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1887-03-11~사망1980-12-31
1887년 뉴욕 출생. 액션영화의 대가이자 130여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한 다작감독인 라울 월쉬는 거의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활동했던,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활동했던 감독 중 한 명이다. 뉴욕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라울 월쉬는 영화연출에 흥미를 느끼고 미국영화의 아버지 D.W. 그리피스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이후 직설적이고 정직한, 군더더기 없는 연출로 명성을 얻은 라울 월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고, 특히 액션 영화와 로케이션 촬영에서 그 연출력이 빛을 발했다. <포효하는 20년대>, <그들은 밤에 달린다>, <하이 시에라> 등은 라울 월쉬 특유의 직관적인 스타일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액션영화의 대가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라울 월쉬의 영화들은 전형적인 장르영화보다 한층 섬세했다. 갱영화에 당시의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정신분석적인 제재를 도입하면서도 서정적인 또는 감상적인 심리묘사를 배척하여 영화가 20세기 독자의 하드보일드한 표현장르로 자리를 굳히게 하였다. 1929년, <올드 아리조나>를 촬영하던 중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안대를 한 그의 모습은 라울 월쉬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앤서니 맨
생년월일1906~사망1967
앤서니 만 감독은 밑바닥에서부터 영화 인생을 다져온 장인 중의 한사람이다. 그가 1950년대 서부극을 대표하는 감독이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일은 수없이 많았다. 배우 선정을 맡거나 무대 장치를 손보아야 하는 것은 그의 오랜 일이었다. 그가 출세를 하기 시작한 것은 RKO영화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1942년에 파라마운트사에서 이적한 그는 중간급의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니버설사에서 전성기의 작품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폭력적이지만 사려깊은 사나이들을 다룬 서부영화 <윈체스터 73 Winchester 73> (1950) <강 굽이 Bend of The River>(1951) <벗겨진 박차 The Naked Spur>(1953) <머나먼 대지 The Far Country>(1955)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Laramie> 등은 이 시기의 수준작이다. 미국의 작가주의 이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앤서니 만을 “주제를 갖지 않은 스타일의 감독이다.
그의 서부극은 미국 영화사상 가장 빛나는 야외촬영 장면들에 의해 뛰어난 감독으로 평가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주제적인 작가라기보다는 장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의 기회도 없이 1960년대 할리우드의 붐 속으로 앤서니 만은 휩쓸려 간다. 이 시기의 감독들은 독립프로덕션 설립과 더불어 스펙터클 영화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감독으로는 데이비드 린, 존 휴스턴의 성서영화들이 있었지만 앤서니 만의 <엘 시드 El Cid>(1961)는 서사극 장르를 신선한 극적 형식으로 선보인 뛰어난 작품이었다. 엘 시드로 불리는 카스틸 왕국의 로드리 고디아즈는 수많은 무용담과 전설 속에서 언급되는 스페인의 국민적 영웅으로 17세기에 이슬람의 침략자들을 격퇴한 명장이다.
감독 앤서니 만은 이 작품 속에서 역사 속의 장엄한 사건과 한 인간의 비극을 동시에 포착했다. 어느 서사극들보다 빠른 템포의 액션과 사건 흐름이 인상적이다. 찰턴 헤스턴의 무게있는 연기가 빛을 더했다. 앤서니 만이 40년대에 만든 작품들은 평작의 수준이었고, 50년대에는 서부극을 다뤘다면, <엘 시드>에 와서는 그의 영화 인생에 완숙미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액션, 연출, 스펙터클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고, 이후 <로마제국의 몰락 The Fall of Roman Empire>(1964) 등과 같은 대작영화에 연이어 도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화인생은 1967년에 죽음으로 멈추어 버리고, 그의 뛰어난 재능은 영화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자료출처: [씨네21 영화감독사전]
'서부의 사나이'
“앤서니 만의 <엘레나와 남자들>”이라는 표현을 쓰며 <서부의 사나이>를 극찬했던 장 뤽 고다르에 따르면, 이것은 극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링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로 귀환하게 되자 그가 완전히 떠나 있다고 생각했던 어두운 과거와, 그것에 기원을 둔 폭력에의 사악한 충동과 다시 맞닥뜨리게 된다. 이 인물이 벌이는 운명과의 싸움을 그린 영화는 마치 그의 불타는 내면 속으로 들어간 듯 대단한 폭발적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순간들을 제공한다. 부상당한 두 남자가 총격을 벌이는 클라이맥스는 아마도 웨스턴영화 사상 가장 뛰어난 총격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아도 될 만하다. 조너선 로젠봄은 여기서 풍경과 건축, 사람들과 환경, 회화와 드라마, 이미지와 개념, 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이 모두 융합을 이룬다고 썼다.
