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7년 가해 4월11일 화요일 [(자) 성주간 화요일]
[수도회] 어둠 가운데서도 사랑의 빛을 보며 되돌아가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9,1-6
† 복음 요한 13,21ㄴ-33.36-38
◈ 오늘의 묵상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3년이나 지낸 사람의 배신행위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삶을 적나라하게 전해 주는 시편 55
(54)편 14-15절은 ‘하느님의 집에서 정답게 어울리던 벗’의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편 41(40)편 10절은 ‘믿어 온 친한 벗, 빵을
나누던 사람’의 배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세상 이치에 밝았고 셈이 참 빨랐나 봅니다. 그는 세리 마태오를
제치고 열두 사도의 돈주머니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닥칠 위기를 감지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돈을 챙길
방안을 찾습니다. 그는 돈 욕심 때문에 스승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의 희망은 한순간에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열정은 절망의 어둠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허망한 기대에 집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지만 회개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삶과 정반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받는 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선택입니다. 자신의 죄악에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이
우리의 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르셨습니다.
2017년 가해 4월11일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1ㄴ-33.36-38
어떤 이들은 사제로 살아가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긴 제 사회 친구들도 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네가 참 부럽다. 집안 걱정을 하니, 자식 걱정을 하니, 또 직장에서
잘릴까봐 걱정을 하니? 너는 행복한지 알아야 해.”
그런데 사제로 살아오면서 정말로 아무런 걱정이 없었을까요? 일반
사회 사람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걱정으로 저 역시 힘들었던 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보좌신부로 생활을 할 때, 국내에서 공부를 할 때,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 본당신부로 또 지금의 성지 신부로 있을 때 모두
나름의 어려움 속에서 걱정을 하고 왜 내게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주시냐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할 때도 참 많았지요.
누구의 고통이 더 크다 작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자신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너무나 힘들어요.”라고 말하면, “뭘 그것
가지고 그래?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서...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면
너무나 서운한 것입니다.
세상의 누구나 다 크고 작은 걱정으로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걱정을 담고 살아갈 때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집니다. 왜 이러한 시련이 나를
찾아왔느냐고 불평불만을 갖기도 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괜히 부럽고 시기심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산란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과연 어떤 것이 주님의 마음을 산란하게
했을까요? 당신께서 곧 맞이하실 모든 시련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쳐 숨는 제자들에 대한
실망감 역시 마음을 산란하게 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을 위해
당신의 수난을 받아들이시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면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으로 산란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산란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역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마음이 산란해질 수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마음이 산란해지는 상황이 결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벌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이 산란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르셨습니다. 불평불만이
아니라 철저한 순명으로, 미움과 단죄의 마음보다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이 산란한 마음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철저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산란한 마음이 사라지고 대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듣는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 즉 당신이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믿음이다(마리사 피어).
유다 이스카리옷.
용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용서할 때 자유로워지고 해방됩니다. 용서할 때 비로소 미래를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용서를 하지 않겠다는 집착에 얽매여 상대에게 지배를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잘못한 누구 때문에 내 마음이 힘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때로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감정을 싹둑 자를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이스라엘 막달라 성지 안의 성화.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는 손을
묵상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어둠 가운데서도 사랑의 빛을 보며 되돌아가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11일 성주간 화요일 요한 13,21-33. 36-3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 13,21.38)
어둠 가운데서도 사랑의 빛을 보며 되돌아가야
오늘 복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몹시 마음이
산란하시어(13,20),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언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배신할 제자들의 연약함을 끌어안으신 채,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정을 계속해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
하십니다(13,21). 그분께서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자 사탄이 그 안에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13,27) 하시자, 유다는 밤에 빵을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13,30).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신만의 어둠 속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겨버립니다.
그리곤 뒤늦게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고,
자신의 어둠 속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맙니다.
어떻게 그런 결말에 이르렀을까요? 아마도 유다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대에 맞는 모습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어 보이고 점차 실패로 치닫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며 실망하여, 그분을 계속 믿고 따라도 될지 의구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의구심만이 아니라, 이기심과 탐욕과 냉정함, 시기 질투로 가득한
마음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돈을
더 사랑했고, 사랑으로 함께하기보다는 머리를 굴려 현세적 이익을
따졌기에, 영혼의 어둠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어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한편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13,37) 하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13,38).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체포되자마자, 스승을 버리고 150킬로미터나 떨어진
갈릴래아까지 달아나버립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기보다는 자신을 믿은 자만심이었습니다.
