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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외도문불(外道問佛)
- 외도가 부처님께 묻다
계단이나 사다리 밟지 말고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라
여러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삶과 무관한 사변적인 관심
지적 허영 사로잡힌 질문엔 그저 침묵하는 것만이 자비
누구나 제대로 길 걸으려면 갈림길서 하나는 포기해야
외도(外道)가 세존(世尊)에게 물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세존은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감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는 커다란 자비를 내려주셔서, 미혹의 구름에서 저를 꺼내 깨닫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예의를 표하고 떠나갔다. 아난(阿難)이 곧 세존에게 물어보았다. “저 사람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감탄하고 떠난 것입니까?” 그러자 세존은 말했다.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다.”
무문관(無門關) 32칙 / 외도문불(外道問佛)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이 정도면 지적인 자만심도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싯다르타가 이야기했던 것과 침묵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외도는 싯다르타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뻐기고 있는 겁니다.다행스럽게도 외도는 그로 하여금 지적인 집착과 허영에서 빠져 나오도록 싯다르타가 침묵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싯다르타의 자비에 예를 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 진정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뿐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흥미로운 학생 한두 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 강의를 잘 메모했다가, 강의가 끝날 무렵 제게 아주 지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입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제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항상 당당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어떻게 당당하게 사는 사람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제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리고 또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당당하고 자유롭게 주인으로 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살면 타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부정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자유롭게 사는 순간,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게 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고는 그는 자신이 얼마나 지적인지를 동료 학생들에게 뻐기며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맞습니다. 정말로 지적으로 정말 영민한 학생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저는 짐짓 역정을 내면서 그를 다그칩니다. “야, 나는 머리가 나빠서 너처럼 질문 두 가지에 답할 수는 없어. 둘 중 중요한 것 하나만 다시 말해봐.” 그러면 학생은 당혹스러워합니다. 철학 선생이 기억력이 나빠 하나만 질문하라고 하니 황당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어느 질문이 더 중요한지 고민하려는 순간, 저는 그 학생에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한 가지일 뿐이야. 그러니까 온 몸으로 고민이 되는 문제는 단 한 가지일 뿐이다. 예를 들어 네가 지금 여자 문제로 정말로 고민한다면, 너는 사회 문제나 학점 문제로 고민할 수는 없을 거다.”
저의 말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도 네가 만일 여자 문제, 사회 문제, 그리고 학점 문제가 똑같이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너는 세 문제 중 어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거야. 그냥 고민한 척 하는 것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지금 네가 던진 두 가지 질문 중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 고민하는 것도, 네가 사실 이 두 가지 문제를 진정으로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머리로만 고민하는 지적 허영에 빠진 놈이라는 비판은 아마 그 학생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엄연한 사실인데요. 물론 그 학생의 첫 번째 질문으로 저는 방편의 논리를 이야기해주면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애정을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살려는 사람은 타인도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주면 됩니다.
2. 지적 허영은 지적 이해만 낳아
지적인 허영에 빠진 학생에게는 그 허영을 충족시켜줄 지적인 대답을 해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학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생과 지적인 대화를 한다는 허영심만 가중시킬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답을 해도 그 학생은 제 이야기를 그냥 지적으로 납득할 뿐, 자신의 삶으로 흡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제가 했던 역정도 불필요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진정한 문제는 삶의 순간에는 하나밖에 있을 수 없고, 만일 문제가 두 가지라면 그것은 모두 삶과 무관한 사변적인 관심일 뿐이라는 제 역정 말입니다. 왜냐고요. 그 학생은 저의 역정마저도 지적으로만 납득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침묵하는 것, 그러니까 그 지적인 학생의 대답을 무시하는 것이 좋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학생은 제가 왜 자신의 질문에 침묵하고 무시하는지를 고민했을 테니까요.
