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묵주 이야기] 세상 떠난 남편과 나눠 가진 향나무 묵주
내가 처음 묵주를 갖게 된 것은 1981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고 나서다. 선물 받은 묵주가 그렇게 좋았다.
그 무렵 친구들과 계 모임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페르페투아 집에서 모였다. 계보다는 친구들 만나는 게 즐거웠다. 우리가 갈 때마다 친구 어머님도 계셨다. 나는 어머님께 “우리 아들이 세례를 받았고 시어머님도 성당에 나가신다”고 말씀드렸다.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말로 말씀을 드렸는데, 친구 어머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벨을 누르셨다. 우리 집에 오신 어머님은 날 보자마자 “내가 집을 봐 줄 테니 빨리 신림동성당에 가보라”고 하셨다. 6월인가? 얼떨결에 나는 성당으로 향했고 12월 22일 세례를 받았다.
전부터 나는 성당에 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시어머님께도 “나중에요, 나중에요” 하며 성당에 다니는 걸 미루던 중이었다. 세례를 받으면서 친구 어머님은 내 대모님이 돼 주셨고 견진 대모님도 서 주셨다. 친구 덕에 나는 훌륭한 대모님을 모실 수 있었다.
신자가 되면서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묵주에 빠졌다. 누가 묵주를 선물로 주면 좋아했다. 신림동성당에 다닐 때 이웃 자매가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무슨 선물이 좋겠냐고 물었다. 묵주를 사다 주면 좋겠다고 했다. “아유! 형님은 욕심도 없으셔. 다른 걸 고르시지” 하면서도 그 자매는 내게 이탈리아에서 산 묵주를 두 개나 선물해줬다. 초록색 원석으로 된 묵주와 크리스털 묵주였다.
25년 전 바오로 신부님께 받은 묵주도 있다. 돌아가신 신부님은 황해도가 고향이라고 하셨다. 신부님께 받은 묵주는 두 개인데 하나는 신부님이 우리 본당을 떠나실 때 내가 달라고 해서 받았고, 또 하나는 신부님 칠순 잔치에서 받았다. 통일이 염원이셨던 신부님은 우리나라 지도를 넣은 5단 묵주를 만들어 우리에게 나눠 주셨다. 지도 뒤에는 통일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친구 페르페투아에게도 여러 번 묵주를 선물 받았다. 못난이 진주로 만든 묵주, 장미 향이 나는 메주고리예 묵주, 나무 열매 묵주…. 성지순례를 갈 때마다 그곳 묵주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웃에 사는 제르트루다씨도 여행을 갔다 오면서 메주고리예 묵주를 내게 주었다. 여덟 살 아래이면서도 늘 언니 같은 벨라는 손수 묵주를 2개나 만들어 내게 주었다. 수정과 진주로 만든 묵주는 팔찌로도 그만이었다. 어느 날 오랜 친구에게서 옥구슬로 만든 묵주를 받았다. 친구는 묵주 만드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옥빛 묵주가 참 예뻤다. 문득 그 친구가 내 이름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내 이름 가운데 ‘간’ 자는 구슬 ‘’, 옥돌 ‘’이다. 친구의 마음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얼마 전에 평생을 함께했던 남편이 내 곁을 떠났다. 남편이 일산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그곳 원목 신부님께서는 매일 병자 영성체를 해주셨다.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남편은 신부님께서 입에 넣어주시는 아주 작은 성체 조각을 받아 모셨다. 병원에는 신부님이 계셔서 정말 고마웠다. 남편이 떠나기 며칠 전 신부님은 우리 식구들 손목에 향나무로 만든 묵주를 채워주셨다. 남편은 그 묵주를 품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 묵주는 단순히 누가 주면 좋아하는 선물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과 함께하는 소중한 나의 분신이다. 그분들과 나를 하나로 이어주는 영혼의 선물이자 꽃다발이다. 가만히 묵주를 가슴에 안아본다.
허간구 실비아(의정부교구 후곡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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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매님의 신앙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