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안개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갔다.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밟고 상향 전조등을 쏘아 보지만 몰려오는 안개는 속도를 삼키고 불빛마저 산란시켜 버린다. 한밤중 안개에 허우적거리는 심정을 시멘트 고속도로를 달리는 요란한 바퀴 소리가 달래준다.
대구로 들어서자 말간 가로등이 양쪽으로 도열해 무사 귀환을 반기는 것 같다. 오가는 차라고는 한 대도 없는 적막한 도로를 홀로 달린다.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던 남편이 벌써 도착했느냐고 몸을 일으킨다. 운전대를 맡기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안개와 한 판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는 거나하게 취해 조수석에서 단꿈을 꾸었다.
“공자님 말씀은 틀렸어, 친구가 멀리서 찾아와서 즐거운 게 아니라, 친구가 있어서 멀리 찾아갈 수 있으니까 즐거운 거야.”
뜬금없이 소환된 공자님은 오랜 세월 진리라고 받들어지던 논어의 첫 구절을 부정당했다. ⟪논어⟫의 첫머리 〈학이〉 편의 첫 구절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공부하는 기쁨과 사귐의 즐거움을 대 저서의 첫머리에 나란히 놓은 공자의 큰 뜻을 유붕자원방래 有朋自遠方來 밖에 모르는 남편이 하룻밤의 경험으로 항변하는 것이다. 나도 잠시 공자는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까, 갸우뚱해보았다.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19의 방책이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데 먼저 얼굴을 보자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물끄러미 집 앞 팔 차선 도로를 내려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볼 수 있는 데까지 살펴보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차량은 다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겪어보지 못한 대낮의 정적은 공포로 변했다.
거창에 사는 남편의 친구가 조용한 시골이라 괜찮다며 전화로 불렀다. 그 부부가 좋아하는 빵을 사 가려고 빵집을 찾아 헤매다가 문을 닫은 가게들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민망한 빈손을 들고 들어서는데 푸짐한 저녁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쪼그라드는 전쟁터에서 피란처를 찾아간 것처럼 편안해졌다. 이른 저녁밥으로 시작해서 자정을 넘길 때까지 대학 시절부터 코로나 상황까지 안주를 삼아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고 회포를 풀었다. 집에 돌아갈 뒷걱정일랑 접어둔 채 옛이야기를 끄집어내며 흥에 겨웠다. 결국 못 미더워하던 내게 운전대를 넘겨주고 술기운에 조수석에서 코를 골았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논어까지 들먹이는 것이었다.
산청에서 부고가 날아들었다. 남편과 동문수학하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 동기였지만 두 살 아래라서 형님, 형수님이라고 따르던 사람이었다. 첩첩산중에서 어렵게 자라서인지 그 연배에 보기 드물게도 소아마비를 앓았다. 늘 웃고 있었지만 앞서 걸어가는 우리 부부를 힘겹게 좇아오던 발걸음에서 삶의 무거움을 발견하곤 했다. 그는 좋은 일자리가 났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주 안부를 묻고 산청으로 놀러 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처음으로 산청을 간다. 코로나 시국에도 이 길은 주저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산 좋고 물 맑은 자기 고향을 보여주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길이 멀어서, 애들이 어려서라고 미루기만 했다. 그를 영영 보내는 날 이별을 위해 만나러 간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굽이지던 길에는 고속도로가 닦였다. 우리가 산골 길을 멀다 않고 아이들 손을 잡고 놀러 갔더라면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짧은 한쪽 다리에 기대어 서서 손짓하는 그에게 먼저 달려가 손을 잡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멀리 있는 친구가 거리를 상관하지 않고 찾아갔더라면 두고두고 꺼내는 술안주 거리가 되었을 텐데.
공자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춘추시대에 살았다. 인의예악을 말하여 명성은 높았지만 현실의 삶은 고달팠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고향을 떠나 제자들과 오래 타국을 떠돌아야 했다. 덜커덩거리는 수레를 타고 추위에 떨기도 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긴 유랑 생활을 보내다가 노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로 긴 노정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공자님이다. 함께 배우고 익히던 친구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고맙고 기뻤을까.
공자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가는 기쁨보다 나를 만나러 오는 친구의 마음을 더 귀하게 여긴 성인의 풍모를 읽는다.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먼 거리를 재지 않고 친구를 먼저 생각하는 우정의 의미를 새기게 한다. 고단했던 삶의 노정이 벗의 사정을 더 배려 하게 했을 것이다.
거창에서 푸짐한 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맞이한 친구 부부는 연신 와줘서 고맙다고 술잔을 채웠다. 거창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한우라며 우리 앞에 수북이 쌓아 주었다. 처음 보는 나의 운전이 걱정되었는지 새벽녘에 문자를 보내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야 잠을 청했단다.
거창을 지나 산청으로 간다. 그의 고향으로 찾아가 먹고 마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리산 자락에서 뛰노는 서로의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나누었을 텐데. 함께 공부하던 시절을 추억하며 산수유 막걸리 잔을 기울였을 텐데. 산청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만날 수 없는 그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다리가 불편한 그가 뛸 듯이 반기 지나 않을까, 허망한 상상을 한다.
하필 거창을 지나며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공자님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내 형편보다 벗을 먼저 생각하는 성인의 뜻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영정 속에서 웃으며 반길 그의 얼굴이 슬픈 마중을 나온다.
(이미영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