삶의 차원에서 매순간 중요한 문제는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만일 두 가지의 문제가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삶의 차원이 아니라 머리로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가 하나 있다고 해보지요. 물론 그는 두 여자가 자신의 삶에서 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의 말은 진실일까요. 첫 번째 여자를 만나도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여자를 곧 만나야 할 테니까요.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여자를 만났을 때 첫 번째 여자를 만날 시간을 체크해야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첫 번째 여자를 만날 때 두 번째 여자를 생각하느라, 그리고 두 번째 여자를 만날 때도 첫 번째 여자를 생각하느라, 그는 어느 여자와도 제대로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됩니다.
두 가지 문제가 모두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은 두 가지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신세입니다. 한 쪽 길로 가려고 해도 더 깊이 더 멀리 가지 못하고 곧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서 다른 쪽 길로 갈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그 갈림길 주변부에 머물다 지쳐가게 될 겁니다.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제대로 삶을 영위하지는 못하는 셈입니다. 제대로 길을 걸으려면, 그는 갈림길 중 어느 한 가지 길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인연과 항상 마주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제대로 사랑하려면 두 여자 중 한 여자만 사랑해야만 합니다. 모든 여자를 포기하고 한 여자를 사랑하면서 사랑의 끝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운 좋으면 좋은 배필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불운하면 실연의 아픔을 맛보겠지만 말입니다.
3.싯다르타 침묵, 주인 삶 살라는 명령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두 번째 관문에서 천둥소리처럼 가르침을 피력하는 싯다르타의 침묵이 들리십니까. 싯다르타 앞에 어느 외도(外道, tirthaka) 한 사람이 당당히 서 있습니다. 외도란 불교 이외의 사상이나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도 상당한 학식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겁니다. 자기 지성의 보편타당성을 시험하기 위해 자기 학파를 떠나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 앞에 왔을 정도니까요. 더군다나 그는 싯다르타가 제창했던 불교 사상을 미리 공부해온 용의주도함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 그는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해 침묵해야만 한다는 싯다르타의 주장을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불교에서는 무기(無記, avyākrta)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세계는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 ‘세계는 유한한 것인가, 아니면 무한한 것인가?’ ‘정신과 신체는 다른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것인가?’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싯다르타는 침묵했습니다. 지적인 양자택일의 문제는 집착을 만들어내서 진정한 삶을 살아내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기 때문이지요. 싯다르타를 지적으로 이기기 위해 찾아온 외도가 어떻게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싯다르타의 말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물어보았던 겁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으렵니다.” 이 정도면 지적인 자만심도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싯다르타가 이야기했던 것과 침묵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외도는 싯다르타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뻐기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지적인 오만에 가득 차 있는 외도의 도전적인 질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싯다르타는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지적인 구분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것이고, 동시에 외도의 지적인 의문에 대해서도 침묵했던 겁니다.
지적인 허영에 사로잡힌 외도의 질문에 어떤 대답이라도 던지는 순간, 외도는 싯다르타의 대답에서 허점을 찾으며 논쟁을 계속하려고 할 겁니다. 이렇게 지적인 오만에 빠진 사람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을 해준다는 것은 마치 타오른 모닥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지적인 오만에 빠지지 말고 삶을 주인으로 살아라!”라고 말해도, 외도는 오만, 주인, 삶 등의 개념을 가지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될 겁니다. 그러니 침묵할 수밖에요. 최소한 기름은 붓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행스럽게도 외도는 그로 하여금 지적인 집착과 허영에서 빠져 나오도록 싯다르타가 침묵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싯다르타의 자비에 예를 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강신주
싯다르타의 말대로 이 외도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좋은 말”과 같은 근기는 갖추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쨌든 싯다르타의 침묵은 알음알이에 빠지지 말고 삶을 주인으로 살아내라는 자비로운 명령이었던 셈입니다. 무문 스님이 이 대목을 놓칠 리가 없지요. 서른두 번째 관문을 마무리하면서 무문은 이야기합니다. “계단이나 사다리를 밟지 않아야 하고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不涉階梯, 懸崖撤手)”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