그는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참된 사랑은,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스승의 실패한 듯 보이는
모습을 보며, 그분의 제자라고 고백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태도로,
주님을 모른다며 부인해버립니다. 하지만 유다와 달리 그는 참회한 뒤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체포되자 줄행랑을 쳐버렸던 제자들의
모습을, 비통한 마음으로 떠올리면서 겸손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그분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유다와 같은 영혼의 어둠과 베드로의
인간적 나약을 떠올리며,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주님의 뜻을 실행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을 배반하고 죄의 나락에 떨어지더라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받아주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사랑하기를 시작해야겠지요. 유다처럼 어둠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여 스스로를 단죄하지 말고, 베드로와 더불어 다시 일어나
사랑이신 주님께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유다의 ‘어둔 밤’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11일 성주간 화요일: 유다의 ‘어둔 밤’
복음: 요한 13,21-33.36-38: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그분의 마음이 산란해진 이유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이다. 그분은 마음으로 우리와 공감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연민
때문에 산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산란하다는 표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아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자신에 대해서만 확신할 뿐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는 요한에게 그 자가
누구인지 여쭙게 하였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빵을 물에 적심으로써 빵에서 축복을 씻어
배반자에게 주셨다.
그러기에 유다는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유다는 자신이 생명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 이에 대한 분노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의 잔을 마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그래서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께서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일어난
사건들, 땅이 흔들리고 해가 빛을 잃고 땅이 어둠에 덮이고 무덤들이
열리고 바위가 갈라진 일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위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9)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라고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썩는 육체는 갈 수 없는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지금은 그들이 용감하게 죽음과 맞서지 못함을
뜻한다. 그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시몬은 그분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박해와 시련을 잘 이겨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36절)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스승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하신
일이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자신의 욕심에 주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죽음에로
몰아넣었으며, 베드로는 필요 이상의 자신감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눈물로 다시 살아난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시간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상하 성 모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성주간 화요일
2017년 가해 4월11일 성주간 화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 13,21ㄴ-33.36-38
36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금촌으로 놀러 갔습니다.
서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일행을 기다리면서 저는 친구에게
여자 친구를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저의 부탁을 너무나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의 여자 친구는 친구의 여자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노래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 제가
겪었습니다. 친구 덕분에 저는 여자 친구와 짧은 만남을 가졌고, 어쩌면
그 결과 지금 사제의 길을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배신은 어쩌면 늘
가까운 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대통령
선거를 앞당긴 ‘국정농단’의 실체도 가까운 이들의 폭로에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도였음을 알게 됩니다. 시계는 태엽을 감으면
어김없이 돌아가지만 사람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네 번째 말씀은 ‘목마르다.’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지만 삶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독신, 정결, 순명’을 약속했지만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산업의 발전으로 인류는 더없이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마음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신앙, 희망, 사랑’을
목말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악의 세력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 중에는 ‘다음에 하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봄누에는 죽기까지 실을 뽑고, 초는 재가 될 때까지 불을
밝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본당에 가서
처음에는 열심히 하지만 떠날 때가 되면 다음에 오실 신부님께 미루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혼인을 할
때, 배우자들은 서로에게 약속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젊거나 늙거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많은 경우에 깨어지곤
합니다. 성격이 차이가 난다고 말을 하기도 하고, 서로가 조건을 따지고
계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 열심히 기도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고, 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지 26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처음 먹었던 그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들의 빛이 된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는 서로 다른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격
안에, 베드로의 인격 안에 모든 것이 함께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또한 언제나 민족들의 빛,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성삼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하며, 주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를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
◈ [청주]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11일 성주간 화요일 (요한13,21-33. 36-38)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 것을 보면 인정받던
제자입니다. 그가 유감에 빠져 배신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 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에 따르는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용서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눈에 뛰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부끄러움이 없이 묻고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주님과 소통을 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자책으로 목숨을 건 유다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입니다. 주님과의 대화로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