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7
9월21일[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연중 제2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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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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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IsHStLQTg8
[예수회 이보람 마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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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우리 모두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년, 40년 전에 지었던 죄, 이제는 그만 떨치고 작별하면 좋으련만, 아직도 똑같은 죄를 고백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제게 생각만 해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 사가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 앞에는 언제나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직업이 세리라는 것은 곧 죄인을 의미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조직폭력배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가오면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어서 멀리 돌아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요주의 인물, 진상, 속물, 인간 말종으로 각인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세리로 일하던 시절 마태도 역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인지라,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분명히 의식하였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인간도 아닌 삶,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비참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가던 세리 마태오에게 어느 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어느 순간 특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비스럽고 세상 따스한 누군가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없이 자상한 얼굴에, 측은지심 가득한 눈동자의 예수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세리 마태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분의 눈길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태오야, 그간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느냐?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심정 다 안다. 네 잘못 하나도 아니란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해 보는거야.”
이윽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향해 결정적인 초대의 말씀 한 마디를 던집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이어서 던지는 말씀,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욧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죄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서는 안될 일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느님 자비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밥먹듯이 죄를 짓고 또 지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비의 배경에는 진실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자비도 없습니다. 자비와 무책임이나 불의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히 그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는데도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방임주의 보다는 엄중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주님 자비와 가깝지 않을까요? 자녀가 무슨 짓을 하든 허락하는 부모는 무책임한 것이지 자비로운 것이 절대 아닙니다.
따라서 자비에는 어느 정도 엄격함이 포함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자비의 형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목소리에도 마땅히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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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이 될 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이신가요? 십자가에 달려 팔을 벌리신 예수님만큼 예수님의 본성을 잘 표현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의 예수님이기보다는 자비의 예수님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으신 이유는 무언가 보여주시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주님의 식탁에는 죄인들밖에 없을 것입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로 가시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비’입니다. 그 자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은 그래서 그분과 한 식탁에 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정말이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한 말기 간암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가셨습니다. 그 환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 있었고 친척들이 신부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어 신부님이 일어설 때 그가 신부님의 등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나 죄 없어.”
이 말은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죄인인데 그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됩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자신의 죄를 잊어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심판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도 판단하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만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항상 죄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가 아니라 본성을 보신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는 것을 보시지 않고 음란한 마음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살인하는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화가 솟아나는지를 보십니다. 화가 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사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히 후회할 죄입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본성이 자신이라는 것만 알면 우리는 결코 자비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라야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누구를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나 제물이나 봉사가 아니라 바로 ‘자비’ 하나뿐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리에서부터 사도가 되었기에 자신이 부르심 받은 이 은총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비를 노래하는 사람만이 결코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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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여행을 가면 꼭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면허증, 노트북입니다. 노트북은 매일 강론을 준비하기에 가지고 다닙니다. 노트북을 10년 가까이 쓰다 보니 가끔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노트북은 작은 문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인터넷을 무선으로 연결해야 하는데 비행기 모드에서 바뀌지를 않았습니다. 저의 실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사목회 총무님이 친절하게 문제 해결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총무님이 알려주는 대로 노트북을 작동하니 비행기 모드가 풀리고,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은사가 다양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 어떤 이는 신령한 언어의 은사를, 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께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총무님처럼 컴퓨터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말과 따뜻한 말로 모임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철저한 준비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게는 친절한 이웃을 보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헤밍웨이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고, 공원의 벤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헤밍웨이는 글을 쓰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고,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헤밍웨이는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글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헤밍웨이가 위대한 작가가 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진실한 한 문장을 쓰려는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 마태오 사도는 ‘마태오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마태오 복음 사가의 글은 지금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생각날까요? 예수님의 족보, 동방박사의 방문, 이집트로의 피난이 있습니다. 그 장면 장면들이 아름다운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더 높이 날려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삶의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부족한 저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고, 제 삶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몸소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우리들의 고통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없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위대한 작가인 헤밍웨이처럼 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성 마태오 사도는 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도로, 예언자로, 복음 선포자로,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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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하였던 것 같다.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신다.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응답에 달렸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인간임을 느끼지만,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첫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셨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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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을 따라갑니다. 절 하나로 부르심과 응답이 끝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짧지 않나 싶습니다.
