니한다..
대불사 터에는 감실 터와 우물이 남아 있는데 옛날 현장법사가 설법하자 현지 법사가 현장법사에게 질세라 땡볕에서 설법하다가 대중의 지지가 없자 개울가로 가서 뛰어내려 자결을 했다고 한다. 통로 남쪽의 동측은 관아와 주택이 있던 곳인데 면적이 2만㎡에 달한다. 동문 터 옆에는 지금도 60m 깊이의 우물이 남아 있다. 번창하던 이곳은 칭기즈칸의 침략 시 큰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2천 년 전의 역사와 문화가 보존되어 있으니 성내 관아의 문과 사원의 불탑 등 많은 건물터와 길목 등이 남아서 옛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카레즈는 2천 년 전에 시설한 수리시설로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지점부터 투루판 시내까지 끌어온 지하수를 현재까지 모든 시민이 이용하는 수리시설을 말하는데 중국 3대 불가사의라고도 한다. 카레즈는 5,300km의 연장으로 만리장성 경항운하 다음 세 번째 긴 거리의 수로로서 천산산맥에서 흐르는 물을 화염산-고비사막-포도밭-투루판 시내 음료로 활용 중이다. 임측서 장군도 카레즈 공사에 공이 크다고 카레즈에 동상을 세워 놓은 걸 보았다.
우라는 카레즈 현장을 보고나서 점심식사를 한 뒤에 조금 쉬었다가 투루판시 동쪽 2km 거리에 있는 소공탑으로 향했다.
소공탑
소공탑은 신강성 내에 있는 이슬람 건축물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고 한다. 청 건륭제 42년(1777년)에 투루판의 군왕 액민의 아들 소래만이 청조에 대한 충성과 유일신 알라에게 정성을 표하고 부친 액민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은 7천 냥을 들여 건축했다고 한다. 탑 높이 40m에 직경 10m 규모인데 나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에 대들보 없이 밑에서 위쪽으로 빙빙 돌아 올라간 72개의 나사식 계단에 의해 탑이 지탱되고 있다. 15종의 다른 도안이 가미되어 멀리에서 보면 하나의 도자기같이 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탑이다. 탑은 벽돌로 쌓았는데 벽돌 하나하나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소공탑 입구에는 웨이얼 문자와 한문으로 된 비석이 있고 액민의 소상도 서 있다. 투루판은 지형이 낮은 지역이어서 해발 0도의 표지판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세 가지가 제일이라고 칭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제일 덥다. 연평균 기온이 45도이고 제일 건조한 지역이다. 연중 강우량이 17m/m이며 제일 입이 단 고장이다. 포도와 수박 농사를 많이 짓는데 250여 종의 포도가 있다. 2천여 년의 노하우에 강우량이 적고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여 당도가 높다는 포도농장에 가서 포도의 재배와 포도 종류 그리고 보관 벙법 등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1kg에 160원(元)짜리 건포도를 샀는데 우리 돈으로 28.800이다. 다음날 시장에 가서 보니 어제 구입한 것이 약 3배가 비쌌으니 수업료를 단단히 지불한 셈이다.
5월 2일(월)
8시 30분 버스 편으로 우루무치로 향했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달리던 화물차가 넘어져 버스의 배가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걸 보았다. 중국에서는 이 바람꼴 황량한 벌판에 날개 하나의 길이가 25m인 풍력발전기를 1988년부터 설치하여 가동 중이라고 한다.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 사막이 때를 만나 제값을 하고 있고 발전단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으니 부러운 현상이다. 해발 1500m 고지에 짠물 호수라는 소금 호수가 있다. 2억년 전에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올라오는 융기 현상이 있었는데 바닷물이 말라서 소금이 되었다. 이 채광권을 우리나라 韓化가 80년간 독점하여 개발한다고 한다.
천산산맥 북쪽 자락에 있는 남산 목장에 갔다. 바로 위에는 아직도 눈으로 덮여 있으나 산 아래 기슭 새싹이 움트는 곳에 마을의 원주민들이 모여 있다. 손님에게 말을 태워 주고 몇 푼 벌려는 삶의 어려운 현장이었다. 내외분이 같이 온 일행 중 한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가지고 온 헌 옷을 헐벗은 여자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으나 모두 냉담하고 시큰둥해서 베풀려는 손이 민망한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스키장 인근 휴양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루무치에 도착해서 국제시장에 들러 구경을 했다. 시간이 넉넉하니 늦장을 부리며 시장 구석구석을 들여다봤다.
중국인들의 위생 관념이나 환경정돈 상태는 아직도 멀었는데 풍부한 농산물과 공산품이 쌓여 있어 시골도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풍요를 누리며 기를 펴고 생활할 여건으로 성숙하여 가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밤에는 중국에 건너온 지 8일 만에 귀가 번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으니 韓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아랑도’라는 음식점에 갔더니 너무 실망! 삼겹살 2점에 상추 2잎이 전부이다. 그 외에는 아무리 요동을 쳐도 모르쇠로 일관! 짠 된장으로 밥 한 그릇을 비웠으니 그나마 고향 냄새라도 맡은 것을 다행으로 치부하여야 하겠다.
5월 3일(화)
바가지 상혼
6시에 호텔을 출발하기에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빵 1개 오이 1개 생수병 1개 그리고 달걀 1개를 도시락이라고 건네주기에 그걸 들고 우루무치 공항에 가서 出國 절차를 밟고 나니 시간 여유가 넉넉하다. 생수병을 들고 공항검색대 통과가 불가라기에 봉암 서원도와 둘이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시키고 내 배낭에서 김과 빵을 꺼내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커피값이 80元에 부가세 8元 거기에다 물티슈 2元을 합해서 90元을 내라고 한다. 중국 돈 1元이 우리 돈 180원으로 계산하면 커피 한 잔을 16,200원에 마셨으니 이런 바가지가 있을 수가 있는지? 국제공항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은 후진국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비싼 수업료를 내고 후진국에서 한 수 배웠다. 공항을 통과하는 여행객을 일회용 물티슈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우선 자기 코앞만 바라보는 모자라는 생각이다. 적어도 공항에서 세계 여러 나라 여행객을 상대하는 것은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일종의 홍보대사의 한 사람이라는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책임감이 절실히 필요할 터인데 우리나라 인천공항에도 이런 부류가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우루무치에서 CZ6029 중국 국내선으로 북경공항으로 왔다가 북경에서 OZ338 아시아나항공으로 갈아타고 인천공항에 내리니 19시 4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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