시네마테크 부산은 6월의 ‘수요시네클럽’으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추천한 <서부의 사나이>를 6월21일 세차례 상영한다. 안소니 만 감독의 1958년작인 <서부의 사나이>는 게리 쿠퍼의 어둡고 음울한 액션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안소니 만의 마지막 서부극이기도 하다. 정성일씨는 이 영화가 “서부극의 끝”이라고 일컬으며 추천하고 있다. 장 뤽 고다르 감독 또한 <서부의 사나이>를 그해의 영화로 꼽으며 “서부극의 재발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영은 오전 11시30분, 오후 2시, 오후 4시30분, 오후 7시, 모두 네차례이며 오후 7시에는 특별강연이 열릴 예정이다. 예매는 6월13일부터 시작된다.
정성일씨의 추천사 전문
“짐 키츠는 단언하고 있다. 미국이 문화예술에서 발명한 것은 재즈와 서부극뿐이라고.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그 예술적 발명이 20세기의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부극은 다른 장르와 달리 그 자체가 영화적이라는 표현과 동일하다. 게다가 서부극은 오직 미국에서만 성립 가능한 장르이다. 그건 마치 재즈가 미국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걸 유럽에서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스파게티 웨스턴. 혹은 ECM 재즈. 하지만 그건 일종의 유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부극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서부극의 위대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영화적 순수함이라는 말을 끝내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서부극의 역사는 고전 영화문법이 세워지는 과정이었으며, 영화에서의 가장 순수한 스펙터클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영화의 순수한 기쁨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서부극을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과정은 자꾸만 그 기쁨을 망각하는 반복 학습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본다는 그 자체의 기쁨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에 자꾸만 다른 이유를 대서 즐거워지는 것은 자기 최면의 기만이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 수많은 서부극 중에서 무슨 영화를 볼 것인가? 물론 그 중 최고의 영화는 존 포드의 <역마차>이다. 나는 차라리 서부극은 결국 <역마차>라고 단언하고 싶다. 모순된 말이긴 하지만 존 포드의 최고걸작은 <수색자>이지만, 서부극의 최고걸작은 존 포드의 <역마차>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그걸 안소니 만의 <서부의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후에 수많은 서부극이 나왔다. 심지어 존 포드의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도 있다. 셀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도 있다.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건 모두 후일담이다. 안소니 만은 여기서 모든 영웅 신화를 끝낸다. 도적떼들의 친족관계. 그 안에서 부활의 신화를 다시 쓰려는 노력은 황량한 서부를 보여주는 시네마스코프의 풍경 속에서 절망적인 시적 몸짓을 보여준다. 특히 이제는 노쇠한 57세의 게리 쿠퍼의 저 느릿느릿 움직이는 육신의 고단함. 그 게리 쿠퍼가 걸어가는 모습을 따라가는 안소니 만이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붙잡은 풍경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장면들보다, 앙겔로풀로스보다, 키아로스타미보다 훨씬 영화적이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2.35대 1의 화면에 담긴 텅 빈 마을 풍경들을 보라. 거기서 그저 크레인으로 슬쩍 한번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 공간은 거의 완전한 하나의 우주적 질서를 획득한다. 그런 다음 이 서부극의 신화적 공간은 어느 새 마치 다른 혹성의 다른 공간, 그러나 결국은 어느 별에서 시작해도 같은 결론의 신화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듯한 체념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운동을 한껏 펼쳐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순간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지막 대결의 순간 총에 맞아 쓰러지는 아버지의 그 황홀한 몸짓은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악당 중에서 가장 우아한 몸짓으로 마치 승천이라도 하듯, 우리에게 미처 하지 못한 그 어떤 말을 그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듯, 그 망설이는 듯한 자세로, 언덕에서 굴러 떨어진다. 이런 멋진 장면은 존 포드도, 하워드 혹스도, 윌리엄 A 웰만도, 라울 월쉬도, 니콜라스 레이도, 킹 비더도, 델마 데이비스도, 버드 버티쳐도 만들어낸 적이 없다. 그 영원과도 같은 순간. 나는 바로 그 순간을 당신들과 함께 다시 맛보면서 영화가 주는 그 순수한 즐거움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 영화를 선택했다. 나는 이런 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우리 함께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추고 그 장면의 우주적 행복의 기적을 축복하자. 이런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쇼트는 항상 영회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으려고 하지만 쇼트는 언제나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우주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우주의 대결, 혹은 그 사이의 중재의 주름.” 시작된다. 글 문석 2006-06-08
자료출처: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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