이 한 장면 안에는 세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서 한 편에, 그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세리 마태오가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하는 일을 보시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십니다. 그는 남들에게 공공연히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이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내세우며 자비 따위는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것으로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세리인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가 어떤 결심을 하였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회개는 하였는지 물으시지도 않고 곧바로 당신과 함께 있도록 불러 주시는 분이 마태오에게는 분명한 구원자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는 것은 그에게 걸림돌이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따라가야 할 분을 알려 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도 다른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자기가 부당하다는 것을 말씀드리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당함을 다 아시면서도 따라오라고 하신다는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라면 따라갈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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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1)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마태오도 갑작스럽게 응답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입니다. 어부 출신 사도들의 경우처럼,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오가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눈여겨보시다가,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곧바로’ 응답하지 못합니다. 서품식 때의 서약 예식을 보면, “원합니까?”라는 질문들과 “원합니다.” 라는 답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 서품 대상자들은, 그 전에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지를 엄격하게 심사 받는 과정을 거칩니다.>
2)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ㄴ-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갑자기’가 없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하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받은 ‘부르심’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갈라 1,15-16ㄱ)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로 보이긴 하는데,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고, 태어나기 전부터 ‘부르심의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 자신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신 것은 사도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3)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라는 말은, 직업과 낡은 인생을 버리고 ‘새 인생’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부들처럼 부르심을 받자마자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렸다면, 예수님을 위한 ‘큰 잔치’를(루카 5,29) 베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가 모든 것을 버린 때는 잔치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였을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집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은 사람의 내면은 보지 않고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만 자꾸 강조하는 이들은 그런 바리사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말씀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씀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병든 이들’이고,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건강하냐? 너희는 의인이냐?”라고 묻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셨고, ‘모든 사람’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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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르심이 응답에 앞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는 관계의 주도권이 우리가 아닌 하느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불러 주시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부르심은 그 자체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특별히 죄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불편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는 자칫 예수님께서 의인들을 부르시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부르심에서 제외되는 이는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지 않듯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죄인인 우리가 은총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삶으로 그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스승께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듯이(11,29 참조), 우리도 겸손과 온유를 다하여야 하고, 스승께서 당신 사랑으로 끝까지 제자들을 인내하시고 참아 주셨듯이(17,17 참조), 우리도 형제들의 부족함을 인내하고 참아 주어야 하며, 스승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듯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요한 17,11.20-24 참조)
마태오 사도는 비록 세리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어 죽기까지 스승을 닮고자 노력하였던 참된 제자였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리는 성 마태오 사도를 본받아 우리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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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마태오는 세리였기에 일반 민중으로부터 미움은 받았지만, 그렇다고 살아가는 데 어떤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권력과 재산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마태오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영적 갈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태오는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럼으로써 마태오는 안정된 직업을 잃었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않았습니까? 영적인 생명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는 바리사이들이 비난합니다.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비난에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은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그런 만큼 하느님을 더 절실히 찾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의미지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으려면 자신을 영적인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육신이 아프면 곧바로 고통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이 병든 것을 느끼기는 쉽지 않지요. 의외로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늘 남의 티끌만 바라보며 다른 이들 탓만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여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거나 오히려 불편함과 불만마저 품게 되지요.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나의 삶이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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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태 9,9 참조)
‘그곳’은 마태오 복음 9장 1절에 따라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마을’이며 ‘예수님께서 사시는 마을’ 카파르나움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사도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전합니다.(마르 2,14)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하느님의 선물’인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인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부정한 사람인 죄인들과 어울려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품위 없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적 의사’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구세주’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로마의 돈을 만진 마태오의 손은 정화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뚜렷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산상 설교, 선교사들에 대한 가르침, 하늘나라의 비유들,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위한 권고들이 메시아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그 가르침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였고, 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마태오 사도의 열정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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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9,13)
저와 함께 미사를 드렸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참회 양식 ‘다 양식’을 할 땐,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부분을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9,13 참조)라고 덧붙여서 기도합니다. 그 까닭이란 어느 때부턴가 잘 모르지만 제가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실존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의 자비에 대한 저의 확신에서 나온 고백이라고 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어떤 누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고, 이 자비 안에서 과거와 똑같은 길이 아닌 참된 생명이 충만한 상태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식 이름은 '레위'(마르 2,14 참조)이며, 직업은 세리(루5,27)였습니다. 세리는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또한 세리는 본의 아니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했으므로, 반종교적이고 이교도적인 사람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런 마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고 그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당연한 삶의 자리가 아닌 조금은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삶을 살아 온 그에게 예수님의 초대는 참으로 뜻밖에 찾아온 은총의 기회였고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또한 마태오를 부르심으로 당신이 세상에 오신 그 근본적인 뜻을 가르치고 일깨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를 맞이한 것이라 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사건, 하느님 무상의 선물 앞에서 마태오는 이 기쁨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보여지며,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9,11)라고 추궁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11,19;루7.34)하는 비방을 들으셨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 경건자가 그렇게 처신한 이유는, 율법이 아닌 다른 길들은 참된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바른길을 벗어난 죄인들은 하느님의 길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서지 않는 한 하느님은 죄인에게서 멀리 계시다, 하고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죄인이요 병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은 먼저 솔선해서 죄인들을 향해 나아갔고 함께 어울렸던 것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들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9,1213) 는 말씀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행업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경건한 이들의 잘못은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스며들 공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린 그들의 폐쇄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와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서 대자대비하시며,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또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세상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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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유명했던 건배가 있었습니다. 이 건배사를 술집만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지요.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사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짜 우리는 남이 아닐까요? 아무리 같은 직장, 같은 성당, 같은 단체에 있다고 해도 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나 외에는 모두 ‘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이 아니니, 뜻을 같이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는 생각은 독선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나와 네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 안에는 ‘다름’이라는 것을 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름을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사람으로, 나의 적 또는 원수로 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이상한 항의를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람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다름을 왜 인정할 수 없는지, 여기에 자기 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면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서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 모습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반성합니다.
