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시 물 조심해라!
함영연
나는 수영을 못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강릉시 어단리 마을은 저수지가 있고 칠성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아름답고 정겹다. 동해 바다도 가깝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수영을 익혔다. 그럼에도 나는 물을 멀리해야 했다.
우리 마을은 새해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토정비결이라는 것을 보았다. 어느 해였다. 엄마도 그들과 같이 떡국을 나누며 토종비결을 보고 와서는 나에게 물 조심하라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나는 엄마의 말에 순응해 시냇가나 저수지, 바다에 가는 일이 있어도 발끝에 물만 적시다 오곤 했다. 엄마의 물 조심 당부는 매년 반복되었다.
그렇게 생활하다가 강릉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다. 어느 날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수영장에 가자고 했다. “좋아!” 대답은 했는데, “물 조심해라!” 당부하던 엄마의 말이 발목을 잡았다. 갈 수 없었다. 며칠 있다가 친구는 또 수영장에 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수영장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댔다. “나랑 친구하기 싫은 게 아니고?”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오해가 생겨 친구와 멀어질까 봐, 엄마가 보낸 편지를 꺼내 보였다.
‘…우리 딸, 항시 물 조심하고, 혼인은 늦게 하는 게 좋다더라. 그러니 27살 이후에 해라.’
그리고 친구에게 엄마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오빠 둘에 동생 둘까지 어린 우리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병원비, 수술비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엄마의 어깨는 몹시 무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만의 사랑 법으로 우리를 키워내셨다.
엄마가 감자 부침개를 부칠라치면 우리는 서로 먹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엄마는 첫 장을 아이들이 먹으면 머리가 나빠져서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이건 누가 먹어요?” 우리가 손을 멈추고 묻자, 할아버지는 어른이라서 괜찮다고 했다. 감자부침개를 받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예의바르고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셨다. 그 이후로 엄마의 말이 새겨져 항상 할아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또 방 청소를 하고 걸레나 빗자루가 정리 안 된 것을 본 엄마는 빗자루를 밟고 다니면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일이 생긴다고 했다. 그 말을 흘려들었는데, 친구와 놀다가 동네 할머니께 야단맞는 일이 벌어졌다. 모래성놀이를 할 때 할머니께 모래가 튄 것이다. “이놈의 지지배들, 눈은 귓등에 달고 있냐?” 귀에서 쨍 소리가 날 정도로 꾸중을 듣다가, 빗자루를 꾹 밟고 온 게 생각났다. 엄마 말이 딱 맞아 들어가는 찰나였다. 후에 우연의 일치라는 걸 알았음에도 정리하는 습관은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짝 지우개가 내 가방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엄마는 꼭 가져다주라며 그러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두 배로 갚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아주 강렬해서 남의 물건을 돌같이 보게 했다. 그뿐이 아니다. 엄마는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되라며, 신세를 지면 꼭 갚으라고 강조했다. 그 영향일까, 지금도 나는 신세지는 걸 부담스러워하고, 고마움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잔소리 대신 당신만의 이야기로 우리를 키웠지만 유독 물 조심하라는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물었다. “말했잖아. 토종비결이라는 것을 보고…….” 그제야 나도 무슨 연유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강릉에 갔을 때,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왜 자꾸 물 조심하라고 해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특별히 내가 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뭔데요?” “토정비결을 보는 어르신이 널 물 조심 시키라고 하는데 가슴이 탁 메더라.” “왜요?” 엄마는 잠시 침묵하다가 어렵게 말했다. “어릴 적에 동네 애들과 물에서 놀았지. 그런데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옆집 애가 물에 휩쓸렸어. 구하려고 했는데, 구해야 했는데…….”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여태껏 슬픔을 바윗덩이처럼 안고 사셨던 것이다.
그 날 이후, 난 기꺼이 물 조심을 했다. 아, 결혼도 27세 이후에 했다. 이렇게 말 잘 듣는 딸인데……,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없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 법은 가슴에 오롯이 남아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이 되고 있다.
함영연_동화작가이며 동화창작스토리텔링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1998년 계몽아동문학상을 수상으로 동화를 썼고, 『가자, 고구려!』로 방정환문학상을,『로봇 선생님 아미』로 한정동아동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꿈을 향해 스타오디션』『 돌아온 독도대왕』등 다수의 동화책을 출간했습니다.
출처: 샘터 8월호 ㅣ추억이 보내온 편지ㅣp90~91
첫댓글 샘터에서 청탁받아 쓴 원고예요.
잔잔한 감동이 들꽃처럼 피어납니다. 참, 저도 어릴 때 빗자루 밟지 말라는 말씀을 할아버지에게 자주 들었어요.
상선약수-물이야말로 모성의 상징이자, 생명의 원천이지요. 어릴적의 저수지는 여름방학 때면, 곡 한두 건의 사고를 만드는 무서운 곳이었답니다. 물조심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담담하게 그린 수필이 좋습니다~~나누어 읽을게요.
언제나 물 조심하세요.
그리운 우리의 어머니...
제 고향집 앞에 바로 저수지가 있는데 밤마실 못 다니게 하려고, 밤이면 저수지 둑에 도깨비가 나온다고 ㅜㅜ
이 수필을 읽으면서 내내 부모님이 그리워옵니다.
잔잔한 이 이야기는 추억을 불러 오네요. 바른 어머니의 가르침에 사랑을 느낍니다. ♥
(저는 할머니께서 말씀 해 주신 싸리 빗자루의 몽당귀신이 생각났습니다. )
밤에 손톱깍지마라. 문지방 밟지마라 등등.
부모님 말씀 어른들 말씀 이제 생각하니 그게 다
사랑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