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루 / 변종호
평생 맞으며 살아야 할 팔자다. 맞은 만큼 맷집도 늘었다. 귀는 막고 눈은 감았다. 앙다문 입에서는 간간이 신음만 흘릴 뿐이다. 자리를 옮길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운명이라 무시로 내리치는 메질을 받아내지만 세상을 탓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다. 불현듯, 그런 모루가 보고 싶었다.
“땅~땅~땅” 경쾌한 망치 소리에 업혀 온 불내가 대장간이 목전임을 일러준다. 부러 찾기 전에는 보기 어려운 곳이다. 풀무질에 달아오른 화덕이 불똥을 튕기며 맑은 빛을 발하고 있다.단단한 쇳덩이도 금방 뽑아낸 절편처럼 나긋나긋하게 만들어주는 화덕이 한 삽의 조개탄을 집어삼키고 거센 불길을 내뿜는다. 이마에 질끈 수건을 동여맨 대장장이는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잡으면 절로 팔뚝에 힘이 들어가는가 보다.일부분 메질과 풀무질은 기계가 하지만 구상한 물건이 나오려면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건 여전하다. 불과 쇠를 다루는 극한 직업이라 데이고 다치는 건 개의치 않는 대장장이다. 화덕만큼이나 뜨거워진 열정으로 달구어진 쇳덩이를 모루 위에 놓고 망치질을 한다. 말랑한 사람 마음에 자신의 뜻을 심기도 어려운데 단단한 쇠에 마음을 심어주는 작업은 아주 지난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힘껏 내치는 망치질에 달구어진 쇳덩이는 불꽃을 튕기며 비늘 같은 허물을 훌훌 벗어 던진다. 이전의 생을 잊고 대장장이의 혼을 새기겠다는 몸부림이다. 타는 듯한 열기를 몸으로 맞고 메케한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망치질은 둔재 같은 모루 위에서 끊이질 않는다. 타자의 시선으로 보면 손쉬운 것 같지만 눈물과 땀이 절묘하게 혼합된 망치질이기에 의도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불빛만 보고도 쇳덩이 온도를 아는 대장장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불을 피우고 달궈주는 풀무와 화덕이며 연장인 집게와 망치다. 늘 한자리에 붙박여 메질과 망치질을 당하며 늘려주고 구부려주며 뚫어주고 잘라주며 말아주는 덩치 큰 모루를 고맙게 여기지는 않는다.
고대에는 기술이 존재했지만, 현재는 그 기술을 복원할 수 없다는 로스트 테크놀로지의 하나로 분류되는 명검 다마스커스 칼을 비슷하게 재현하는 연산 대장간도 군말 없이 메질을 당하는 모루가 없다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자주 손질을 하는 화덕에 비해 모루는 나무토막에 발목을 단단히 잡힌 채 쇳덩이가 벗어던진 먼지만 뒤집어쓰고 산다. 대장장이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의 공도 당연히 화덕과 망치에 빼앗긴다. 그래도 늘 빙긋이 웃는다. 그런 모루는 혹독한 가난에 홀로 맞서 모든 고통을 겪으며 안으로 안으로만 설움을 삭이던 순박한 내 형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산을 처분한 아버지가 가족을 떠날 때 6학년이던 형의 상급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렇게 뼈를 키운 불운한 형이 맨손으로 시작한 신혼은 온통 가시밭길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몸으로 맞아야 했던 모루같이 덩치 크고 순해 터졌던 형은 목숨 걸고 수시로 무너지는 탄광의 막장을 드나들었고 주물공장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가마솥 안의 흙을 파냈으며 식솔 입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집 없는 설움이 뼈저리던 당신에게 집을 제공한다는 말에 묘목농장에서 십여 년간 온 가족을 볼모로 밤낮없이 농장주의 만행을 받아주던 형을 떠올리면 나는 항상 가슴이 아리고 슬펐다.
사 남매의 아버지로 어머니와 동생까지 부양하며 당신은 몸을 혹사하며 아낌없이 주었다. 무엇을 바라지도 않았다. 홀로 자식 키우느라 강해진 어머니와 까칠한 동생의 메질과 수시로 내리치던 넷이나 되는 자식의 망치질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아프다 힘들다는 말한 번 못하고 메질을 당하던 모루 같은 당신을 열한 살 터울의 동생은 형은 늘 맞고 살아야 할 운명인 줄 알았다. 당신의 희생으로 등 따시게 밥술이라도 떠 넣고 살면서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당신이 떠나고 돌아보니 내게 서운할 만도 한데 늘 고맙다 했다. 아버지 없이 잘 자랐고, 제 가정 꾸리며 두 권의 수필집을 엮어낸 것만도 자랑스럽다 했다.
메질도 망치질도 늘그막에는 그리 싫었는지 뻐꾸기 소리 유난히 구슬프던 날, 당신은 이태 동안 일상으로 찾던 야트막한 산자락에 숨어 나 좀 찾아보라 했다. 휴대폰만 켜있으면 금방 찾을 거라던 수많은 술래인 경찰기동대, 119구조대, 가족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꼭꼭 숨었던 당신을 7시간 만에 찾았으나 이미 모루같이 고달팠던 일흔다섯 이승의 끈을 놓은 지 한참 뒤였다. 혹여, 자식에게 긴병으로 부담 줄까 무섭다던 생전의 강한 의지를 심정지라는 사인으로 남긴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