‘나도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구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보다 ‘우리는~ 남이다!’라는 구호를 외쳐보면 어떨까요?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모범을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로 당시의 모든 유다인은 세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그 역시 어떤 판단 없이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 곁에 예수님도 함께 계실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간주한 죄인에게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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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 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 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오른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는 확답을 들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시고,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이웃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의 의무”(로마 13,8 공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초대받았고,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 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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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마태오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살림>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아무도
보지 않는 이
그분
보시니
그 사람
참으로 있지요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
그분
부르시니
그 사람
기꺼이 따르지요
아무도
함께하지 않는 이
그분
함께하시니
그 사람
끝까지 함께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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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사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우리의 잘난 모습이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이나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 등을 보고 부르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호의와 자비”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르심 받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애를 입은 이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받은 죄인’이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2)
사실, 예수님께서 죄인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그들과 타협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두둔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크신 자비요, 신의요, 호의였습니다. 용서요, 사랑이요,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바로 이토록, 너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사랑과 호의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만약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진정 죄인이라면, 먼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기에 앞서,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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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시고,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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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따라라>
-중심, 방향, 일치의 공동체-
저는 언제나 기상하면 만세칠창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가장 좋은 기도, 만세칠창을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시작했으니 1년이 훨씬 넘었고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후 인터넷 뉴스를 읽으며 세상을 들여다 본후 교황님 홈페이지를 통해 가르침을 배웁니다. 국제 가톨릭 학생 모임의 회원들을 만나 주신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여정중에 있는 순례자들로서 주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일치에로 불림받고 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도 성 마태오가 주님께 불림받고 있는 장면이 잘 드러납니다. 당대 세리라 하면 죄인처럼 사람 취급 못받는 아주 무시당하던 신분이었습니다. 바로 세관에 앉아 있더 세리 마태오가 그런 신원의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후 길을 가시던 길이신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갈망의 사람, 마태오를 첫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바, 그의 과거나 신분이 아닌 그의 내면의 당신을 찾는 순수와 열정, 갈망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마태오의 운명적, 축복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정관념이 없고 선입견이나 편견이 없는,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셨고 실상의 본질을 직시하신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주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시 일어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을 따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은총의 섭리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세리 마태오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런지요?
한두번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당대 제자들이요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버림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았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찾은 마태오이듯이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또 주님께 부름 받은 세리 마태오는 “혼자”의 삶에서 “더불어”의 제자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듯이 우리 또한 주님께 불림 받아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포함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와 주고 받은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당신네 제자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참으로 바리사이의 무지를 반영합니다. 사람 눈에 세리와 죄인이지 주님 눈에는 모두가 평등한 인간이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일뿐임을 까맣게 모른 무지한 바리사이였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복음중의 복음이요 참 명쾌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며 제자들의 공동체의 성격이 환히 드러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의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건강하고 의인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불림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병없고 죄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그대로 치유받은 병자들의 공동체이자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요, 자비로운 목자이자 의사이신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용서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신한 바오로의 말씀이 그대로 교회공동체에 불림받은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길다 싶지만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내용이라 전문을 인용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일치입니다.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한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다양성의 일치요 상호보완의 조화의 일치입니다. 바오로가 강조하는 중심의 “하나”가 일치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분이시고,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서로 좋아서 일치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중심 방향이 같아서 일치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추려 하기 보다는 중심의 주님께 부단히 맞춰가며 각자의 책무에 충실할 때 저절로 다양성과 조화의 일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아름답고 성숙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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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9,9)
<참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9,9-13)은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마태오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정상적인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에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던 세리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세리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이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십니다. 그리고 이런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소식(복음)'입니다.
오늘 독서(에페 4,1-7.11-13)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 신자들에게 전하는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 4,1-3)
바리사이들처럼 살면서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고, 보다 더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참그리도스인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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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가을의 열매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는 주님을
만나게됩니다.
목마른 죄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절망도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눈물까지
부르십니다.
죄인들을 통하여
길을 만들어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죄인들의
가장 큰 기쁨은
죄인을 이해하시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자유롭게 하시고
죄인을 아름답게 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그 누구도
비웃을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돌아가야 할 곳은
다름아닌 주님의
품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치유이며
그것이 부르심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열매는
감사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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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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